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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creyentes que se despojan de sí mismos, vienen a la luz del evangelio y disfrutan de la vida eterna como un regalo de Dios

Los creyentes que se despojan de sí mismos, vienen a la luz del evangelio y disfrutan de la vida eterna como un regalo de Dios       «Nadie ha subido al cielo sino el que descendió del cielo, es decir, el Hijo del Hombre.   Y así como Moisés levantó la serpiente en el desierto, así también es necesario que el Hijo del Hombre sea levantado, para que todo aquel que cree en él tenga vida eterna.   Porque de tal manera amó Dios al mundo que dio a su Hijo unigénito, para que todo aquel que cree en él no perezca, sino que tenga vida eterna.   Porque Dios no envió a su Hijo al mundo para condenar al mundo, sino para que el mundo sea salvo por medio de él.   El que cree en él no es condenado; pero el que no cree ya ha sido condenado, porque no ha creído en el nombre del unigénito Hijo de Dios.   Y esta es la condenación: que la luz vino al mundo, pero los hombres amaron más las tinieblas que la luz, porque sus obras eran malas.   Porque todo ...

예수님의 죽으심 (8) (사도행전 1장 1-11절)

 

예수님의 죽으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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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 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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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5대 구속 사역 가운데 두 번째인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5대 구속 사역은 강생하심,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그리고 재림하심입니다.  이 다섯 가지 사역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수요예배 때 일곱 번째로 ‘예수님의 죽으심 (7)’이라는 제목 아래,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심문과 재판을 받으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며, 마침내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예수님께서 묵묵히 감당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은 여덟 번째로 ‘예수님의 죽으심 (8)’이라는 제목 아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시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가시는 길 위에서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 첫 번째 사건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로마 군인들의 강요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간 사건입니다.  (2) 두 번째 사건은 많은 백성과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슬피 울었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을 향해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오히려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3:27–28).  (3) 세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형을 당하시기 위해 골고다로 끌려가신 사건입니다(눅 23:32).  이 세 가지 사건 가운데 오늘은 첫 번째 사건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진 사건을 집중적으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얼마나 완전하고 독특한 사역인지,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시몬은 히브리어 이름 ‘시므온’과 연결되는 이름으로, ‘들으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29장 33절을 보면 레아가 아들을 낳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정을 들으셨다고 고백하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처럼 시몬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도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시몬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절은 열두 사도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첫 번째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소개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친히 부르신 제자로서 훗날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가나나인 시몬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절에는 가나나인 시몬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가나나인’이라는 말은 가나안 지역 출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열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표현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누가복음 6장 15절에서는 그를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소개합니다.  ‘셀롯’은 열심당원 또는 열심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그가 실제로 조직화된 정치적 열심당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도 두 명의 시몬이 있었을 정도로 당시 시몬이라는 이름은 흔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묵상하려는 시몬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바로 아프리카 북부의 구레네 출신 시몬입니다.

 

구레네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리비아 지역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구레네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0절에도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리비야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이 말씀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마가가 시몬을 단순히 구레네 사람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소개했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시몬의 두 아들 이름까지 기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당시 마가복음의 독자들 가운데 알렉산더와 루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로마서 16장 13절에 등장하는 루포가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제기되어 왔지만, 성경은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고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레네 사람 시몬은 왜 예루살렘에 와 있었을까요?  유대인 남자들에게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라는 세 가지 주요 절기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16장 16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해마다 세 번씩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시몬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정확한 방문 목적을 직접 기록하지 않습니다.  만일 시몬이 구레네에서 예루살렘까지 여행했다면, 그는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동 경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야 하는 쉽지 않은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의 교통수단과 여행 환경을 생각하면서, 그가 예루살렘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길을 지나가던 중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사형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시던 십자가라는 사실을 그가 그 순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시몬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바로 “억지로”라는 말입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불쌍히 여겨 먼저 나서서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고 요청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그를 붙잡아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일반적으로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의 가로 나무를 처형 장소까지 운반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은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으로 나아가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극심한 고난을 당하신 상태였습니다.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셨고, 사람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으며, 로마 군인들에게 잔혹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셨고, 머리를 맞으셨으며, 온몸에 깊은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 가운데 실제적인 육체의 고통과 피로를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지치고 쇠약해지셨을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셨다고 직접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이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사실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그때 로마 군인들이 지나가던 시몬을 붙잡았습니다.  시몬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향해 걸어가야 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6절은 이 장면을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표현은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라는 말씀입니다.  시몬은 자원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강요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과연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도움을 드린 것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공로를 보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다는 말씀을 읽을 때 흔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졌을까? 시몬이 예수님께 큰 도움을 드렸구나!’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시몬이 십자가 나무를 대신 짊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운반하시던 물리적인 짐을 덜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과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공로를 보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관점에서 볼 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사건을 예수님의 속죄 사역에 인간의 공로가 더해진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종교 지도자나 선지자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친히 하나님이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피곤해하시고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신성이 부족하거나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참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그 인간의 본성 안에서 고난을 감당하셨다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원하여 그 고난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25절을 보십시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생명을 공급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족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데 인간의 공로나 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실제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여러 사람이 자신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눅 8:3).  그러나 그런 섬김이 예수님의 신성을 보충하거나 속죄의 공로를 완성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 나무를 대신 짊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데 필요한 구원의 공로를 보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둘째, 죄인을 구원하는 속죄 사역은 오직 예수님 홀로 이루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다른 죄인의 죄를 대신 속할 수 있겠습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도 우리와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몬이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까지 걸어갔다고 하더라도, 그의 수고가 인류의 죄를 속하는 공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10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전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속죄는 완전한 속죄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수고를 더해야 완성되는 불완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의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나머지를 이루어라”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사건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오직 주님 홀로 이루신 완전한 사역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공로에 우리의 공로를 더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토록 극심한 고난을 당하시면서까지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셨을까요?  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고, 채찍질을 받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 예수님의 5대 구속 사역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장차 그 예수님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강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서로 분리된 사건들이 아닙니다.  모두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구속 계획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9절에서 이렇게 확신 있게 선포합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분의 완전한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수고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몬이 짊어진 것은 십자가의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였습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운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시몬은 십자가 나무를 짊어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진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이제 우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사건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몬은 로마 군인들의 강요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사건으로 실제적인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먼저 로마 군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골고다로 끌고 가서 십자가형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극심한 고난을 당하신 상태였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운반하기 어려우셨다면, 군인들에게는 처형 장소까지 예수님을 데리고 가는 일이 지연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것은 로마 군인들이 처형을 진행하는 데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처형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1절은 안식일을 앞두고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시체가 그대로 남아 있지 않도록 요청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생각할 때,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진 일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처형을 진행하던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로마 군인들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시몬을 붙잡았는지, 또는 대제사장들이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확정적인 역사적 사실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예수님의 처형이 진행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이러한 일을 겪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이 사건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시몬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가 원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을 통해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시몬이 그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훗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도 성경은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계획하지 않았던 사건까지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섭리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시몬에게는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였지만, 그 사건은 그가 예수님의 고난을 매우 가까이에서 접하게 된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난 자체가 선하다거나, 모든 억울한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하다고 부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한 행동과 고통스러운 사건까지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지를 물어야 합니다. 

 

억지로 짊어진 십자가에서 자원하여 지는 자기 십자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진 사건을 묵상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어떤 공로도 보탤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었고,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묵상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의 십자가를 대신 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구속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오직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역에 공로를 보탤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때로는 고난과 희생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가정에서 내가 먼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자존심을 비우고 배우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섬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행동하면 손해를 볼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겪는 모든 어려움이 자동으로 자기 십자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특별히 주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감당하는 희생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둘째, 억지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처음에 로마 군인들의 강요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그는 자원하여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태도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억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15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때때로 불평할 수 있습니다.  왜 나만 희생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 나만 용서해야 하는지, 왜 나만 먼저 사과해야 하는지, 왜 나만 교회에서 수고해야 하는지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랑을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억지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물론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진다고 해서 그 길이 언제나 쉽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히 고민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원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난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셋째,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로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다가 지치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그 길을 결코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또한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지치고 낙심하는지도 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서 고난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두려우면 두렵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6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품으시고 돌보신다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붙들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끝까지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저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줄 알았는데, 돌이켜 보니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나를 주님께서 친히 붙들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주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칠 수 있지만 주님의 은혜는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억지로 끌려가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갑시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가정의 자리에서, 교회의 자리에서, 직장의 자리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자리에서 기쁨으로 주님께 순종합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갈 때마다 우리를 위해 먼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끝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이번 한 주간도 억지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불평이 아니라 기쁨으로,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여정 가운데 우리를 품으시고 붙드시며 끝까지 인도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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