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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사랑법, 복음 도시 운동"

" 시대적 사랑법, 복음 도시 운동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전도 방법 세 번째, 복음 도시화입니다. 도시화입니다. 요나는 큰 도시 니느웨로 가라는 부름을 계속해서 세 번 받는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큰 도시로 가라고 합니다. 요나서 전체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는 방식으로 끝납니다. 이곳에는 120,000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이 큰 도시를 사랑하지 않아야 겠느냐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 도시로 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거대한 잃어버린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거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여기 120명의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고 여기 120,000명의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면, 120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120,000명에 약간 더 비중을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빌 크리스핀이라는 오랜 도시 사역 친구가 있는데요. 그는 훌륭한 신학적 추론을 하면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골에는 사람보다 식물보다 더 많고 도시에는 식물보다 사람이 더 많은데 하나님은 식물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는 시골보다 도시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를 도시로 부르셨을 때 그분은 단순히 길 잃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곳으로 가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분은 전략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을 잘 말해야 하는데요. 제가 이것을 강조할 때마다 사람들이 항상 제게 “맞아요, 도시로 가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그것이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합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예가 있죠. 롯은 도시로 가서 파멸되고 아브라함은 도시 밖에 있기 때문에 멋진 농촌 생활을 하고 거룩하게 지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바로 자기라고 합니다. 왜 도시로 가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일원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롯이 거기에 간 것은 그가 그 도시의 일...

주간 짧은 말씀 묵상 (2025년 10월 27-31일)

주간 짧은 말씀 묵상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위는 맛닷이요 위는 레위요 위는 멜기요 위는 얀나요 위는 요셉이요 위는 맛다디아요 위는 아모스요 위는 나훔이요 위는 에슬리요 위는 낙개요 위는 마앗이요 위는 맛다디아요 위는 서머인이요 위는 요섹이요 위는 요다요 위는 요아난이요 위는 레사요 위는 스룹바벨이요 위는 스알디엘이요 위는 네리요 위는 멜기요 위는 앗디요 위는 고삼이요 위는 엘마담이요 위는 에르요 위는 예수요 위는 엘리에서요 위는 요림이요 위는 맛닷이요 위는 레위요 위는 시므온이요 위는 유다요 위는 요셉이요 위는 요남이요 위는 엘리아김이요 위는 멜레아요 위는 멘나요 위는 맛다다요 위는 나단이요 위는 다윗이요 위는 이새요 위는 오벳이요 위는 보아스요 위는 살몬이요 위는 나손이요 위는 아미나답이요 위는 아니요 위는 헤스론이요 위는 베레스요 위는 유다요 위는 야곱이요 위는 이삭이요 위는 아브라함이요 위는 데라요 위는 나홀이요 위는 스룩이요 위는 르우요 위는 벨렉이요 위는 헤버요 위는 살라요 위는 가이난이요 위는 아박삿이요 위는 셈이요 위는 노아요 위는 레멕이요 위는 므두셀라요 위는 에녹이요 위는 야렛이요 위는 마할랄렐이요 위는 가이난이요 위는 에노스요 위는 셋이요 위는 아담이요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누가복음 3:23-38)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우리가 어제 묵상한 누가복음 3 21-22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요단 강에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30여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사신 것을 청산하시고 이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는 중요한 사건임을 알려준다는 말이 생각납니다(참고: 호크마).  그리고 생각난 말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께서 살아생전에 만일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예수님처럼 30 사역을 준비한 3 사역을 감당하고 싶다는 식의  말을 기독교 신문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만큼 사역 자체보다 사역을 위한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었습니다.

 

(a)   호크마에 의하면 누가복음 3 23절에서만 유일하게 예수님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호크마의 말입니다: “그리고 누가가 공생애 시작 당시 예수의 나이를 '30 ' 으로 밝힌 것은, 30세라 하는 나이가 제사장들이 그들의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하는 시기(4:3) 점을 염두에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해 마침내 예수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실 시점에 이르신 것이다( 5:10).  , 예수는 스스로는 전적으로 무죄(無罪)하신 분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죄악의 장벽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길을 여실( 10:20) 시점에 이른 것이다.  한편 그리고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고( 41:46) 다윗도 30세에 왕위에 올랐다(삼하 5:4).  또한 산헤드린의 회원 자격도 30세가 되어야만 주어졌다.  따라서 누가는 이러한 여러 배경을 감안하여 예수의 나이를 밝혔을 것이다.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연륜을 감안해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도 사역을 하기에 충분한 시기에 이르러셨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항상 자신의 '' 알았다( 7:6)(호크마).

 

(i)                  저는 호크마의 글을 읽고 묵상할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다(41:46) 말과 예수님께서 30 쯤에 가르치심을 시작하셨다(현대인의 성경으로는, “예수님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신 때는 30세쯤 되셨다”)(3:23) 말씀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         그리했을 생각은, 요셉은 17 때부터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13 동안이나 고난을 당하였다는 것과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30여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사시다가 30세쯤 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시다가 마지막 공생애 3 째인 33세쯤 때에는 고난을 당하시다가 결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셨다는 것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          , 요셉은 30세때부터는 오르막 길을 걸었다면, 예수님은 30세태부터 내리막 길인 십자가에 죽으시는 길이요, 나아가서 깊은 속에까지 내려가시는 (12:40) 걸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n  이것을 로마서 8 18 말씀으로 다시 말한다면, 요셉은 13 동안 고난을 받았지만(“현대의 고난”) 결국에 가서는 30 때부터는 과거에 13 동안 받았던 고난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영광(“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없도다”) 누리게 반면에, 예수님은 영원히 누리셨던 하늘의 영광[참고: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이제 나를 다시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버리시고[참고: (2:6-7, 현대인의 성경) “그분은 원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2:7-8, 현대인의 성경) 우리를 위해 지옥과 같은 고통과 쓰라림을 겪으셨다고 생각합니다[참고: 영어 주기도문에 he descended to hell(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 의미는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칼빈이나 벌코프 등의 해석처럼 겟세마네의 고뇌와 골고다 십자가에서 당하셨던 지옥과 같은 고통과 쓰라림에 관련된 의미임(인터넷)].

 

(b)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복음)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아버님처럼 목사가 되겠다고 헌신의 눈물을 흘렸던 때에 1987 5, 나이 19살이었습니다.  때부터 저는 신학교에 준비를 하기 시작하여 결국 대학교을 5 만에 졸업한 ( 나이 23)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여 평생 처음으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M. Div.)( 나이 27).  그런 저는 바울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풀러 신학교에서 Th. M. 공부를 하였고( 나이 31), 후에는 한국 총신신대원에 입학하여 바울신학으로 박사학위 공부를 하였습니다(수료)( 나이 33).  이렇게 저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전도사로, 강도사로, 교육 목사로 주님의 교회인 미국 승리장로교회와 한국 서현교회를 섬겼습니다.

 

(i)                  그런 나이 36살에 주님께서 “…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16:18)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다시 부르시사 미국 승리장로교회로 한국 서현교회에서 돌아오게 하셔서 2003 12 21 주일에 승리장로교회 위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         그리고 오늘 누가복음 3 23 상반절인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하신 때는 30세쯤 되셨다 …”]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지금의 나이는 58세입니다.  ,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섬겼던 세월이 벌써 이렇게 39년째 지나갔습니다.

 

-          저는 숫자 39”를 묵상할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란 인물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에 대하여 말씀 묵상한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17 번의 (37:6-11) 39(30살의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 7년의 풍년 + 2년째 흉년 = 39)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왜그 꿈들을 꾸게 하셨는지, 하나님께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리도록 허락하셨는지, 억울한 누명을 써서 옥에 갇히게 하셨는지, 애굽 바로의 신하인 술관원의 꿈을 해석케 하시므로 2 바로 왕의 꿈까지도 해석케 하셨는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정인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높이시고, 옥에서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높이시다가 결국에는 나라인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뜻은 바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였습니다”[참고: “요셉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4):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0361221947]. 

 

 

n  그리고 생각난 것은 제가 오늘 아침에끊을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제목아래 만든 유트뷰 동영상이 생각났습니다: https://youtu.be/ifGA5DpQjK8?si=kLsbI-I5cNT9ipw8.  “…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8:39)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38절상) “내가 확신하노니 …”] 세상의 출구[위에 동영상을 교회 본당 EXIT(출구) 표지판을 배경으로 만들었음] 나아갈 때까지 끊을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8:35) 주님께서 세상인 천국으로 오라 부르실 할렐루야 감사로 찬양을 드리면서 하늘과 , 예루살렘의 출입문(ENTER) 진입하길 간절히 기원하며 소망합니다.

 

(2)   누가복음 3 23 하반절부터 38 말씀은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것인데 기록의 시작은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23)이라는 말씀이요 기록의 마지막은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입니다(38). 

 

(a)   이렇게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킴으로써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호크마).

 

(i)                  사실을 묵상할 우리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3 22 말씀이 생각납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말씀들을 종합해서 말한다면,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아들이십니다!

 

(b)   이렇게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을 시켰는데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기록된 많은 이름들 중에 저는 “다윗”(31)이란 이름을 생각할 우리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 31-33 말씀이 생각납니다.

 

(i)                  아마도 이유는 가브리엘 천사가 “다윗의 후손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27, 현대인의 성경)에게 나타나 중에 예수님의 “조상 다윗”(32)이란 말씀과 더불어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32)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라.  그는 위대한 인물이 것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그에게 주실 것이니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31-33, 현대인의 성경).

 

·         결국 예수님의 조상 중에 다윗이란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 내용 “이 복음”(1:2)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현대인의 성경) “이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그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고”](2-3).

 

-          (딤후 2:8, 현대인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전한 기쁜 소식대로 다윗의 후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대는 그분을 기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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