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God’s love, which is stronger than death, is causing me to continue walking the path of the mission the Lord has given me (John 6:1–15).

God’s love, which is stronger than death, is causing me to continue walking the path of the mission the Lord has given me (John 6:1–15).             “At that very time some Pharisees came and said to Him, ‘Leave this place and go somewhere else. Herod wants to kill You.’   He replied, ‘Go tell that fox, “I will keep driving out demons and healing people today and tomorrow, and on the third day I will reach My goal.”   In any case, I must press on today and tomorrow and the next day—for surely no prophet can die outside Jerusalem!   Jerusalem, Jerusalem, you who kill the prophets and stone those sent to you, how often I have longed to gather your children together, as a hen gathers her chicks under her wings, and you were not willing.   Look, your house is left to you desolate.   I tell you, you will not see Me again until you say,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Luke 13:31–35).     ...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은 저로 하여금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요6:1-15)을 계속해서 걷게 만들고 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은

저로 하여금 주님이 주신 사명의 (6:1-15)

계속해서 걷게 만들고 있습니다.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일이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3:31-35).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31-35 말씀을 읽고 읽을 때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헤롯을 가리켜 여우”[“λώπεκι”](32)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a)    예수님께서 헤롯 안디바를 향해여우”[“λώπεκι”(알로페키)]라고 부르신 것은 단순히 성격이 교활하다는 비난을 넘어, 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적 배경과 예수님의 사역적 의지를 담은 다층적인 의미가 있습니다(인터넷):

 

1.       간교함과 교활함 (Cultural Craftiness):

 

당시 랍비 문헌과 헬라 문화권에서 여우는 간사하고 꾀가 많은 존재를 상징했습니다.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인물이었으며, 예수님은 그의 이러한 기회주의적이고 기만적인 성품을 꿰뚫어 보시고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2.       하찮음과 무능력 (Insignificant Impotence):

 

유대 전통에서 사자는 '위대한 인물'이나 '강한 ' 상징하는 반면, 여우는 사자에 대비되는 하찮고 비겁한 존재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의미: 예수님은 헤롯이 스스로를 강력한 통치자(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는 아무런 실질적 권한이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헤롯이 죽이려 위협할지라도, 예수님의 사역(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 하나님의 계획대로 계속될 것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3.       파괴자 (The Destroyer)여우는 포도원 담장을 헐고 열매를 망치는 파괴적인 짐승으로 묘사됩니다(아가서 2:15 참고).

 

상징: 헤롯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포도원) 해치려 하는 '파괴자'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헤롯 안디바가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 했던 이유는 크게 정치적 위협, 종교적 갈등, 그리고 과거의 죄책감이라는 복합적인 원인이 얽혀 있습니다.

 

a.       정치적 위협과 왕권에 대한 두려움

 

헤롯 안디바는 로마에 의해 임명된 분봉왕으로서 자신의 통치권 유지를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민중의 지지: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을 이끌고 다니시는 것을 보고, 영향력이 로마의 질서를 해치거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 있는 민란의 씨앗이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새로운 왕의 등장: 헤롯 가문은 메시아, '유대인의 ' 나타난다는 소식에 매우 민감했습니다.  과거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이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안디바 역시 예수님을 자신의 보좌를 위협하는 잠재적 경쟁자로 간주했습니다.

 

b.       세례 요한과의 관계 죄책감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심리적 배경에는 그가 처형했던 세례 요한이 있습니다.

 

요한의 환생으로 오해: 헤롯은 예수님의 기적 소식을 듣고 내가 베어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 몹시 당황하고 두려워했습니다(누가복음 9:7-9).  그는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불안한 양심과 죄책감을 끝내려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역의 연속성: 예수님의 메시지가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와 맥을 같이 했기에, 요한을 제거했음에도 다시 살아난 듯한 강력한 영적 지도자의 등장은 그에게 골칫거리였습니다.

 

c.       종교 지도자들과의 공모

 

누가복음 13 31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떠나소서라고 경고한 장면은 정치적 음모의 성격이 강합니다.

 

압박 수단: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님을 쫓아내기 위해 헤롯의 살해 위협을 이용하거나, 혹은 실제로 헤롯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압박했습니다.

 

체제 전복 세력으로 규정: 헤롯과 유대 지도층은 예수님을 기존의 사회적, 종교적 질서를 뒤흔드는 위험 분자로 규정하는 이해관계가 일치했습니다.

 

요약하자면, 헤롯에게 예수님은 진리를 전하는 스승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위협하고 죽은 요한을 떠올리게 하는 '제거해야 위험 요소'였던 것입니다.

 

헤롯의 이런 태도는 훗날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는 모습으로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23:11)”(인터넷).

 

예수님은 이어지는 누가복음 13 34절에서 자신을 '암탉'으로 비유하시며, 파괴자인 여우(헤롯)로부터 새끼(예루살렘 자녀들) 보호하려는 사랑을 대조적으로 보여주십니다.

 

4.       성별과 언어적 뉘앙스 (Feminine Nuance):

 

헬라어 원어 '알로페키'(λώπεκι) 여성 명사형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 헤롯이 헤로디아에게 휘둘려 세례 요한을 죽이는 주체성 없이 타인(특히 여성) 의해 조종당하는 나약함을 꼬집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헤롯의 위협이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결코 막을 없다는 당당한 주권적 선포로서 그를 "여우" 부르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헤룻의 위협 가운데서도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길을 가야 하리니”[“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계속 길을 가야 한다”(현대인의 성경)](33) 말씀하셨는데 의미는 무엇일까요?

 

(a)    먼저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길을 가야 하리니”(33)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씀이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32) 말씀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i)                      예수님께서 32절과 33절에서 반복하여 언급하신 시간적 표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예수님의 사역적 과정과 최종적 목적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말씀의 연관성을 가지 포인트로 정리해 드립니다.

 

1.       과정결론 일치 (3일의 구조)

 

32 (사역의 내용):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여기서 '오늘과 내일' 예수님이 현재 수행하고 계신 구원 사역의 지속성을 의미합니다.  '제삼일' 사역이 완성되는 시점,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합니다.

 

33 (사역의 장소):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길을 가야 하리니

 

33절의 '오늘, 내일, 모레' 32절의 '오늘, 내일, 제삼일' 정확히 조응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32) 단순히 시간적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우연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계획된 필연적인 행보(33)임을 강조합니다.

 

2.       하나님의 시간표’(Kairos) 대한 확신

 

헤롯(여우) 아무리 죽이려 위협해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헤롯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 달려 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연관성: 32절에서 완전하여지리라(완성하리라)’ 하신 계획이 있기 때문에, 33절에서 길을 가야 하리라 담대함이 나옵니다.  , 완성할 (제삼일) 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예수님의 길을 막을 없다는 주권적 선포입니다.

 

3.       구체적 의미: 예루살렘

 

33 하반절에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말씀이 붙어 있습니다.

 

32절의 사역(치유와 귀신 축출) 결국 33절의 목적지(예루살렘에서의 죽음) 향한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이 다스리는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멈추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계심을 구절의 연결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요약하자면:

32절이 무엇을(사역) 완성할 것인가 초점이 있다면, 33절은 완성을 위해 어디로(예루살렘) 가야 하는가 대한 단호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헤롯의 위협은 예수님의 '오늘과 내일' 사역도, '제삼일' 완성도 결코 방해할 없다는 것입니다”(인터넷).

 

·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스스로 계속 갈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암닭)(34)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죽음의 위협(여우) 앞에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거절당한 사랑의 슬픔' '사명을 향한 단호한 의지' 교차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a.       찢어지는 듯한비통함’ (The Heart of Lament)

 

34절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부르시는 대목에는 형용할 없는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히어로처럼 당당하게 성으로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을 품으러 가시는 어머니(암탉) 심정입니다.

 

묵상 포인트: 자신을 찌를 자들을 품기 위해 스스로 찌름의 자리로 가시는 마음은, 공의의 심판보다 긍휼의 눈물이 앞선 마음이었습니다.

 

b.       치의 흔들림 없는단호함’ (Unwavering Resolve)

 

"내가 길을 가야 하리니"(33)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려는 거룩한 고집이 서려 있습니다.

 

묵상 포인트: 여우(헤롯) 간교함이 예수님의 발목을 잡을 없었던 이유는, 주님의 마음이 이미 자기 백성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주님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c.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인내’ (Persistent Invitation)

 

"내가 번이나... 모으려 하였느냐"(34) 고백은 일회적인 감정이 아니라 역사 내내 거절당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인내를 보여줍니다.

 

묵상 포인트: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발걸음 또한 '마지막 ' 기회를 주기 위한 인내의 걸음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주님은 "내가 죽어서라도 너희를 날개 아래 품겠다" 결연한 사랑으로 가득 있으셨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의 마음은 '죽으러 가는 자의 공포'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살리러 가는 자의 절박함'이었습니다(인터넷).

 

-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은 저로 하여금 주님이 주신 사명의 (6:1-15) 계속해서 걷게 만들고 있습니다.

 

(3)    이렇게 헤롯을 여우”(32)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암탉”[“ρνις”(오르니스)](34)으로 묘사한 것일까요?

 

(a)    예수님께서 자신을 암탉’(ρνις)으로 묘사하신 것은, 파괴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여우’(헤롯) 대조하여 희생적이고 포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시기 위함입니다.

 

1.       포식자에 맞서는 '희생적 방패'

 

여우는 자기 안위를 위해 타인을 해치는 포식자이지만, 암탉은 위협 앞에서 자기 몸을 방패 삼아 새끼를 지키는 존재입니다.

 

십자가의 예표: 암탉이 날개를 펴서 병아리를 감싸듯,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죄의 심판과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취약함 속의 승리: 암탉은 이빨이나 발톱 같은 무기가 없지만,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새끼를 품으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는 폭력이 아닌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을 이기시는 주님의 방식을 상징합니다.

 

2.       거부할 없는 '모성적 자애'

 

암탉 비유는 권위적인 통치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초대: 암탉은 위협이 특유의 소리로 새끼를 부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내가 번이나 모으려 하였느냐 탄식하시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지칠 모르는 구원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안식처의 상징: 유대 전통에서 '날개 아래' 하나님의 보호와 안식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교활한 여우의 통치가 아닌,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있는 참된 평안으로 백성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3.       '모으려 ' '원치 않음' 대조

 

비유의 핵심은 암탉(주님) 간절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병아리(예루살렘)들이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13:34)라는 비극적 현실을 드러내는 있습니다.

 

주님은 여우의 위협보다,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고 여우의 길을 따르는 백성들의 완악함을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스스로 암탉이 되심으로써, 세상의 (여우)보다 강한 사랑의 권능을 확증하셨습니다”(인터넷).

 

(4)    주님(암닭) 간절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병아리들) 예수님의 사랑을원하지 아니한 것입니까?

 

당시 예루살렘(유대 백성과 지도자들) 암탉처럼 품으려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원하지 아니하였던이유는 크게 가지 신학적, 역사적 배경으로 나누어 있습니다.

 

1.       자신들이 기대한 '메시아상' 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강력한 정치적·군사적 메시아(사자 같은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실: 하지만 예수님은 칼을 장수가 아니라, 희생하는 '암탉'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결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원했던 '영광과 승리' 기대치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주님의 품을 거부했습니다.

 

2.       기득권과 자기 (Self-righteousness)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있으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고 믿었습니다.

 

착각: 그들은 스스로를 ' 잃은 병아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영적 지도자라고 믿었기에, 회개를 촉구하며 자신들을 품으려는 예수님의 초대를 자존심 상하는 일이자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습니다.

 

거부의 원인: 자신들의 가르침과 전통이 부정당하는 것을 견딜 없었기에 주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기보다 날개를 꺾으려 했습니다.

 

3.       '여우' 주는 세상적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3 문맥에서 보듯, 당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권력인 헤롯(여우) 두려워하거나 권력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불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랑의 통치보다는, 당장 눈앞의 현실적 이익과 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안전해 보였던 것입니다.

 

영적 소경: ‘평화에 관한 알지 못했던 그들은( 19:42), 참된 평화의 왕이신 주님의 품이 주는 안전함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4.       징벌적 완악함 (역사적 반복)


예수님은 34 상반절에서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과거부터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와 경고를 반복해서 거절해 역사적 완악함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고집과 교만 때문에 생명의 품을 스스로 밀어낸 것입니다”(인터넷).

 

(a)    지금 현대인들이 주님의 품을 거절하고원하지 아니하는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세상이 주는가짜 날개 너무나 매혹적이고 견고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지 핵심적인 이유로 나누어 있습니다(인터넷):

 

a.           자기 신격화 독립성에 대한 집착

 

현대 문화의 핵심은 인생의 주인은 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유: 암탉의 날개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통치와 보호를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완악함: 하지만 현대인은 자신의 지성, 능력, 그리고 기술로 인생을 통제할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품을 '안식처' 아니라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속박'으로 오해하기에 스스로 품을 밀어냅니다.

 

b.           가짜 피난처’(현대판 여우의 유혹) 풍요

 

과거에는 생존의 위협 앞에 주님을 찾았다면, 지금은 주님의 날개보다 안전해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유: 자본(), 보험, 과학기술, 사회적 시스템이 현대인의 새로운 (God) 되었습니다.

 

완악함: 당장 눈에 보이는 통장 잔고나 사회적 지위가 주님의 보이지 않는 날개보다 확실한 보호막처럼 느껴지기에, 주님의 간절한 부름을현실감 없는 종교적 수사 치부해 버립니다.

 

c.           영적 분주함 감각의 마비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지만, 현대인은 너무나 시끄럽고 분주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유: 끊임없이 쏟아지는 미디어, 소비문화, 즉각적인 쾌락이 영적인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완악함: 암탉이 새끼를 부르는 소리는 자극적이지 않고 나직합니다.  현대인은 자극과 재미를 쫓느라 주님의 애끓는 탄식과 부름을 들을 여유도, 마음의 공간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은, 주님이 힘이 없어서 우리를 품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 없이도 있다는 오만함에 빠져 있음을 지적합니다(인터넷).

 

(i)                      주님 없이도 있다는 오만함에 빠져 있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 없이도 있다 오만함은 현대판황폐한 ’(35) 만드는 뿌리입니다.   영적 중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멈춤’, ‘낮춤’, ‘돌이킴 과정이 필요합니다(인터넷):

 

(a)    여우 허상을 폭로하고멈추기

 

세상이 주는 안전장치들(, 명예, 기술) 결코 영원한 피난처가 없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실천: 인생의 통제권을 쥐려는 집착을 멈추고, 내가 의지하던 것들이여우처럼 언제든 나를 배신할 있는 유한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루 10분이라도 세상의 소음을 끄고 주님의 날개 치는 소리(말씀) 귀를 기울이는정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b)    병아리 정체성으로낮추기

 

암탉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내가 스스로를 지킬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실천: 기도는 능력을 확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나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 없이는 한순간도 안전할 없는 어린 새와 같습니다라는 정직한 고백이 우리를 교만에서 건져냅니다.

 

(c)    원함 방향을돌이키기

 

34절의 비극은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의지(Will) 사용해야 합니다.

 

실천: ‘내가 원하는 아니라주님이 가라 하시는 선택하는 훈련입니다.  비록 죽음의 위협이 있는 예루살렘(사명의 자리)일지라도 주님이 그곳에 계시다면 품으로 뛰어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d)    함께 모이기 회복

 

암탉은자녀들 모읍니다.  혼자서는 오만해지기 쉽지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의 연약함을 확인하며 주님의 날개를 함께 경험합니다.

 

실천: 나를 품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날개 그늘이 되어주는 사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 우리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없이는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되리라”(35) 경고는 주님의 품을 떠난 삶의 끝이 공허함뿐임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반대로 안에 거한다면, 세상이 없는 가장 완벽한 평안을 얻게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다.' 때까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35) 말씀하셨는데 의미는 무엇일까요?

 

(a)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영적 거부와 그로 인한 심판, 그리고 미래의 회복을 동시에 담고 있는 예언적인 선포입니다.  주요 의미는 크게 가지로 요약할 있습니다(인터넷):

 

1.       거부에 따른 영적 단절과 심판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유대인들을 모으려 하셨으나 그들이 거부했음을 언급하십니다.  "나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은 메시아를 거절한 결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중단되고, 그들이 자랑하던 성전(너희 ) 황폐해질 것임을 뜻합니다.

 

이는 주후 70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함과 동시에, 주님을 밀어낸 영혼이 겪게 황폐함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2.       메시아에 대한 뒤늦은 인정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 시편 118 26절을 인용한 표현으로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말씀은 가지 시점으로 해석됩니다:

 

가까운 미래(입성):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군중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구절을 외쳤습니다.

 

궁극적인 미래(재림):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인 눈을 뜨고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아로 영접하며 찬송하게 마지막 ,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3.       회개와 회복을 향한 소망

 

비록 현재는 심판을 선언하시지만, " 때까지"라는 표현 속에는 이스라엘이 언젠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회복의 약속이 숨겨져 있습니다.  , 예수님을 메시아로 진정으로 인정하고 환영할 비로소 그분과의 만남과 영적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은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경고함과 동시에, 그분이 다시 오실 모든 이들이 그분을 주님으로 찬송하게 날을 바라보는 장엄한 선포라고 있습니다.

 

(i)                      저는 말씀을 묵상할 우리는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이 언젠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회복의 약속을 믿고 그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하나님의 마음 (기다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며 슬퍼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영혼이라도 멸망치 않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 때까지는"이라는 표현은 결국 돌아올 기회가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b.       닫힌 눈을 여는 기도: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은 영적인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믿지 않는 이들의 가려진 마음의 눈을 밝혀, 그들이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 고백하게 돕는 영적 통로가 됩니다.

 

c.       포기하지 않는 소망: 이스라엘이라는 완악한 민족도 결국 찬송하며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면, 우리가 품고 있는 전도 대상자들 역시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변화될 있다는 소망을 가질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지금은 그들이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찬송의 고백이 터져 나올 그날을 기대하며 중보하는 것이 우리의 귀한 사명입니다(인터넷).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