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슬픈 여자를 기쁘시게 하시는 하나님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사무엘상 1장 15-16절).
저는 어제 목요일 새벽기도회 후에 룻기 1장 13절과 21절 말씀 중심으로 “인생의 쓴 맛을 본 여인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저는 그 글을 쓰면서 하나님께서 제가 쓰는 말씀 묵상의 글을 도구로 사용해주시사 혹시나 나오미(이름 뜻: “나의 즐거움”)와 같이 풍족함에서 빈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식구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의 쓴 맛을 이미 본 자매님들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 그 쓴 맛을 보고 있는 자매님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시길 기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씀 묵상의 글을 다 쓴 후 제 개인 네이버 블로그와 페이스 북 등 여러 웹싸이트에 그 글을 올려서 나눴습니다.
그런 후 저는 어젯 밤 잠들기 전에 오늘 금요일 새벽기도회 때 읽어야 할 사무엘상 1장에서 3장을 읽기 시작하다가 1장에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 첫째로 든 생각은, 사무엘상 1장 2절에서 엘가나라 하는 사람(1절)에게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나”는 자식이 없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다는 말씀에 야곱의 두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두 아내도 “레아”는 자식이 있었지만 “라헬”은 자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창29:31).
(2) 둘째로 든 생각은, 사무엘상 1장 5절을 보니까 남편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 재물의 분깃을 한나에게는 “갑절”로 줬는데 그 이유는 “이는 그(녀)를 사랑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갑절”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창세기 43장 34절에서 요셉이 자기 음식을 자기 형제들에게 줄 때에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었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창43:34). 요셉이 다른 형제들 보다 자기 동생인 베냐민에게 다섯 배나 준 이유는 요셉에게 있어서 베냐민은 자기가 사랑하는 친동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42:20). 아버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인데 야곱이 그리도 사랑했던 요셉은 야곱이 무척 사랑했던 베냐민을 자기도 무척이나 사랑했기에 자기 음식을 다른 형들보다 친동생 베냐민에게 다섯 배나 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장 5절에서도 남편 엘가나는 두 아내 중 한나에게만 제물의 분깃을 “갑절”로 준 것을 보면 엘가나가 한나를 얼마나 사랑을 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좀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추측 속에서 저는 이 말씀을 좀 더 묵상할 때에 왜 한나는 자식이 없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는지 그 이유를 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야곱의 두 아내에 대한 창세기 29장 31절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마치 하나님께서 남편이 야곱의 사랑 받지 못한 레아에게는 태를 여시사 자녀를 주시고, 야곱의 사랑을 받은 라헬은 자녀가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남편 엘가나에게 사랑을 받아 갑절의 제물의 분깃을 받은 한나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삼상1:5).
(3) 셋째로 든 생각은, 자녀가 있는 엘가나의 아내 브닌나가 자녀가 없는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했다는 말씀(6절)을 생각할 때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의 관계를 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여인은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는 라헬이 자녀가 있는 언니 레아를 “시기”했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30:1). 이 사실을 보면 엘가나의 두 아내인 브닌나와 한나의 관계가 그리 좋았을리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녀가 있지만 남편의 사랑을 “갑절”로 받지 못한 브닌나가 자녀가 없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은 한나를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그래서 브닌나는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삼상1:6, 현대인의 성경). “브닌나의 그와 같은 태도는 해마다 변함이 없”어서 매년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를 더욱 비웃고 조롱하며 학대”했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한나는 “울고 음식을 먹지 않을 때가 보통이었”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4) 넷째로 든 생각은, 남편 엘가나가 울고 음식을 먹지 않는 한나에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8절)라는 말씀을 읽다가 어제 새벽기도회 때 읽었던 룻기 4장 15절 하반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그러면서 저는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할 때 나오미란 여인이 인생의 쓴 맛을 본 이유가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만 죽어서 뿐만 아니라 두 아들이 결혼했는데도 불구하고 모압 땅에서 거주하신 10년쯤 되어 죽기 전까지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기에 모압 땅에서 며느리 룻과 함께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곳 여자들에게 자기를 “나오미”(뜻: “나의 즐거움”)라 부르지 말고 “마라”(뜻: “쓰다”)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고 생각합니다(룻1:20). 그런데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에게 하나님께서는 며느리 룻의 보아스와의 결혼(재혼)을 통해 손자 “오벳”을 보게하셨습니다(4:17). 그 때 그녀의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의 이름을 지어줄 때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습니다(17절). 분명히 오벳은 보아스와 룻의 아들인데 그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며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 지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자기의 손자 오벳을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6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에게 손자 오벳을 주시므로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셨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은 후 저는 계속해서 사무엘상 1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오늘 본문 15절에서 한나가 제사장 엘리에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한 말씀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제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저는 개인적으로 이 세상은 슬픔이 많은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사무엘상 1장 15절을 읽으면서 한나가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말하니까 제 마음에 그 말씀이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사무엘상 1장과 2장의 말씀 중심으로 한나란 여인에 대해서 3가지로 묵상을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마음이 슬픈 한나를 기쁘시게 하셨는지 좀 더 자세히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로, 한나란 여인은 “마음이 슬픈 여자”였습니다.
성경 사무엘상 1장 15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이 말씀은 한나가 “성전으로” 가서(9절, 현대인의 성경)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10절)하고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12절) “평상시에 습관대로 성전 문 앞 의자에 앉아 있었”던 엘리 제사장(9절, 현대인의 성경)에게 한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무엘상 1장 14절 말씀은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입을 주목했을 때((12절) 그녀가 취한 줄 생각하고(13절) 한나에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4절)고 말했을 때에 한나가 답변한 말입니다(15절). 이 한나의 답변을 보면 먼저 그녀는 엘리 제사장에게 자기가 포도주에 취한 것이 아님을 말했습니다(15절). 엘리 제사장이 오해를 한 것입니다. 분명히 한나는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닌데(15절) 엘리 제사장은 그녀가 취한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13절). 안그래도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통곡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10절) 주님의 종인 엘리 제사장에게 오해를 받은 것입니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15절).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통하고 있었던 한나에게 엘리 제사장은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했고(14절) 한나는 그의 말을 들은 후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라고 말한 것을 보면(16절) 그녀는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인데(15절) 엘리 제사장은 ‘나를 악한 여자로 여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브닌나로 인하여 울고 음식을 먹지 않을 때가 보통이었을 정도로(7절, 현대인의 성경) 마음이 슬퍼하고 있었는데(8절)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심정을 쏟아 간구하는 한나를 엘리 제사장이 “악한 여자”로 여기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과연 한나의 슬픈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안그래도 한나는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에(16절) 그리 하나님께 자기의 심정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주님의 종인 술이나 취하는 “악한 여자”로 여겼으니 그녀의 슬픈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제 생각엔 한나가 자기 자신을 가리며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말했을 때 물론 그녀의 마음의 슬픔은 브닌나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한나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업신여기고(6절, 현대인이 성경) 또한 매년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를 더욱 비웃고 조롱하며 학대까지 했기 때문에(7절, 현대인의 성경) 그랬겠지만 저는 그녀의 마음의 깊은 슬픔은 어쩌면 그녀는 “여호와께서 그(녀)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에(6절) 그랬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만일 한나가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면 매년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에 자기 남편인 엘가나가 자기를 브닌나보다 더 사랑하여 자기에게는 제물의 분깃을 갑절로 주고(4-5절) 그러므로 브닌나에게 “더욱” 비움음과 조롱과 학대를 받았다면(7절, 현대인의 성경) 한나는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브닌나에게 하나님께서 자녀를 이미 주셨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자기에게는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고 계시다는 것(5, 6절)을 적어도 짐작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나의 마음의 슬픔은 아기를 못나는 것이나 브닌나가 몹시 괴롭히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이 제일 마음의 큰 슬픔이요 제일 큰 괴로움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많은 결혼한 자매들이 한나처럼 자녀를 놓고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고 있을텐데 아기가 들어서지 않으면 그 자매들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합니다. 특히 그 자매들의 시부모님이 손자를 그리도 원하고 계시다면, 그녀들의 마음은 심히 괴롭고 힘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그 자매들의 남편이 외동아들이라면 더하겠지요. 그래서 그 자매들이 한나처럼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서원기도까지 간절히 드리는 자매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 기도회 등등 일주일에 여러번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자매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처럼 마음의 슬픔을 가지고 자신의 그 심정을 하나님께 쏟아내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없어 아기가 들어서지 않고 있다면 그 현실에 대한 그녀들의 마음의 슬픔은 한나와 별 다를바가 없을 정도로 심히 괴롭고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나처럼 혼자 예배당에 올라가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하나님께 기도로 쏟아내고 있는데 담임 목사님이 와서 ‘자매님, 술취하지 말고 술을 끊으세요’라고 말하던지 기도하는 자매를 오해해서 그녀로 하여금 ‘목사님은 나를 나쁜 여자로 여기고 계시는구나’라는 식의 생각을 들게 했다면 그 자매의 괴로운 심정은 어떠할까요? 그 자매는 매우 섭섭해 할뿐 아니라 그 목사님으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 또한 사역을 하면서 저로 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매들이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글을 쓰면서도 생각나는 자매가 있습니다. 인터넷 사역을 하는 가운데 네이버 블로그에서 알게 되어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여러번 하다가 제가 상대방 자매가 힘들게 마음 문을 열고 자신의 심정을 나눴는데 제가 그 자매가 말한 내용을 잘 기억을 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알게 된 목사인 저에게 마음 문을 열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용기를 내어 속 마음의 이야기를 나눈 것인데 제가 혼동 속에서 잘 기억을 하고 있지 못해 결국에는 그 자매와의 대화는 끊겼습니다. 제가 잘못했지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이 말씀 묵상 글을 쓰면서 그 자매가 생각이 났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네이버 블로그에 제 카카오톡 주소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혹시나 카톡으로라도 대화를 하고 싶은 지체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저 조금이나마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카톡 주소를 올려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약 10여년 동안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 지체들을 알게 되었고 또한 몇몇 지체들과는 블로그의 비밀 댓글을 통하여서 뿐만 아니라 카톡으로도 대화를 나눴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지체들이 제일 힘들고, 제일 괴롭고 어려울 때 용기를 내서 저에게 댓글이나 카톡으로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전혀 모르는 저에게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서 말한다는게 결코 쉽지 않았을터인데 그렇게 한 지체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인터넷 사역 한국으로”라는 명칭 아래 한국에 나아가서 지체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은 많은 지체들이 겪고 있는 것들이 참 많은데 그 마음 속 이야기를 교회 안에 누군가에게 나누는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지체들이 고충과 고통과 아픔, 눈물, 상처 등등을 함께 나눌 사람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이 마음이 좀 아픕니다. 한나처럼 마음이 슬픈 자매들이 많이 있을텐데(물론 형제들도요) 말입니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만일 어느 자매가 목사인 저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로라도 ‘저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이 자매가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힘들었으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저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라고 말할까’”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여탯것 신앙 생활을 해오면서 주위에 알게된 여러 자매들을 생각하면 겉으로는 밝고 환하고 자주 웃는 자매들이 생각납니다. 그 자매들이 생각나는 이유는 제 생각엔 겉으로 그렇게 하는 자매들이 왠지 마음에는 고충이 많고 심지어 아픔까지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도 엘레 제사장처럼 그 자매들을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보편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은 겉으로 봐서는 잘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속 마음을 주님 안에서 저 같은 목사에게 나눈다 하여 그것이 그 자매들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사역을 하면서 드는 생각은 많은 자매들의 속 마음엔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픔과 상처를 누구에게도 쏟아낼 수 없는 것은 엘리 제사장이나 저 같은 목사가 그 자매들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매들도 알지요, 목사님에게 말해보았자 충분히 이해를 하지 못하시고 이해를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요. 그러기에 한나처럼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자기의 심정을 쏟아낼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둘째로, 한나란 여인은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였습니다.
성경 사무엘상 1장 26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말씀은 한나가 엘리 제사장에게 또 한 말로서 그 말한 시기는 한나가 “사무엘”이란 아들을 낳고(20절) 그 아기 사무엘을 젖 뗀 후(22-23절)에 그 어린 아이를 데리고(24, 25절) “여호와의 집에 나아”가(24절) 엘리 제사장에게 한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한나가 엘리 제사장에게 자기 자신을 가리켜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한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무엘상 1장 15절에선 한나가 엘레 제사장에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말했었는데 26절에 와서는 자기는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했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 고백 사이에 한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엘리 제사장에게 “마음이 슬픈 여자”에서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했는지 좀더 묵상하고 싶었습니다. 이 두 고백사이에 있었던 일은 마음이 슬픈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 자기의 심정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면서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그 서원 기도 내용은 11절에 나와있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얼마나 간절한 서원 기도입니까? 얼마나 한나의 마음이 괴롭고 슬펐으면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을까 생각됩니다. 특히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리면서 만일 아들을 주시면 자기가 그 아들을 평생토록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그렇게 되면 한나는 그리도 간절히 원했던 자기 아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한나는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그 아들은 하나님의 집(성전)에서 평생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서원기도를 하는 자녀 없는 어머니가 있을까요? 불임 목회하는 박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한국에 불임 부부가 22만쌍 정도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불임 부부가 한나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면 그 자녀를 평생에 하나님께 받치겠다는 서원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볼 때 한나가 드렸던 서원 기도 내용처럼 자기 자녀를 어린 나이부터 교회에서 살게할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주로 자녀가 성장하면 목회자의 길이나 선교사의 길이나 등등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여 사람으로 받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나가 드린 서원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평생토록 하나님께 그리 받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서원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비록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오해를 받아(12-13절) 책망을 받았지만(13절) 자신이 독주에 취한 것이 아니고 “마음이 슬픈 여자”로서 자기의 많은 원통함과 격분됨을 엘리 제사장이 자기에게 말했을 때까지(16절)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그 말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고(17절) 그 말을 들은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당신의 여종이 당신케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 후(18절)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빚이 없”었습니다(18절). 이 사실도 좀 놀랍습니다. 어떻게 한나는 엘리 제사장의 그 한 마디(17절)를 듣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을 수 있었을까요?(18절) 분명히 그녀는 “울고 음식을 먹지 않을 때가 보통이었던” 사람인데(7절,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그녀는 기도 후 엘리 제사장의 말 한마디를 듣고 가서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근심 빛이 없을 수 있었을까요? 혹시 그녀는 엘리 제사장의 말을 확고히 믿게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진정 엘리 제사장의 말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이 기도하여 구한 것을 들어주실 줄 믿어서 그리한 것이 아닐까요?(17절, 현대인의 성경) 혹시 한나는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을 통하여 자기에게 하신 말씀으로 믿고[(엘리 제사장의 말)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절), (한나의 말)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28절)] 엘리 제사장에게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은혜 입기를 원해서(18절) 음식을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놀라운 것은 한나가 음식만 먹고 다시는 근심 빛이 없었던 것 뿐만 아니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했다는 것입니다(19절)[나중에 한나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아 아들 사무엘을 낳고 젖을 뗀 후에 사무엘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 그의 평생에 여호와께 드렸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경배”했음(28절)].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할 때 얼마전에 묵상했던 사사기 7장 1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말씀을 보면 사사 기드온은 적군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부하 부라와 함께 적군 진영으로 내려갔는데(삿7:10-11) 거기서 적군 두 사람의 꿈 이야기와 해몽 이야기를 듣고 기드온이 제일 먼저 한 것이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15절).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의 확신을 가지게 되어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고 확신있게 말했습니다(15절). 그래서 저는 어쩌면 한나도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고, 은혜를 입기를 사모하면서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이 그 다음 날 아침에 하나님 앞에 경배한 것을 보면 그녀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사무엘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삼상1:20). 이 얼마나 놀라운 기도 응답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였지만 그녀의 마음이 슬펐기에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자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마음이 괴로운 여자였기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통곡하는 여자였다고 생각합니다(10절). 그리고 저는 한나가 자기의 많은 원통함과 격분됨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쏟아 놓은 것을 보면(15절, 새번역) 그녀의 마음의 괴로움과 슬픔과 원통함과 격분됨으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의 위로도, 심지어 남편인 엘가나의 위로(8절)도 거부할 정도로 극심한 괴로움과 슬픔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시편 기자 아삽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아삽은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찾고 밤새도록 손을 들어 기도하였으면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시77:2, 현대인의 성경). 그는 심령이 상했고[마음이 약해졌고(현대인의 성경)](3절) 또한 괴로와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는 자기 마음으로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그의 약속은 영영 무산된 것인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것을 잊으셨는가? 그가 분노하여 불쌍히 여기지 않기로 하셨단 말인가?”(6-9절) 만일 한나도 아삽처럼 자기의 영혼이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 받기를 거절할 정도로 마음이 약해져 있었고 괴로와 어느 누구에게도 말도 할 수 없었다면 그녀가 자기의 괴롭고 슬프고 원통하고 격분된 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 송가 “오직 주님만”이란 노래의 가사입니다: “오직 주님만 나의 맘에 갈급함 채우네 오직 주께만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하네 주님만 내 갈급함 채우네 주만 내게 새생명 주네 주만 기쁨 내 맘에 주시네 나의 기도 응답하시네”(인터넷). 또 제가 좋아하는 복음성가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가 생각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삶의 도움이시니 …”(인터넷). 저의 첫째 아기 주영이가 질병으로 중환자실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기도도 나오지 않았었습니다(그런데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셨음). 그 때를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면 이 복음 성가 가사인 “오직 주님만이 내삶의 도움이시니”가 마음에 다가옵니다. 저 또한 시편 기자 아삽처럼 어느 누구의 위로도 받기를 거절할 정도로 마음이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혼자 강대상에 기도할 때에 아빠 아버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여 엉엉 눈물 콧물 흘리기까지 마음을 쏟아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때에 우리는 이 찬송가를 마음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노래했나요?
1.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2.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난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3.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대신 짐을 져주시네
4. 마음의 시험 무서운 죄를 주 앞에 아뢰이면
예수는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 주시네
<후렴>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새찬송가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마음이 슬픈 여자 한나는 하나님께 자기의 심정을 쏟아내면서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를 생각하셨습니다(삼상1:19).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기억하시사(19절, 현대인의 성경) 한나로 하여금 임신하게 하셨고 때가 와서 아들을 낳았는데 “사무엘”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었습니다(20절). 결국 마음이 슬픈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매년 드리는 제사와 서약을 지키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갈 때가 되었을 때(21절, 현대인의 성경) 한나는 올라가지 않고 자기 남편 엘가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젖을 떼면 내가 직접 그를 여호와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여호와께 바친 다음 평생 동안 그 곳에 있도록 하겠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왜 한나는 아기 사무엘을 젖을 떼면 자기가 직접 여호와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받치려고 했던 것일까요? 혹시 젖을 때지 않은 아기를 여호와의 집에 머물게 하면 엘리 제사장이 그 아기에게 젖을 메길 수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요?(2:11) 혹시 한나는 평생토록 여호와의 집에서 거주할 사랑하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나중에 젖을 뗀 후 어린 사무엘을 실로에 머물르게 하고 자기는 남편 엘가나와 함께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간 후(11절) 해마다 엘가나와 함께 제사를 드리러 실로로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아들 사무엘에게 준 것을 보면(19절)] 젖을 떼기까지 만이라도 자기가 젖을 먹이면서 양육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의 말(1:22)을 듣고 그녀에게 “그대의 소견에 좋은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23절). 그래서 한나는 아기 사무엘이 젖떼기까지 그를 양육하며 집에서 기다렸다가(23절, 현대인의 성경) 젖을 떼자[주로 구약 당시 유대인들은 젖을 떼는데 한 3년이 걸렸다고 함(주석)] 한나와 엘가나는 “어린아이”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갔습니다(24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그들은 빈손으로 가지 않고 제물로 3년 된 수소 한 마리와 밀가르 2.2리터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갔”습니다(24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빈손”이란 단어를 보니까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가 생각납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며느리 룻과 함께 다시 고향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그 곳 여자들에게 “내가 이곳을 떠날 때에는 가진 것이 많았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룻1:21,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습니다. 풍족했다가 빈손이 된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와 달리 한나는 슬픈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께 심정을 쏟는 서원기도를 드린 후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아 그 서원을 지키고자 젖을 뗀 어린아이 사무엘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으로 가면서 빈손으로 가지 않은 것입니다(삼상1:24,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한나는 그녀의 남편인 엘가나와 수소를 잡아 아들 사무엘을 데리고 엘리 제사장에 가서 그에게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곂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고 말했습니다(25-26절). 마음이 슬픈 여자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던 여자였습니다.
셋째로, 한나란 여인은 주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여자였습니다.
성경 사무엘상 2장 1절을 보십시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성전)에 올라가(1:24, 현대인의 성경) 자기가 서원한대로(11절) 평생 하나님께 받치고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의 첫 부분입니다. 이 기도 내용을 보면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들이 없었을 때처럼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통곡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1:10). 또한 그녀는 사무엘이 없었을 때 브닌나가 자기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기를 몹시 괴롭히고 업신여기며 자기를 더욱 비웃고 조롱하며 학대하므로 음식도 먹지 않고 울면서(6-7절, 현대인의 성경) 슬픈 마음으로 많은 자신의 원통함과 격분됨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쏟아내는 기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15절). 오히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아(27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27절, 비교: 17절) 아들 사무엘로 인하여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2:1, 현대인의 성경). 즉, 이 한나의 기도는 주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한 마디로, 한나는 사무엘로 인하여 기뻐한 것보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한 것입니다(1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하나님은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렘31:13). 우리가 마음이 괴롭고 슬퍼서 하나님께 우리의 괴롭고 슬픈 마음을 쏟아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시되 우리를 그 괴롭고 슬픈 상황에서 건져주시사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근심 대신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괴롭고 슬픔 속에서 자신의 괴로움과 원통함과 격분함을 쏟아 하나님께 간구한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사 그녀의 마음의 슬픔을 돌이켜 기쁨으로 채우셨습니다(삼상 2:1, 현대인의 성경). 저는 하나님께서 한나의 슬픔을 돌이켜 그녀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한나와 같이 슬픔 마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 아버지께 쏟아내고 있는 자매님들의 간구를 하나님 때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들어주시사 그 자매님들의 슬픔을 돌이켜 기쁨이 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이번 주 목요일부터 룻기서에 나오는 나오미와 사무엘상 1-2장에 나오는 한나를 묵상하면서 주시는 깨달음이 결코 우연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매년마다 읽었던 말씀인데 이렇게 금년에는 그 두 여인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선포한 후 다시금 묵상 글을 적어 내려가면서 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란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슬픈 한나를 기쁘시게 하시는 하나님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목요일 새벽기도회 때부터 어제 금요일 새벽기도회 및 오늘 토요일 새벽기도회 때까지 삼일 연속 그 두 여인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그 두 여인의 하나님은 누구이신지를 알아갈 때에 귀한 은혜가 되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흉년이 들어 풍족한 가운데서 모압 땅으로 남편과 두 아들과 이주한 나오미(이름 뜻: “나의 즐거움”)는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그곳 여인들에게 자기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뜻: “쓰다”)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했지만 결국에 가서 하나님께서는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와 재혼하게 하시사 오벳을 낳으므로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에게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마음이 슬픈 한나의 서원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를 생각하시사 아들 사무엘을 주시므로 그녀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슬픈 여자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나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시사 그녀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했습니다. 동일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쓴 맛을 보고 있는 형제, 자매님들에게 즐거움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마음이 슬픈 형제, 자매들의 간구를 들어주시사 구원의 기쁨을 주시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괴롭고 슬픈 마음을 기도로 아버지 하나님께 쏟아내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맛보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9년 3월 30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새찬송가 539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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