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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7)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27)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 너무나 풍요로웠습니다 .   그들은 스스로 "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 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   뜨거운 온천수처럼 영적인 열정 ( 신앙의 뜨거움 ) 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 그렇다고 차가운 냉수처럼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선한 영향력 ( 순전함 ) 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   그들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 종교적 취미 ' 정도로 여 기는 안일함과 타성에 젖어 있었습니다 .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 고 말씀하셨습니다 .   즉 , 주님은 온천수처럼 영적인 열정으로 사람을 살리든지 , 냉수처럼 순전함으로 사람을 시원하게 하든지 , 둘 중 하나의 확실한 영적 가치를 지녀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   미지근한 상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   결국 이 말씀은 " 네 신앙이 세상의 풍요에 취해 아무런 맛도 , 쓸모도 없는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 는 것을 그들이 가장 잘 아는 ' 물 ' 의 비유로 강하게 경고하신 사랑의 책망이었습니다 .

오직 나를 보내신 주님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말씀만을 정직하게 흘려보내는 청지기적 순종

오직 나를 보내신 주님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말씀만을 정직하게 흘려보내는 청지기적 순종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3:31-36).

 

 

(1)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31-36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사도 요한이 말씀한 “만물위에계”신[ἐπάνω πάντων ἐστίν (에파노 판톤 에스틴)] “위로부터 오시는 이”[Ὁ ἄνωθεν ἐρχόμενος (호 아노덴 에르코메노스)]또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ὁ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ἐρχόμενος (호 에크 투 우라누 에르코메노스)](31절)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한 가지 좀 의하한 점은 사도 요한은 “위로부터”[ἄνωθεν (아노덴)]라고 쓴 후 “위로”[ἐπάνω (에파노)]라고 썼을 때 두 헬라어 단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요한은 그 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요?

 

(a) 여기서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선포한 “만물 위에 계신 분”, “위로부터 오시는 분”,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이라는 이 세 가지 선언은 요한복음 기독론의 가장 높은 신적 주권과 영광을 입체적으로 증명하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세 구절을 한 문장 안에 촘촘하게 배치한 신학적 의미를 인공지능이 정리한것입니다(인터넷):

 

1.   Ὁ ἄνωθεν ἐρχόμενος (호 아노덴 에르코메노스) ➔ “기원과 출처의 신비: 위로부터 오시는 이”

 

구체적 의미: 여기서 ‘아노텐(ἄνωθεν)’은 3절에서 니고데모에게 선포하셨던 거듭남의 그 ‘위로부터’와 완전히 동일한 단어입니다(3:3, 31).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과 출처(Origin)’가 어디인가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구속사적 메시지: 예수님은 땅의 혈통이나 인간의 뜻, 혹은 이 땅의 철학과 교육을 통해 발생한 선생이 아닙니다(1:13, 3:2).  주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의 품 속에 계시다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문을 열고 직접 시공간을 뚫고 내려오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유일한 신적 인격’이심을 뜻합니다(1:1, 14, 18, 3:13).

 

2.   ὁ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ἐρχόμενος (호 에크 투 우라누 에르코메노스) ➔ “실체와 권세의 신비: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구체적 의미: 사도 요한은 앞선 ‘아노텐’의 개념을 31절 하반절에서 ‘에크 투 우라누(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하늘로부터)’라는 명확한 공간적 단어로 한 번 더 반복하여 도킹(결합)시킵니다.

 

구속사적 메시지: 땅에서 난 인간(세례 요한, 니고데모를 포함한 모든 인류)은 아무리 위대해도 본질적으로 땅에 속하여 땅의 한계와 낮은 포도주만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2:10, 3:31).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이라는 영원한 초월의 영역’에서 직접 걸어 내려오신 분이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하늘의 완전한 진리와 대속의 신비(하늘의 일)를 완벽하게 보고 들은 대로 증언하실 수 있는 ‘독점적 권세’를 가지셨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3:11, 12, 32).

 

3.   ἐπάνω πάντων ἐστίν (에파노 판톤 에스틴) ➔ “수직적 통치의 신비: 만물 위에 계신 이”

 

구체적 의미: 앞선 두 단어가 주님의 ‘출처’를 증명한다면, 이 단어는 그 출처를 가진 주님이 지니신 ‘절대적인 통치 주권(Authority)’을 선포합니다.  원어 ‘에파노(ἐπάνω)’는 공간적으로 ‘~의 바로 수직 위쪽에, ~를 완벽하게 발밑에 두고 다스리는(over/ruling)’이라는 강력한 지배의 뜻을 가집니다(3:31).

 

구속사적 메시지: 사도 요한은 이 선언을 31절 서두와 결론에 두 번이나 중첩하여 못 박아 둡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피조물, 로마의 권력, 유대인의 바리새인 체제, 인간들이 세운 46년짜리 가짜 성전 건물(2:20), 사탄 마귀의 음부의 권세, 그리고 앞서 사역을 감당했던 세례 요한 자신까지 포함하여, 온 우주와 만물의 머리 ‘바로 위에서’ 그것들을 완벽하게 통치하고 지배하시는 최고 사령관이자 창조주이심을 확증한 것입니다 (1:1, 3, 마 16:18)(인터넷).

 

(b)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독보적인 신분과 권세를 확증하기 위해 왜 이 다른 두 단어[‘아노텐’(ἄνωθεν)(“위로부터”)과 ‘에파노’(ἐπάνω)(“위에”)]를 철저하게 계산하여 사용했는지, 그 구체적인 신학적 의도와 목회적 교훈을 인공지능이3가지 차원으로 명확하게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Ὁ ἄνωθεν ἐρχόμενος (호 아노덴 에르코메노스) ➔ “기원과 출처의 신비: 위로부터 오시는 이”

 

구체적 의미: 여기서 ‘아노텐(ἄνωθεν)’은 3절에서 니고데모에게 선포하셨던 거듭남의 그 ‘위로부터’와 완전히 동일한 단어입니다(3:3, 31).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과 출처(Origin)’가 어디인가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구속사적 메시지: 예수님은 땅의 혈통이나 인간의 뜻, 혹은 이 땅의 철학과 교육을 통해 발생한 선생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의 품 속에 계시다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문을 열고 직접 시공간을 뚫고 내려오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유일한 신적 인격’이심을 뜻합니다(1:1, 14, 18, 3:13).

 

2.   ὁ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ἐρχόμενος (호 에크 투 우라누 에르코메노스) ➔ “실체와 권세의 신비: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구체적 의미: 사도 요한은 앞선 ‘아노텐’의 개념을 31절 하반절에서 ‘에크 투 우라누(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하늘로부터)’라는 명확한 공간적 단어로 한 번 더 반복하여 도킹(결합)시킵니다(3:31).

 

구속사적 메시지: 땅에서 난 인간(세례 요한, 니고데모를 포함한 모든 인류)은 아무리 위대해도 본질적으로 땅에 속하여 땅의 한계와 낮은 포도주만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2:10, 3:31).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이라는 영원한 초월의 영역’에서 직접 걸어 내려오신 분이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하늘의 완전한 진리와 대속의 신비(하늘의 일)를 완벽하게 보고 들은 대로 증언하실 수 있는 ‘독점적 권세’를 가지셨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3:11, 12, 32).

 

3.   ἐπάνω πάντων ἐστίν (에파노 판톤 에스틴) ➔ “수직적 통치의 신비: 만물 위에 계신 이”

 

구체적 의미: 앞선 두 단어가 주님의 ‘출처’를 증명한다면, 이 단어는 그 출처를 가진 주님이 지니신 ‘절대적인 통치 주권(Authority)’을 선포합니다. 원어 ‘에파노(ἐπάνω)’는 공간적으로 ‘~의 바로 수직 위쪽에, ~를 완벽하게 발밑에 두고 다스리는(over/ruling)’이라는 강력한 지배의 뜻을 가집니다(3:31).

 

구속사적 메시지: 사도 요한은 이 선언을 31절 서두와 결론에 두 번이나 중첩하여 못 박아 둡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피조물, 로마의 권력, 유대인의 바리새인 체제, 인간들이 세운 46년짜리 가짜 성전 건물, 사탄 마귀의 음부의 권세, 그리고 앞서 사역을 감당했던 세례 요한 자신까지 포함하여, 온 우주와 만물의 머리 ‘바로 위에서’ 그것들을 완벽하게 통치하고 지배하시는 최고 사령관이자 창조주이심을 확증한 것입니다.

 

(2) 둘째로, 저는 만물 위에 계신 하늘로부터 오신 이가”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요3:31-32)하였다[ὃ ἑώρακεν καὶ ἤκουσεν, τοῦτο μαρτυρεῖ (호 헤오라켄 카이 에쿠센, 투토 마르투레이)]는 말씀을 읽을 때 그 증언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더불어 그 증언에 두 다른 반응인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τὴν μαρτυρίαν αὐτοῦ οὐδεὶς λαμβάνει (텐 마르투리안 아우투 우데이스 람바네이)](32절)과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ὁ λαβὼν αὐτοῦ τὴν μαρτυρίαν ἐσφράγισεν ὅτι ὁ θεὸς ἀληθής ἐστιν (호 라본 아우투 텐 마르투리안 에스프라기센 호티 호 테오스 알레데스 에스틴)](33절)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주님이 “친히 보고 들은 그 증언”의 실체

 

현재완료형의 살아있는 앎: 여기서 ‘본 것’에 해당하는 ‘헤오라켄(ἑώρακεν)’은 현재완료 시제입니다.  이는 땅에서 태어난 선지자들이 환상이나 명상을 통해 수집한 간접적인 정보가 아닙니다.

 

구속사적 알맹이: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품  속에서 성부 하나님과 완벽하게 마주하며 상시로 ‘친히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직접 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영원한 구속 계획과 하늘의 일’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이 하시는 증언의 진짜 실체는 우리가 이미 가장 뜨겁게 묵상하셨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새 언약의 완전한 대속적 사랑의 법도와 십자가 복음 그 자체입니다(14, 15, 16, 17절).

 

2.   첫 번째 반응: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우데이스 람바네이] ➔ 인간의 전적 타락

 

원어적 대조와 역설: 32절 상반절에서 주님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계시는데, 곧바로 이어서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다”라고 절대적 절망을 선언하십니다.

 

신학적 의도: 이는 참빛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1장 10-11절의 선언과 정확히 일치하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영적 소경됨의 비극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얕은 땅의 생각(이성의 한계)과 46년짜리 종교 시스템에 갇혀 있기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십자가 대속과 은혜의 선물이라는 진짜 표적을 제 지혜로는 단 1%도 스스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비참한 상태임을 못 박은 구절입니다.

 

3.   두 번째 반응: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요 3:33)

 

인치심의 문장: "세상의 모든 가짜 기득권과 인간적인 계산을 완전히 십자가 앞에 뒤엎어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과 대속의 사랑(3:16)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구원의 실체이며 이를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참되시다라는 영적 진리 위에 자기 전 생애를 걸고 완료형의 도장을 찍어 확증하는 반응을 뜻합니다."

 

“인쳤느니라” [ἐσφράγισεν (에스프라기센)] ➔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확증과 영수증"

 

원어적 의미와 배경: ‘인치다’의 원형인 ‘스프라기조(σφραγίζω)’는 고대 사회에서 왕이나 주인이 문서나 소유물 위에 ‘내 도장(Signet ring)을 꾹 찍어 봉인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는 소유권을 확정하고, 내용물이 진짜임을 최종 보증하며, 절대 변개할 수 없도록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행동입니다.

 

구속사적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보고 들으신 하늘의 복음(십자가 대속과 독생자의 사랑)을 내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100% 진짜이며, 이 예수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참되시다”라는 거대한 진리 위에 자기 인생 전체를 걸고 최종 도장을 꾹 찍어 확증하는 자입니다(3:33).

 

사명적 고백의 문장: "나를 지우고 오직 만물 위에 계신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만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을 주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찬란하게 증명하는 진짜 참 이스라엘 사람의 살아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주권의 전복: 인간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하는 역설

 

신앙고백의 위대함: 본문의 구조는 놀라운 영적 역설을 보여줍니다.  원래는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너는 내 소유다”라고 인을 치셔야 맞습니다(요 1:12-13, 6:27, 엡 1:13).  그런데 요한은 예수의 증언을 영접하는 인간이 역으로 “하나님은 참되십니다!”라고 도장을 찍어 확증한다고 선언합니다(요 3:33).

 

의도: 세상의 기득권과 바리새인 체제는 끊임없이 자기들의 잣대(46년짜리 가짜 건물)를 가지고 예수의 자격을 사상 검증하려 들었습니다(1:19, 2:18, 20).  그러나 참된 성도는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검증을 배설물로 버리고(2:24-25), 예수의 십자가 보혈과 말씀 한마디를 내 영혼의 유일한 약속(영수증)으로 삼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 천하에 당당하게 완료형으로 입증해 내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합니다(1:41, 49, 2:22).

 

4.   제임스 목사님의 말씀 나눔 사역 위에 주는 위대한 교훈:

 

목사님께서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기도로 바쳐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감당하시는 그 말씀 나눔 제단이, 바로 영혼들의 심령 속에 이 복음의 최종 영수증과 하나님의 도장을 꾹 찍어주는 거룩한 인치심의 사역입니다.

 

사람의 반응(어둠의 거절)에 속지 말고, 인치시는 성령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32절 말씀처럼 대다수의 군중이 나의 수고를 몰라주거나 완고하게 거부할지라도 결코 낙심하여 주도권을 잃지 마십시오.  목사님이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지는 소리가 되어 주야로 신실하게 예수의 십자가 사랑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대접해 주실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택하신 영혼들의 마음 빗장을 완전히 열어젖히실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반전이 목사님의 미래의 면류관입니다: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서성거리며 돌아갔던 니고데모는, 훗날 주님이 세 번째 유월절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고 헐어지셨을 때, 마침내 이 첫날 밤의 말씀이 정교하게 심령 속에 도킹(결합)되어 깨어납니다.  그는 빌라도 앞에 당당히 나아가 주님의 시체를 요구하며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하나님은 진짜 참되시다!”라고 부활의 도장을 찍어 증언하는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눈물로 뿌리시는 복음의 소리는 결코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의 심령 속에 이 확실한 믿음의 인치심으로 차오르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요한복음 3: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의 인치심" 최종 요약: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의 증언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받아들이는 자는(33절), 세상의 가짜 기득권과 인간의 계산을 완전히 십자가 앞에 뒤엎어버리고(2:15, 3:30), 오직 예수의 말씀과 대속의 사랑(3:16)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구원의 실체이며 이를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참되시다라는 영적 진리 위에 자기 전 생애를 걸고 완료형의 도장을 찍어 확증하는 자이며(33절), 나를 지우고 오직 만물 위에 계신 신랑 예수의 목소리만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3:29, 31),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을 주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찬란하게 증명하는 진짜 참 이스라엘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4)(인터넷).

 

(3) 셋째로,저는”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ὃν γὰρ ἀπέστειለን ὁ θεὸς τὰ ῥήματα τοῦ θεοῦ λαλεῖ, οὐ γὰρ ἐκ μέτρου δίδωσιν τὸ πνεῦμα (혼 가르 아페스테일렌 호 테오스 타 레마타 투 테우 لال레이, 우 가르 에크 메트루 디도신 토 프네우마)](요3:34)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제 자신에게 반영하며 적용하길 기원합니다.

 

1.   첫째 영적 지침: 인간의 이론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흘려보내는 순전한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원어적 신비 [τὰ ῥήματα (타 레마타)] ➔ “내면을 수술하여 치유하는 살아있는 생생한 언어”

   

요한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성경의 기록된 진리를 뜻하는 ‘로고스(λόγος)’ 대신, 입을 열어 선포하시는 실시간의 생생한 음성이자 활력을 뜻하는 복수형 단어 ‘레마타(ῥήματα)’로 기록했습니다.

 

목회적 적용: 바리새인들과 니고데모는 자신들이 축적한 종교적 지식과 인간의 생각을 자랑하며 예수를 분석하려 들었습니다(3:2, 10).  목사님이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나누시는 사역의 본질은 인간의 웅변이나 신학적 이론을 전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내 자존심의 상(Table)과 인간적인 계산을 완전히 십자가 앞에 뒤엎어드리고, 오직 나를 이 시대의 전령으로 보내신 이의 마음을 받아, 영혼들의 마음속 지성소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가장 순전한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대접하는 맑고 깨끗한 소리로만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2.   둘째 영적 지침: 내 자아를 완전히 비워낼 때, 비로소 성령의 ‘한량없는 충만함’이 사역 위에 임합니다.

 

원어적 신비 [οὐ γὰρ ἐκ μέτρου (우 가르 에크 메트루)] ➔ “인간의 한계와 저울을 깨부수는 무한한 공급”

   

‘한량없이’의 원어 ‘우 가르 에크 메트루(οὐ γὰρ ἐκ μέτρου)’는 “왜냐하면 저울이나 자로 재서(by measure) 제한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목회적 적용: 인간은 자신이 가진 46년짜리 유한한 건물 체제와 땅의 자격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늘 하나님의 능력을 제약하려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생명력은 결코 흉내만 내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세우신 결단, 즉 “제임스라는 이름은 철저히 쇠하여 흔적 없이 지워지고 오직 신랑 예수의 이름만 찬란하게 흥왕하여 떠오르게 하겠다”는 그 철저한 자기 부인의 자리야말로(3:30), 하나님이 성령 세례의 은혜를 저울로 재지 않고 폭포수처럼 무한하게 쏟아부어 주시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내 힘을 100% 빼고 주님 발 앞에 완벽하게 이양할 때, 성령님이 목사님의 입술과 자판을 온전히 사로잡아 영혼들을 살려내기 시작하십니다.

 

3.   셋째 영적 지침: 사람의 평판에 내 마음을 의탁하지 않는 진짜 ‘완료형의 자족’을 누려야 합니다.

 

구속사의 약속: 세상의 종교 시스템과 군중들은 끊임없이 내 사역의 크기와 타이틀을 검증하며 조건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32절 말씀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목사님이 선포하는 하늘의 증언을 받지 않고 외면하는 척박한 광야를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세 번째 유월절 십자가 위에서 육체의 성전을 허무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다 이루었다” 하시는 영원한 구원의 도장을 승리장로교회와 목사님의 사역 위에 완료형으로 꾹 찍어 두셨습니다.

 

내 사역의 지분과 이름표를 다 지워버린 자는 사람들의 칭찬(연회장의 자리)에 목마르지 않습니다(요 2:9).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내 영혼 속에 천국의 안식이 단번에 가득 차올라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현재완료형으로 완벽하게 충만하다”라고 고백하는 진짜 성령으로 난 사람의 자유함과 사명적 자족함을 오늘 목회 현장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3:34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 목회적 최종 요약:

 

재림의 주님 앞에 예비하는 전령으로 파송 받아(1:23, 3:28절) 제임스 목사님이 날마다 강단과 말씀 제단 위에 반영하여 적용해야 할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는 선언은(34절), 내 인간적인 모든 지식의 자랑과 경험의 계산을 십자가 앞에 완전히 헐어버리고 오직 나를 보내신 주님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말씀만을 정직하게 흘려보내는 청지기적 순종이며(2:19, 3:34), 내 이름과 유익은 기쁘게 무대 뒤로 쇠하여 지워지는 광야의 소리(신랑의 친구)가 될지라도(1:23, 3:29, 30), 하나님이 성령 세례의 은혜를 인간의 잣대와 저울로 재지 않고 무한한 충만함으로 사역 위에 부어주심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1:16, 33, 3:34절),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고 온 교회를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으로 매 순간 누리는 참된 목회자의 거룩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4). 

 

(4) 마지막 넷째로, 저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ὁ πατὴρ ἀγαπᾷ τὸν υἱόν, καὶ πάντα δέδωκεν ἐν τῇ χειρὶ αὐτοῦ.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τὸν υἱὸν ἔχει ζωὴν αἰώνιον· ὁ δὲ ἀπειθῶν τῷ υἱῷ οὐκ ὄψεται ζωήν, ἀλλ’ ἡ ὀργὴ τοῦ θεοῦ μένει ἐπ’ αὐτόν (호 파테르 아가파 톤 휘온, 카이 판타 데도켄 엔 테 케이리 아우투  호 피스튜온 에이스 톤 휘온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호 데 아페이돈 토 휘오 우크 옵세타이 조엔, 알 헤 오르게 투 테우 메네이 에프 아우톤)](요3:35-36)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특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요한일서 5장 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ὁ ἔχων τὸν υἱὸν ἔχει τὴν ζωήν· ὁ μὴ ἔχων τὸν υἱὸν τοῦ θεοῦ τὴν ζωὴν οὐκ ἔχει (호 에콘 톤 휘온 에케이 텐 조엔, 호 메 에콘 톤 휘온 투 테우 텐 조엔 우크 에케이)]. 두 말씀의 연관성은 무엇일까요?

 

(a) 사도 요한이 이 두 본문을 통해 선포하고자 했던 “만물의 통치자이신 아들을 소유함(믿음)이 가져오는 완료형의 영생과, 이를 거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최종적 선언”의 3가지 핵심적 의미와 유기적 연관성을 인공지능이 명확하게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의미: 만물의 지배권이 아들의 손에 완벽하게 위임되었습니다(35절).

 

성부의 사랑과 주권의 이양 ➔ 데도켄 [δέδωκεν]: 35절의 ‘주셨으니’에 해당하는 ‘데도켄(δέδωκεν)’은 현재완료 능동태형 동사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아들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온 우주와 만물, 그리고 인간의 생사화복과 모든 심판의 주권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 단번에 완벽하게 넘겨주셨고, 그 주권적 위임 상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영원히 유효하게 지속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46년짜리 가짜 성전 건물이나 바리새인의 권력 등 땅의 그 어떤 가치관도 아들의 손 위에 있는 만물의 지배권을 흔들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의 주권을 쥐고 계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 자아의 계산을 완전히 뒤엎고 복종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2.   둘째 의미: 영생은 죽어서 가는 미래가 아니라, 아들을 ‘소유한 현재완료형의 상태’입니다(36절).

 

요한복음 3장 36절과 요한일서 5장 12절의 도킹(결합)은 ‘생명(영생)’의 시제와 실체가 무엇인지를 시각적으로 확증해 줍니다.

 

현재형 소유 ➔ 에케이 [ἔχει] / 에콘 [ἔχων]: 두 본문 모두 ‘생명이 있고’, ‘아들이 있는 자’를 말할 때 현재 시제 동사인 ‘에케이(ἔχει)’와 현재 분사인 ‘에콘(ὁ ἔχων)’을 집요하게 중첩하여 사용합니다.

 

연관성의 신비: 요한복음 3장에서 물과 성령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성도에게 임하는 영생은, 미래에 겨우 얻어내는 불확실한 티켓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독생자의 사랑을 내 인생 전체를 걸고 도장 찍어 영접하는 바로 그 순간, 참빛이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인격이 내 마음속 지성소 속에 들어와 결합(도킹)하여 영원히 머무시는 ‘현재 완료형의 안전한 상태’가 곧 영생이며 생명 자체라는 선언입니다.  아들을 가진 자는 이미 영생을 지금 실시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3.   셋째 의미: 순종하지 않는 자는 진노가 ‘상시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36절 하반절).

 

사도 요한은 아들의 증언을 거부하는 자들이 직면한 비극적 실상을 단호하게 매듭짓습니다.

 

어둠의 상시적 지배 ➔ 메네이 [μένει]: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미래의 어느 날 진노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메네이, μένει]”라고 현재 시제로 못 박아 둡니다.

 

의도: 1장 32-33절에서 성령이 예수님 위에 영원히 ‘머물렀던’ 축복의 단어가, 여기서는 아들을 거부하고 자기 행위의 위선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여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와 정죄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상시로 빽빽하게 머물러 덮고 있는’ 비극적 정체성으로 반전되어 쓰인 것입니다)(3:18, 36).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  아들이 있으면 생명(안식)이 상시 머물고, 아들이 없으면 진노(심판)가 상시 머물 뿐입니다.

 

4.   제임스 목사님의 심령과 말씀 나눔 사역 위에 주는 적용:

 

목사님께서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기도로 바쳐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감당하시는 그 말씀 나눔 제단이, 바로 영혼들에게 이 영원한 완료형의 생명과 아들 예수를 소유하게 만드는 이 시대의 가장 신실한 청지기 사역입니다(요 1:23).

 

①   목사라는 타이틀의 껍데기를 지우고, 날마다 내 안에 ‘아들 예수’만 가득 차올라야 합니다.

 

사역자가 가장 타락하기 쉬운 자리는 "내가 목사로서 목회적 연륜이 있고 신학을 가르친다"라는 인간적인 울타리(46년짜리 가짜 건물) 뒤로 내 자존심을 숨길 때입니다(2:20, 3:10).  주님은 우리의 그러한 외식에 자신을 결코 의탁하지 않으십니다(2:24, 25).

 

날마다 말씀 제단 앞에 설 때마다, 내 지식의 상을 주님의 채찍 앞에 완전히 뒤엎어드리고, "주님, 저는 제 힘이나 배경을 1%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제 목회의 유일한 생명과 실력은 오늘 내 안에 참된 지성소로 살아 계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라고 자아를 헐어버려야 합니다(1:20, 2:19, 21).  내가 철저히 쇠하여지고 주님만 흥하실 때(3:30), 하나님은 성령의 한량없는 충만함을 목사님의 입술과 컴퓨터 자판 위에 저울로 재지 않고 무한히 쏟아부어 주실 것입니다(34절).

 

②    양들의 더디 믿음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완료형의 ‘구원[소데]’의 이름만 선포해야 합니다.

 

목사님이 전하시는 복음의 소리를 들을 때, 어떤 영혼들은 진리의 빛이 부담스러워 어둠 속으로 도망치거나 거절할지라도 낙심하여 주도권을 잃지 마십시오.  이미 주님은 세 번째 유월절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는 최종 승리의 도장을 찍으셨고, 승리장로교회와 목사님의 말씀 제단 위에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는 승리의 종착지를 영원한 반석으로 고정해 두셨습니다(요 19:30, 마 16:18).

 

오늘 밤의 어둠 속을 방황하며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 탄식하던 무지한 니고데모를(3:2, 4, 9), 결국 십자가 앞에 당당히 나아와 향유를 아귀까지 가득 채워 왕의 장례를 치르는 흠 없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바꾸어 내셨던 그 주님의 집요한 ‘하늘의 사랑(3:16)’과 빛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2:7, 19:39, 엡 5:27).  목사님이 뿌리시는 복음의 언어들은 결코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영혼들의 심령 속에 아들을 소유한 자의 확실한 현재완료형의 기쁨과 영생의 인치심으로 가득 차오르게 될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요 3:29, 33, 요일 5:12).

 

요한복음 3장 전체 대장정(1-36절)의 전방위적 마침표 요약:

 

표적의 현상과 지식적 껍데기에 갇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거듭남의 진리를 선포하신 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무능력 상태에 처해 있음을 폭로하기 위함이며(3,5,9절), 광야의 놋뱀처럼 자신이 저주의 나무에 높이 들려 피 흘려 죽으실 최고의 영적 영광을 통해 온 세상을 향한 성부의 압도적인 대속적 사랑을 완료형의 선물로 성취해 주셨습니다(14,16절).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선포하며 신랑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완료형의 기쁨을 누리고 퇴장한 사명의 터전 위에(29,30절), 사도 요한은 아들을 믿고 소유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영생)이 현재형으로 주어져 있음을 요한일서의 선언과 대조하여 완벽하게 도킹하사 확증해 주셨으니(3:36, 요일 5:12), 내 생각의 계산과 가짜 의지를 완전히 뒤엎고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나아와 예수님이 사신 것과 똑같이 행하며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을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대망하며 묵묵히 전진하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요 1:12, 13, 33, 2:19, 21, 20:31, 고전 3:16, 엡 5:27, 살전 4:16)(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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