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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요나와 내려가시는 예수님

내려가는 요나와 내려가시는 예수님       내려가는 요나 :   하나님의 명령은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서 상달되었음이니라”였습니다 (1:2)   그러나 요나는 욥바로   내려가고 , 다시스로 가는 배로   ‘내려가고 ’ (3 절 ), 더 나아가서 배 밑층으로   내려갔을   뿐만 아니라 (5 절 ), “깊은 속 바다” (2:3) 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6 절 ). 이렇게 교만한 불순종의 길은 내리막 길입니다 .     내려가시는 예수님 : 허나님의 명령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일어나 저 죄악된 세상으로 가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 사랑하신 ) 자들 그리고 미리 작정 ( 예정 , 선택 ) 하신   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대속 죽으라 였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으로 내려가셨고 , 베들레헴 마구간 구유에 내려가셨고 , 하류계층만 처형당한 십자가까지 내려가셨고 , 땅 깊은 속에까지 내려가셨고 , 지옥까지 내려가셨습니다 [“he descended to hell”( 영어 사도신경 )]. 이렇게 겸손하신 예수님은 낮아지시고 낮아지시면서 순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

주간 짧은 말씀 묵상 (2022년 9월 5-9일)

주간 짧은 말씀 묵상

 

 

 

모세의 부모는 태어난 지 석 달 밖에 안된 아들 모세를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해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모세를 담아 그 상자를 나일 강변의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누이가 모세가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멀리 서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2-3, 현대인의 성경).  믿음으로 모세를 석 달 동안이나 숨겨 두었던 모세의 부모(히브리서 11:23, 현대인의 성경)는 모세를 믿음으로 떠나보냈습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의 삶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를 멀리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기대하며 기다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 자녀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참고: 출애굽기 2:2-6).

 

사랑하는 형제가 큰 위기 가운데 있을 때에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 큰 위기에서 어떻게 건져주실지 기대하면서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적절한 때에 그 형제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출애굽기 2:4-9, 현대인의 성경).

 

이집트 왕 바로의 딸 공주가 모세를 양자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다"하고 그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습니다(출애굽기 2:10,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시사 출애굽 당시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사 이스라엘 자손이 마른 땅을 밟고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사 구원해 주셨습니다(3:21-22,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그의 이름의 뜻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그의 이름의 뜻["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구원자"(마태복음 1:21)]대로 사용하시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을 향해 가다가 파도를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들어갔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을 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사 그를 건져주셨습니다(마태복음 14:29-31, 현대인의 성경).  구원의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미디안 땅으로 피신한 모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일곱 딸들과의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르우엘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했습니다(출애굽기 2:15-21, 현대인의 성경).  아브라함의 종도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배우자를 찾는 과정에서 우물가에서 리브가와의 만남을 갖게 되어 결국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을 했습니다(창세기 24:11-67,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앉아 계셨을 때 한 사마리아 여자와의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그 결과 그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말을 듣고 그 마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복음 4:6-42,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학대 받는 것을 똑똑히 보셨고 잔인한 감독자들에게서 구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려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구출하고 그 땅에서 이끌어내어 기름지도 비옥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모세를 시내산에서 부르셨습니다(출애굽기 3:7-10,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학대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다는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어제도 암투병중인 사랑하는 사촌 여동생이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딸이 암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그녀를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암투병중인 심수은 사모님을 위해서두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 바로 왕에게 보내시사 하나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목적은 "너희가 이 산에서 나를 섬길 것이다"였습니다(출애굽기 3:12,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모세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해 내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케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인 예배를 생각할 때 우리는 봉사자가 아니라 우선 예배자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두 반응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1) "내가 누구이기에" (2) '하나님은 누구시기에'입니다(출애굽기 3:11, 13).  이 두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은 (2)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14, 현대인의 성경)]이시고 (2) 모세나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입니다.  모세나 우리는 그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부르시사 "가라"(9)고 명하시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9-20).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지 않으면 믿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참고: 출애굽기 4:1-9, 현대인의 성경).

 

혀가 둔하여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가 사람의 입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참고: 출애굽기 4:12, 15, 현대인의 성경).

 

모세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집트 왕 바로에게 가서 말을 했는데 그때부터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학대하였으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1) "여호와여, 어째서 이 백성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습니까?" (2) "무엇 때문에 나를 보내셨습니까?" (3) "내가 바로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그때부터 그가 더욱 이 백성을 학대하는데도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전혀 구해 주지 않으셨습니다"(출애굽기 5:22-23, 현대인의 성경).  (1) 왜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신 것일까요? (2) 왜 하나님은 나를 그 고통을 당하는 지체들에게 보내신 것일까요?  (3) 왜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당하는 형제, 자매들을 그 고통속에서 건져 주시지 않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러한 "?"라는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는 죄를 범하게 할 위험이 참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허락하신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 우리가 포함이 되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은혜요 특권입니다.  반드시 진실하신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하는 고통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큰 능력과 심판으로 구원하여 해방시켜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하심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출애굽기 6:6-7,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와 같은 사탄의 나라에서 죄의 노예 생활을 하던 우리를 큰 능력과 심판으로 구원하여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상하고 가혹한 노역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6:9).

 

우리가 말을 잘해서 상대방이 우리 말을 들으면 어찌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말을 잘 못하는데 상대방이 우리 말을 안 듣는게 더 낫습니다(참고: 출애굽기 6:12, 30, 현대인의 성경).  제일 좋은 것은 우리가 말을 잘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우리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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