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야 55장 8-9절, 현대인의 성경)
요즘도 아내는 가끔 저에게 ‘당신과 나는 너무나 다르다’곤 말합니다. ㅎㅎ 제가 분명히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우리 부부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서로의 다른점들 속에서 서로를 보완하여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종종 말을 했지만 너무나도 점점 뚜렷하게 보이는 부부의 다른점들은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하하. 이렇게 주님 안에서 한몸(막10:8)이라는 부부도 너무나도 다르다면 그 외에 사람들하고는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피조물끼리도 이렇게 매우 다르다면 조물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오늘 성경 이사야 55장 8-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고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르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르데 어느 정도로 다르냐면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길과 천지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정도로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우리의 생각과 길과 다른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이렇다고 확신있게 말하며 어떻게 우리의 길로 하나님의 길이 이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왜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롬9:20). 어떻게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왜 저를 귀히 쓸 금그릇이나 은그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천히 쓸 나무 그릇 또는 질 그릇으로 만드셨습니까?’라고 반문할 수가 있겠습니까(롬9:20; 딤후2:20).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반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에 있어서 수 없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2가지 성경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성경 66권에서 제일 좋아하는 요나서를 보면 제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점 중에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던져진 요나 선지자를 구하심에 있어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사 요나를 삼키게 하신 것입니다(욘1:15, 17) 왜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빠진 요나를 곧장 육지(해변)로 건져주시지 않으신 것일까요?(2:10) 왜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3일 동안이나 물고기 뱃속에 있게 하신 것일까요(1:17)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짧은 생각엔 어쩌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요나로 하여금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현대인의 성경)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라고 고백케 만드시고자 그리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2:9). 그런데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 신앙 고백되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할 기회를 얻은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3일 동안이나 걸어서 큰 성 니느웨로 가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40일 후에는 그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치므로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며 회개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시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을 때(3장), 어떻게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낼 수가 있었을까요?(4:1) 아니, 어떻게 주님의 종인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께 “여호와여,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편이 낫겠습니다”라고 기도할 수가 있나요?(3절,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악에 돌이켜 진정으로 회개한 것을 기뻐하지 않고(하나님은 기뻐하시는데) 니느웨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을 수 있었을까요?(5절)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요나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다가(그 때 요나는 그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했음) 벌레를 예비하사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사 요나는 머리 위에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로 쓰러질 지경이어서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하면서 죽고 싶을 정도로 하나님께 화를 낼 수가 있나요?(6-9절) 그런데 저는 요나서를 묵상하면서 제일 이해가 안되는 하나님의 행하심은 자기가 수고도 아니하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박넝쿨을 그리도 아끼면서(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12만여 명의 영혼들을 아끼시는데)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니느웨에 사는 12만여 명의 영혼을 아끼지 않았던 요나를 왜 하나님께서 그리도 아끼셨을까 입니다. 왠지 저는 요나서 1장에서 4장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12만여 명의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종 요나를 더 아끼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요나가 받을 자격이 있었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그리도 사랑하시고 아끼신 것일까요? 우리의 땅과 같은 생각으로 하늘과 같은 하나님의 생각과 행하시는 역사를 이해 할 수가 있나요?
또 하나 성경에 나오는 예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 속에서 이해가 안되는 점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왕상17:3-4) 분명히 엘리야가 아합에게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했고(1절)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3년 동안(18:1) 이슬이나 비를 내리지 않으실꺼면서 왜 엘리야에게 얼마 후에 말라 버릴 시냇가(7절)로 가서 숨어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좀 물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더 이해가 안되는 점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에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9절).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 사르밧 과부가 그녀의 아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후에는 죽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12절)을 알고 계셨을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녀에게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물이 말라 버릴 시냇가로 인도하셨다가 건져주신다는게 아들과 함께 마지막 한끼 먹고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과부에게 인도해 주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좀 물질적으로 축복받은 과부에게 인도해 주시면 안되셨던 것일까요? 그러면 주님의 종이 그녀에게 재정적으로 후원도 잘 받아서 주님의 일도 마음 것 할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더 이해가 안되는 점은 하나님께서 그 과부의 집에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서 비를 지면에 내리시는 날까지 그녀의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그 기름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하신 후(14, 16절) 그녀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17절). 왜 하나님께서 그 과부의 아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일까요? 혹시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말한대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일까요?(18절) 혹시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녀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그러셨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21-23절). 그 때서야 그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의 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알게 되었습니다(24절). 이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볼 때 우리의 땅과 같은 생각으로 하늘과 같은 하나님의 생각과 행하시는 역사를 이해 할 수가 있을까요?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은 다릅니다. 아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달라야 합니다. 다르데 너무나 다릅니다. 어느 정도로 다르냐면 하늘과 땅차이만큼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각과 길이 땅이라면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하늘이란 말입니다. 그 성경적인 예로, 저는 성경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와 성경 열왕기상 17장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짧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짧은 묵상의 핵심은 우리의 땅과 같은 생각으로는 왜 하나님께서 물에 던져진바 된 요나 선지자를 3일 동안이나 큰 물고기 속에 있게하신 것인지, 왜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두셨다가 다시금 살리셨는지 하늘과 같은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마치 요나가 밤낮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예수님도 밤낮 3일 동안 땅 속에 계시는 것(마12:40)과 마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도 죽으신 후 3일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었습니다(마16:21; 17:23; 20:19; 눅9:22; 18:33; 24:7, 46). 결국 하나님의 생각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었고(고전15:3-4) 하나님의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요14:6)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참 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참 험하니
우리 몸에 매어 있는 그 더러운 죄짐을
하나 없이 벗어놓고 힘써서 들어갑시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 큰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갈지라도 멸망길로 끝나니
세상 헛된 부귀영화 모두 내어버리고
주의 말씀 순종하여 그 생명길로 갑시다
구원의 문 열렸으니 주의 공로 힘입어
주저 말고 들어가서 생명길로 갑시다
구원의 문 닫힌 후엔 들어가고 싶으나
한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후렴]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 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길 갑시다.”
[새찬송가 521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성경 말씀을 통하여 배워가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년 8월 4일, 나 자신의 생각과 길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족한지를 더욱더 깨달아 가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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