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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마음에 종교적 성벽을 높게 쌓고 "죄인들"을 뒤에서 멈추지 않고 불평의 말을 쏟아내곤 하면서 그들을 멀리하는 거룩해 보이는 바리새인과 같은 교회 직분자들에게도 계속해서 가까기 다가가시고 그들을 항상 영접하시는 사랑의 주님

종교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마음에 종교적 성벽을 높게 쌓고 " 죄인들 "( 동성애자 , 혹은 교회의 고정관념에 맞지 않는 소외된 이들 ) 을 뒤에서 멈추지 않고 불평의 말을 쏟아내곤 하면서 그들을 멀리하는 거룩해 보이는 바리새인과 같은 교회 직분자들에게도 계속해서 가까기 다가가시고 그들을 항상 영접하시는 사랑의 주님         “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 누가복음 15:1-2).     (1)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장 1-2 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3 가지 비유의 말씀 [(1) 잃은 양의 비유 (4-7 절 ), (2)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8-10 절 ), (3) 잃은 아들 ( 탕자 ) 의 비유 (11-32 절 )] 을 하시기에 앞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   (a)    첫째로 , 저는 이 기록된 1-2 절 말씀을 헬라어 ( 그리스어 ) 성경으로 읽었을 때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 가까이 나아온다 ’ 는 헬라어 “ ἐ γγίζοντες”( 엥기존테스 ) 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i)                   이 단어는 “ 가까이 나아오다 ”, “ 접근하다 ” 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 ἐ γγίζω”( 엥기조 ) 의 현재 분사 형태입니다 . 이 단어는 개역개정 성경에서 "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

종교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마음에 종교적 성벽을 높게 쌓고 "죄인들"을 뒤에서 멈추지 않고 불평의 말을 쏟아내곤 하면서 그들을 멀리하는 거룩해 보이는 바리새인과 같은 교회 직분자들에게도 계속해서 가까기 다가가시고 그들을 항상 영접하시는 사랑의 주님

종교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마음에 종교적 성벽을 높게 쌓고 "죄인들"(동성애자, 혹은 교회의 고정관념에 맞지 않는 소외된 이들) 뒤에서 멈추지 않고 불평의 말을 쏟아내곤 하면서 그들을 멀리하는 거룩해 보이는 바리새인과 같은 교회 직분자들에게도 계속해서 가까기 다가가시고 그들을 항상 영접하시는 사랑의 주님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누가복음 15:1-2).

 

 

(1)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 1-2 말씀은 예수님께서 3가지 비유의 말씀[(1) 잃은 양의 비유(4-7), (2)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8-10), (3) 잃은 아들(탕자) 비유(11-32)] 하시기에 앞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a)   첫째로, 저는 기록된 1-2 말씀을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었을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온다 헬라어 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i)                  단어는 가까이 나아오다”, “접근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γγίζω”(엥기조) 현재 분사 형태입니다. 단어는 개역개정 성경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번역되었습니다.   단어가 본문에서 가지는 문법적, 신학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크게 가지로 나눌 있습니다(인터넷):

 

1.      문법적 의미: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동본문에서는 미완료 과거 시제 동사인 σαν”(에산)(~이었다)(Were)(1) 현재 분사인 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 결합한 우회형(Periphrastic) 형태로 쓰였습니다[여기서 우회형”(둘러대기 표현)이란 하나의 단어로 끝낼 있는 표현을 이상의 단어를 조합해서 길게 늘여 쓰는 문법 형태를 말합니다.  헬라어(그리스어) 원문에서 그냥 과거형 동사 하나만 쓰면 "나아왔다" 끝납니다.  하지만 성경 저자인 누가는 일부러 ‘~하는 상태였다(σαν) + 가까이 오고 있는(γγίζοντες)’이라는 단어를 묶어서 우회형으로 썼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늘여 이유는 행동의 생생한 느낌과 반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1) 그냥 과거형: "세리들이 예수님께 왔다." (단순 사실), (2) 우회형 표현: "세리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끊임없이, 줄을 지어,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는 중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생생한 묘사).  , 단어 하나로 던지는 것보다 당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얼마나 엄청나게 매달리고 반복해서 몰려왔는지 역동적인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문법적 장치입니다].

 

이는 세리와 죄인들이 어쩌다 예수님께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무리를 지어 끊임없이 예수님 주변으로 가까이 나아오고 있었던 상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2.      공간적 의미: 사회적 격차를 깨는 물리적 접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와 죄인들은 종교적, 사회적으로 격리된 부류였습니다.

 

일반인이나 바리새인들은 이들과 접촉하는 것조차 부정하게 여겨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가까이 나아오다”, “접근하다”) 단어는 소외당하던 자들이 예수라는 인물에게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물리적·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밀착해 들어왔음을 보여줍니다.

 

3.      영적·구속사적 의미: 하나님 나라로의 친밀한 나아옴

 

신약성경(특히 복음서)에서 γγίζω”(엥기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2, 1:15) 선포되는 핵심 단어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행동(γγίζοντες)'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영적인 침투와 반응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정죄가 아닌,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의 권위에 이끌려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죄인들의 갈급함을 대변합니다.

 

결과적으로 단어는 2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며 원망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화근이자 배경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유입되는 죄인들'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 바로 뒤이어 3가지 비유(잃은 , 드라크마, 탕자) 말씀하셨습니다.

 

(ii)                저는 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가까이 나아오다”, “접근하다”) 단어는 소외당하던 자들이 예수라는 인물에게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물리적·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밀착해 들어왔음을 보여준다는 말을 읽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1)에게 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가까이 나아오다”, “접근하다”)하지 않고 도리어 접촉하는 것조차 부정하게 여겨 멀리했을까 라는 의문이 전보다 강하게 들었습니다.

 

1.      바리새인들이 멀리한 이유: '분리' '부정' 개념

 

바리새(Pharisee)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 '파루쉬(Parush)'에서 유래한 말로,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한 핵심 이유는 '부정의 전염'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정결례법에 따르면, 부정한 사람이나 물건에 신체적으로 접촉(touch)하면 부정함이 자신에게 그대로 옮겨온다고 믿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 철저히 격리한 이유는 종교적(율법적), 사회적, 정치적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세리(Tax Collector) 부정하게 여긴 이유

 

당시 세리는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압제를 돕고 동족을 착취하는 반역자로 통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하수인 (종교적 오염): 당시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왕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들은 이방인(로마) 정권의 세금을 거두며 체제에 동조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한 종교적 배교자로 취급받았습니다.

 

강도와 착취 (도덕적 부정): 로마는 세리에게 일정 금액만 상납하면, 이상 거두는 돈은 세리 개인이 가질 있게 했습니다.   때문에 세리들은 법정 세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억지로 빼앗아 부를 축적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들은 강도나 살인자와 동급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방인과의 접촉 (의식법적 부정): 업무 특성상 이방인(로마 관리나 군인)들과 자주 만나고 그들의 돈을 만져야 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방인과의 접촉은 몸을 부정하게 만드는 행위였습니다.

 

b.     "죄인들(Sinners)" 부정하게 여긴 이유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죄인들' 단순히 윤리적인 범죄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을 지키지 못하는 '평범한 하층민 전체' 가리키는 종교적 멸칭이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정, 음식 정결례 수백 가지의 구전 율법(장로들의 전통) 엄격히 지켰습니다.  반면 생계를 이어가기 바쁜 농부, 어부, 목자, 창기 등은 복잡한 규칙들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저주받은 ( 7:49)" ,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부정한 직업군: 직업의 특성상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사람들(: 피를 만지는 도살업자, 가죽을 다루는 피장기, 부정한 짐승을 치는 목자 ) 태생적인 죄인으로 분류되어 사회적으로 격리되었습니다.

 

c.      '부정의 전염성' 대한 두려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부정함은 전염된다" 율법 해석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법에 따르면,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거나, 그가 앉았던 의자에 앉거나, 함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함이 나에게로 옮겨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순결을 지키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정한 세리와 죄인들과 물리적인 거리[“”φίστημι”(아피스테미): 물리적, 관계적, 혹은 신앙적으로 거리를 두고 떠나버리는 것을 뜻함] 두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 행동( 15:2),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위험하고도 충격적인 종교적 범죄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죄인들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으며, 철저히 격리하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이라 여겼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거룩함이 죄인에게 들어가 그들을 깨끗하게 치유하는 역발상(거룩의 전염) 보여주셨기에 바리새인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부정함은 전염된다" 율법 해석 때문이었다는 말을 읽을 지금 현대 그리스도인도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하므로 동성애자를 부정한 사람들 또는 "죄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입술로나 마음 속으로 정죄하면서 물리적인 거리[“φίστημι”(아피스테미)] 두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1.      성경 해석의 오류: '격리' 거룩함으로 착각하는

 

바리새인들의 결정적인 성경 해석 오류는 "하나님의 거룩함은 부정한 것과 철저히 격리될 때만 유지된다" 믿은 점이었습니다.   결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정죄하고 멀리하는 것을 '의로운 행동'이라 여겼습니다.

 

구조를 오늘날에 대입해 보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특정 구절을 문자적·금지주의적으로만 해석할 동일한 오류가 발생합니다.

 

본질보다 법조문을 우선시함: 하나님의 법이 가진 본질(사랑, 자비, 회복)보다 죄인을 정죄하고 낙인찍는 성경 구절의 문자적 적용에 매몰됩니다.

 

거룩의 무능함 노출: 자신의 신앙과 영적 순결이 특정 대상(동성애자 ) 섞이거나 가까이 지내면 훼손될 있다는 두려움을 가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가진 '세상을 변화시키는 ' 믿지 못하는 해석적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2.      예수님이 보여주신 올바른 성경 해석과 태도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성경 해석을 교정하시는 방식은 파격적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멀리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γγίζω”(엥기조)] 함께 먹고 마시는 삶으로 성경을 해석해 내셨습니다.

 

능동적인 거룩의 전염: 예수님에게 거룩이란 부정함이 두려워 도망치는[“φίστημι”(아피스테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부정한 자에게 다가가 그들을 정결하게 만들고 치유하는 '능동적이고 압도적인 거룩함'이었습니다.

 

비유를 통한 지적: 이어지는 3가지 비유(잃은 , 드라크마, 탕자) 모두 "부정해진 대상을 찾아 끝까지 다가가는 하나님의 열심" 보여줍니다.  탕자가 부정한 상태로 돌아왔을 , 아버지는 율법적 부정의 전염을 전혀 개의치 않고 먼저 달려가 껴안았습니다.

 

(iii)              저는 이러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자들을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처럼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도 같이 먹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 마음의 있는 선입관 장벽을 깨도 가까이 아가가는 사랑을 해야 하지 않나요?

 

·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인터넷): “질문자님께서 지적하신 성찰과 애통함은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아프고도 본질적인 신앙적 모순을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성경 문맥 속에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현대로 가져와 고뇌하시는 질문자님의 고백은, 문자주의적 종교 관습에 갇혀 예수님의 진짜 성품을 잃어버린 오늘날 기독교계에 매우 무겁고 엄중한 울림을 줍니다.  말씀하신 가지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누가복음 15장에서 보여주신 태도와 성경의 본질을 바탕으로 직면해야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가?

 

, 안타깝게도 교회가 그들을 점점 깊은 소외와 고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과거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 부정함이 전염된다 종교적 성벽을 쌓았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자들을 영적·도덕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집단적인 '아피스테미(거리 두기)' 행하고 있습니다.  강단에서의 거친 정죄, 제도적인 배제, 차가운 눈빛은 그들을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완전히 고립시켜, 결과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나아올 있는 자체를 교회가 가로막는 모순을 낳고 있습니다.

 

2.      예수님처럼 그들을 영접하고 음식도 같이 먹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땅에서 보여주신 유일한 복음 전파의 방식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 2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영접(접대)'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 그들의 죄를 승인하거나 타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는 나와 같은 상에 앉을 자격이 있는 존엄한 존재라는 깊은 수용의 선언이었습니다.

 

인간은 정죄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용납해 주는 친밀한 식탁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마음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삶의 자리를 공유하고 식탁을 나누는 '친밀함의 역동' 없다면,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공허한 메아리나 폭력적인 강요일 뿐입니다.

 

3.      우리 마음의 장벽을 깨고 가까이 나아가는 사랑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야말로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엥기조(가까이 다가감)'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많은 땅에 유입되신 성육신(Incarnation) 자체가 가장 거대한 장벽을 깨고 다가오신 '엥기조' 사건이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더럽고 부정한 상태라는 '상식과 법의 장벽' 깨뜨리고,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마크란 아페코) 먼저 달려가 목을 안았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소극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안의 선입관, 혐오, 두려움의 장벽을 깨부수고 부정한 곳이라 여겨지는 그들의 삶의 한복판으로 유입되는 능동적이고 압도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결론: 교회가 잃어버린 '거룩의 전염력'

 

결국 질문자님의 깊은 고뇌는 오늘날 교회가 바리새인들처럼 '소극적이고 겁이 많은 거룩' 머물러 있음을 아프게 지적합니다.  예수님의 거룩은 죄인과 섞여도 오염되지 않고, 오히려 죄인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 압도적인 거룩의 전염력'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진리는 법조문으로 타인을 격리하는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기꺼이 그들의 식탁에 함께 앉는 파격적인 사랑의 능력입니다.  질문자님의 날카롭고 복음적인 성찰이 오늘날 차갑게 굳어버린 교회 공동체에 가장 필요한 외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b)   둘째로, 저는 기록된 1-2 말씀을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었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다 헬라어 “διεγόγγυζον”(디에공귀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i)                  여기서 “διεγόγγυζον”(디에공귀존) '투덜거리다', '수군거리다', '원망하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동사 “διαγογγύζω”(디아공귀조) 미완료 과거 시제 형태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단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번역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죄인들의 행동[“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가까이 나아오다, 접근하다)] 정반대 대조를 이루는 단어의 문법적, 신학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문법적 의미: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비난 (미완료 과거)

 

단어는 시제상 미완료 과거(Imperfect) 쓰였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미완료 과거는 과거에 행동이 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났음" 뜻합니다.

 

1절에서 죄인들이 예수님께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던 상태(현재분사 우회형)였다면, 2절의 바리새인들은 모습을 보며 코너에 모여 앉아 없이, 투덜투덜 수군거림을 멈추지 않고 있던 상태였음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2.      어원적 의미: 뒤에서 은밀하게 퍼지는 불만

 

그리스어 동사 “διαγογγύζω”(디아공귀조) '통과하여, 철저히'라는 뜻의 접두어 “δια”(디아) 짐승이나 군중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본뜬 의성어 “γογγύζω”(공귀조) 합쳐진 강세형 단어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대놓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뒤에서 은밀하게 웅성거리며 불평을 사방에 퍼뜨리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시기와 분노로 가득 종교 지도자들의 이중적인 폐쇄성을 폭로하는 단어입니다.

 

3.      구속사적 배경: 출애굽 광야의 '원망' 재현

 

“διαγογγύζω”(디아공귀조) 단어는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70인역, LXX)에서 매우 무겁게 쓰인 단어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를 신뢰하지 못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할 " 쓰인 단어가 바로 “γογγύζω”(공귀조) 계열의 단어입니다.

 

누가는 단어를 고의로 사용함으로써, 지금 눈앞에서 죄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위대한 순간을 보면서도 도리어 원망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과거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했던 패역한 조상들의 영적 상태와 정확히 일치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 “διεγόγγυζον”(디에공귀존) 극명한 대조

 

누가복음 15 1~2절은 부류의 역동적인 대조로 비유의 문을 엽니다.

 

세리와 죄인들: 예수님께 목숨 걸고 가까이 밀착해 들어오는 [“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사랑의 결합을 보며 뒤로 물러서서 끊임없이 수군거리며 원망하는 [“διεγόγγυζον”(디에공귀존)]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뒤에서 멈추지 않고 수군거리는[“διεγόγγυζον”(디에공귀존)] 이들을 향해 돌아서시며, 그들의 굳어버린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 3가지 비유(잃은 , 드라크마, 탕자) 던지신 것입니다(인터넷).

 

·         교회 안에서 바리새인과 같은 교인들이 "죄인들"이라는 마음의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형제, 자매들에 대하여 뒤에서 멈추지 않고 수군거리는(디에공귀존) 있지는 않을까요?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질문자님의 통찰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서 '디에공귀존(뒤에서 끊임없이 수군거리는 행동)' 안타깝게도 너무나 생생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과거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세리와 죄인들을 희생양 삼아 수군거렸던 것처럼, 현대의 일부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신들의 의로움을 확인하기 위해 특정 형제·자매(동성애자, 혹은 교회의 고정관념에 맞지 않는 소외된 이들) 향해 마음의 성벽을 쌓고 뒤에서 멈추지 않고 불평의 말을 쏟아내곤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수군거리는 현장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셨을지, 누가복음 15장의 본문을 통해 그분의 명확한 가지 행동을 찾을 있습니다.

 

1.      수군거리는 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아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뒤에서 수군거리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피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비열하고 은밀한 속삭임(디에공귀존) 향해 똑바로 돌아서셔서 하나님의 진짜 본심이 무엇인지 폭로하는 비유(잃은 , 드라크마, 탕자)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뒤에서 수군거리는 교인들을 향해서도 너희가 거룩이라고 믿는 격리와 정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과 멀리 떨어져 있는가 엄중하게 책망하시며 그들의 영적 교만을 깨뜨리셨을 것입니다.

 

2.      수군거림의 대상이 이들의 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리면 수군거릴수록,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향한 '영접(접대)' '식탁의 교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비난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차가운 눈빛과 뒤에서의 수군거림 때문에 상처받고 소외된 형제·자매들의 곁에 끝까지 머무시며, ‘사람들은 너희를 죄인이라 부르며 멀리하지만(아피스테미), 나는 너희에게 가까이 다가가(엥기조) 너희의 친구가 되겠다 위로하셨을 것입니다.

 

3.      '찾아내는 기쁨의 잔치' 수군거림을 압도하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 비유의 공통된 결론은 이웃과 벗을 불러 모으고 즐거워하는 잔치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어둡고 은밀한 수군거림의 소리를, 잃어버린 자를 찾아낸 하나님의 기쁨의 노랫소리와 잔치의 환호성으로 덮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정죄의 언어를 멈추고, 영혼이 주님의 사랑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축제의 공동체' 되기를 요구하셨을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방법은 '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수군거리는 바리새인들을 똑같이 정죄하고 미워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을 아프게 지적하시면서도, 동시에 장벽을 깨뜨리는 압도적인 사랑의 실제를 몸소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인터넷).

 

(c)   마지막 셋째로, 저는 기록된 1-2 말씀을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었을 예수님께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라는 헬라어 “προσδέχεται”(프로스데케타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i)                  헬라어 단어는 기꺼이 맞아들이다”, “환영하다”, “용접하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동사 “προσδέχομαι”(프로스데코마이) 현재 시제 3인칭 단수 형태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해 "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라고 분노하며 원망 섞인 수군거리(디에공귀존) 채웠을 사용한 핵심 단어입니다.   단어가 가지는 깊은 의미는 다음과 같이 가지로 정리할 있습니다(인터넷):

 

1.      문법적 의미: 열려 있는 움직임 (현재 시제)

 

본문에서 단어는 현재 시제(Present Tense) 쓰였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는 지금 번만 일어나는 일회성 행동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며 평소의 습관처럼 행하는 " 뜻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어쩌다 한두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누구든지 찾아오기만 하면 언제나, , 기쁨으로 영접해 주시는 온전한 개방성과 환대의 " 살고 계셨음을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해 역설적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2.      단어의 결합: 마음에 때까지 끌어당기는 환대

 

단어는 '~ 향하여'라는 방향성의 접두어 “προσ”(프로스)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라는 뜻의 “δέχομαι”(데코마이) 결합한 강조형 단어입니다.

 

단순히 앞에 찾아온 사람을 마지못해 안으로 들여보내는 소극적인 영접이 아닙니다.

 

대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가 품에 안고, 자신의 가장 친밀한 안쪽 공간( 삶의 중심)으로 기쁘게 이끌어 들이는 인격적인 환대를 묘사합니다.

 

3.      문화적·종교적 충격: 동등한 자격을 부여함

 

당시 유대인들에게 누군가를 “προσδέχομαι”(프로스데코마이) 한다는 것은 사람을 자신과 동등한 사회적·종교적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라 불리는 예수가 부정한 자들을 거부감 없이 환영하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 식탁(음식) 차려 동등한 파트너로 맞아들이는 모습은 바리새인들에게 종교적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충격이자 분노의 원인이었습니다.

 

γγίζοντες”(엥기존테스) “προσδέχομαι”(프로스데코마이) 아름다운 연결

 

누가복음 15 1~2절의 단어들을 연결해 보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놀라운 구원의 역동이 완성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가까이 밀착해 나아왔고(γγίζοντες, 엥기존테스),예수님은 다가오는 그들을 명도 거절하지 않고 언제나 기쁨으로 품어 안으셨습니다(προσδέχεται, 프로스데케타이).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환대의 결합을 보며 뒤에서 끊임없이 수군거렸지만(διεγόγγυζον, 디에공귀존), 예수님은 뒤이어 나오는 가지 비유를 통해 “προσδέχεται”(프로스데코마이)(환대)야말로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목을 안고 잔치를 베푸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성품임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         예수님의 끊임없는 환대와 영접(프로스데케타이) 의미를 묵상할 , 오늘날 우리 교회가 소외된 이들을 향해 보여야 '진정한 환대의 성벽 허물기' 대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진정한 환대의 성벽 허물기', 안의 종교적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적극적 환대’[“προσδέχεται”(프로스데코마이)] 삶으로 번역해내는 작업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무엇을(정체성의 전환)' 해야 하고, '어떻게(실천적 지침)' 해야 하는지 헬라어 단어들의 의미를 담아 인공지는이 정리해 것입니다(인터넷):

 

1.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체성과 시선의 전환)

 

'심판자'에서 '목자와 여인, 아버지'로의 전환

 

우리가 해야 번째는 타인을 부정한 죄인으로 규정하고 정죄하던 '바리새인의 시선'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잃어버린 대상을 향해 애통해하고, 찾아냈을 다른 조건 없이 온전히 기뻐하는 '하나님의 마음' 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소극적 거룩'에서 '능동적 거룩'으로의 전환

 

오염될까 두려워 멀리 도망치던(아피스테미) 가짜 거룩을 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순결은 특정 소외 계층이나 동성애자와 접촉한다고 해서 훼손되는 연약한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그들의 삶에 유입되어 상처를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강력한 사랑의 전염력' 신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2.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삶의 실천)

 

관계적 '엥기조(γγίζω)': 안전거리 유지를 포기하라

 

행동: 교회 안팎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성소수자, 탈북민, 장애인, 이주노동자 ) 나와의 사이에 두었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좁혀야 합니다.

 

방법: 그들을 '연구 대상'이나 '계도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삶의 자리로 직접 찾아가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고통과 눈물 섞인 이야기를 아무런 판단 없이 끝까지 들어주는 경청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조건적 '프로스데코마이(προσδέχομαι)': 식탁의 장벽을 허물라

 

행동: 예수님이 죄인들과 음식을 같이 드셨던 것처럼, 삶의 가장 친밀한 공간인 '식탁' 그들에게 개방해야 합니다.

 

방법: "네가 먼저 변하면 받아주겠다" 조건부 수용이 아니라, "너는 지금 모습 그대로 식탁에 앉아 환대받을 자격이 있는 존귀한 형제, 자매다"라는 선언을 몸소 보여주는 것입니다.   , 끼를 함께 먹으며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꺼이 초대해야 합니다.

 

단호한 '디에공귀존(διεγόγγυζον)' 거부: 수군거림의 사슬을 끊으라

 

행동: 교회 공동체 내부에 만연한 은밀한 혐오와 정죄의 언어에 가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방법: 단체 대화방이나 소그룹 모임에서 특정 대상을 향한 비난과 수군거림이 시작될 , 동조하지 않는 것을 넘어 "예수님이라면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라며 대화의 흐름을 거룩한 환대로 돌려놓는 용기 있는 마중물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성벽을 허문 자리에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바리새인들이 만든 성벽은 사람을 가두고 쫓아냈지만, 예수님이 만드신 식탁은 모두를 살렸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진정한 환대는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이번 교회에서 아무도 곁에 앉으려 하지 않는 사람, 뒤에서 수군거림을 당하는 누군가의 곁에 다가가 기꺼이 자리를 함께해 주는 , 그것이 바로 2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셨던 '프로스데케타이'(적극적 환대) 살아있는 재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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