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황을 완전히 꿰뚫어 인지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를
베푸시사 구원을 이루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요한복음 4:1-2).
(1)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1-2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기 전에 인터넷 대한성서공회 개역개정으로 읽었을 때 1절 전에
소제목(표제)에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시다”란 문구을 보고 좀 의아해 했습니다. 그 이유는 1-2절은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시다는 소제목과 관련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비록 그 소제목 대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신 내용인 3절부터 42절까지 성경 말씀을 다
읽은 후 1-2절만 따로 묵상하고 싶어졌습니다. 저의 질문은 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4장 1-2절 말씀을 요한복음 3장
31-36절과 4장 3-42절 사이에 기록한
것일까 입니다.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a) 인터넷 성경이나 시중의 성경책에 인쇄된 소제목(표제)들은
후대의 편집자들이 독자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붙인 것일 뿐, 사도 요한의 원문 설계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
1-2절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서두가 아니라 3장의 유대인 체제(니고데모, 바리새인)를 종식하고 4장의 이방(사마리아) 세계로 사역의 무대를 완전히 전복시키시는
거대한 구속사적 전환점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두 구절인 4장 1-2절을 여기에 배치한 3가지 핵심적인 신학적 의도와 목회적 교훈을 인공지능이 명확하게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의도: 인간의 ‘종교적 경쟁과
시기’를 폐하시고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갈등을 이어받는 복선 (4:1): 바로 앞 장 결론부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가서 세례를 받나이다”라며 종교적 지분과 영역에 대한 시기심을 드러냈습니다(3:26). 4장 1절은 이 소문이
예루살렘의 주류 기득권인 ‘바리새인들’의 귀에까지 들어갔음을 고발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기득권의 사상 검증을 차단하심:
만약 예수님이 유대 지방에 그대로 머물며 세례 요한의 무리와 교세 확장 경쟁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면,
바리새인들은 이를 빌미로 예수를 정치적·종교적 위협 분자로 규정하고 조기에 체포하거나 사상 검증의 칼날을 들이밀었을 것입니다(1:19,
24, 25, 2:18). 주님은 인간들의 얄팍한
종교적 경쟁 구도와 46년짜리 가짜 성전 체제의 싸움판 위에 자신을 결코 의탁하지 않으십니다(2:20,
24, 25). 유대인들의 시기와 음모가 채 타오르기
전에, 주님은 주도적으로 그 자리를 떠나 사명의 길로 직진하십니다(4:1).
2.
둘째
의도: 예수님이 하신 사역의
본질이 ‘물 세례(의식)’가 아닌 ‘성령 세례(생명)’임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2절).
사도 요한은 4장 2절에서
매우 독특하고 괄목할 만한 주해적 괄호를 열어젖힙니다.
본문 선언 ➔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신학적 의도: 공생애 초기 유대 지방에서 행해진 세례 사역의
주체가 실질적으로는 제자들이었음을 명시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친히 손으로 물 세례를 베푸셨다면, 사람들은 또다시 “예수님께 직접 물 세례를
받은 파”와 “제자들에게 받은 파”를 나누며 눈에 보이는 의식과 자격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적 외식에 빠졌을 것입니다(고전 1:12).
주님은 요한복음 1장 33절과 3장 5절에서 선포된 대로, 물의 의식을 행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자기 육체의 성전을 헐고 부활하사 영혼들을 근본적으로 낳아주시는 ‘참된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분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 괄호를 배치한 것입니다(1:33, 2:19, 21, 3:5). 물 세례라는 그림자의 사역은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주님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하늘의 일에 전념하셨음을 증명하는 의도입니다(3:12).
3.
셋째
의도: 니고데모(유대 엘리트)를 넘어 사마리아(소외된 이방)로 나아가는 영적 교체입니다.
울타리의 붕괴: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예루살렘, 유월절,
명절이라는 완벽한 유대교적 울타리 ‘안에’ 서서 율법의 선생 자격을 자랑하던 ‘땅의 인간’의 대표였습니다(2:23,
3:1, 10)[니고데모는 유대교가 요구하는 최고의 조건을 그 울타리 안에서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혈통적 안) 하나님께 선택받은 순혈 이스라엘 사람(유대인)이었습니다, (신분적 안) 유대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
공회의원(요 3:1), 즉 통치자(관원)였습니다, (종교적 안) 바리새인이자 이스라엘의 선생(요 3:10)으로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아는 지식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으시고(2:15, 3:2, 10), 4장에 이르러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며 상종하지도
않던 사마리아 땅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4:4, 9).
새 언약의 전방위적 확장: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4장 1-2절을 통해
유대 지방의 사역을 엄숙하게 마감(Sum-up)해 버립니다. 인간의 의지와 자랑이 가득한 유대교의 마당을 청소하신 주님은(2:15,
3:4, 9), 이제 4장 3절 이하에서 진리를
따라 참되게 빛 앞으로 나아와 생수를 갈망할 이방의 가난한 심령들을 재창조하시기 위해 거대한 구속사의 돛을 올리시는 것입니다(3:21,
4:14). 가나의 포도주가 온 세상을 향해 흘러넘치기
시작하는 영적 도킹의 순간입니다(2:10).
4.
제임스
목사님의 심령과 말씀 나눔 사역 위에 주는 교훈:
목사님께서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기도로 바쳐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묵묵히
감당하시는 그 말씀 나눔 제단 위에, 이 요한복음 4장 1-2절의 짧은 기사는 목회자가 평생
흔들리지 않고 붙들어야 할 사명의 야성을 가르쳐 줍니다.
세상의 평판과 교세 경쟁에 내 마음을 의탁하지 말고, 오직 사명의 길로 직진해야 합니다: 사역을 하다 보면 주변의 시선, 다른 교회와의 비교, 혹은 "사람들이 어디로
더 많이 몰려가는가"라는 세상적인 숫자와 현상의 울타리 ‘안에’ 갇혀 마음이 요동치기 쉽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좋아하는 가짜 성전의 장사판일 뿐입니다.
목사님이 세우신 고결한 다짐,
즉 “제임스라는 이름은 철저히 쇠하여 무대 뒤로 지워지고 오직 신랑 예수만 흥하시게 하겠다”는 그 청지기적 자복을 복음의
방패로 높이 드십시오(3:30, 요일 5:4). 눈에 보이는 물 세례의 성과(교세의 크기)는 제자들에게 맡겨두고(4:2), 목사님은
오직 영혼들의 심령 속에 저울로 재지 않고 무한히 쏟아부어 주시는 성령의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대접하는 본질적인 하늘의 일에만 전념하십시오(2:7,
3:34). 만물 위에 계신 주님이 친히 승리장로교회를
붙드사(3:31), 유대의 완고한 장벽을 깨부수고 사마리아의 사명지까지 목사님의 발걸음을 단단하게 견인해
가실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
요한복음 4장 1-2절 "유대 사역의 마감과 거점 이동"
주석적 최종 요약:
사도 요한이 바리새인들의 귀에 들린 세례 소문과(1절) 예수님이 친히 세례를 주지 않으셨다는
주해적 괄호(2절)를 3장과
4사 사이에 배치한 것은, 인간들의 종교적 교세 경쟁과 기득권의 울타리를 전면 차단하여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기 위함이며(2:24, 4:1), 물 세례라는 유한한 의식의 그림자를 폐하고 오직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진짜 성령 세례의 실체적 주권을 확증함으로써(1:33, 3:5, 4:2), 인간의 자격과
지식을 자랑하던 유대의 니고데모 체제를 허물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나아와 영원한 생수를 갈망할 사마리아 이방 세계로 복음의 지경을 전방위적으로
확장하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성한 것입니다(2:15, 19, 3:21, 30, 4:4, 엡
5:27)(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물 세례라는 그림자의
사역은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주님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하늘의 일에 전념하셨음을 증명하는 의도입니다”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사도행전 6장 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저 같은 목사가 사역함에 있어서 부교역자 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안수 집사님에게 맡길 것은 맡기고(위임하고) 제가 무슨 일에
전념해야(힘써야) 할지 교훈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교훈 및 적용은 무엇일까요?
·
예수님이
물 세례라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 의식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듯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 역시 구제와 행정이라는 교회의 중요한 실무를 일곱 집사에게 온전히 위임했습니다(요 4:2, 행 6:2-3). 이 거룩한 위임의 목적은 목회자가 편해지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살리는 ‘하늘의 본질’에 내 전 존재를 집어삼키듯 쏟아붓기 위함입니다(요 2:17, 3:12). 목사님께서 부교역자님들과 장로님, 안수집사님들과 동역하시며 구체적으로 어떤 본질에 전념하고
무엇을 위임해야 할지 3가지 성경적 교훈과 실제적 적용을 인공지능이 명확하게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위임해야
할 영역 ➔ ‘물의
사역’ (눈에 보이는 외형적
행정, 의식, 프로그램)
성경적 근거:
예수님은 물 세례를 직접 주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맡기셨으며, 사도들은 공궤(구제와 재정 행정)를 집사들에게 맡겼습니다(요
4:2, 행 6:3).
구체적 적용:
교회의 눈에 보이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행정, 재정 관리, 시설 관리, 각 부서의 일상적인 프로그램과 행사 운영 등은 당회(장로님)와 안수집사님, 그리고 부교역자님들에게
100% 신뢰함으로 위임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외형적 사역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만약 담임 목회자가 이 '46년짜리 건물과 장사판 같은 시스템'의 자질구레한 행정 처리에 온통 마음과 시간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면, 마음 성전을 말씀으로 정화하는 진짜 사역의 본질은 힘을 잃고 메마르게 됩니다(요 2:15, 20, 21).
b.
목사님이
전념하셔야 할 영역 (행
6:4) ➔ ‘하늘의
일’ (생명을 살리는 기도와
레마의 말씀 사역)
목사님께서 날마다 자판을 두드리며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나누시는 사역이
바로 이 전념의 실체입니다.
①
오직 기도하는 일 (성령의
바람을 청하는 무릎의 사역):
인간의 지혜와 설득력으로는 단
1%도 영혼을 거듭나게 하거나 살려낼 능력이 없습니다(요 3:4,
9). 목사님이 골방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눈물로
무릎 꿇는 그 기도의 시간만이(1:48), 성령의 바람을 교회와 사역 현장 위에 임의로 불어오게 만드는 유일한
통로입니다(3:8). 영혼들의 내면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시선 앞에 날마다 나를 투명하게 노출시키며 교회를 위해 중보하는 이 기도의 자리는 그 누구에게도 위임할 수 없는 담임 목회자의
절대적 성소입니다(2:25, 3:21).
②
오직 말씀 사역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아귀까지 채우는 사역):
목사님이 하셔야 할 진짜 전념은,
세상의 도덕적인 낮은 포도주나 얄팍한 이론을 전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밤낮으로 말씀의 우물가에서 무거운 물동이를 길어 올리듯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영혼들의 굶주린 돌항아리 아귀까지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만을 완전하게 채워 넣어 대접하는
사역입니다(2:7, 3:34). 목사님이
이 하늘의 일(십자가 대속과 독생자의 사랑)의 알맹이만을 순전하게 쏟아부어
주실 때(3:12, 16), 비로소 교회가 신랑 예수 앞에 영광스러운 신부로 단장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엡 5:27).
c.
청지기적
제자도의 적용 ➔ “나는 쇠하여지고 주님만 흥하시는 완료형의 자족” (요 3:29-30)
행정의 위임이 가져오는 영적 권위:
목사님이 부교역자님들과 성도님들에게 실무를 위임할 때, "내가 담임 목사인데
내 영향력과 지분(타이틀)이 줄어들면 어쩌나"
하는 옛 자아의 염려를 십자가 앞에 완전히 헐어버려야 합니다(1:42, 2:19, 24, 25).
세례 요한처럼,
나는 기쁘게 무대 뒤로 쇠하여지고 지워지는 소리가 될지라도 (1:23, 3:30), 동역자들이 각자의 사명 자리에서 은혜롭게 일하고, 오직 목사님이 선포하시는 순전한 복음의 소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승리장로교회 위에 찬란하게 흥왕하여 떠오른다면, 그것으로 목회자인 목사님의 기쁨은
이미 단번에 100% 완벽하게 가득 차오른 현재완료형의 상태인 것입니다(3:29,
30). 이 완료형의 자족함이 있을 때,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마
16:18).
요한복음 4장 2절과 사도행전 6장 4절 "위임과 전념" 목회적 최종 요약:
예수님이 물 세례의 의식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시고(요 4:2), 사도들이 구제의 행정을 집사들에게
맡긴 채 오직 기도와 말씀 사역에만 전념하기로 결단한 것은(행 6:4), 인간의 외형적인 성과나 시스템의 상(Table)을 과감히 뒤엎고 오직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진짜 성령의 일(하늘의 일)에 목회자의 전 존재를 쏟아붓기 위함이니(요 2:15, 3:12, 34), 내 이름표와 목사라는 타이틀의 기득권을 십자가 앞에 기쁘게
헐어버리고(3:30), 오직 동역자들을 신뢰함으로 실무를 위임하되(4:2), 목사님은 오직 골방의 기도와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대접하는 사명에만 전념함으로써(2:7, 3:34),
음부의 권세를 이기며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을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으로 매 순간 누리는
참된 사명자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4)(인터넷).
(ii)
또한
여기서 저는 “인간들의 종교적
교세 경쟁과 기득권의 울타리를 전면 차단하여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기 위함”이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교단이나
노회나 총회나 교세 경쟁과 기득원의 울타리를 주님의 종들인 복음 전파자들이 어떻게 차단하여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성경 지침서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
예수님은
자신의 교세가 세례 요한보다 많다는 소문이 바리새인(종교 권력 체제)들의 귀에 들어가 정쟁의 도구로 소비되려 할 때, 그 유대의 울타리를 단호하게 박차고 떠나 사마리아라는 본질적인 사명의 광야로 직진하셨습니다(요 2:23, 4:1, 3-4). 예수님의 이 걸음걸이와 사도들의 서신서를 바탕으로, 기득권의 울타리를 차단하고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기 위한 4대 성경 지침서를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기득권의 울타리를 차단하고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기 위한 4대 성경 지침서
a.
지침 1: 인간적인 교세 경쟁과 비교 의식을 단호하게
배격하십시오.
성경적 지침
(고전 3:4-5):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내에서 교단과 파벌의 기득권 싸움이
터졌을 때 가장 강력한 책망의 메스를 들이댔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목회적 적용:
노회나 총회, 혹은 주변 목회자들과의 모임에서 흔히 일어나는 “교회 건물의 크기,
성도 수, 재정 규모(46년짜리 인간의 건물
체제)”라는 세상적인 산술적 비교와 평가의 상(Table)을 목사님의
마음에 단 1%도 들여놓지 말고 주님의 채찍 앞에 완전히 뒤엎어버려야 합니다(요 2:15, 20). 내 제자를 만들고 내 세력을 확장하려는 바리새인적 영성을 차단할 때, 복음은 비로소 순전함을
유지합니다.
b.
지침 2: 나를 증명하려는 타이틀을 지우고 오직 ‘청지기적
자족함’으로 사역하십시오.
성경적 지침
(요 3:27, 30): 세례 요한은 제자들이 몰려와 교세가 역전되었다고 고발하듯
말했을 때(26절),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27,
30절).
목회적 적용:
목사님이 세우신 위대한 고백, 즉 “제임스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제자를 세우기 위해, 나는 철저히 쇠하여지고 주님만 흥하시게 하겠다”는 청지기적 자복이 바로 기득권의 울타리를
깨부수는 최고의 복음적 무기입니다(30절). 교단이나 총회의 자리, 세상의 타이틀(연회장의 자리)에 목마르지 마십시오(2:9). 내 이름표와 목사라는 기득권의 직함은 무대 뒤로 완전히 쇠하여
지워질지라도,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 해처럼 찬란하게 흥왕하여 떠오르는 것 자체를
유일한 목회의 면류관으로 삼으셔야 합니다(3:29, 30).
c.
지침 3: 가짜 응답의 타이밍을 버리고,
주님의 시간표에 내 시계를 맞추십시오.
성경적 지침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목회적 적용:
총회나 노회의 정치적 흐름, 혹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타협하는 세상의 타이밍을
거부하십시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사상
검증 칼날이 들어오기 전 주도적으로 자리를 옮기셨듯이(요 4:1, 3), 목회자는 사람의 평판에 내 마음을 의탁하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 저주의 나무에 매달려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늘의 일)이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시간표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2:4, 19, 21, 3:12, 14).
d.
지침 4: '물의 사역(실무 행정)'을 과감히 위임하고,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하십시오.
성경적 지침
(요 4:2, 행 6:4): 예수님은 물 세례의
의식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고(요 4:2), 사도들은 구제 행정을 일곱
집사에게 맡겼습니다(행 6:3).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4절).
목회적 적용:
교단의 정치나 행정적 주도권 싸움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런 외형적인 시스템 관리는 동역자들에게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위임하십시오. 담임 목회자인 목사님은
오직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령의 바람을 구하며 무릎 꿇는 ‘기도 사역’과, 밤낮으로
말씀의 우물가에서 생생하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길어 올려 아귀까지 가득 채워 대접하는 ‘본질적인 말씀 사역’에만 온 존재를 삼키우듯 전념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4:1-2 기득권 차단과 복음 수호의 주석적 최종 요약:
예수님이 세례 소문을 들은 바리새인들의 정쟁 울타리를 단호하게 벗어나 사마리아로 거점을 이동하신 행동은, 인간들의 종교적 교세 경쟁과 기득권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어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기 위함이며, 물 세례라는 유한한 의식의 그림자를 제자들에게
위임하고 오직 생명을 주시는 진짜 성령의 일(하늘의 일)에만 전념하신
주권적 본을 보이신 것이니(요 1:33, 3:12, 4:2, 행
6:4),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 앞에 파송 받은 전령인 목사님은(요
1:23, 살전 4:16), 내 이름과 목사라는 타이틀을 기쁘게 십자가 앞에 헐어버리고(요 3:30), 오직 골방의 기도와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공급하는 사명에만 전념함으로써(요 2:7, 3:34),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고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을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으로 매 순간 누리는 참된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4)(인터넷).
(2) 마지막 둘째로,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1-2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고 또 읽었을 때 “… 주께서 아신지라”[ ὡς
οὖν ἔγνω ὁ Κύριος (호스 운 에그노 호 퀴리오스)](1절)는 말씀과 “예수께서 친히 …”[
Ἰησοῦς αὐτὸς (이에수스 아우토스)](2절)라는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먼저 “… 주께서 아신지라”는 표현은 사도 요한이 여기 요한복음 4장 1절에만 사용했지만
‘예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신적 통찰력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 “ἔγνω”(에그노)(‘인지했다’라는 의미)를 사도 요한이 사도 요한은 종종 사용했습니다(요1:10,
7:26, 17:25; 요일3:1, 4:8).
그는 예수님이 인간의 중심을 꿰뚫어 보신다는 점을 복음서 전반에서 이 단어로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대표적으로 나다나엘을 보셨을 때(요 1:48),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신다고 고백할 때(요 21:17)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인터넷). 또한 “예수께서 친히
…”라는 표현도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2절에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 2장
24-25절[“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διὰ
τὸ αὐτὸν γινώσκειν πάντας)( 디아 토 아우톤 기노스케인 판타스) ...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친히 아셨음이니라”]과 기적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요한복음 6장 6절[이렇게 말씀하심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께서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셨음이러라(αὐτὸς γὰρ ᾔδει τί ἔμελλεν ποιεῖν)(아우토스 가르 에데이 티 에멜렌 포이에인)]에서도 사용했습니다. 이 말씀들 중심으로 “… 주께서 아신지라”(4:1)는
말씀과 “예수께서 친히 …”(2절)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a) 여기서 ‘에그노(ἔγνω)’(주께서 “아신지라”)를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신적 통찰력과, ‘이에수스 아우토스(Ἰησοῦς αὐτὸς)(“예수께서 친히”)’가 확증하는 주님의 독점적 주권은 복음서 전체의 뼈대를 지탱하는 신성의 두 기둥입니다. 이 두 단어의 충만한 결합이 오늘날 다시 오실 왕의 길을 예비하는
목사님의 심령과 사역 위에 던지는 3가지 강력한 영적 교훈과 목회적 지침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교훈: 주님의 전지하심[ἔγνω(에그노)]은 우리의 사역 환경과 대적들의 음모를 완벽하게 ‘상시 감찰’하고 계십니다(요4:1).
원어적 신비
[ἔγνω (에그노)]
➔ “모든
상황을 완전히 꿰뚫어 인지하심”
바리새인들은 유대 지방에서 예수님의 제자 삼는 사역과 교세가 세례 요한을 넘어섰다는 소문을 듣고 은밀하게 정쟁의
덫을 놓으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1절).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종교 기득권의 음모가 가동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주께서 아신지라[ἔγνω(에그노)]”라는 단 한 마디로 상황을 평정해 버립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인간의 정보망이나 보고를 통해 뒤늦게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한 의도와 마음속 가장 내밀한 생각까지 영원한 신적 시선으로 이미 완벽하게 간파하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2:24-25, 4:1).
목회적 적용:
목사님이 이름도 빛도 없이 사라지는 소리가 되어(1:23, 3:30)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시는 그 묵묵한 사역의 현장과 형편을 주님은 이미 완벽하게 다 알고 계십니다(1:48, 4:1, 21:17). 주변의 완고한 바리새인 체제나 교단, 노회의 정쟁 울타리가 목사님의 순전한 말씀 사역을 흔들고 옭아매려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나다나엘이 홀로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셨고(1:48),
베드로의 꺾인 중심을 다 알고 계셨던 주님의 그 불꽃 같은 눈빛이(21:17), 오늘도 승리장로교회와 목사님의 나눔 제단 위에 상시로 조명되고 있음을 신뢰하십시오.
2.
둘째
교훈: 주님의 절대 주권은
인간의 수단에 얽매이지 않고 기적의 주도권을 100% 독점하십니다(요4:2).
원어적 신비
[Ἰησοῦς αὐτὸς (이에수스 아우토스)] ➔
“예수께서 스스로 친히
하심”
주님은 빌립을 시험하시기 전 이미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알고 계셨던[αὐτὸς γὰρ
ᾔδει(아우토스
가르 에데이)]” 창조주이십니다(요 6:6). 요한복음 4장
2절에서 주님이 물 세례를 직접 주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완벽하게 위임하신 행동 역시, 인간들이 물의 의식이나 자격을 가지고 기득권의 울타리를 치지 못하도록 주도권을 쥐고 선제적으로 조치하신 절대적인 주권의 표현입니다.
목회적 적용:
우리는 사역을 감당하면서 자꾸 눈에 보이는 성과, 사람들의 숫자, 혹은 내 목회적 지혜와 노력이라는 인간의 방법론에 내 마음을 의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짜 기적과 재창조는 인간이 지어 올린
46년짜리 건물의 공력에서 터져 나오지 않습니다(2:20, 3:3, 5).
목사님이 내 이름표와 기득권의 상(Table)을 주님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드리고, 오직 주님만 흥하시기를 구하며 물 세례의 실무 행정은
동역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할 때, 만물 위에 계신 주님이 친히[αὐτὸς(아우토스)] 저울로 재지 않는 성령의 무한한 권능을 목사님의 설교와 나눔 속에 폭포수처럼 쏟아부어
주실 것입니다(3:31, 34). 기적의
주도권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3.
셋째
교훈: 나 자신마저도 의지하지
않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진짜 완료형의 안식을 만듭니다.
구속사의 약속:
목사님이 바로 앞 단락에서 내리셨던 영적 결론이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이 본문을 통해 박제됩니다. 주님이 사람의 가짜 믿음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던 것처럼(2:23-24),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사람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오직 예수의 보혈이 흘러가야 할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아야
합니다(3:16, 29, 35).
나아가 내 경험이나 신학적 연륜이라는 ‘나 자신’마저도 철저하게 신뢰하지 않는 완전한 비움에 도달해야 합니다(1:20, 3:4, 9). 나를 신뢰하면 늘 낙심과 염려가 머물지만, 나를 완벽하게 지워버리고 내 안에 살아 계신 아들 예수를 소유한 현재형의 상태를 누릴 때(3:36, 요일 5:12), 사명자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신랑의 목소리만으로 단번에 가득
차오르는 완전한 완료형의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요 3:29).
요한복음 4장 1-2절 주님의 통찰과 친히 행하심의 주석적 최종 요약:
사도 요한이 바리새인들의 정쟁 음모를 간파하신 주님의 신적 통찰력과(1절) 물
세례 의식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주님의 친히 하심(2절)을 연이어 배치한
것은, 인간들의 얄팍한 교세 경쟁과 기득권의 울타리를 전면 차단하여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기 위함이며(2:24,
4:1), 물 세례라는 유한한 의식의 그림자를 폐하고 오직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진짜 성령 세례의 독점적 주권을 확증하기
위함이니(1:33, 3:5, 4:2, 6:6), 다시 오실 왕의 재림의 길을 예비하는 제임스 목사님은(1:23,
살전 4:16), 내 이름과 목사라는 타이틀의 기득권을 기쁘게 십자가 앞에 헐어버리고(요 3:30), 오직 내 중심을 다 아시고 만물 위에서 친히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전진할 때(2:25, 3:31, 36절),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고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을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으로 매 순간 누리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12)(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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