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22절 말씀 묵상]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하워드 헨드릭스 목사님은 그의 책 "사람을 세우는 사람"에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당신은 힘든 일이 닥치면 포기해 버리든지 또는 그 일이 성공하게 되면 그것을 당신의 영광으로 가로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쭙곤 합니다. 특히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이 질문을 많이 던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왜 이런 역경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겪게 하시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을 때 성경 로마서 12장 2절 하반절 말씀을 묵상하며 붙잡습니다: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성경에서 나에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진리는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비록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나를 제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는 성경 구절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베드로전서 3장 16-17절을 보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을 행하므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제목 아래 우리 교회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한 5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을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여러분, 요즘 여러분 마음에 기쁨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기쁨보다 근심, 걱정, 우울 또는 슬픔이 있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접하면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은 바로 느헤미야 8장 10절 하반절입니다: “…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힘이 될 것입니다”](Do not grieve,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제가 개인적으로 기쁨에 관하여 생각할 때 좋아하는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그 말씀이 제 삶에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과연 나는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라는 자문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는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과연 나의 힘인지도 자문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성경 느헤미야 8장 10절 말씀 문맥에 근거해서 한 3가지로 묵상했습니다:
(1)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슬퍼하지 말며 울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 느헤미야 8장 9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자 에스라를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듣고 또한 레위 사람들을 통하여 율법을 깨닫게 될 때에 자기들의 죄가 들춰지므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통하여 죄의 자각(conviction of sins)이 있으므로 울었습니다(에스라10:1).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자각으로 인하여 울고 있을 때에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며 울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2)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느헤미야8장 10-11절을 보십시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왜 수문광장에 모여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심을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심하였던 이유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무엇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지 잘 모르면서 오랫동안 주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Packer). 근심은 우리에게 힘이 되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연약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주일 주님의 전에 올라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들춰지므로 근심할 수 있고 또한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근심은 우리의 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회개하므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자유를 누리므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느헤미야 8장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그들에게 모세 율법을 깨닫게 했던 레위 사람들을 권면을 듣고 슬픔과 눈물과 근심을 그치고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알았기 때문입니다(12절).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특히 우상을 섬기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 많은 환난(1:6)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은 환난 중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한 4가지 원리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1) 데살로니가인들은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들었습니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하던 데살로니가인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4절). 그랬기에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기쁜 소식)을 전했을 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입니다(5절). 우리가 항상 기뻐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복음)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슬프고 마음에 무거운 일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면 우리는 기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 여기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겪은 많은 환난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선포한 것은 유대교가 아니라고 하면서 데살로니가 시민들을 충동질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저자의 깡패들까지 동원해서 기독교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로마 관원에게 고소하여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김세윤). 그런 와중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많은 환난 중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KJV 성경 주석).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2:13). 그리고 그 말씀이 믿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가운데 역사했습니다(13절). 그랬기에 그들은 많은 환난 중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많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 슬퍼하지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그 와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는커녕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가 많은 고난과 고통 중에 있을 때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겸손히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하십니다. 그 결과 성령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 말씀으로 빚으시사 거룩케 하시고 주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1:6).
(3)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많은 환난 중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을 보십시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리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견디면서 항상 기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잠10:28; 롬12:12).
(4) 저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원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 보았습니다. 그가 많은 환난 중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3장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빌4:1). 바울에게는 이러한 기쁨의 형제, 자매들이 있었기에 어떠한 핍박과 환난 중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살전 5:16).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기쁜 소식)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되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말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를 우리의 기쁨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참 기쁨이 되시는 주님으로 인해 항상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저는 몇 주 전 새벽기도회 때 시편 10편 17절인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라는 말씀에 힘을 얻어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간절히 기도케 하셨습니다. 특히 성령님께서는 그날 그 새벽에 제 마음의 간절히 소원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제 소원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게 하시므로 제 마음을 위로해 주셨습니다(시10:17).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해져 있을 때(the weak)(2절), 우리가 무기력해져 있을 때(the helpless)(9, 12절) 우리가 외로울 때(14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간절한 소원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17절).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우리의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18절). 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간구를 아뢰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 3가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1) 우리는 구원(건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55편 16절을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면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 가운데서 허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그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충분히 건지실 수 있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 밖에 있는 우리의 상황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믿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해있는 그 상황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어야 합니다(롬 8:28).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도 그의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실 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우리는 예수님(뜻: ‘하나님은 구원이십니다’)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2) 우리는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55편 17절을 보십시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께 간구해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이 없다고 생각될 때 매우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서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기도하는데 낙심까지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알면서도(눅18:1) 우리는 낙심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실제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중단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기도 응답의 확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6장 24절을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때에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시편 55편 22절을 보십시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벧전5:7).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7절). 우리는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시55:22). 성경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굳세게 하시며 또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우리가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반복해서 (repetitiously) 기도하라는 말도 아니고 휴식이 없이 계속해서(continuously)라는 말이 아니라 끈기 있게(persistently) 그리고 정기적으로(regularly) 기도하라는 뜻입니다(MacArthur). 여러분, 우리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포기하지 말고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힘든 것이 사탄은 자꾸만 우리에게 다가와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가 접한 힘든 상황은 지속되고 우리의 기도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 될 때 사탄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현혹합니다. 어떻게 사탄은 우리를 현혹합니까? 사탄은 우리에게 수시로 다가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현혹하는 지름길(deceptive shortcut)을 제안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1)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므로 하나님의 때에 기도 응답을 받든지, 아니면 (2) 우리가 그리도 원하는 것을 더 이상 기도하며 기다리기보다 사단이 보여주는 지름길을 선택하여 빨리 얻든지(그러나 이 선택의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에게도 고통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 응답이 더딜 때 이 둘 중에 어는 것을 선택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이 쓴 이 데살로니가전서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뒤돌아보면 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했는지 좀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그들을 기억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리할 때 저는 이런 글을 써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빌립보서 1:8)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억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2절).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우리 육신의 눈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보기보다[사랑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잠언 17:9)]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일(역사)을 볼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1:3).” 저는 이 말씀을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 권면한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4:9)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그들을 사랑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한 것처럼(1:2)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길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에게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늘 기억하기 때문입니다(3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성경에 쉬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사무엘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7장 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이스라엘 백성의 이 부탁대로 사무엘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아니했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12:23). 사무엘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도 3년 동안 에베소에 있었을 때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사도행전 20장 31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도 “쉬지 않고” 기도를 했고(롬1:9) 또한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를 위해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그를 생각했습니다(딤후 1: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로 기도드렸을 뿐만 아니라(살전1:2) 그는 그들을 만나서 그들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했습니다(3:10, 현대인의 성경).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그리 간구한 이유는 그들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3절). 바울은 그들이 환난 중에 시험하는 자로 말미암아 믿음이 흔들려서 바울 자신의 수고가 헛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습니다(5절). 여러분, 우리가 쉬지 않고 서로의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5:6). 우리는 영적으로 졸지 말고 깨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박윤선). 성경 베드로전서 4장 7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성경 마태복음 26장 41절을 보십시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현대인의 성경) “시험에 들지 않도록 정신 차려 기도하라 …”].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시험에 들어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라고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눅11:4,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우리는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끈기 있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항상 기억하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반석 위에 견고히 서 있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직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끈기 있게,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준비되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요즘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감사 기도가 나오십니까? 만일 나오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으로 인해 감사하고 계십니까? 가족 식구들입니까? 교회 식구들입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1:2).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때문이었습니다(3절):
(1) 첫째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란 3가지입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말로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것입니다(5절).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9절).
(b) 많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는 것입니다(6절).
(c)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는 것입니다(8절).
(2)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 란 3가지입니다:
(a) 서로 위로하는 것입니다(4:18).
(b) 서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5:11).
(c) 서로 화목하는 것입니다(13절).
(3)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소망의 인내”란 2가지입니다:
(a)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1:10).
(b)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3:13)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모든 일(in everything)에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상황(in every situation)이나 모든 환경(in all circumstances)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WBC).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우리가 모든 상황/환경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을까요? 심지어 우리가 보기에 나쁜 상황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좋은 예가 바로 요나 선지자라 생각합니다. 요나 선지자가 쳐해 있었던 상황은 결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밤낮 3일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욘1:17). 그는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2:2). 그는 바다 깊은 곳에 던져졌습니다(3절). 그는 주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4절). 그의 생명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7절). 그는 죽음의 땅에 갇혀 있었습니다(6절). 이런 상황에서도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1, 9절).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바로 그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나 선지자가 기억한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1:15)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므로 그가 밤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입니다(17절). 이것이 바로 요나가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요나가 기도하며 기대했던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가 기대했던 구원은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시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2:10). 그러나 주권자이신 하나님 구원은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2:1, 9).
우리 기도의 응답이 우리 기대대로 현실화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응답의 현실화는 우리가 기도한 내용대로, 우리가 기대한 대로 돼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어졌음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므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9절)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과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현재에도 구원을 베풀어 주실 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3:8)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사 요나를 육지에 토해 내게 하셨습니다(욘2:10).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나의 상황은 드디어 변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이 아닌 육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도 상황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9절).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위하여 기도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보기보다[사랑으로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잠17:9)]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일(역사)을 보기 때문입니다(살전1:3). 성경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현대인의 성경)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염려할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존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감사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에 한 부분인 감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찬양으로 그것을 고백하며, 모든 좋은 것을 그의 선하심에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평생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평생에 감사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영원히 감사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조건은 구원입니다. 그 조건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감사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로 다시금 헌신해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0절을 보십시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여러분, 혹시 타는 불에 물을 끼얹어 본적이 있으십니까? 왜 우리는 타는 불에 물을 끼얹는 것인가요? 그 이유는 불을 끄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불을 끄지 않고 불을 더 활활 타오르게 하려면 우리는 휘발유를 쏟아 붇습니다. 그 좋은 예가, 우리가 캠핑을 가서 밤에 모닥불을 필 때 나무를 모아 놓고 그 나무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 휘발유를 뿌린 나무에 불을 붙이며 얼마나 활활 나무가 잘 타오릅니까? 그렇게 모닥불을 피고 놀다가 우리가 잠들기 전에 그 모닥불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 모닥불을 끄기 위해서 그 위에 물을 붓습니다. 물을 붓되 우리는 혹시나 작은 불씨가 있을까봐 확실하게 불을 끄기 위해서 충분한 용량의 물을 모닥불 위에 붓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내라면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의미가 뭘까요? 성령님을 소멸한다는 것은 마치 타는 불을 끄듯이 성령의 불을 끄는 것입니다. 새찬송가 184장 “불길 같은 성신여”란 찬양 가사 하시죠? 그 가사 1절과 후렴은 이렇습니다: (1절) “불길 같은 성신여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줍소서”, (후렴) “성신이여 임하사 내 영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합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 이 찬송가 가사를 보면 “불길 같은 성신”이라는 표현과 그 불길 같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시길 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그리 표현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성령님을 여러 상징적인 명칭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불”입니다(물, 바람, 기름, 비둘기). 성령님을 불로 묘사한 성경구절 중 마태복음 3장 11절과 사도행전 2장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2:3). 이 말씀들을 보면 마태복음 3장 11절은 “성령 세례”를 말하고 사도행전 2장 3절은 “성령 충만”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성령님을 상징하는 “불”의 역할은 성령 세례에 있어서는 우리의 죄를 다 태우는 역할을 하고 성령 충만에 있어서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두 성경구절을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인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한다면 먼저 사도행전 2장 3절과 연관할 때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한 의미는 성령님의 은사를 존중히 여겨(박윤선) 그 성령의 은사를 억압하거나(억누르거나)(stifle)해서 성령님의 행하시는 일을 제안하거나 저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Believer’s Bible 주석). 그리고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 말씀을 마태복음 3장 11절과 연관할 때 바울이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한 의미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예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에서 이미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더 이상 더럽게(부정하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인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더 이상 남의 아내를 가로채지 말고(6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거룩하게 살라는 말입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한 것입니다(3:13).
우리는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인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역사를 소멸하는 죄를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은혜로 주어진 성령님의 은사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의 은사를 억누르지 말고 성령님의 행하시는 일을 제안하거나 저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님의 은사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데 지혜롭고 절제 있게 마음 것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0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드는 생각은 바울은 그 교회 성도들 중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러한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 가운데서 열심히 자기 손으로 일을 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남의 일을 참견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11). 왜 그들은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이 있었을까요? 안 그래도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을 보면 그 교회 성도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고 견디고 있었습니다(3절, “소망의 인내”). 그런데 그렇게 소망의 인내를 하면서 예수님을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 중에 어떻게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잘못된 예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잘못된 예언을 전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거짓 예언을 한 것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예언자들이나 거짓 선생들이 아니었겠습니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여기 미국 LA에 1990년대 초반에 마라나타라고 해서 1992년 10월 28일을 휴거의 날로 굳게 믿고 그 시간이 밤 12시 자정이라고 해서 소동 아닌 소동이 난 적이 생각납니다(인터넷). 그 때 저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 예언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거짓 예언에 사람들이 현혹되어서 휴거를 한다고 막 떠들 석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거짓 예언을 매우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떠한 위험이 있는가하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예언을 하잖게 여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비록 잘못된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할지라도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예언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MacArthur). 특히 바울은 그들이 바울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을 감안하고(2:13)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권면했다고 생각합니다(5:20). 물론 거짓 예언자(선지자)의 거짓된 예언은 멸시해야 하지만 참된 예언자(선지자)의 참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때”란 바로 장차 일어날 예언의 성취입니다(Believer’s Bible 주석). 그리고 그 예언이란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가리킵니다(1절). 그리고 그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의 초점은 바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4, 8절).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분이십니다(5절하).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6절).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7절).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주님이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현대인의 성경). 그 때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계1:7). 그리고 세상에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슬피 울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7절). 그 이유는 그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과 심판의 두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MacArthur).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죄책감과 심판의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5절하). 오히려 우리 신부된 교회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충만한 기쁨으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것입니다(요3:29). 그러므로 기쁨으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우리 교회는 먼저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계 22:20).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의 음성인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믿음으로 말해야 합니다(20절).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왔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1:3).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또한 우리 마음에 새겨서 신랑 되신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하되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22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여러분, 우리는 건강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선물로 주신 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로서 건강관리를 신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우리 몸에 무엇이 유익(이익)이 되고 무엇이 해(손실)가 되는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는 우리 몸에 해가 되는 것은 버리고 유익이 되는 것은 취해야 합니다. 마친 가지로, 우리는 우리 영적 건강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영적 건강관리를 신실하게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우리 영적 건강에 무엇이 유익이 되고 무엇이 해가 되는지를 구분해서 유익이 되는 것은 취하고 해가 되는 것은 배설물(쓰레기, 똥)로 여기고 버려야 합니다(빌립보서 3장 7-8절).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야 합니다(7절).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2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권면대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말씀처럼 환난 가운데서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취하고 유혹하는 자의 유혹들을 뿌리쳤습니다.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어떠한 좋은 것을 취하고 어떠한 악한 것들을 버렸습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취하고 불신을 버렸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믿기 전에(불신자 때) 우상을 섬기면서 (1:9)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않았습니다(4:5). 오히려 그들은 유혹자의 유혹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음란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3절). 한 마디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모든 유혹을 버리고 믿음에 견고히 서서(3:8) 요동치 않았습니다(3절). 여러분, 사단은 우리를 미혹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불만족 속에서 불평하며 원망하여 결국은 하나님께 범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불만족합니까? 그 원인은 욕심입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한 분 만으로 자족하지 못하게 하고자 욕심이란 영적 암세포를 우리 안에 침투시켜 결국 불만족과 불평, 원망 속에서 결국 하나님께 범죄하게 만듭니다. 그 범죄는 바로 하나님을 불신하여 하나님을 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역사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롬10:17) 순종하여 살아 있는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믿음을 취하고 불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불신을 버리기 위해선 믿음을 부지런히 취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불신을 이겨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야 합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사랑을 취하고 미움을 버렸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그들을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인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겼습니다(5:12-13).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였습니다(4:9). 더 나아가서, 그들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들도 사랑하였습니다(10절).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결코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아지 않았습니다(6절). 오히려 그들은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아무 할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였습니다(9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8). 그러나 사단은 거짓입니다. 사단은 거짓된 사랑인 미움이라는 영적 암세포를 우리 안에 침투시켜 우리로 하여금 서로 미워하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신다(신1:27)는 거짓된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 할 수 없는 무능력하고 차가운 사람들로 만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역사를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사단의 유혹과 싸워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한 사랑(God’s chosen love)을 더욱더 깊이, 넓게, 많이, 높이 깨달아 가야 합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사 많고 많은 죄인들에 우리는 택하시사 보배로운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케 하신 그 구원의 사랑을 우리는 더욱더 깊이 묵상하며 체험하며 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적 사랑으로 사단의 죄악 된 미움을 이겨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야 합니다.
(3)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소망을 취하고 절망을 버렸습니다.
비록 환난 중에서 형제의 죽음을 통하여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절망 속에서 슬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4:13)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14절) 예수님의 재림 때에(1:10)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데리고 오심을 참고 기다렸습니다(4:14).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살아남은 자들도 잠자는 자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주님을 영접하므로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17절, 5:10) 소망 가운데서 모든 환난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흠 없게 보전하시기를(5:23) 소망하면서 모든 환난을 견뎌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모든 환난을 참고 견뎌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낙망과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 가운데서 절망하게 만들지만 우리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예수님의 재림의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 줄 믿는 것입니다(롬12:2). 비록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주권적인 뜻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믿음 더욱 굳세라”라는 복음 성가 가사 2절을 좋아합니다: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주님의 뜻 안에 내가 있음을 믿노라 사랑의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인터넷).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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