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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Then one of those standing near drew his sword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 Mark 14:47, Today's Korean Version ) 1. Identifying the People Involved: The person who stood beside Jesus and drew the sword was Simon Peter .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was named Malchus .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The servant’s name was Malchus.” ( John 18:10 ) 2. Jesus' Response to Peter's Action: (a) Jesus said: “Permit even this.” ( Luke 22:51, KJV: “Suffer ye thus far”; RSV: “No more of this” ) The Greek words clarify this: “ἕως τούτου” (“heōs toutou”) = “up to this point” or “even this” “ἐᾶτε” (“eate”) = “allow it,” “let it be,” “leave it alone” Therefore, Jesus is essentially saying: “Let them do what they are doing. Do not resist any further.” “If ...

“죽을 병”을 통한 믿음의 성장?

죽을 병을 통한 믿음의 성장?

 

 

예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너희를 위해 내가 거기 없었던 것을 나는 기뻐한다. 이것은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로 가자”(요한복음 11 4, 15, 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식구가 병이 걸렸을 때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그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병인지 아니면 못 고치는 병인지 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식구가 암 같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 암 같은 병이 (수 있는) 인지 아니면 죽을 병인지 입니다.  만일 의사 선생님이 이 암은 말기래서 여기 저기 암이 퍼져서 6개월 밖에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살아생전에 제 장인 어르신을 장모님과 함께 병원에 모시고 갔었을 때 담당 의사 선생님이 6개월 미만 밖에 살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말해줬음), 우리는 절망 속에서 사랑하는 식구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시작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의사 선생님이 아닌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주님을 갈망하므로 주님께 사랑하는 식구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눈물로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저의 경우는 그 때 장인 어르신을 집으로 모시고 와서 죽음이 두려우신지 여쭤보았음). 

 

          성경 요한복음 11 1-4절을 보면 나사로라는 한 병자가 나옵니다.  그는 베다니에 사는 자로서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 주님,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었습니다라는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3, 현대인의 성경).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4,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2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첫 번째 든 생각은, 요한복음 9 1-3절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누구의 죄로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났습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 위해서이다”(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의 죄로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났는지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은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의 죄이던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이던지 죄로 말미암았다는 제자들의 선입견(또는 편견)을 보여줍니다.  그 때 예수님의 답변은 그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 3절에서도 나사로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을 연관해서 사랑하는 병든 우리 식구와 우리에게 적용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식구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살 병인지 죽을 병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보다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 병에 걸린 사랑하는 식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사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돼야 합니다.  사랑하는 병든 식구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 그 식구의 병이 고침을 받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위해 기도하기 이 전에 우리는 그 병을 통해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우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식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비록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 식구가 병 고침을 받아 건강이 회복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기도 제목은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입니다(26:39,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사랑하는 병든 식구가 병 고침을 받아 건강이 회복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는 것인지 모릅니다(저의 첫째 아기 주영이의 경우는 주님께서 불러가셨는데 같은 중환자실에 있었던 병든 아기는 살았음).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병든 식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기 위해선 우리는 사랑하는 병든 식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시다는 진리를 확고히 믿어야 합니다(12:2).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병든 식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사랑하는 식구의 병도 합력하여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8:28).  비록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식구가 병 고침을 받아 건강이 회복되는 것이지만 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식구의 병이라는 매우 고통스러운 문제를 통해서라도 합력하여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므로(경험하므로) 더욱더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저의 경우는 첫째 아기의 죽음을 통해 시편 63 3절의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주님의 영원한 사랑을 경험하므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아기의 뼛가루 뿌리고 돌아오는 작은 배 안에서 나의 구원자의 굉장하고 놀라운 사랑을 찬양케 하셨고 지금까지도 그 때 받은 은혜와 사랑을 간증케 하고 계심).

 

사랑하는 식구가 병으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께 간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간구하되 우리는 주위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도 우리의 기도 제목을 나눠서 함께 기도해 주기를 부탁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정도로 우리는 사랑하는 식구가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 건강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합심 기도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함께 주님께 간구할 때에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 모든 기도의 과정에서 우리가 간절한 기도와 기대와 기다림은 사랑하는 식구가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 건강이 회복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합심) 기도를 속히 응답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 요한복음 11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3) 친구(11)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도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리하신 것일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속히 베다니로 가서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분명히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나사로)이 병들었습니다라고 말을 전하게 할 정도로(3,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 속히 베다니로 오셔서 죽어가고 있는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렸을 텐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신 것일까요?  여기서 제가 죽어가고 있는 오빠 나사로라고 쓴 이유가 있습니다.  제 생각엔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에(3) 오빠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었다는 생각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 사람을 통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2일을 더 머무셨고, 2일 후에 베다니로 갔었을 때에는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4일이 되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17,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킬로미터 조금 못되는 가까운 곳이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18, 현대인의 성경), 마리아와 마르다가 베다니에서 보낸 사람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걸어서 온 기간이 1일정도 된 것 같고, 또한 예수님께서 2일을 더 머무시고 베다니로 걸어서 가신 기간이 1일정도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말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낸 사람이 걸어서 1,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더 머무신 기간이 2, 예수님이 베다니로 걸어서 1, 도합 4,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4일이나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만일 제 생각이 맞다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기 전에 그녀들이 보기에는 오빠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을 때에 그 사람이 1일을 걸어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는 도중에 이미 그녀들의 오빠인 나사로는 죽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제 생각이 맞다면 적어도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을 때의 심정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속히 베다니로 오셔서 오빠 나사로를 죽을 병에서 살려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서 좀 엿볼 수 있냐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중을 나온 마르다가 예수님께 한 말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예요”(21, 현대인의 성경).  이 말은 마르다만 예수님께 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도 급히일어나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서(29)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32,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우리의 질문은 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시고 급히일어나셔서 속히 베다니로 가시지 않으시고 2일을 더 머무신 것일까요?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해 내가 거기 없었던 것을 나는 기뻐한다.  이것은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로 가자”(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2일을 더 머무신 이유(6)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였습니다(15).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낸 사람을 통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곧장 베다니로 가서 병든 나사로를 치유하셨다면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예수님께서 그 계시던 곳에서 2일을 더 머무신 후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가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그 제자들은 예수님께 더욱더 믿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우리의 기대대로 속히 응답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뜻을(우리의 뜻이 아닌) 주님의 때에(우리의 때가 아닌) 주님의 방법으로(우리의 방법이 아닌) 이루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1 17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4일이나 지났고(17, 현대인의 성경) 많은 유대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습니다(19, 현대인의 성경).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중을 나가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21-27, 현대인의 성경):

 

마르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에요.  그러나 저는

 지금이라도 주님이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실 것으로 압니다

      예수님: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며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 “, 주님.  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저는 이 대화 내용을 묵상하다가 27절에 나와 있는 마르다의 신앙 고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 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이 신앙 고백을 묵상하다가 처음으로 마태복음 16 16절에 나와 있는 시몬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연관을 짓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두 사람의 신앙 고백이 비슷한 것을 보고 예수님은 (1) 주님이시요, (2) 그리스도이시며, (3)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신앙 고백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성경의 구약과 신약, 전체 66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앙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의 근거는 빌립보서 3 7-8절입니다: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그 모든 것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다 버렸습니다.  더구나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 나도 부활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10-11,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마르다나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인 예수님은 (1) 주님이시요, (2) 그리스도이시며, (3)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예수님은 (1) 컨트롤(control)하시며 권위(authority)가 있으시며 또한 임재(presence)하시는 하나님이시요(주님), (2) 왕 중의 왕이시요, 대제사장이시며 또한 그 선지자이시요(그리스도), (3)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셨기에(알게 하셨기에) 베드로나 마르다가 그리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16:17).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뿐만 아니라 마르다의 믿음을 위해서도 역사하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식구가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으면 당연히 우리는 슬퍼하며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 또한 첫째 아기 주영이가 제 품안에서 죽었을 때 통곡을 하였는데 그 때 저는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그 아이가 살기를 바랬는데 결국에 가서는 제 품 안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 때 저는 주영이를 제 품안에 앉고 중환자실 옆에 있는 작은 방(waiting room)으로 갔었습니다.  그곳에 함께 예배를 드린 후 먼저 가 계셨던 제 부모님과 제 형과 형수님과 여동생, 그리고 제 아내가 있었습니다.  죽은 아기를 들고 그 방에 들어갔었을 때 아버님과 빼고 다들 울음바다가 되었었습니다.  아내 옆에 아기를 들고 앉은 저에게 아버님이 다가오셔서 아기를 좀 달라고 하셔서 드렸더니 아버님은 주영이를 품 안에 한손으로 앉으시고 다른 손으로 그 아기의 이마에 대시고 요한복음 3 16절 말씀을 외우셨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1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다니에 오시기 전에는 그의 제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병든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에 없었던 것을 기뻐하셨던 예수님께서(15) 베다니에 오셔서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녀들을 위로하러 온 많은 유대인들(19, 현대인의 성경)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33)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35).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로마서 12 1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제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역사하시면서 기뻐하셨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우는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 및 그녀들을 위로하러 온 많은 유대인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 역사하시면서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식구의 죽음으로 인해 울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신다고 생각될 때 위로를 받습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위로의 역사를 경험할 때 우리 또한 주님을 본받아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주님의 위로의 도구로 쓰임 받길 기원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11 38-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십니다.  그 무덤은 동굴이었으며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주님, 죽은 지가 4일이나 되었으니 냄새가 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39,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40).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저는 믿음이 없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죽은 지가 4일이나 된 오빠 나사로의 동굴 무덤의 입구를 막아 놓은 돌을 옮겨놓을 수가 있습니까?  이미 사랑하는 오빠가 죽은 지가 4일이나 되었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돌을 옮겨 놓을 수가 있습니까?  만일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23, 현대인의 성경)라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그 동굴 무덤의 입구를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며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믿음이 없이는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그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41, 현대인의 성경).  (2) 저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굴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옮겨 놓으므로 결국에 가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죽은 오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43-44).  히브리서 11 6절 상반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또한 고린도후서 5 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새번역). 


          성경 요한복음 11 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광경을 본 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의 제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그 계시던 곳에 2일을 더 머무신 것(6)을 기뻐하셨던 예수님께서는(15) 마르다로 하여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라는 귀한 신앙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국에 가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므로 이렇게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온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믿게 하신 것입니다(45).  이 사실을 생각할 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12:2)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도 사랑하는 식구의 죽을 병”(11:4)도 사용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토요일 새벽 4시 즘에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고 있는 인터넷 사역의 연애, 결혼, 가정페이스 북 그룹에 이러한 글을 써서 올렸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세요.  아내의 이모부 장로님이 지금 10시간 수술을 받으신 후 중환자실에 계십니다.  심수은 사모님과 이찬영 권사님과 제 사촌 여동생 수정이가 암투병중에 있습니다.  20년 전에 화상 3도 입으므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이종미 자매의 영육 간에 강건함을 위해서.  마약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나아지고 있는 한나 자매를 위해서.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지체들을 위해서.  가정의 부부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주위에 지체들을 위해서.  (첨부한 짧은 말씀 묵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요한복음 11장 말씀을 묵상한 글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함께 믿음으로 기도하십시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글을 써서 올린 후 어제 금요일 아침에 묵상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요한복음 11장 말씀의 짧은 말씀 묵상의 글 pdf 파일을 첨부했습니다.  제가 그리한 이유는 요한복음 11장의 말씀을 짧게 6개로 묵상한 저의 글이 혹시나 주님께서 사용하시사 사랑하는 식구의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그들을 조금이나마 견고케 해주시길 기원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병중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과 사랑하는 병든 식구를 생각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지체들을 주님께 부족한 마음의 기도로나마 의탁하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21 11 27,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11:4,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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