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무게

세상이 주는 현실의 무게를 체감하는 순간들이 있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 가득한 세상살이 이야기 속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내 안에서 커지는 갈망이 있다. ‘마음이 청년인 사람’과 함께 걷고 싶다는 목마름이다. 현실이 옥죄어 와도 본질을 묻는 질문을 멈추지 않고 그 답을 찾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에너지를 들일 수 있는 사람, 무섭도록 현실 감각만 장착한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유턴을 하고, 때로는 대공사를 벌이더라도 돌아볼 용기가 있는 사람, 나에게 청년은 그런 존재다.
한 청년이 전하는 세계선교단체에서의 경험담이 흥미진진했다. 마약과 온갖 중독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그 선교단체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그들의 일상과의 싸움이었다. ‘올영 세일’이 박힌 헌 옷을 훔쳐 입고는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외국인부터, 검열을 피해 매일 밤 담배 타임을 거르지 않고, 마약을 몰래 주사하고 매일 밤 집회에 참여해 회개 기도와 열방을 위한 기도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민낯을 보게 했다. 반복되는 죄와 싸우는 전쟁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이야기를 듣던 청년들은 반응과 의견이 엇갈렸다. 죄와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시선이 가장 많았고, 마약 투여 후의 기도는 그저 약기운에 벌이는 망령된 행동이라고 보는 반응도 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중 마음에 박혀 제거할 수 없는 한 문장이 있었다. “술, 담배 등의 사소한 기호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관심조차 없으신 것 같다”는 발언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고민해 보았을 문제이지만, 속히 결론 내렸을 수도 있다. 성경이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역사 속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나름의 답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틴 루터 같은 위대한 목사도 맥주를 즐겼으며, C. S. 루이스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이자 비서였던 월터 후퍼의 글에 따르면) 죽음을 맞이한 요양소에서도 마지막까지 담배를 즐겼다. 하늘 같은 변증학의 스승 루이스도 와인과 담배를 즐겼다는데, 주위 유명한 목사가 술은 죄가 아니라는데, 현대의 청년들이 무슨 생각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구원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는 자유함을 가져야 한다’는 개혁파 구원론자들의 주옥같은 조언들은 오늘도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편협한 생각을 깨뜨리고 또 깨뜨린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로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전파이자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선교사적 자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아침마다 교부들의 ‘침묵과 고독과 절제’에 대한 글들을 즐겨 읽는다. 교회 역사 내내 반복된 주제이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이 답을 얻지 못해서 오랫동안 회피하고 방치한 주제이지 않을까?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언어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본질을 붙들고 있다면 사소한 것은 중요한지 않다는 가르침’이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질문들을 품고 성찰하는 시간은 힘겹고 외롭기도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삶의 시간을 멈추고 진리를 묵상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한 가지가 아닐까?
‘청교도의 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신학자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참된 신자라고 할지라도, 믿음 후에도 죄를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하면, 죄에 사로잡힌 삶을 살게 되고 결국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육신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현세에서 평안은 누리지 못하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다가, 나중에 죽어도 불을 통과하는 것 같은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구원을 받는다.”(존 오웬, 죄 죽이기) 그의 전제는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로 ‘의인’의 신분 유지에 관한 성화의 영역을 펼쳐가기 위함이다.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일제강점기 직전의 격변의 시대 속에서 조선인들이 어떤 태도로 하루를 살아냈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당장의 자신과 가정의 유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누군가는 현실에 순응하며 무기력하게 하루를 버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 생명까지 잃을지라도, ‘나라의 주권 회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영광의 순간을 붙들고 의병의 길을 선택한 이들도 등장한다. 모두가 ‘조선인’이라는 동일한 정체성을 지녔으나, 그들이 향한 길은 전혀 다른 곳을 가리켰다. 흔히 그 차이를 ‘애국심’에서 찾으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본질적인 차이를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 곧 시간관에서 보았다.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고 당부했다. 우리의 하루는 조급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기대하고 즉각적인 기쁨을 주는 자극을 좇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하루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인내를 배워, 결국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를 빚어 가는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하루를 허망하게 흘려보내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지나갈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하루는 언제나 우리가 그를 닮아 가도록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의병에게 ‘하루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창조의 첫째 날, 빛이 일어서자 우주의 질서가 열렸다. 출애굽의 그 밤, 단 하루가 430년의 사슬을 끊어냈다. 예수님의 금요일과, 그로부터 사흘 만의 주일은 인류의 운명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단 하루가 역사를 꺾고, 단 하루가 시대를 여는 일, 그 하루 앞에서 우리는 멈추지 않을 이유를 얻는다.
‘술, 담배가 죄냐 아니냐’는 성숙하지 못한 질문일 뿐, 의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질문은 이것이다: ‘이 행동이 내 하루를 천 년의 무게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천 년을 하루처럼 가볍게 증발시키고 있는가?’ 행위 자체보다 시간관, 방향성, 좁은 길을 향한 결단과 관련 있다는 뜻이다.
의병의 하루는 곧 전쟁이다. 기대와 불안, 그리고 소명이 공존하는 아침을 맞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비교와 속도감이 지배하는 성취 중심의 전장 한복판에서 낮을 보낸다. 그리고 해가 지면 실패와 용서, 사랑과 고독이 얽힌 저녁의 해석 앞에 서게 된다. 침묵과 어둠 속에서 은혜와 끝없는 기다림의 밤을 지나, ‘내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 하루는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언제나 의인은 극소수였다. 광야 시대, 민수기에 기록된 1세대 남자 장정은 60만이 넘었다. 그중 전쟁이 가능한 인물 중에서 선발된 열두 정탐꾼은 말 그대로 수만 분의 일의 경쟁을 뚫은 대표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입성하도록 허락하신 이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노아 시대에는 한 가족만 남았고, 소돔은 의인 열 명이 없어 무너졌으며, 엘리야는 광야에서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절규해야 했다. 예수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찾는 이가 적다”(마 7:13–14)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소수의 하루하루 순종이 쌓여, 천 년을 견디는 역사를 이룬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한다는 것’(롬 8:24)은 어쩌면 하루 가운데 가장 버거운 일일지 모른다. 3대에 걸친 독재와 핵으로 세상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이 여전히 건재한 현실 앞에서, 그들의 심판을 기다리는 마음은 때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소망처럼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내게는 허락하지 않으신 것들을 거리낌 없이 남용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수많은 리더들을 바라볼 때도 마음은 복잡해진다. 같은 고민을 품었던 성경의 인물들과 나란히 질문하다 보면, 결국 나는 내 안에 숨은 더 추악한 죄와 마주하는 고통의 순간을 맞는다.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내 안의 죄를 목격하는 그 시간이 더 아프고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천 년처럼 사는 하루의 습관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윤리 강령을 지키거나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다. ‘천년 같은 하루’란, 오늘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영원을 의식하며 사는 태도를 뜻한다. 옆 사람이 삼십 년 동안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간다 해서, 그 삶이 옳다고 믿지 않기를 바란다. 의인은 다르다. 모세가 살인 전력이 있었다 해서 살인을 정당화하지 않고, 야곱이 속임에 능했다 해서 속임을 답습하지 않는다. 라합이 거짓말을 했다고 거짓을 모방하지 않고, 다윗이 여러 여인을 거느렸다고 정욕을 당연한 듯 따르지 않는다. 의인은 타인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말씀과 영원을 따라 오늘을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병사의 하루는 벌을 두려워해 절제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는 절대적 존재를 향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멈추고, 사랑 때문에 인내하며, 사랑 때문에 자신을 다스린다. 영성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결국 한 편의 러브 스토리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쳇바퀴 같은 나의 하루, 사랑하는 이만은 그 하루를 끝까지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다는 확신 속에 사는 삶이다. 때로는 티격태격하지만 끊임없이 대화로 마음을 맞추고, 때로는 싫고 괴롭더라도 우리를 위한 공간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것과 같다. 몇 해가 걸리더라도 바른 길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전쟁터 같은 시간을 견뎌 나가는 것이다.
한없이 짧은 오늘일지라도, 하나님 손에 붙들린 하루는 천 년의 무게를 가진다. 다시 한 번, 내 안에서 청년으로 일어나자.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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