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1편 1-3절).
인생이란 태어나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다가 노인이 되어서는 자녀나 심지어 양로원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을 받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에는 누구간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 사이의 기간은 어떠합니까? 그 기간에는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자 하기보다 우리 스스로 홀로서려고하는 기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기간에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역경와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면 누군가의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긴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그 큰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굴까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너무나 힘들고 극심한 고통에 있을 때에서야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곤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큰 역경과 어려움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로서 서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주므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는 우리가 큰 역경과 어려움을 당할 때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즉, 어떠한 큰 역경과 어려움은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을 정도로의 극심한 큰 위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위기를 우리가 만나게 되면 우리는 낙망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절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도움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큰 위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갈망하게 하시며 그러므로 주님을 소망케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큰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을 소망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큰 구원의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저는 여태까지 살면서 제가 경험한 큰 위기는 바로 첫째 아기 주영이의 죽음이었습니다. 약 2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 장면들 중에 하나는 바로 약 23년 어느 한 주일 오후에 주영이가 누워있는 어린이 병원 중환자실에서 담당 의사 선생님과의 대화입니다. 그 주일 점심 때 여동생이 병원에 갔다 교회로 돌아와서는 저와 제 아내에게 주영이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 때 아내는 곧 바로 병원으로 갔고, 저는 교회 사역을 다 마치고 오후에 병원으로 갔습니다. 손을 씻고 가운을 입고 병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주영이의 담당 의사 선생님에게 저에게 아기의 상황을 알려주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 자신과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내용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아기를 빨리 죽게할 것인지, 천천히 죽게 할 것인지 알려달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사 선생님에게 (제) 아기를 천천히 죽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병실로 들어갔는데 사랑하는 아내가 아기가 누워있는 곳에서 좀 떨어져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아내의 그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놀랍게도 그 때의 아내의 모습은 결혼식 예배 때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아내의 모습 보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 날 저는 아내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의사 선생님과 나눴던 그 대화 내용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에 저는 성경을 읽다가 시편 63편 3절 말씀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주영이의 55일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님을 찬양할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주영이를 빨리 죽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시편 63편 3절 말씀 중심으로 제 마음을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의 마음에도 역사하셔서 저희 부부는 아기를 빨리 죽게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아내는 의사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우리의 결정을 알렸고 저는 부모님과 식구에게 알려서 중환자실에 모여 아버님 목사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영이를 안아보았는데 그 때 아기는 제 품에서 고이 잠들었습니다. 그 죽은 아기를 화장한 후 뼛가루를 뿌리고 돌아오면서 작은 배 앞에 앉아 있었던 아내가 갑자기 뒤에서 배를 조종하고 있었던 저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타이타닉”이라고 말했는데 그 때 아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창공을 바라보면서 영어 복음성가가 터져나왔습니다. 그 영어 복음성가의 가사 내용은 주님의 구원의 사랑이 얼마나 굉장하고 놀라운지를 찬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지나고서야 저는 그 때 그렇게 찬양하게 된 것이 바로 시편 63편 3절 말씀의 성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제 인생의 큰 위기를 통해 주님의 구원의 사랑이 얼마나 굉장하고 놀라운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은혜는 이렇게 나누고 또 나눌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제 인생에 경험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1편 1-3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저는 이 말씀을 다시금 묵상할 때 세 가지로 간략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성경 시편 121편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현대인의 성경)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 시편 기자는 자신의 눈을 “산”들”을 향했습니다. 여기서 “산들”이란 산 같이 큰 세상 세력을 의미합니다(죤 칼빈, 박윤선).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는 눈을 들어 큰 세상 세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모든 환난”[“모든 위험”(현대인의 성경)](7절) 가운데서 그 큰 세상 세력에게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시편 기자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역경이나 위험가운데 있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눈을 들어 이 세상의 큰 세력을 바라봅니다. 우리들 중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또는 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들 중에는 영력을 가진 목사님들이나 신앙 선배님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좀 뼈저리게 깊이 깨달아 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어느 누구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지어 여러 가지의 여러 번 큰 어려움과 큰 역경을 통해서라도 철저히 우리 자신의 무력함(helplessness)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인지를 겸손히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력함 속에서 여기 저기 사람들에 도움을 구하는 가운데서 그 사람들에 낙심뿐만 아니라 심지어 절망까지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세상의 큰 세력에게 도움을 얻어 보려고 하다가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 외에 우리가 도움을 구하는 이 세상의 모든 세력이나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해서라도 우리의 도움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깊이 깨달아 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 때에서야 우리의 도움이 우리가 바라보던 “산”들이 아니라 그 “산”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로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시편 121편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현대인의 성경) “나의 도움이 천지를 만드신 여호와에게서 오는구나”]. 시편 기자는 “모든 환난”[“모든 위험”(현대인의 성경)](7절) 가운데서 도움을 받고자 자신의 눈을 들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산”들(1절)을 바라보았습니다. 즉, 그는 이 큰 세상 세력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 결과 시편 기자는 자기의 도움이 피조물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기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구원자시요 도움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박윤선). 그래서 그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2절).
우리는 하나님 외에 우리가 도움을 구하는 이 세상의 모든 세력이나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해서라도 우리의 도움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깊이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큰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라도 오히려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심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도움의 손길을 막으셔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2절)라는 진리를 마음 판에 깊이 새겨주시길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시편 기자나 히브리서 기자처럼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도우시니(He is my helper) 내 원수들이 패하는 것을 내가 보리라”(시118:7,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The Lord is my helper)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히13:6, 개역한글).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사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임을 알고 주님 안에서 행복감을 누려야 합니다. 성경 신명기 33장 2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He is your shield and helper)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시편 121편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현대인의 성경) “그가 너를 넘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니 …”](“He will not allow your foot to slip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로 하여금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박윤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는 시편 기자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게 하십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입니까? 우리는 이사야53장6절 말씀처럼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려고 할 때가 많은 연약한 자들인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해주시고 계시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은혜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좇는 제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에서 탈선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를 시편 73편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그 성경 구절이 생각난 이유는 시편 121편 3절 상반절을 영어로 보면 “He will not allow your foot to slip”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시편 73편 2절도 영어로 보면 “my foot had almost slipped”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편 121편 3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걸음을 미끄러지지 않게 하신다고 말했는데 시편 73편 2절에서도 시편 기자 아삽은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말했기 때문에 저는 우리가 진리에서 탈선하는 이유 중 하나를 시편 73편에서 찾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의인은 고난을 받고 있기에 왜 악인은 형통하고 있느냐’는 것 때문입니다. 좀 더 달리 말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에서 탈선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의인이 받는 고난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성경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 아삽이 거의 실족할 뻔 하였던 이유는 ‘의인의 고난 그러나 악인의 형통’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의인이 받는 고난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탈선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시편 73편 3-7, 12-14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이렇게 시편 기자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교만한 악인들을 질투하여 거의 미끄러질 뻔했습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의인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악인들은 “일평생 아무런 고통도 없이 건강하게 지내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일도 없”고 “언제나 편안한 생활을 하고 그들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가는 것을 보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허사구나”라고 생각안하겠습니까?(4-5, 12-13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의인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악인들은 형통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걸음이 충분히 미끄러 질 수가 있으면, 우리는 충분히 진리에서 탈선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인이 받는 고난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탈선하게 만들 수 있을 때 우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가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 대답을 빌립보서1장29절에서 찾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 그 은혜를 감사하므로 받고 누릴 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임을 알게 해주셔서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게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새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1절과 3절 가사가 생각나서 하나님께 오늘 새벽기도회 때에도 찬양을 드렸습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 주소서”(1절),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아 주소서”(3절). 저는 이 찬양을 부를 수밖에 없었을 때 특히 1절과 3절 가사에 많이 공감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저의 기도로 삼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곤 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하여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나아가 찬양으로도 간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고 또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의지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그 도움들조차도 막으시고 차단하시사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임을 가르쳐 주셨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하시시라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게 하시되 저의 걸음이 거의 미끄러질 뻔 한 상황에서도 붙잡아 주시고 또한 건져주시사 오늘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 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특히 인간적으로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사랑하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부부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기도 응답을 받을 때까지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함께 구하십시다.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21년 5월 22일,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 주소서”(새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1절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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