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Then one of those standing near drew his sword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 Mark 14:47, Today's Korean Version ) 1. Identifying the People Involved: The person who stood beside Jesus and drew the sword was Simon Peter .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was named Malchus .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The servant’s name was Malchus.” ( John 18:10 ) 2. Jesus' Response to Peter's Action: (a) Jesus said: “Permit even this.” ( Luke 22:51, KJV: “Suffer ye thus far”; RSV: “No more of this” ) The Greek words clarify this: “ἕως τούτου” (“heōs toutou”) = “up to this point” or “even this” “ἐᾶτε” (“eate”) = “allow it,” “let it be,” “leave it alone” Therefore, Jesus is essentially saying: “Let them do what they are doing. Do not resist any further.” “If ...

“지혜를 사모하는 자” (1) (잠언 29장 1-5절)

 “지혜를 사모하는 자” (1)

 

 

[잠언 29 1-5절 말씀 묵상]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란 바로 말씀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지혜의 책들을 계속해서 묵상해 나아가면서 또 하나의 능력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지혜의 능력”입니다.  물론 그 지혜의 능력을 구하게 된 동기는 지혜의 책들을 묵상하게 되면서 더욱더 제 자신이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들춰지는 가운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가 지혜의 능력을 사모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악을 미워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제가 하나님께 지혜의 능력을 구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저 또한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선을 저 또한 더욱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 3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현대인의 성경“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란 제목 아래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무엇을 또는 누구를 사모하는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첨 보다 책망을 사모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 1절과 5절을 보십시오“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고집을 피우는 사람은 예기치 않은 패망을 당하고 구제가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웃 사람에게 아첨하는 자는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책망을 듣는 것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아첨을 듣는 것이 좋으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을 아첨하는 사람은 여러분 앞에서만 거짓말로 여러분을 기쁘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그 아첨을 계속해서 듣고 싶겠습니까?  아니면 비록 책망을 듣는 그 당시에는 기분이 좀 않좋겠지만 그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해서 여러분을 위하여(여러분을 세우고자책망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자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그 책망에 오히려 귀를 더 기울이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잠언 28 23절에서 “사람을 경책하는 자(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는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사람을 경책하는 자”(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을 경책하는 자가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23절하).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본능은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기보다 지금 사랑을 더욱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상대방에게 더욱 사랑을 받는 방법은 우리가 그 상대방의 잘못을 정신차리도록 꾸짖기(경책보다 그 사람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아부(아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 5절을 보면 성경은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이웃 사람에게 아첨하는 자는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웃에게 ‘아첨한다’라는 말은 이웃에게 매끄러운 것(smooth thing)을 말한다는 뜻으로서 “그것은 상대방의 죄악 성품에 잘 영합하여 듣기 좋게 말함입니다(박윤선).  그 좋은 예가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에게 듣기 좋게 아첨한 거짓 선지자 400명입니다.  그 당시 아합 왕은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자기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과 싸우려고 했을 때였습니다(4).  그 때 여호사밧 왕은 아합 왕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자고 하였습니다(5).  그래서 아합 왕은 선지자 400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고 물었습니다(6).  그러자 그 선지자들은 아합 왕에게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라고 아첨을 했습니다(6).  또 다른 예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 듣기 좋은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그 거짓 예언이란 평강이 없는데 그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6:14, 8:11).  아니죄를 짖고 있으면서도 회개치 않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평강이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이요 이스라엘 백성의 귀에 듣기 좋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거짓 선지자들은 아첨한 것일까요?  왜 그들은 아합 왕에게 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듣기 좋게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 듣기 좋은 소리를 듣고 있었던 아합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죄를 짓고 있었기에 그들의 죄악 성품에 그 거짓 선지자들의 아첨은 자신들의 죄악된 뜻과 이익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은 자신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라고 오늘 본문 잠언 29 5절 하반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왜 사냥군이 그물을 칩니까?  사냥하는 동물을 잡고자 그러는 것 아닌가요?  자기 이웃에게 아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란 말씀은 비록 처음에 이웃에게 아첨할 당시에는 별 문제 없어보일지라도 그것은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으로서 결국에 가서는 그 그물에 잡힌다(걸려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아첨하는 자는 패망을 가져온다는 말입니다(26:28).  성경 예레미야 9 8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들의 혀는 사람을 죽이는 화살과 같다.  그들은 항상 거짓을 말하고 입으로는 자기 이웃에게 다정히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그를 잡을 덫을 놓고 있다.  아첨하는 사람의 혀는 죽이는 화살과 같습니다.  아첨하는 사람은 입으로 항상 거짓을 말합니다.  자기 입으로 이웃에게 다정히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상대방을 잡을 덫을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첨하는 자는 두 마음으로 거짓을 말합니다(12:2).  그러므로 우리는 두 마음을 품고 우리에게 아첨하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아첨하는 자를 경계합니다.  물론 먼저 우리 자신이 사도 바울처럼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살전2:5).  특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지 말아야 합니다(1:16).  우리가 경계해야 할 아첨하는 자들은 아첨의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합니다(16:18).  결코 그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고 교묘하게 진리와 거짓을 섞어서라도 우리에게 아첨의 말을 하여 우리로 하여금 미혹되어 교만한 가운데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첨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리를 사랑으로 경책하는 자의 책망을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28:23).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첨보다 책망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 잠언 29 1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이 곧은 사람”이란 매우 고집이 완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람은

“가르치기 어려운말을 잘 듣지 않는” 영(unteachable spirit)이 있는 사람입니다(MacArthur).  성경에 이렇게 매우 고집이 완강한 목이 곧은 사람하면 누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 왕 바로가 생각남.  하나님께서 10가지 내릴 때까지 바로 왕은 계속해서 마음을 완강하게 해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뜻을 고집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0번째 재앙을 받고서야 자기의 완강한 고집이 꺽여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바로 왕 외에도 성경에 나는 매우 고집이 완강한 사람을 생각할 때 요나 선지자도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3:10).  니느웨 백성들이 행한 것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0).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4:1).  그는 죽고 싶을 정도로(3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자기의 뜻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였습니다(3:4).  그래서 그는 니느웨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내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4:5).  그가 기대한 "무슨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니느웨 성읍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3:4).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완강하게 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묶은 땅을 기경하듯이 우리의 마음의 농사를 부지런히 해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불과 방망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녹이고 부서트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찔러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서 우리를 사랑으로 책망하는 사람의 말을 겸손히 배우는 자세로 듣고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특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책망하시는 것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39:11).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여 우리의 죄를 우리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실 때에 우리는 그 책망을 겸허히 받아들어야 합니다(50:21).  그러므로 우리의 들춰진 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들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위하여나를 세우고자 책망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를 듣는 지혜로운 자가 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 4 18내 죄악의 성품과 뜻에 맞는 거짓된 아첨을 듣기 보다 그 성품과 뜻을 들춰내고 양심에 찔림을 주는 진실된 책망을 들을 수 있는 지혜를 사모하면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