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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는 가정

  https://youtu.be/7e-MBYtjbiw?si=Cp21WwD0kpZtKtGp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 (마가복음 8:34-35)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4-35).

 

 

어제 토요일 엔세나다, 멕시코에서 나를 따르라”(1:17)는 주제 아래 청소년 집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전날이 금요일 아침에도 엔세나다, 청소년 집회를 기억하며 기도했을 때 오늘 주일 예배 설교를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이란 제목 아래 우리 모든 육신의 가정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들이 되길 기원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가복음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첫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인 마가복음 1 17절 말씀과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실 때인 마가복음 2 14절 말씀 외에 예수님께서 제자도의 본질을 가르치실 때인 마가복음 8 34절과 35절 말씀이 적합한 성경 본문 구절이라 생각되어 마가복음 8 34-35절 말씀을 오늘 설교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 중심으로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4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주님의 음성만을 들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 3-5절 말씀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저희가 사는 동네에 중국집이 있는데 제가 전화를 해서 To go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그 중국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은 제 음성을 알기에 목사님이시죠?”하고 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물며 제가 직장에 있는 제 아내에게 전화를 하면 남편인 제 목소리를 알지않겠습니까.  요한복음 10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문지기의 음성을 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헬라어 단어 오이다”(οδα)는 마치 아기가 출생 직후 본능적으로 자기 어머님을 알아채는 것처럼 예수님의 양은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즉각적으로 알아챈다는 것입니다.  양은 시력이 매우 나빠 앞을 잘 보지 못하지만, 청각이 극도로 발달해 있습니다. 양 무리가 섞여 있어도 자기 목자가 고유의 신호나 음성을 내면, "이게 누구 목소리지?" 하고 분석(기노스코)하지 않고,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오이다)합니다., 주님의 양들에게는 참 목자의 음성을 즉각적으로 알아채는 영적 직관이 내재되어 있습니다(인터넷).  고대 유대에서는 밤이 되면 여러 목자의 양들을 하나의 큰 공동 우리에 함께 모아두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각 목자가 자기만의 독특한 휘파람이나 목소리로 부르면, 신기하게도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은 양들만 줄을 지어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러기에 주님의 양들은 타인의 음성에 대한 즉각적 거부 반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5절에 보면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οκ οδασι)" 도망친다 고 합니다.  타인의 목소리가 들릴 때, 양들은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 나한테 해를 끼칠까?" 학습된 지식으로 고민하지 않고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라는 이질감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생명의 위협을 받아 즉시 도망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저는 이러한 이질감이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가치관, 탐욕, 혹은 교묘한 거짓 가르침(이단)이 밀려올 때, 우리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거나 "조금만 맛볼까?" 하고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이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니다"라는 불편함과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 즉시 그 자리와 생각에서 도망치는(Escape) 것이 성경적 분별이라는 것입니다(인터넷)(요셉이 우리의 아내가 유혹할 때 그리했음).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즉각적으로 알아채고 주님을 따름니다.  가정의 가장인 남편/아버지가 계속해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주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고 속히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며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두 부부는 부모로서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식구가 주님의 음성만을 듣고 주님만을 따를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8 34절 말씀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다는 헬라어 단어 παρνησάσθω”(아파르네사스도)"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자신을 철저히 디스오운(Disown, 소유권 포기)하라"는 뜻을 가집니다(인터넷).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는 단호하고 즉각적인 결단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인터넷).  John Calv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를 지배하게 하라”(인터넷).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자기를 부인하다는 헬라어 단어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배반)할 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14:71).  여기서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했다'는 것은 "내가 예수와 상관이 있다면 신의 저주를 받아도 좋다"라는 뜻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고 단절할 때 쓴 가장 극단적인 표현입니다(인터넷).  이렇게 베드로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향해 "나는 저 사람을 도무지 알지 못하며, 아무 상관이 없다"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부끄러운 사건의 단어를 그대로 가져오셔서 마가복음 8 34절에 "나를 따르려거든 (예수님이 아니라) 너 자신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너 자신과 상관없는 자로 부인하라(παρνησάσθω)"고 역설적인 명령을 주셨습니다(인터넷).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은 모든 식구가 자기 자신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기 자신과 상관없는 자로 계속해서 부인하는 삶을 사는 공동체입니다.  먼저 가정의 가장인 남편이 아내 앞에서 자기 자신의 권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처럼 행합니다.  억울함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에 내 자아의 요구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자신을 부인하셨듯 배우자를 먼저 섬기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에 대한 내 소유권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로서 자녀를 대합니다.  자녀 역시 자신의 독립성을 내세워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려는 자아를 부인하고 주 안에서 순종을 배웁니다.  이렇게 가정이 서로를 향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 인정하는 가정이야 말로 주님을 따르는 가정입니다(인터넷).

 

셋째로,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마가복음 8 34절 말씀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삶의 무거운 짐이나 고난'을 뜻하는 감상적인 은유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명예와 평판을 다 버리고, 매일 죽으러 가는 사형수처럼 예수님을 따르라"는 극단적이고 단호한 요청입니다(인터넷).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살면서 삶에 찾아오는 우리 각자만의 구체적인 고난과 순종의 몫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짊어지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인터넷).  어떻게 우리는 이 말씀을 가정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배우자 관계에서의 십자가: 부부 싸움의 원인은 대개 "내 자존심"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비판하고 고치려 드는 내 자아를 부인(아파르네오마이)합니다.  주님이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듯, 배우자의 연약함을 내 십자가로 삼고 묵묵히 기도로 받아냅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의 청지기 의식: 자녀를 내 소유로 생각하는 자아를 부인합니다.  자녀의 진로나 삶의 선택을 대할 때, 내 대리만족이나 세상적 성공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자녀를 맡기는 십자가를 집니다”(인터넷).  가정 안에서 가장이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아내와 자녀의 연약함을 판단하는 대신 내 몫의 십자가로 짊어질 때, 그 가정이 살아납니다.  가장이 죽을 때(자기 부인), 그 십자가의 틈새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평강이 아내와 자녀의 영혼 흘러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가장의 십자가는 가정을 억누르는 짐이 아니라, 가정을 살리는 가장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인터넷).

 

마지막 넷째로,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선 가정의 공동 목적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야 합니다.

 

마가복음 8 35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세상을 따르는 가정의 세속적인 목적은 자녀의 좋은 대학 진학, 경제적 안정, 세상적인 명예가 가정의 최종 목적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의 복음을 위한 목적은 모든 선택의 기준이 "이것이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가?", "이것이 복음에 유익한가?"가 됩니다.  자녀의 진로나 물질의 사용 역시 주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을 따르는 가정은 가정에 경제적 위기나 억울한 손해가 찾아오면 원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가정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에, 주님 때문에 당하는 손해와 희생을 실패가 아닌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흔적'으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식구들이 각자 자기 뜻(목숨)을 구하려고 하면 가정은 부딪치고 깨어집니다.  그러나 온 가족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각자의 자아를 잃어버리기로 (포기하기로) 결단할 때, 역설적으로 그 가정 안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강과 구원의 기쁨(생명)이 충만해질 것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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