광야는 인격이 변화되는 곳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광야의 목적은 우리를 정화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하나님의 공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존 비비어, “광야에서의 승리”).
저 같이 준비가 되지 못한 목회자나 또한 준비되지 못한 남편이자 아버지는 교회와 가정을 광야로 삼고 그 곳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목회자와 남편 및 아버지로 준비되어가야 합니다. 준비되어 가되 무엇보다도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함을 더욱더 느낍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격의 변화를 우선으로 추구할 때 하나님께
합당한 준비된 목회자이자 남편 또한 아버지로 세움을 받을 줄 믿습니다.
저는 광야와 같은 가정과 교회를 생각할 때 특히 가정에서는 제 자신의 허물이 많이 들춰짐을 실제로 봅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제 자신의 허물이 많이 들춰지고 있음을 저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에서 들춰지는 허물들은 가정에 비해 표면적으로 그리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나타나던 나타나지 않던 적어도 말씀 순종으로 정화되어 가고 있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러기에 교회
성도들이 표면적으로 허물과 죄가 잘 보지 못하고 오히려 목회자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칭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목회자라면
자신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가운데 성도들의 칭찬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아는 신앙인이라면 표면적인 크리스천이 되고자 힘쓰기보다 내면적인 크리스천이 되고자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인 크리스천이 되고자 힘쓰는 자라면 사람이 보기에 합당한 크리스천이 되고자 치장하기에 힘쓰기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힘쓸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갈 것입니다. 바로 광야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
저는 생각합니다.
철 없는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부모님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 달라고 땡깡을 부리곤 합니다. 불평도 하고 불만도 표출할 것입니다. 그는 고집을 피우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 만족하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마음을 계속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철이
들고 성장하는 자녀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기에 부모님의 마음을 그리 속썩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부모님에게 원하는 것이 있기에 부모님에게 조심히 그 원하는 것을 요청하되 인내심을 가지고 얻을 때까지 기다릴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성숙한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기에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는 부모님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청하기보다 그저 부모님이
자기의 필요한 것을 아시기에 그 때 끄 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줄 믿고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부모님을 신뢰하므로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주시던지 아니 주시던지 부모님의 베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고 자녀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베풀어 주기를 원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배워가므로
부모님의 마음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성숙한 자녀로
성장하는 곳이 바로 광야라 생각합니다.
광야란 영적으로 벌거벗는 장소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들춰내시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보십시오. 얼마나 저의 허물과 죄가 들춰지는지 셀 수도 없습니다. 그리할 때마다 나
같은 자가 어떻게 한 아내의 남편이자 세 자녀들의 아버지가 되었는지 참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도 별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바라볼 때
생각과 마음의 죄와 허물들이 셀 수도 없습니다. 스쳐 지나 가는 죄악된 생각들도 수 없이
많습니다. 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범죄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교회 사역 속에서 제 자신의 허물과 죄를 들춰내시면서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바라보며
의지케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용서를 구할 때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제 모습 이대로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제 마음이 녹아지고, 넉넉해지며, 넓혀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제 마음을 변화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신실하신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을
빚어주시고 계십니다. 조금 조금 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는 교회와 가정 사역자로
세우시고자 말입니다.
저는 요즘 목회자의 지도력에 대해서 문제를 삼는 기독교 신문에 기사들을 보곤 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저런 갈등 속에서 목회자의 지도력이 문제라는 기사들을 보면서 왜 이러한 문제들이 표면화되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목회자들의 결핍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우리 목회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 받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교회를 광야로 삼고 목회를 감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광야와 같은 사역지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제일 우선
순위로 배워가려고 힘쓰리라 생각합니다. 교회를 광야로 삼는 목회자라면 무슨 은사와 능력보다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그의 음성을 들으며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제일 우선 순위로 배워나가가는데 헌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헌신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선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기도로 요구하기보다 수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그의 적적한
시기에 주실 줄 믿고 잠잠히 기다리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조급한 마음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과 또한 인내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그의 역사를 사모하므로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므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저는 광야와 같은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저의 죄와 허물들이 계속 들춰지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싶습니다. 저와 광야와 같은 교회와 가정에서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모든 면을 닮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광야와 같은 교회와 가정에서 한 영혼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 영혼 영혼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함께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길 원합니다. 저는 광야와 같은 교회와 가정에서 준비된 목회자와 남편과 아버지로 세움을
받길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와 주님 중심된 가정을 세우는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존귀케 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광야에서 인격 변화를 추구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
(2009년 3월1일,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와
가정 사역자로 세움을 받아 섬기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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