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2)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잠언 27장 13절).
우리는 잠언을 묵상해 오면서 이미 잠언 기자가 보증에 대하여 말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잠언 6장 1-5절 말씀 중심으로 잠언 기자가 우리에게 이웃을 위하여 담보나 보증을 섰다가 우리가 그 이웃에 손에 빠졌을 때 스스로 구원하라(deliver yourself)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 이웃의 채무 이행 책임을 떠 맡게 되었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 구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어리석은 행동이란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진 상태을 알면서도 채무 불이행(defaults)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 스스로 그 빚을 갚는 책임을 약속하는 것, 즉 보증을 서는 것을 가리킵니다(MacArthur). 물론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 사랑함에 있어서 이웃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을 아예 금하고 있는 말씀은 아니지만(박윤선) 잠언 기자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혹여나 보증을 섰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보증을 선 여러분이 실제로 책임질 각오를 하지 못하였던지 또는 상대방 이웃에게 속아서 보증인이 되던지, 보증을 선 후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이행할 경제력 실력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이웃의 빚을 갚을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서 그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설 각오를 하고 보증을 선다면 그것은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의 빚츨 갚을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그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선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또 다른 예는 잠언 22장 26절 말씀입니다: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하였습니다: “너는 남의 빚 보증을 서지 말아라.” 이 얼마나 명백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성경은 남의 빚 보증을 서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경제적 실력 없이 남의 빚에 보증이 된다는 것도 그 빚진 자의 마음에 헛된 위로를 주는 것 뿐이며,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파산을 가져오기 쉽다.” 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파산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하게 이웃의 보증을 선다는 것, 그것은 헛된 위로를 주는 것 뿐입니다.
둘째로, 주님을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3절을 보십시오: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현대인의 성경) “낯선 사람의 보증을 서는 자에게는 그의 옷을 담보로 잡고 외국인의 보증을 서는 자에게는 그의 몸을 담보로 잡아라’]. 여기서 잠언 기자는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 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을 취하라”는 말씀이나 “볼모 잡을 지니라”는 말씀은 “남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가 마침내 쓴잔을 받아야 된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적어도 우리는 이미 남을 위하여 보증이 되었다가 쓴잔을 맛본 사람(들)을 통하여 교훈을 받아 남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누군가를 위하여 보증을 설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결코 우리는 남을 위하여 보증을 서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3절 말씀은 이미 잠언 기자가 잠언 20장 16절에서 한 말입니다. 두 구절을 보면 똑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보증 행위에 있을 수 있는 실수를 경고하고 있는데(박윤선) 그 실수란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외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므로 그 외인에게 아무 것도 돌려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서서는 아니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가족, 친척 식구라 할지라도 보증을 서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일까요? 그런 행위를 가리켜 박윤선 박사님은 “경제적 모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큰 경제적 모험입니까? 경제적으로 빛을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는 행위이던 보증을 서는 것이든 이러한 행위는 돈을 빌려줬던지 보증을 서 준 사람에게 큰 경제적 손실을 가지고 올 수 있기에 경제적 모험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말입니다: “사람들이(특별히 신자들이) 경제적 모험을 하면 실패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지나친 경제 모험이 일종의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험은 내일 일을 인간의 힘으로 주장할 듯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무시함이다(약4:13-17).”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부탁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1장 15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현대인의 성경) “남의 보증을 서는 사람은 쓰라린 고통을 당하여도 남의 보증 서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평안하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가 되야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대로 말한다면 우리는 남의 보증 서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증을 섰다가 손해를 당하여 쓰라린 고통을 받는 것을 마다할 수 있다면 남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 누가 뭐라하겠습니까. 그러나 제 생각엔 그렇게 당하는 손해나 고통은 그리 큰 의미가 없고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이웃이 보증을 서 달라고 간곡히 부탁까지 하는데 거절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보증 서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11:15하).
지혜롭게 “아니오”해야 할 때 분명하게 “아니오” 할 수 있는 자가 되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6년 11월 2일, 보증 서기를 싫어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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