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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Then one of those standing near drew his sword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 Mark 14:47, Today's Korean Version ) 1. Identifying the People Involved: The person who stood beside Jesus and drew the sword was Simon Peter .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was named Malchus .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The servant’s name was Malchus.” ( John 18:10 ) 2. Jesus' Response to Peter's Action: (a) Jesus said: “Permit even this.” ( Luke 22:51, KJV: “Suffer ye thus far”; RSV: “No more of this” ) The Greek words clarify this: “ἕως τούτου” (“heōs toutou”) = “up to this point” or “even this” “ἐᾶτε” (“eate”) = “allow it,” “let it be,” “leave it alone” Therefore, Jesus is essentially saying: “Let them do what they are doing. Do not resist any further.” “If ...

인생의 쓴 맛을 본 여인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

인생의 쓴 맛을 본 여인에게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룻기 1 13, 21).
 
 
            인생의 쓴 맛을 본 여인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 자라나면서 (특히 사춘기 때아버지에게 크고 깊은 상처를 입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 상처들로 인해 받은 아픔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상처와 고통에서 온전히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관계를 끊고 사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여인들은 그리도 사랑하는 남편과 원치않는 이별로 인해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인들은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큰 슬픔과 통곡 속에서 마음 아파하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 중에는 사랑하는 남편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으로 인해 극심한 괴로움과 아픔과 큰 슬픔 속에서 고통 중에 있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인생의 쓴 맛을 본 여인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룻기 1 13, 21절을 보면 참으로 인생의 쓴 맛을 본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이 나오미란 여인은 처음부터 인생의 쓴 맛을 본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처음엔 인생의 단 맛을 본 여인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그녀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 살 때에는(1남편도 있었고 두 아들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2그녀는 풍족한 삶을 살았었습니다(21).  한 마디로처음엔 나오미는 그녀의 이름의 뜻(“나의 즐거움”)대로 “희락”과 “즐거움” 있는 “행복”한 삶을 살았었습니다(다국어 성경).  그런데 그녀가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가서 살기 시작하면서(1-2더 이상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이주해서 살면서 남편 엘리멜렉이 먼저 죽고(3그 땅에서 산 지 10년쯤 되었을 때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마저 죽었기 때문입니다(4-5현대인의 성경).  그 뿐만 아니라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살면서 빈궁해 지기까지 했습니다(21).  유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을 때에는 남편도 있었고두 아들도 있었으면 풍족한 삶을 살았었는데 모압 땅으로 이주해서 살면서는 남편도 죽고두 아들도 죽었을 뿐만 아니라 빈손(21현대인의 성경)이 된 것입니다.  이제 나오미에게 모압 땅에서 남은 것은 두 며느리였습니다(5).  “그로부터 얼마 후에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축복하여 그 땅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게 모압 땅을 떠나” 다시 고향(1)인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6현대인의 성경).  그렇게 하는 도중에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7-8현대인의 성경).  그녀가 두 며느리인 오르바와 롯(4)에게 그리 권면한 이유는 나오미는 그 두 며느리가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길 원했기 때문입니다(9현대인의 성경).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그 두 며느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르바와 룻에게 다시금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면서 그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3).  나오미는 죽은 두 아들의 부인인 오르바와 룻으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파했습니다.  자기도 과부이지만 자기보다 젋은 두 며느리도 과부가 되었으니 나오미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두 며느리를 생각하니 “어떻게 남편 없이 살 수 있겠느냐” 생각할 때 나오미의 마음은 더욱 아팠던 것입니다(13현대인의 성경).  그랬을 때 오르바는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입을 맞춰 작별 인사를 하고 자기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14현대인의 성경).  오르바는 자기 백성과 신들에게 돌아간 것입니다(15).  그러나 룻은 계속 시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14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유다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굳게 결심했기 때문입니다(18).  왜 룻은 그리 결심한 것일까요?  과부에다가 모압 여인으로서 “알지 못하던”(2:11) 유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산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어떻게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함께 그녀의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룻기 1 16-17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저에게 억지로 어머니 곁을 떠나라고 강요하지 마시고 어머니와 함께 가게 해 주세요.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가고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에 저도 살겠습니다어머니의 백성이 저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묻힐 것입니다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 만일 제가 어머니 곁을 떠나면 여호와께서 저에게 무서운 벌을 내리시기 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시어머니의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시머니의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룻은 모압 땅에서 자기 남편인 말룐과 결혼했을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을텐데(4먈룐과 그의 시댁 식구들과 함께 10년 즘 살면서(4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어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16).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겠다고 굳게 결심한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어 두 사람이 함께 베들레헴까지 갔습니다(18-19).  그들이 다시금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온 성이 떠들썩하며 그 곳 여자들이 ‘정말 이 사람이 나오미냐?’라고 물었습니다(19현대인의 성경).  그 때 나오미는 그녀들에게 자기를 “나오미”(: “나의 즐거움”)라 부르지 말고 “마라”(: “쓰다”)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19-20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그녀는 더 이상 “나오미”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녀의 이름은 “나오미”였지만 그녀는 모압 땅에서 살면서 더 이상 전에 누렸던 희락이나 즐거움이나 행복을 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녀는 많은 “괴로운 시련”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겪고 있었던 많은 괴로운 시련으로 인한 괴로움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셨다고 믿었습니다(20, 21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벌하셨고” 자기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20, 21).  그래서 그녀는 그 베들레헴의 여자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말한 것입니다(20).  여기서 “마라”라는 단어의 의미는 “쓰다”입니다.   “마라”라는 단어가 또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바로 출애굽기 15 23절에 나옵니다.  성경 출애굽기 15 22-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3일을 여행하여 지치고 힘들어 잇을 때 물을 발견하였는데 아쉽게도 이 물은 소금기가 있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괴로움(쓴 맛)'을 뜻하는 '마라'라 이름 붙였습니다(다국어성경).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원망을 했고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나무를 물에 던져 넣었더니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24-25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쓴 맛”이란 뜻을 가진 “마라”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왜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 여인들에게 자기를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 주길 부탁했는지 좀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의 죽음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너무나 괴로웠고 또한 풍족한 삶에서 빈손이 되었기 너무나 괴로웠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인생의 괴로움을 맛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베들레헴의 그 여인들에게 자기를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말한 것입니다(20). 
 
            이렇게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에게 이젠 남은 것이라곤 며느리 룻 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나오미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녀는 남편도 없고두 아들도 없고 또한 풍족했던 물질도 없습니다.  그녀에게 있는 것은 딱 하나 며느리 룻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자기의 삶의 현실이 이렇게 된 이유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벌”하셔서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21).  그녀는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치셨기에(13남편도 죽고두 아들도 죽고 또한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 잃고 빈손이 되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3, 5, 21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나오미에게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녀는 “나의 즐거움”이란 의미를 가진 자기의 이름 “나오미”보다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마라”라고 그 베들레헴 여인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20).  그런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는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에게 남은 딱 한 사람 모압 여인 룻이란 며느리를 통해서 인생의 쓴 맛을 본 “마라”인 나오미에게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것일까요?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로 회복시켜 주신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으로 하여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보아스(2:1)에게 속한 밭으로 인도하시사[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룻이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른 것이 “우연히”(3)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는 우연이란 것기에보아스로 하여금 룻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시고(10-16, 20), 룻으로 하여금도 보아스에게 인애를 베풀게 하시사(3:10) 결국에 가서는 룻이 “현숙한 여자인 줄을” 아는(11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로 하여금(12)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시사(4:10, 13) 룻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13오벳(22)이란 아들을 낳게 하시사(13오벳으로 하여금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가 되게하셨습니다(15).  한 마디로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쓴 맛을 본 “마라”에게 그녀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15)인 모압 여인 룻에게 임신케 하시고 아들 오벳[다윗의 할아버지(22)]을 낳게하시므로 나오미에게 즐거움을 주신 것입니다.  결국에 가서 하나님께서는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낳게하시사(22) “다윗의 혈통에서”(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와 룻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렸습니다(1:5).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주위엔 인생의 쓴 맛을 본 여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에서도 인생의 쓴 맛을 보고 있는 “마라”와 같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과거에만 인생의 쓴 맛을 본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인생의 쓴 맛으로 인해 괴로움 가운데 있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풍족한 삶을 살다가 빈손이 되어서 괴로워하는 여인들도 있겠지만 이 땅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극심한 슬픔과 괴로움 가운데 있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거기에데가 사랑하는 자녀까지 떠나보낸 여인들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를 생각할 때 제 고등학교 친구의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그 친구의 어머님은 남편을 일찍이 떠나보내시고 혼자가 되셨는데 두 아들인 제 친구와 그의 동생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나오미처럼 제 친구의 어머님도 남편과 두 아들이 이 세상을 먼저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때 친구와 그의 동생이 죽었을 때 그들의 어머님에게 남았던 식구는 둘째 아드님의 부인하고 그 부부의 아기였습니다.  그 때에 제 친구의 어머님에게 남은 식구란 며느리와 손주 밖에 없었습니다.  벌써 약 30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저는 아직도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이야기를 묵상하면 그 친구의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님처럼 우리 주위엔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여인들이 더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모님이나 형제자매까지도 죽으므로 말미암아 극심한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여인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정도로 극심한 괴로움 속에 있다면 하나님께 부르짖다가도 더 이상 기도가 나오지 않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제 첫째 아기가 제 품 안에서 죽기 전까지 어린이 병원 중환자실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 때 저는 기도가 나오지 않았음).  그러한 때에 과연 그 여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그 여인들은 마음의 괴로움을 좀 덜 수가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그들의 “마라”(“쓰다”) “나오미”(“나의 즐거움”)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 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의 쓴 맛을 본 그 여인들에게 즐거움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리하실 수 있으십니까?  바로 “한 나무”(15:25)인 저주의 나무(21:23; 3:13)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쓴 맛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는 여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사( 51:12) 그들의 “마라”에서 “나오미”로 바꿔주십니다(참고 50:20).
 
 
 
인생의 쓴 맛을 단 맛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9 3 28사랑하는 주영이가 죽은 후 세 자녀인 딜런예리예은이를 사랑의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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