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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Then one of those standing near drew his sword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 Mark 14:47, Today's Korean Version ) 1. Identifying the People Involved: The person who stood beside Jesus and drew the sword was Simon Peter .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was named Malchus .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The servant’s name was Malchus.” ( John 18:10 ) 2. Jesus' Response to Peter's Action: (a) Jesus said: “Permit even this.” ( Luke 22:51, KJV: “Suffer ye thus far”; RSV: “No more of this” ) The Greek words clarify this: “ἕως τούτου” (“heōs toutou”) = “up to this point” or “even this” “ἐᾶτε” (“eate”) = “allow it,” “let it be,” “leave it alone” Therefore, Jesus is essentially saying: “Let them do what they are doing. Do not resist any further.” “If ...

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

 


[사도행전 10장 34-48절 말씀 묵상]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 속에 어떠한 사람들을 환영하십니까?  고 헨리 나우웬이란 신부님은 그의 삶 속에 환영한 사람을 한 사람 말하라고 한다면 아담 아네트(Adam Arnett)라는 한 중증 장애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나우웬은 70년에는 예일대에서 신학적 심리학을 가르쳤던, 80년대에는 하버드에서의 파트타임 강의와 남미 선교를 병행하였다가, 90년에 들어서서 그의 마지막 인생 한 10년간은 캐나다의 라르쉬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서 장애인들을 돌보면 살았었는데 그 장애인들 중에 아담이란 장애인을 나우웬의 그의 삶과 마음에 특별히 환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담이 1996 2월에 34 년의 생을 마감한 후헨리 나우웬도 “아담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라는 책을 쓰고 난 직후인 같은 해 9 마치 자신도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 아담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헨리 나우웬을 아끼던 많은 친구들은 나우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헨리자네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데가 여기인가?”, “아담에게 자네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던 대학을 떠났단 말인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도움더 체계적인 인도함더 큰 섬김의 기회들을 마다하고 이런 곳에 와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아담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았고 또한 자신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 “아담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란 책에서 아담의 시간을 본 경험을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관에 누워있는 아담의 시신을 본 순간부터그의 삶과 죽음의 신비에 사로 잡혔다.  그때 섬광처럼 내 가슴에 와닿은 사실은바로 이 장애인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독특한 사명을 띄고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그리고 이제 그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었다...”.  헨리 나우웬은 아담이란 장애인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자로곧 철저한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자로 환영했”습니다.  그랬을 때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을 나우웬은 이렇게 그의 책에서 썼습니다: “그때부터 아담은 특별하고경이롭고타고난 재능이 있는 약속의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의 경이로운 존재 자체와 믿어지지 않는 가치는 우리에게우리도 그처럼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입었으며 사랑받는 자녀임 … 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줄 것이다...”. 

 

이 얼나마 놀라운 영성입니까?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 삶 속에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영하시는 우리 또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들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얼마나 귀히 여겨주시며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알아갈 때에 우리 삶 속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사도행전 10 34-48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이란 제목아래 과연 사도 베드로가 깨달은 하나님께서 환영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이 되야 할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35절을 보십시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도행전 1030-33절에 나오는 고넬료의 말을 들은 후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34), 유대인이던 이방인이던 인종을 떠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받으시는 줄 깨닫게 되었습니다(35).  참으로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의를 행하는 자였습니다.  이미 우리가 묵상한 사도행전 102절 말씀을 보면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고 사도행전의 저자 의사 누가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경건함은 가정에서도 모범이 되어서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본이 된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행전1022절을 보면 고넬료의 심부름으로 욥바에 있었던 베드로에게 보냄을 받은 고넬료의 두 종들과 경건한 군인은 베드로를 만나 자기들의 주인인 고넬료에 대해서 22절에서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  고넬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습니다(2).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경외심으로 표현이 되었다면 더 구체적인 사랑 표현은 이웃을 향하여 구제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를 행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옳은 일입니다.

 

            성경 시편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지 한 일곱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축복은 이렇습니다: (1) 첫째로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를 살피십니다.  시편 33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2) 둘째로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시편10313절을 보십시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3) 셋째로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시편103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4) 넷째로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십니다.  시편11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 억하시리로다”.  (5) 다섯째로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편11513절을 보십시오: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6) 여섯째로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의 간구를 들어주십시니다.  시편14519절을 보십시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7) 일곱째로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시편14711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우리도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옳은 일을행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둘째로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은 화평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42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도 환영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 그는 고넬료 집에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36절부터 43절까지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평안의 좋은 소식이였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36절에서 “화평의 복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복음이란 뜻입니다(박윤선).  그 화평의 복음을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 집에 모인 모든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면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37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결말을 맺었습니다(39-40).  그의 설교 내용 중 나사렛 예수님께서 베푸신 선행과 치유는 사람들을 사탄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의 사건이였습니다.  이와 같은 능력있는 구원 역사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베드로는 38절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유상섭).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역(갈릴리 지역을 포함한)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셨고 이 일에 사도 베드로는 자신과 다른 사도들이 증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39).  그리고 베드로는 설교 내용의 핵심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오늘 본문 39-4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에게 화평의 복음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42 –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  그리할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4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화평의 복음입니다.  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환영하십니다.  그러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어떻게 그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까?  첫째로사도 베드로처럼 그 화평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전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을 열어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실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우리의 입을 열어 전파해야 합니다.  둘째로화평의 복음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화평의 복음적 삶이란 화목케 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518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직책이란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첫째로는 이미 묵상한 바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화목케 하는 복음 전파 사역을 가리킵니다.  둘째로는 이웃과 이웃간의 화목케 하는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 두번째 화목케 하는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로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에베소서 2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 힌 담을 허시고”.

 

우리는 우리의 입술과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9절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지막 셋째로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46절을 보십시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 베드로는 화평의 복음을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었을 때에 오늘 본문 44절을 보면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습니다.  그 때에 사도 베드로나 그와 함께 욥바에서 온 유대인들은 놀랬습니다(45).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심을 보고 사도 베드로와 그의 일행은 유대인 신자들은 놀랬습니다.  그럼 사도 베드로와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모든 이방인들 에게 성령 부어 주심을 어떻게 알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4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두 가지 “방언”과 “하나님 높임”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고넬료와 함께 모인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높였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방언으로 말하는 사건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은 사도행전 211절 에서 120문도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타나난 현상과 유사합니다(유상섭):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성령강림하심을 목격한 사도 베드로는 그와 함께 온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집에 함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과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여 결국은 고넬료와 그와 함께 한 이방인 모두 다 세례를 받아 이젠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믿는 이방인들도 믿은 유대인 신자들과 동일하게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서게된 것입니다(유상섭).

 

            성령을 받은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였던 모든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그들은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그를 높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국어로 찬양하던 영어로 하던 Espanol로 하던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찬양하므로 그를 높일 때에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합니다.  또한 그들은 화평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높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환영하시는 사람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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