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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pt God’s Invitation to Res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gods-invitation-rest/ Accept God’s Invitation to Rest August 24, 2025   |    Scott W. Kay © iStock.com/nullplus Share Post Email Advertise on TGC “It feels so nice to finally stop and catch my breath.” Can you remember the last time you had a moment like that? For some of us, it’s been a while. In our hard-working, highly productive culture, we can sometimes feel like exhausted swimmers swept downstream in a fast-moving river, fighting to keep our heads above water, gasping for air. We get up early and stay up late. We never waste a minute. Our schedule is full, running here, running there, running late, running to catch up, running on empty, until we collapse in utter exhaustion. Underneath the satisfaction of being hard-working, hard-playing people is a weariness that’s desperate for the pace to relent so we can rest and recharge. Deep down, we’re  dying  to slow down and take a break. We keep telling ours...

순종의 종

 순종의 종

 


[로마서 615-23절 말씀 묵상]


 

            지난 주 월요일 저희 교회 영어사역에 있는 Steven 형제와 Kelly 자매의 결혼 예배 때 히브리서1123-26절 말씀 중심으로 “믿음으로”라는 설교 제목 아래 한 3가지로 권면의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3가지 권면의 말씀 중 하나는 믿음으로 더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의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과 고난을 받을 것을 권면하였었습니다.  과연 믿음으로 모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양자 선택에 있어서 “믿음으로” 바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냐(24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냐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냐(25아니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냐(25), 또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택하는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는 것이냐(26)라는 양자의 선택 길에서 모세는 믿음으로 바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이란 양자의 선택 길에서 바른 선택을 합니다.  결코 이쪽저쪽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고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구분하는 가운데 바른 선택을 합니다.  이렇게 바른 선택하는 이유는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경우는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26).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좀 선을 분명히 긋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삶과 믿은 후 삶의 뚜렷하게 드러나는 다른점들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삶과 믿은 후에 삶에 무엇인가 뚜렷하고 명백한 다른점들 혹은 달라진 점들이 우리 삶 속에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빛과 소금을 역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기 후의 삶이 같다면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다른 삶을 산 사람들 입니다.  착복을 일삼는 돈의 노예였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불의하게 축척하고 강탈한 재산을 원주인들에게 갚고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었습니다.  불의한 삶과 결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가문과 지위학문적 성취 등 자신의 화려한 배경을 더 이상 자랑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교만함에서 떠나 겸손히 예수님을 가장 귀중한 존재로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남편을 여러 명 두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더 이상 쾌락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전파했습니다”(인터넷).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삶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까?  왜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 삶에 다른점들이 잘 드러나고 있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삶과 후에 삶 사이에 분명하고 명백한 선을 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과 후에 삶 사이에 분명한 선을 거야 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61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삶과 예수님을 믿은 후의 삶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에게 자신들을 드려 죄의 종이였지만 지금 예수님을 믿고 난 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어 의에게 순종하므로 의의 종이 되었다고 편지를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죄의 종”(slaves of sin) ‘의의 종’(slaves of righteousness)이란 무슨 말씀입니까? 

            먼저 “죄의 종”이란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살았던 삶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삶이란 죄의 종 되었던 삶으로서 우리가 우리 지체를 부정(impurity)과 불법(lawlessness)에 드리면서 삶았던 삶을 가리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  여기서 우리가 우리 지체를 “부정”한 것에 드렸다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아무 가치가 없는 헛된 것에 허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아무 가치가 없는 헛된 것은 바울의 편지를 받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로마서124절에서부터 이미 사도 바울이 말씀하였던 것처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을 추구하며 살았던 삶을 가리킵니다.  , “몸을 서로 욕되게 하”는 성적 타락(sexual impurity)의 삶을 가리킵니다(24).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부끄러운 욕심”(shameful lusts혹은 부끄러운 정욕에 이끌려 아무 가치가 없는 헛된 성적 타락의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 노릇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의 종으로서 우리 지체를 불법에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죄를 짖고 살았던 삶(요일3:4)이 바로 예수님 믿기 전에 우리의 삶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렇게 법을 어기면서 죄를 지면서 살았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로마서118절부터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가 불의로 진리를 막아서 우리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21).  그 결과 우리는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25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두기 싫어했었던 것입니다(28).  우리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의 법을 두기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법을 좇아 육체의 욕심따라 육의 일을 행하면서 죄를 지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 몸을 부정과 불법에 드리면서 살므로 더욱더 불법에 이르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한 마디로죄가 우리 삶 속에 왕 노릇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6, 21,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16) “…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 (21) “…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이니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삶은 한 마디로 우리 지체를 부정(impurity)과 불법(lawlessness)에 드리면서 사망에 이르는 삶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삶은 어떠한 삶을 가리킵니까?  오늘 본문 로마서 6장 18-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삶을 가리켜 ‘의의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의의 종’(18)의 삶은 어떠한 삶을 가리킵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서의 의로운 삶을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생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자로서의 의로운 삶은 어떠한 삶을 가리킵니까?  다시 말하면의의 종된 삶이란 무엇입니까? 

 

            첫째로의의 종된 삶이란 과거의 죄의 종 되었을 때 행했던 일들을 부끄러워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 20-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로 신앙생활을 지금 하고 있다면 우리의 양심은 살아 있어야 함.  그리고 우리의 양심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나 자신과의  영적 싸움에서 져서 옛 사람의 죄악된 습관대로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양심에 찔림과 더불어 죄책감이 들고 또한 죄를 진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만 아니라 교회 안에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하여서도 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TV이나 신문 등을 통하여 모 교회 모 목사님이 성적 죄를 범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우리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크리스천들이 되야 합니다.  얼마 전 서거한 노 전대통이 2006 12 21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예비역 장성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성명을 두고 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자기 나라 군대 작전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놓고 나 국방장관이오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것이냐"라고 하며, "그래서 작전권 회수하면 안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내고 자기들이 직무유기한 것 아니냐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래된 유행어가 바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합니다(인터넷).  맞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참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부끄러운 욕심”에 이끌려 성적 범죄를 하는 것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법(계명)을 어기는 것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얼굴이 뻔뻔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2:4).

 

            둘째로의의 종된 삶이란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 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14절에서 말씀한 후 은혜 아래 있는 자들로서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다(15)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를 짖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죄가 더이상 예수님을 믿는 신자(성도)들을 주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4).  왜 죄가 더 이상 저와 여러분들을 주관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본문 18절과 22절을 보면 저와 여러분들은 “죄에게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we have been freed from sin).  찬송가 202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아시죠?  (1)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2“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후렴) “주의 보혈 능력이로다  주의 피 믿으로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우리는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육체의 정욕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자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습관적인 죄를 지으면서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죄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셋째로의의 종된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6장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의의 종된 삶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해야 함을 말씀해 주면서 그 결과는 ‘의에 이르느니라”(16), “거룩함에 이”른다(19, 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의 종 노릇을 하면 그 열매는 사망이지만(21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면 그 열매는 거룩과 영생이라(22)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바른 교훈”(2:1)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과 그의 말씀에 순종하길 원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벧전2:2)(MacArthur).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6:17).  그러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순종하길 원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몸의 사욕”을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12).  저와 여러분들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복음 전파입니다[(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우리는 부끄러워해야할 것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범하는 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의 입술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종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삶은 한 마디로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이젠 예수님을 믿고 나서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의 종으로서 과거의 죄의 종 되었을 때 행했던 일들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겸손과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9 62부끄러운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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