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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fundamento de la sabiduría [Eclesiastés 7:15–18]

  El fundamento de la sabiduría         [Eclesiastés 7:15–18]       Durante la reunión de oración de esta mañana, medité sobre los temas de una familia bendecida, una iglesia bendecida y una nación bendecida, centrándome en 2 Crónicas 9:7: «¡Bienaventurados tus hombres! ¡Bienaventurados estos siervos tuyos, que están continuamente delante de ti y oyen tu sabiduría!». Al reflexionar sobre este versículo, contemplé la tremenda bendición que supone encontrar a un líder sabio. Esto se debe a que la nación de Israel fue bendecida precisamente porque su rey, Salomón, era sabio. Al defender la justicia y la rectitud, el sabio rey Salomón fortaleció a la nación (versículo 8); así, tal como observó la reina de Sabá, el pueblo de Israel era, en efecto, un pueblo bendecido. Para que nuestras familias sean bendecidas, el cabeza de familia —el esposo o el padre— debe ser sabio. Para que nuestras empresas sean bendecidas, el presidente debe se...

니고데모의 안경 나눔, 전적부패: 타락의 결과 P. 104-118

니고데모의 안경 나눔, 전적부패: 타락의 결과 P. 104-118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선악과를 두셨을까?

1.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 즉 말씀에 대한 순종 가운데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말씀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세계의 창조질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자존자시나, 피조물인 인간은 의존자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말씀 가운데서만 살 수 있으니, 선악과 나무가 없으면 생명나무도 없다. 더욱이 에덴동산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담보다 못하게 지어졌으므로, 하나님 외의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필요와 만족을 채울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 의존 외에 다른 생명의 길은 없으며, 범죄전 아담은 선악과를 바라보며 하나님과 우리의 위치를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에 의한 인격적 순종과 교제를 원하신다. 돌이나 길가에 떨어진 낙엽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하나님의 질서에 불순종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돌이나 낙엽같게 하지 않으셨다. 얼마전 전도 훈련 과정에서 직장 동료에게 복음을 제시한 적이 있다. 염려했던 것은 내가 직장 상사이기 때문에 위력(?)에 의하여 마음에도 없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자발성을 잃은 신앙고백에는 생명도 구원도 없다. 아담에게는 자유의지가 필요했다.

3. 어린 아이는 불을 다룰 수 없지만 어른은 능숙하게 불을 다룰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불일듯 타오르는 인간 죄성의 맹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타락에 의하여 결코 좌절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타락을 능숙하게 다루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일 것이다. 이는 선악과를 두신 이유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여전히 죄가 만연한 것을 그 자비하심으로 오래 참으실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며,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들이 잔존하는 죄성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더욱이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께서 능히 다루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타락과 구속 사역 조차 그의 영원전 계획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선악과 사건은 결코 하나님의 실패일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의 생명에 대한 언약은 ‘순종’이라는 조건이 있는 언약이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상징적이고 주권적인 명령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아담은 생명 나무를 포함한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지만, 불순종의 댓가는 ”죽으리라“(창2:17) 하는 것이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7,8)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약속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적 통치)에 대한 '언약의 복'을 약속하셨다. 특히 신약 시대에 이르러 베드로는 성도들을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 일컬었다(벧전1:2),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신약 성도들이 '순종'과 '언약의 복'을 함께 얻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순종'과 '하나님의 복'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난 '죄'의 삯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재, 곧 '사망'이다.

그러나 인류는 불순종했다. 호세아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볼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신다."(호4:1a)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순종의 죄에 대한 엄중한 법정이 열리면서 방청과 주의를 요구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기서 '쟁변한다' 함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괴한 책임을 물어 이스라엘을 고소한다는 의미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도다"(호4:1b) 

기소장이 낭독되면서 인류의 죄상이 낱낱이 고발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순종하는 의와 참된 거룩을 받았지만(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2항), 이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고 오로지 죄에 순종하며, 거룩을 잃고 불순종의 자녀되었다. 윌리엄 거널의 말처럼, 양은 도랑에 빠질 수는 있지만, 돼지는 그 속에서 뒹굴고 산다.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양이 될 것인가, 돼지가 될 것인가. 

그리고 이어서 판결문이 낭독된다.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호4:3) 

인류에게 내려진 판결은 '사망'이었다. 먼저 우리의 육신이 질병과 사망의 고통 가운데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낡음과 썩어짐과 슬픔과 이별과 좌절과 분노 등 죽음의 속성들로부터 떠날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가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항상 신음한다. 또한 전 인격과 기능이 부패하고 오염되어 영적 감각의 기능 역시 완전히 상실됨에 따라, 하나님과의 영적 분리, 곧 영적 사망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또한 그 최종적인 결과로서, 하나님의 유보된 심판이 마지막 날 임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넘치는 진노와 영원한 사망 앞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실존적으로는 인류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잃었다. 생명의 근원이며,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이고, 인간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과의 사랑과 교제를 상실한 것이다. 이것이 인류 앞에 놓인 모든 문제의 핵심이지만, 불순종의 노예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인 죄인은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무능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자신의 문제를 깨달을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속죄와 그의 의를 의지함으로써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다스릴 대리인으로 세워진 인류에 대한 판결은 피조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조셉 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변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늘도 부정하며(욥15:15), 사람이 든든히 섰을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며(시39:5), 땅도 저주 아래 있으니(창3:17,18), 참으로 모든 피조물이 탄식한다.(롬8:21,22)”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진노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고(합 3:2) 최종적인 심판을 유보하셨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사 54:8) 

정말 그렇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즉시 진멸하시지 않으셨고, 인류의 끊이지 않는 죄악 가운데서도 여전히 진멸하시지 않고 계시며, 여전히 오래참고 계시다. 노아의 홍수 당시 구름이 해를 완전히 가리웠을 때도, 빛 되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셨다. 구름이 가리운 것은 해가 아니라 지구이며 내 작은 눈일 뿐이었다. 내게 드리워진 이 어둔 구름은 영원한 빛 되신 하나님을 조금도 가리울 수 없으며, 그는 결코 구름 뒤에 숨지 않으신다. 구름은 곧 흘러가되 태양은 항상 그 자리를 지킬 것이며, 하나님도 항상 계실 것이다.

넘치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버리시지 않기로 계획하셨다. 노아의 홍수 이후 육식이 허용되기까지(창9:3) 피조세계에 짙은 어둠이 드리웠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인류를 보존하시겠다는 언약을 노아와 체결하셨으니, 이는 죄인들을 향한 넘치는 은혜(일반은총)의 결과다. 더욱이 노아의 가정을 택하여 교회 삼으심은 교회와 믿음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특별은총(구원의 은총)의 결과였다. 이처럼 해를 가리운 구름이 뿌려대는 차디찬 빗방울 마저도 탐스런 꽃과 열매를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된다.

잠시 밖으로 나가보자. 맑고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결, 적당히 따사로운 햇살, 이 모든 것이 죄인된 우리에게 과분한 은혜라 가슴이 벅차오른다. 푸른 하늘이 폭우를 쏟아내어 노아의 홍수되어 우리를 삼키더라도, 상쾌한 바람이 매서운 폭풍이 되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가더라도, 따사로운 햇살이 매서운 불기둥을 쏟아내어 우리를 다 태워 진멸시킨다 할지라도, 우린 한 마디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범죄 후 우리는 본질상 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나 바닥의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었다. 그런 벌레같은 죄인에게 하늘과 바람과 햇살을 허락하신 것만도 주체할 수 없는 은혜이니, 이것이 성도나 불신자 누구에게나 주어진 일반은총이다.  

아브라함 카이퍼 등이 주장했던 일반은총은, 하나님의 뜻에는 성도가 구원받고 천국에 이르는 특별은총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문화를 보존하시고 발전시키셔서 이 발전된 문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견해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뒹구는 쓰레기와 같은 우리들을 폐기하시지 않으시고, 부패한 우리를 보존하시고 부패한 것들을 이어붙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형상을 드러내신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빚어진 하나님의 작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떨어진 흙을 가져다가 훌륭한 작품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셨다. 아무리 잘그린 그림도 모델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듯이, 인간은 불완전했지만 분명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타락 이후에는 땅도 부패하였고, 인간도 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문화, 인간 등 더욱 불완전해진 재료들을 가지고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릴적 초등학교에서 폐품을 이어붙여 미술작품을 만들 듯, 그리고 죽은 나무를 이어붙여 십자가를 만들 듯, 부패하고 불완전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충분하게 드러내고 계신다. 재료는 부패하였지만 그 재료들로 작품을 만드시는 이는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상을 빚어 그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가? 동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을 통해서는 가이사의 통치를 알아보면서, 왜 사람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와 일반은총으로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는 왜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지 못하는가. 

고통과 고난, 부패와 슬픔, 기쁨과 자유, 부와 가난 등 세상의 모든 것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드러내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재료를 보기보다 작품을 조망하는 안목이 있기를 소망해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세계관이다.

물론, 성도에게 주어진 은혜는 일반은총에 그치지 않았다. 출애굽한 광야의 1세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일반은총)로 인해 진멸당하지 않고 광야에서의 삶을 이어갔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셨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은혜(특별은총)를 입은 것은 갈렙과 여호수아뿐이었다. 이들만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쓰레기나 벌레와 같았던 죄인들 사이에서 그의 백성을 택하여 주워건지시고 하나님의 소유삼으셨음(특별은총)을 믿음으로 소망하는가.

오늘 내가 원하는 것은 일반은총인가. 특별은총인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여전히 진멸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부분적으로나마 맛보며 살아간다. 부와 명예와 건강과 안전과 사랑 등이 그것이다. 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것이라 늘 이러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특별은총,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다. 광야의 1세대 백성처럼, 우리도 불순종과 불신앙을 가지고서도 이 땅에서 잠시 진멸당하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낼 수 있다. 아니 그동안은 거기에 만족하려 했고 거기에만 집착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인가.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시119:70) 

선악과를 먹지 말라던 첫 율법 안에서만 아담이 즐거울 수 있었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법' 안에서라야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의 복락들을 즐거워할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옭아매기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율법 그 자체는 매우 선하나, 우리가 지킬 능력을 상실해서 율법이 저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돌판이 아닌 성도들의 '마음'에 새기시겠다 하신 새 언약(렘31:33~34)'과 '자유의 율법'(약2:12) 안에 있는 신약 성도는 구원의 보증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으니,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 즉 복음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거룩에 이르게 하기 위해 그의 영으로써 우리 안에 사시기도 한단 말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왕이시며 목자이신 여호와의 주권을 고백하는 사람이다.(시23:1) 반면, 오늘도 여전히 불만과 결핍 속에 있는 사람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이 그 영혼 안에 없어서 스스로 삶의 목자 되려하는 사람이다. 타락한 인간의 영혼은 본래 '나' 자신을 향해있었으며, 본성적으로 '죄'를 향하고 '사망'을 향하여 속히 달려가는 인생이었다. 옷을 사두면 자꾸 낡아지고, 거울을 보면 점점 늙어가듯, 타락의 영향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저절로 후패해져가니(고후4:16), 실로 썩어질 것과 사망을 향해 달음질하던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해 거듭난 성도는 그 방향을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달음질하니 그것은 천국과 영생을 향한 달음질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탐하기보다, 거듭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보암직했으나 누구에게든 금지된 나무였고, 그 열매를 취하면 죽었으나,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볼품이 없었어도, 은혜 가운데서 마음이 원하는 모든 이에게 허락된 나무이며, 그 열매를 취하여 생명의 떡되신 그리스도를 먹는 자마다 생명을 얻는 참 생명 나무시다. 

우리는 여전히 태초의 질서, 하나님의 질서,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 안에 있을 때라야 참 만족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은 분명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똑같은 구원을 약속받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를 닮아 하나님께 순종하여 세상과 구별되어지는 '거룩'만이 잠시의 쾌락이 아닌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다시 한 번 상고해본다."

(영상 형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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