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제자도의 핵심은 "내 인생의 모든 주권(인간관계, 목숨, 소유)을 예수 그리스도께 전면 이양하는 ‘철저한 대가 지불’과 ‘조건 없는 항복’"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25-33).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4장
25-33절 말씀을 묵상할 때 어제 묵상한 누가복음
14장
15-24절 말씀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긍금해졌습니다.
(a)
“누가복음
14장 15-24절(큰 잔치 비유)과 14장 25-33절(제자도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응하는 올바른 태도와 그에 따르는 대가 지불'이라는 핵심 주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자가 초청을 거부하는 자들의 핑계를 보여준다면,
후자는 그 초청에 참되게 응하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두 본문의 문맥적,
신학적 연결성은 다음과 같이
3가지 핵심 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일상의 우선순위 문제
(거절의 핑계
vs 제자의 조건)
두 본문은 모두
'세상 소유와 관계'를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문제를 다룹니다.
눅 14:15-24
(잔치 비유):
초청받은 자들이 잔치를 거절한 이유는 밭(재산), 소(직업·사업), 장가(가족)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들은 악한 일이 아닌 평범한 일상이지만,
하나님 나라보다 우선순위에 놓였을 때 초청을 거절하는 결정적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눅 14:25-33
(제자도): 예수님은 곧바로 이 세 가지 요소를 다시 언급하시며 제자의 조건을 선언하십니다.
부모와 처자(가족, 26절)를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목숨, 27절)를 지며,
자기의 모든 소유(재산, 33절)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연결성: 앞의 비유에서 일상(밭, 소, 가족)을 핑계로 잔치를 거부했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뒤의 평지 설교처럼 가족과 소유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우선순위의 재정립'이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2.
'값비싼 은혜'에 대한 대가 계산
(망대와 전쟁 비유)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거저 주어지는 은혜이지만,
그 초청에 머무는 삶에는 철저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눅
14:28-32: 예수님은 망대를 세우는 사람과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비유를 드십니다.
두 비유의 핵심은 시작하기 전에
'비용과 대가를 미리 계산해보라'는 것입니다.
연결성: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지만,
단순히 수많은 무리처럼 감정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25절)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잔치에 끝까지 남아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결단해야 함을 경고합니다.
3.
'무리'에서 '참된 제자'로의 전환이 두 본문 사이에는 청중과 분위기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연결성: 24절까지는 바리새인의 집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기득권층을 향해 잔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25절에서 수많은 무리가 동행하자,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들을 향해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잔치)을 받았다고 해서 안심하는 무리가 되지 말고,
대가를 지불하는 참된 제자가 되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요약하자면
앞 단락(15-24절)이 세상 염려와 소유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거절하는 인간의 실상을 폭로했다면,
뒤 단락(25-33절)은 그 초청에 합당하게 응답하여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 소유와 목숨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실제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구조적 연결성을 가집니다”(인터넷).
(2)
저는 이 구조적 연결성을 묵상할 때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합당하게 응답하여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 세 가지 행해야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a)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부모와 처자와 목숨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26절).
(i)
누가복음
14장 26절 말씀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현대인의 성경)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μισεῖ”(미세이)는 “μισέω”(미세오)의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서 현대적 의미의 감정적인 증오나 적대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적 관용구와 성경적 문맥 안에서
"예수님을 가장 최우선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대상을
'덜 사랑하다',
또는 '우선순위에서 아래에 두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단어의 핵심 의미와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히브리적 비교 표현
(덜 사랑하다)
헬라어 “μισέω”(미세오)(미워하다)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사네(שָׂנֵא)'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고대 셈어(히브리어·아람어)에는 "A를 B보다 더 사랑한다"는 정교한 비교급 표현이 부족했기 때문에,
"A는 사랑하고
B는 미워한다"는 이분법적 대조를 통해 우선순위를 강조했습니다.
성경적 증거:
창세기 29장 30-31절을 보면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다"고 기록하면서,
바로 뒷 구절에는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직역: 미움받음, 사네)"을 보셨다고 표현합니다.
즉,
성경에서 미워한다는 표현은 감정적 증오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사랑함'을 뜻합니다.
평행 본문:
이 의미는 마태복음
10장 37절을 통해 명확히 증명됩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에서 이를 누가가 기록한 거친 직설적 표현 대신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라고 알기 쉽게 풀어썼습니다.
2.
절대적인 우선순위
(Disregard / Prioritize)
“μισέω”(미세오)(미워하다)는 무언가를
'소홀히 여기다',
'우선순위에서 제외하다',
'거절하다'라는 행동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주님의 부르심과 충돌할 때,
가족의 요구나 자신의 안전(목숨)을 과감하게 뒤로 미룰 수 있는 단호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μισέω”(미세오)] 저를 사랑하거나"라고 하신 말씀 역시 두 대상을 동시에 최고 자리에 둘 수 없음을 말하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3.
문학적 수사
(과장법)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강력하고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의도적인 과장법(Hyperbole)을 사용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가족을 증오하라고 명령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만큼 제자도가 요구하는 대가가 철저하며,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헌신"이라는 사실을 충격적인 단어를 통해 각인시키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누가복음 14장 26절의 “μισεῖ”(미세이)(미워하다)는 감정적인 미움을 품으라는 독소 조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대체 불가능한
'최우선 순위'에 두고,
그 어떤 소중한 인간관계나 자기 목숨조차도 주님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제자도의 강력한 선언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가족을 미워하는 것’이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청중들이 느꼈을 실제적인 의미와 사회적 충격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고대 근동과 유대 사회에서
'가족(가문)'은 단순히 정서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한 인간의 생존,
신분, 경제, 종교의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가족을 주님보다 뒤로 둔다는 것은 삶의 모든 기반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생존과 경제적 기반의 상실:
당시에는 국가의 사회보장제도가 없었습니다.
가문에서 쫓겨나거나 가족과 결별한다는 것은 경제적 파산,
상속권 박탈,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에서 완전히 배제됨을 의미했습니다.
사실상 부랑자나 거지가 되는 길을 자처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적·율법적 가치관과의 충돌:
유대인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핵심 제5계명이었습니다. 부모와 처자를 미워하듯 뒤로 미루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의 눈에는 ‘율법을 파괴하는 불효자의 선동’으로 보일 만큼 반사회적이고 충격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정체성의 전면 재수정:
고대 사회에서 개인은 ‘누구의 아들,
어느 가문의 누구’로 정의되었습니다.
가족을 내려놓으라는 것은 기존의 가문 중심적 정체성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교회)'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입으라는 혁명적인 요구였습니다.”
·
여기서 자기의 ‘묵숨[“ψυχή”(프시케)]을 미워하는 것’(26절)이란 단순히
"죽기를 원한다"는 자학이나 자살 충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미워하다[“μισέω”(미세오)]의 성경적 정의(덜 사랑하다,
우선순위를 뒤로 두다)를 대입하면,
이 구절은
"나의 생존,
안전, 자아실현을 예수님보다 앞세우지 않고,
주님을 위해 언제든 그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
3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a.
자아(Self)와 생존 본능의 통제
성경에서 “목숨”은 육체적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아,
욕망, 편안함, 생존 본능을 모두 포함합니다.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내 삶의 주도권을
'나의 생존과 안위'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까?"라는 본능적인 질문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따를까?"라는 질문을 내 삶의 절대적인 기준선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b.
순교적 각오와 단호함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따르는 것은 로마 제국과 유대 사회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은 복음과 진리를 위해서라면 실제의 육체적 생명(Life)까지도 기꺼이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단호한 태도를 말합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목숨을 건지느니,
주님을 따르고 목숨을 잃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순교적 영성'입니다.
c.
평행 본문과의 연결
(역설의 진리)
이 말씀의 의미는 누가복음
9장 24절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내 목숨을 우상으로 삼아 쥐고 흔들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지만,
내 목숨의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내려놓을 때(미워할 때)
오히려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역설적 진리입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우상인
'나 자신(Self)'을 보좌에서 내려놓고,
나의 생사화복과 안전의 전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이양하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b)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을 지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i)
누가복음
14장 27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청중들이 느꼈을 실제적인 의미와 사회적 충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삶의 작은 고난,
질병, 혹은 참아야 하는 성격적인 문제 등으로 영해(spiritualize)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청중들에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지극히 시각적이고 끔찍한 실제 현실이었습니다.
정치적 반역자의 처형 방식:
로마 제국은 반역죄를 지은 자들에게만 십자가형을 집행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는 로마 제국에 처형당하는 반역자입니다’라는 사실을 온 동네에 공개하는 수치스러운 행위였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
사형수는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의 가로대(Patibulum)를 메고 처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삶,
법적 권리,
미래가 완전히 끝났음(죽음)을 선언하는 편도 티켓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 ‘나를 따르려면 영웅적인 대접을 받을 생각은 버려라.
세상의 눈에는 반역자처럼 수치를 당하고,
완전히 죽을 각오(순교적 결단)를 한 자들만 내 뒤를 따를 수 있다’는 가장 극단적인 헌신의 촉구였습니다”(인터넷).
-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서 ‘지라’는 헬라어 “βαστάζει”(바스타제이)란 단어는 원형 “βαστάζω”(바스타조)의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 형태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물건을 잠깐 들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엄청난 무게와 고통을 동반한 짐을 짊어지고 끝까지 견뎌내며 이동하는 연속적인 행위"를 뜻합니다.
당시 문화와 문법적 맥락에서 이 단어가 가지는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지속적이고 습관적인 태도
(현재 시제의 의미)
헬라어 문법에서 현재 시제(Present
Tense)는 일회성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즉, “βαστάζει”(바스타제이)(지라)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 결단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따르기 위한 대가와 수치를 지속적으로 짊어지고 나아가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의미합니다.
(b)
무거운 짐을 자발적으로 감당함
(To Bear / Carry)
“βαστάζω”(바스타조)(지다)는 주로
'매우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다',
'고통스러운 짐을 감당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는 날씨의 더위와 수고를 견디거나(마 20:12), 타인의 약점을 담당하는(롬 15:1) 맥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형수는 처형장까지 타인에 의해 강제로 십자가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깨 위에 온전한 무게를 자발적으로 짊어지고(Bear)
걸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삶이 이와 같이 무겁고 고통스러운 대가를 자발적으로 짊어지는 삶임을 이 단어로 묘사하셨습니다.
(c)
공적인 수치와 정체성의 노출
(To Display)
고대 문헌에서 “βαστάζω”(바스타조)(지다)는 무언가를
'몸에 지니고 다님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널리 알리거나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바울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βαστάζω”(바스타조)] 있노라"고 할 때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거리를 걷는 행위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와 수치를 공개하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βαστάζει”(바스타제이)(지라)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조롱과 수치,
불이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공적으로 당당히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누가복음 14장 27절의 “βαστάζει”(바스타제이)(“지고”)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구체적인 희생과 고난을 단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짊어지고 끝까지 인내하며 걸어가는 제자의 연속적인 삶의 태도를 선언하는 단어입니다.
n
그런데 실제로 현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구체적인 희생과 고난을 단 한 번의 이벤트로 끝내는 것 같아 보이는 교회의 행사 또는 기독교 단체들의 행사에 헌신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제자도는 매일 삶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짊어지는 십자가('바스타제이')인 반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일회성 이벤트나 감정적 충전에 머무는
'단발성 헌신'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와 성경적 제자도와의 괴리를
3가지 측면으로 짚어볼 수 있습니다.
1.
'단기 선교·수련회' 신드롬과 이벤트성 헌신
현상: 많은 청년과 교인들이 단기 선교,
대형 집회,
특별 기도회 등의
'기획된 프로그램'
안에서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헌신을 결단합니다.
괴리: 이러한 행사는 영적 자극을 주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 열정은 빠르게 식어버립니다.
일주일간의 해외 선교 현장에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질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매일 출근하는 직장이나 학교,
혹은 가정이라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자아를 죽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쉽게 실패합니다.
2.
비용 계산(Cost-Counting)이 없는 값싼 제자도
현상: 현대의 많은 기교적 행사들은 참가자들에게
'위로와 격려,
성공과 축복'을 주로 약속합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소유와 목숨을 내려놓으라’는 거친 비용 계산(눅
14:28-32)을 요구하면 사람들이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괴리: 비용 계산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한 헌신은 망대를 짓다가 기초만 쌓고 중단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건축가(눅
14:29-30)의 모습과 같습니다.
대가 지불에 대한 냉철한 각오 없이 감정적 감동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눅 14:25)'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
소비주의적 영성과
'무리'의 영성
현상: 현대 교회 문화는 종종 신앙을
'소비'하게 만듭니다.
좋은 시설,
훌륭한 찬양 팀,
감동적인 설교가 있는 집회를 찾아다니며
'영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을 제자의 삶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괴리: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무리(25절)'를 보시고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돌아서서 그들에게 가장 찬물을 끼얹는 듯한 제자의 조건(26-27절)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벤트에 참여하는 관객(Consumer)에 머물지 말고,
삶을 관통하는 제자(Follower)가 되라는 촉구였습니다.
결론을 맺으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를
'진다(바스타제이)'는 표현의 현재 시제는 ‘집회의 불이 꺼지고 일상이라는 무대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진짜 제자도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일의 예배나 특별한 행사는 일상의 거친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지고 걸어갈 힘을 공급받는
'충전소'여야지, 그 자체가 제자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인터넷).
(c)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자기의 모든 소유(재산)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33절).
(i)
누가복음
14장 33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여기서 ‘버리다’라는 헬라어 동사 “ἀποτάσσεται”(아포타세타이)는 원형 “ἀποτάσσω”(아포타소)의 3인칭 단수 현재 중간태 직설법 형태로서 단순히 물건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고대 문맥에서
"결연한 관계 단절,
작별 인사,
또는 소유권의 완전한 포기"를 뜻하는 매우 무겁고 공식적인 법적·관계적 단어입니다.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전면적인 관계의 단절과 작별
(To Say Goodbye)
“ἀποτάσσω”(아포타소)(버리다)의 본래 가장 흔한 쓰임새는
"작별 인사를 고하다",
"떠나보내다"입니다. 신약성경 다른 본문에서도 작별하는 맥락에서 자주 쓰였습니다:
누가복음 9장 61절:
"내 가족과 작별하게(아포타소) 허락하소서"
사도행전 18장 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아포타소)"
따라서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내 재산과 물질을 향해
"이제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공식적인 작별 고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물질이 더 이상 내 삶을 지배하거나 명령하지 못하도록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입니다.
2.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포기
(중간태의 문법적 의미)
이 단어는 중간태(Middle
Voice)로 쓰였습니다.
헬라어에서 중간태는
"행동의 주체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 스스로 그 행동을 내면화하여 행함"을 뜻합니다.
즉, 외부의 강요나 율법적인 의무 때문에 억지로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스스로 결단하여 자발적으로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과 권리를 내려놓는 주체적인 포기를 의미합니다.
3.
소유권의 이전
(From Owner to Steward)
예수님은 모든 제자가 전 재산을 다 팔아 거지가 되어야만 제자가 된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의 핵심은
'소유권의 완전한 이전'에 있습니다.
"내 물질,
내 시간,
내 재능,
내 생명은 내 것"이라는 착각과 작별(아포타소)하고, "이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나는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의 전적인 태도 변화를 뜻합니다.
결론과 전체 맥락의 완성
누가복음 14장의 제자도 설교는 결국 다음과 같은 원어적 동사의 흐름으로 완성됩니다.
미세이(μισεῖ, 26절): 세상의 인간관계나 자아를 주님보다
'덜 사랑하기로'
마음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바스타제이(βαστάζει,
27절): 그로 인해 오는 삶의 무게와 수치를 매일
'지속적으로 짊어지며',
아포타세타이(ἀποτάσσεται, 33절): 내 모든 소유권에 대해 스스로
'자발적인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결단(우선순위, 인내, 포기)이 실제 삶에서 작동하지 않는 신앙을
'맛을 잃어버린 소금(34-35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행사나 이벤트 속에서는 소금처럼 보이지만,
실제 소유와 목숨이 걸린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맛을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소유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한 인간의 안전,
신분, 생존을 보장하는
'신(Mammon)'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소유와 작별하는 제자의 삶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실천될 수 있습니다.
1.
'소유'를 통한 신분 상승 욕구와의 작별
(자발적 불편과 절제)
현대인은 내가 무엇을 소유했는가(어떤 차,
어떤 아파트,
어떤 브랜드)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합니다.
실천: 제자는 소유를 통해 나를 과시하려는 세상의 방식과 작별해야 합니다.
더 큰 집,
더 좋은 차로 갈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더라도,
주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발적으로 상한선을 두고 절제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을 거부하는 것이 소유와의 가장 첫 번째 작별입니다.
2.
가계부의 주권 이전
(정기적이고 희생적인 나눔)
입술로는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고백하지만,
돈을 쓰는 목적과 방향이 오직 나와 내 가족의 안위만을 향해 있다면 그것은 소유권이 여전히 나에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실천: 내 소유에 대해 공식적인 작별(아포타세타이)을 고한 청지기는 물질의 사용처를 바꿉니다.
나의 생존과 상관없는 고아,
과부, 소외된 이웃,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내 삶에 타격이 올 정도의 희생적인 나눔'을 정기적으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흘려보냄을 통해 ‘이 돈은 내 것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매달 삶으로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3.
일회성 감정을 넘어선
'일상의 청지기'
훈련
교회 행사나 선교지에서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눈물로 결단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진짜 아포타세타이는 집회의 불이 꺼진 월요일 아침,
일터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실천: 직장 생활을 할 때 돈을 버는
'목적' 자체를 수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부유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여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물질을 유통하기 위해 일하는 태도입니다.
매일 아침 ‘오늘도 내게 주신 시간과 물질,
건강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의 루틴이 필요합니다.
4.
탐욕을 거절하는 단호한
'선택적 손해'
재산을 모으고 증식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불의한 이익이나 타인을 착취하는 구조와 단호히 결별해야 합니다.
실천: 남들은 다 하는 편법이나 불의한 재테크,
혹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비즈니스 모델을 과감히 거절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이야말로 내가 물질의 종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임을 세상에 가장 강력하게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결론을 맺으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포타세타이'는 모든 재산을 당장 팔아 유랑민이 되라는 율법적 명령이 아닙니다.
‘돈이 너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게 하라’는 영적인 선언입니다.
일회성 종교 행사에서 위안을 얻는
'무리'는 돈이 주는 안전함과 예수님이 주는 구원을 동시에 소유하려 하지만,
참된 '제자'는 주님 한 분만으로 안전하기에 내 손에 쥔 물질을 언제든 놓을 준비를 하며 살아갑니다.
이 짠맛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서 버려지지 않는 참된 소금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인터넷).
(3)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망대를 세우는 사람의 비유”(눅14:28-30)에 대해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a)
“누가복음
14장 28-30절의 '망대를 세우는 사람의 비유'는 감정에 치우쳐 무작정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무리에게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냉정하고 철저하게 계산해 보라’는 엄중한 경고이자 교육적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주시는 핵심 의미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비용 계산(Cost-Counting)'의 필수성
본문 내용: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먼저 앉아서 준공하기까지의 비용이 충분한지 계산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입니다.
의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아무런 대가 없이 편안함과 축복만을 누리는 길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된 가족과의 관계 재정립(26절), 자기 십자가를 지는 수치와 고난(27절)이라는 엄청난 대가가 따릅니다.
예수님은 충동적이거나 맹목적인 열정으로 시작하지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할 희생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결단하라고 요구하십니다.
2.
'끝까지 버텨내는 것(Perseverance)'의 중요성
본문 내용: 기초만 쌓고 비용이 부족하여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하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만 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라며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게 됩니다.
의도: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시작만 화려하고 끝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해나 물질적 손해,
일상의 유혹이 찾아왔을 때 대가 지불을 거부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켜 완공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3.
'값싼 은혜'와 '무리의 영성'에 대한 폭로
맥락적 연결: 이 비유는 ‘수많은 무리가 동행할 때’(25절) 주어졌습니다. 대다수의 군중은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과 떡에 매료되어 감정적으로 따르던
'구경꾼'이었습니다.
의도: 예수님은 군중의 숫자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분위기에 휩쓸려 따르는 값싼 영성을 경고하시며,
‘끝까지 대가를 지불할 소수의 참된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준비 없는 헌신은 결국 무너질 건축물과 같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가르침은 ‘제자도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소유와 목숨을 내려놓는 철저한 대가 지불을 계산 안으로 넣으라’는 뜻입니다.
앞서 나눈
'이벤트성 헌신'의 맥락에서 보면,
집회에서 감정적으로 눈물 흘리며 기초(시작)만 다져놓고,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비용(삶의 헌신)을 치르지 않아 결국 조롱거리로 남는 미완성 망대와 같은 신앙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제자가 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대가 중에 '끝까지 버텨내는 것’(“예수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켜 완공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물으십니다”)란 말을 읽을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4장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끝자리”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a.
'끝까지 버텨내는 장소'는 곧
'끝자리'입니다.
망대를 완공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비용)는 세상적인 화려함이나 성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제자도의 비용은 다름 아닌
"낮아짐과 수치를 견뎌내는 비용"입니다.
누가복음 14장 9-10절:
혼인 잔치에서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자리(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연결성: 제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 완공(29절)한다는 것은,
세상의 중심에서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끝자리'에 처하는 수치와 소외를 매일 자발적으로 지고 견디는 삶('바스타제이')을 의미합니다.
낮아짐의 자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망대를 완공할 비용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b.
'망대의 완공'과 '끝자리의 영광'
(하나님이 높이시는 타이밍)
두 본문은 모두 인간이 스스로를 높이거나 스스로 완성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일어나는 역설을 다룹니다.
누가복음 14장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연결성: 망대 비유에서 중도에 포기한 건축가는 세상의
'조롱(30절)'을 받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부인과 낮아짐의 비용을 지불하며
'끝자리'를 지켜낸 제자는,
결국 마지막 날 주인이 와서
"벗이여 올라앉으라"(10절)고 하시는 참된 영광과 완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끝까지 버틴다는 것은 내 힘으로 성공의 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이실 때까지 끝자리에서 묵묵히 버텨내는 인내입니다.
c.
'이벤트성 헌신'은 높은 자리를 탐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앞서 나눈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단발성·이벤트성 헌신'이 왜 망대를 완공하지 못하는지 이 연결을 통해 명확해집니다.
많은 경우,
일회성 행사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곳에 화려함,
감정적 고조,
사람들의 인정 등
'높은 자리'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행사가 끝나고 돌아가야 할 일상의 자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끝자리'입니다. 이 끝자리의 지루함과 비천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비용 계산 실패),
망대 공사는 기초만 쌓인 채 중단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망대를 완공할 각오"란, 세상에서 멋진 성을 쌓아 올리겠다는 야망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삶의 가장 낮은
'끝자리'까지 기꺼이 내려가 지키며,
그곳에서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끝까지 버텨내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
14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낮아짐과 포기'라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인터넷).
(4)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4장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비유’에 대해서 묵상하고 싶습니다.
(a)
누가복음
14장 31-32절 말씀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i)
여기서 ‘헤아리다’라는 헬라어 “βουλεύσεται”(불류세타이)란 단어는 원형 “βουλεύω”(불류오)의 3인칭 단수 미래 중간태 직설법 형태로서 단순히 머릿속으로 스치듯 생각하는 가벼운 궁리가 아니라,
"자신의 온 존재와 운명을 걸고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해 깊이 고뇌하고 의논하는 법정·군사적 숙고"를 뜻합니다.
당시 문화와 문법적 맥락에서 이 단어가 가지는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전인격적인
'숙의'와 '최종 결단'
(To Deliberate / Counsel)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βουλεύω”(불류오)(헤아리다)는 도시국가의 의회(Boule)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행위에서 유래했습니다.
본문에서 임금이 “βουλεύσεται”(불류세타이)(헤아리다) 한다는 것은 혼자만의 독단적인 생각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을 앞두고 참모들과 함께 모든 생존 확률과 데이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깊이 연구하고 최종 결단을 내리는 치열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2.
자신을 위한 주체적인 고뇌
(중간태의 영적 의미)
망대 비유(28절)에서 비용을 계산할 때는 일반적인 계산을 뜻하는
'프세피제이(ψηφίζει)'가 쓰인 반면,
전쟁 비유에서는 중간태(Middle
Voice) 형태인 '불류세타이'(βουλεύσεται)가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중간태는
'자기 자신을 위해 깊이 개입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즉,
이 숙고는 남의 인생을 대하듯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숨과 내 나라의 운명이 이 결정에 완전히 걸려 있다"는 절박한 인식을 가지고 스스로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주권을 저울질하는 영적 결단을 뜻합니다.
3.
미래 시제가 주는 기회와 긴박감
(미래형의 의미)
이 단어는 미래 시제(Future
Tense)로 쓰였습니다.
강력한 왕이 이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직 멀리 있을 때(32절)" 마땅히 임금이 취해야 할 필수적인 행동을 예견합니다.
이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진노와 심판의 주님이 완전히 당도하시기 전,
네게 아직 생각할 기회가 남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철저하게 영적인 주권 계산을 끝내야 한다는 긴박한 촉구를 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누가복음 14장 31절의 “βουλεύσεται”(불류세타이)(헤아리다)는 감정에 치우쳐 군중의 열기에 휩쓸리는 신앙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 인생의 왕좌를 주님께 넘겨드릴 것인가,
아니면 내 고집대로 살다 멸망할 것인가"라는 거대하고 엄중한 영적 테이블 앞에 정직하게 앉아,
내 존재를 건 최종 항복의 결단을 내리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ii)
이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비유’(31-32절)는 앞선 망대 비유(28-30절)와 함께 제자도의 대가를 다루지만,
그 깊이와 뉘앙스에서 더 파괴적이고 전면적인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 비유의 구체적인 의미와 망대 비유와의 미묘한 초점 차이,
그리고 33절로 이어지는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전쟁 비유(31-32절)의 핵심 의미:
전면적인 항복과 주권 이양
본문 내용: 일만 명의 군사를 가진 왕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강력한 왕과 싸우려 할 때,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직시하고 아직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 평화를 청합니다.
영적 의미: 여기서 '이만 명을 이끌고 오는 강력한 왕'은 하나님(혹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일만 명을 가진 무력한 왕'은 죄인인 인간(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하나님 나라와 맞서 싸우려 하지만,
인간의 자원(일만 명)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이만 명)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주님과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조건 없이 전면 항복(주권 이양)을 선언하라"는 뜻입니다.
2.
망대 비유
vs 전쟁 비유의 미묘한 초점 차이
망대 비유는 제자의 길을 완성하기 위해 치러야 할
'지속적인 인내와 수치의 비용'에 초점을 맞춘다면,
전쟁 비유는 자기 왕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압도적인 주권을 넘겨드려야 하는
'전면적인 항복과 생존의 위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전자가 "끝까지 버틸 끈기가 있는가?"를 묻는다면,
후자는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투항할 용기가 있는가?"를 엄중히 묻고 있습니다.
3.
최종 결론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33절)의 필연성
두 비유를 거친 후,
예수님은 33절에서 "이와 같이(Therefore)"라는 접속사로 결론을 맺으십니다.
소유를 버리는 것('아포타세타이')이 제자도의 절대적인 필연성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항복의 구체적인 증거
(전쟁 비유의 결론)
전쟁에서 패배하여 항복하는 왕은 자신의 왕관,
영토, 군사, 재산의 모든 권리를 승리한 왕에게 넘겨야 합니다.
물질과 소유는 인간이
'내 인생의 왕'으로 버티기 위해 쥐고 있는 마지막 무기이자 보루입니다.
따라서
'모든 소유를 버린다(작별한다)'는 것은 주님께 전면 항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하고 확실한 시금석입니다.
완공을 위한 유일한 재원
(망대 비유의 결론)
망대를 완공하기(끝까지 버텨내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내 손에 쥔 소유를 주님께 드리고,
역설적으로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비로소 마련됩니다.
내 소유를 우상으로 붙잡고 있는 한,
환난과 핍박이 올 때 그 소유를 지키기 위해 망대 건축(제자의 길)을 포기하게 됩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야만 끝까지 버틸 동력이 생깁니다.
'끝자리'로 내려가는 문
앞서 묵상한 누가복음
14장 9-10절의 '끝자리'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소유(신분, 자랑, 재산)를 버려야 합니다.
내 소유를 쥐고 높아지려는 마음이 남아 있는 한,
결코 끝자리에 앉을 수 없으며 망대를 완공할 수도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두 비유를 통해
"나를 따르는 것은 적당히 삶의 일부를 리모델링(망대)하는 수준이 아니라,
네 인생의 주권을 내게 전면 양도(전쟁)하는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권 양도의 구체적 행동이 바로
'모든 소유권의 포기(33절)'입니다(인터넷).
(5)
예수님께서 오는 본문 누가복음
14장
25-33절에서 가르치시는 참 제자도의 핵심은 "내 인생의 모든 주권(인간관계, 목숨, 소유)을 예수 그리스도께 전면 이양하는
‘철저한 대가 지불’과 ‘조건 없는 항복’"입니다.
(a)
예수님은 단순히 열광하며 뒤를 따르는
‘무리(Crowd)’와 삶의 전부를 거는
‘제자(Disciples)’를 엄격히 구분하시며,
참 제자도의 본질을 원어적 맥락과 비유를 통해
3가지 핵심으로 선언하십니다(인터넷):
1.
절대적인 우선순위의 재정립
(μισεῖ, 미세이)
참 제자도는 삶의 모든 가치와 관계의 서열을 전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
처자, 형제, 자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26절)’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감정적인 증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대체 불가능한 최우선순위에 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간관계나 나 자신의 안전(생존 본능)과 충돌할 때,
주저 없이 주님을 선택하는 단호한 태도가 제자의 시작입니다.
2.
매일의 지속적인 자기 부인
(βαστάζει, 바스타제이)
참 제자도는 일회성 이벤트나 감정적 결단이 아니라,
날마다 지속되는 실제 삶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27절)’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당시 청중들에게 죽음과 공적 수치를 의미하는 시각적 현실이었습니다.
‘진다’는 동사의 현재 시제는 집회의 불이 꺼진 월요일 아침,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상의
‘끝자리’에서 세상의 조롱과 수치,
자아를 죽이는 고통을 매일 자발적이고 지속적으로 짊어지고 걸어가는 연속적인 삶이 참 제자도임을 보여줍니다.
3.
소유권의 전면적인 이전
(ἀποτάσσεται, 아포타세타이)
참 제자도의 구체적인 증거는 물질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33절)’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버리다’는 소유를 향해 공식적인
‘작별 인사’를 고하는 법적·관계적 단어입니다.
"내 돈, 내 시간,
내 미래는 내 것"이라는 탐욕과 결별하고,
내 삶의 모든 자원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유통하는
‘청지기’로 주권을 양도하는 행위입니다.
두 비유의 엄중한 경고:
충동적 신앙에 대한 거부
예수님은 이 핵심을 요구하시며 망대 비유(28-30절)와 전쟁 비유(31-32절)를 던지십니다.
망대 비유:
제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지속적인 인내의 비용'을 미리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감정으로 시작했다가 일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중도 포기하는
'미완성 망대'
같은 신앙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전쟁 비유:
내 자원(일만 명)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만 명)을 이길 수 없음을 직시하고,
심판이 당도하기 전 영적 테이블에 앉아 깊이 숙고하여(불류세타이, 31절) 내 왕권을 내어놓는
'전면 항복'을 하라는 뜻입니다.
최종 요약
참 제자도는 예수님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리모델링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왕좌에서 내가 내려와,
주님께 전권(Total
Commitment)을 넘겨드리는 전인격적인 투항"입니다. 이 대가 지불과 짠맛을 잃어버린 신앙은 결국 세상에 밟히는
'맛을 잃은 소금(34-35절)'이 될 뿐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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