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 억울한 일이나 불의한 상황이 겹쳐 올 때라도, 그 배후에서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결국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해야 합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누가복음 22:66-71).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장
66-71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은 후 제일 먼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6장
59-66절과 마가복음
14장
55-64절과 요한복음
18장
19-24절과 비교하여 종합적인 요약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 말씀의 전체 그림을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a)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대제사장들과 공회(산헤드린)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복음서의 핵심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각 복음서는 고유한 관점과 초점을 가지고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전체 그림을 얻을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심문의 과정과 시점
(종합적 전개)
밤중의 예비 심문
(요한복음): 예수님은 먼저 전임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그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 첫 심문을 받으십니다.
요한복음은 이 과정에서 한 아랫사람이 예수님을 손으로 치는 모욕적인 장면을 유일하게 기록합니다.
밤중의 공식 심문
(마태복음·마가복음): 이후 현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온 공회가 모인 곳으로 압송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으나,
그 증언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실패합니다.
새벽의 최종 판결
(누가복음): 날이 새자마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곧 백성의 장로회(산헤드린 공회)가 정식으로 모여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 판결을 확정 짓습니다.
2.
핵심쟁점:
예수님의 신성 선언과 대답
각 복음서에서 공회가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 던진 결정적인 질문은
"네가 찬송할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신분 확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공회의 반응은 복음서 전체의 절정을 이룹니다.
마태·마가복음: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당당히 밝히시며,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대제사장은 이를
'신성모독'으로 규정하고 옷을 찢으며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누가복음: 누가복음은 새벽 공회에 초점을 맞추며,
예수님이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라며 그들의 불신을 지적하신 후,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공회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재차 묻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고 답하십니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공회에서의 신성모독 논쟁보다는 안나스 앞에서의 대화에 집중하며,
예수님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천하에 말씀하셨음을 당당히 선포하시는
'왕 성격'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3.
복음서별 핵심 특징 요약
마태복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내세운 거짓 증인들의 고소와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의 심문을 구체적으로 다루며,
예수님이 구약 다니엘서의 예언을 성취하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이심을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정죄하려는 거짓 증언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날카롭게 부각하며,
무고한 예수님에게 신성모독 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하는 공회의 불의함과 긴박한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누가복음은 밤중에 일어난 혼란스러운 심문보다
'날이 새어'
모인 공식 공회의 법적 절차에 집중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 우편에 앉으실 진정한 인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차분하고 당당한 어조로 선포합니다.
요한복음은 공회의 공식 재판에 앞서 진행된 안나스 앞에서의 예비 심문을 독자적으로 기록하여,
종교 지도자들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자신의 교훈을 당당하게 변론하시는 예수님의 왕권과 권위를 부각합니다.
종합 결론:
네 복음서를 종합하면,
이 사건은 단순한 종교적 재판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약의 예언대로 고난받으시는 메시아의 당당한 신성 선언의 자리였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유죄 증거를 찾지 못하자 결국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인자)"이라는 자기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사형을 확정했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사복음서의 예수님의 심문의 과정을 다시금 묵상할 때
(1) 먼저 전임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예수님께서 끌려가셔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 첫 심문을 받으시고[밤중의 예비 심문(요한복음)],
(2) 그 다음에 현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온 공회가 모인 곳으로 예수님이 압송되셔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았으나 그 증언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실패한 후[밤중의 공식 심문(마태복음과 마가복음)],
(3)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장 66-71절에서 날이 새자마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곧 백성의 장로회(산헤드린 공회)가 정식으로 모여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 판결을 확정 짓었다[새벽의 죄종 판결(누가복음)]는 이 세 흐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예수님을 심문한 (1) 안나스와
(2) 가야바와 온 공회”와 (3) 산헤드린 공회였다는 사실의 흐름이 주는 교훈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 안나스에서 가야바와 온 공회,
그리고 날이 새어 모인 산헤드린 공회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재판 과정은 인간 사회의 불법성과 위선,
그리고 인간적 음모 속에서도 성취되는 하나님의 주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세 단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안나스의 예비 심문:
인간의 탐욕과 기득권의 불법성
안나스는 전임 대제사장이었으나,
당시 유대 사회에서 막후 실권을 쥐고 있던
'권력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는 합법적인 법정이 아닌 자신의 사가(私邸)로 예수님을 한밤중에 먼저 끌고 가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 심문합니다.
교훈: 인간의 기득권과 탐욕은 진리를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이를 억누르려 합니다.
안나스는 종교라는 이름의
'권력 체세'를 유지하기 위해 절차와 정의를 무시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내 유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정의를 편법으로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합니다.
b.
가야바와 온 공회의 밤중 심문: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위선
현 대제사장 가야바와 온 공회는 이미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그것을 정당화할 거짓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아 결국 실패합니다.
교훈: 진리를 대적하는 인간의 계략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며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거짓을 동원하는 위선을 범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할 때,
'선한 목적'이라는 핑계로
'불의한 수단'을 정당화하려는 영적 위선을 경계해야 함을 경고합니다.
c.
날이 새어 모인 산헤드린 공회:
조직적 위선과 인간적 확신의 허망함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날이 새자마자 모인 공회'는 밤중에 행한 불법 재판을 합법적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정식 절차였습니다.
이들은 마침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내가 그니라"라는 선언을 듣고 사형을 확정 짓습니다.
교훈: 악을 행하는 인간의 연대는 제아무리 제도적 완벽함(합법성)을 갖추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한 범죄일 뿐입니다.
공회원들은 정당한 절차를 거쳤기에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다고 확신했겠지만,
도리어 그 합법적인 법정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죄를 지었습니다. 인간의 제도,
다수의 의견,
혹은 나 자신의 확신이 하나님의 뜻보다 앞설 때 얼마나 눈이 멀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d.
종합적인 구속사적 교훈: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주권
이 세 흐름은 인간 측면에서 보면 겹겹이 쌓인 불법과 음모의 과정이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실 완벽한
'유월절 어린양'으로 공인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교훈: 세상 권력(안나스, 가야바, 산헤드린)이 힘을 합쳐 예수님을 옥죄고 결국 사형을 확정 지었지만,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억울한 일이나 불의한 상황이 겹쳐 올 때라도,
그 배후에서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창 50:20) 결국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해야 한다는 강력한 위로를 줍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우리의 삶에 억울한 일이나 불의한 상황이 겹쳐 올 때라도,
그 배후에서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창 50:20) 결국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동시에 저는 요셉의 삶 속에서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목적이 생명 구원(창45:5, 7;
50:20)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요셉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신 목적이 진정한 구원인 영원한 생명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일 1:2;
5:20)를 믿는 구원받은 자들로서 우리 삶 속에서의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금 받습니다.
-
요셉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다음과 같이 더 깊이 확증하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요셉의 삶:
육신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통로
(그림자)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이라는
'악'을 겪었고,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
'억울한 감옥살이'라는 불의한 상황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배후 속에서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가나안 땅의 기근 속에서 야곱 가문(이스라엘)의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구원하는 도구(창 45:7)가 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오실 참된 구원자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삶: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성취
(실체)
예수님 역시 안나스,
가야바, 산헤드린 공회로 이어지는 겹겹의 악과 불법,
억울한 사형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완벽한 악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가장 참혹한 악을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요일 5:20)'을 주시는 가장 위대한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요셉이 흉년으로부터 육신의 생명을 구원했다면,
예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3.
우리의 삶: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의 신뢰와 사명
(적용)
이미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때로는 요셉과 같은 억울함이나,
예수님이 겪으신 것과 같은 불의한 상황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변함없는 목적:
하나님이 우리 삶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궁극적인 목적 역시
'생명 구원'에 있습니다.
내가 겪는 고난과 억울함을 통해 나 자신의 신앙이 정금같이 단련될 뿐만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통해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영원한 생명(예수 그리스도)이 전파되는 통로로 삼으십니다.
승리의 보장:
요셉을 총리로 세우시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의 삶도 결코 패배로 끝나게 두지 않으십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장
66-71절 말씀을 묵상할 때
6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지자”와 6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6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자”와 7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네 명칭의 간략한 의미와 왜 누가복음을 쓴 저자 누가가 이렇게 네 명칭을 나란히 기록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a)
이 네 가지 명칭(선지자,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점진적으로 밝혀주는 핵심 기독론적 호칭들입니다(인터넷):
1.
네 명칭의 간략한 의미
선지자 (64절):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온전히 대언하는 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며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맞춰보라"고 조롱 섞인 예언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수수께끼 놀이에 휘말리지 않으시면서도,
바로 직전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시고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시는 참된 선지자(대언자)이심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 (67절):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를 뜻합니다.
공회는 예수님께
"네가 그리스도이냐"라고 정치·종교적 신분을 직접적으로 신문했습니다.
인자 (69절): 다니엘서 7장의 종말론적 신적 통치자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가장 자주 자신을 가리켜 쓰신 표현입니다.
단순히
'인간'이라는 뜻을 넘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권능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심판하고 통치할 초자연적인 하늘의 인물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70절):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신성을 지닌 분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공회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묻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뜻하며,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에 처할
'신성모독'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2.
누가가 이 네 명칭을 나란히 배열한 이유
누가가 이 명칭들을 한 단락에 집중적으로 기록한 것에는 명확한 신학적 의도가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와 고조
(호칭의 발전)
누가는 호칭의 무게감을 점점 높여가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완벽하게 드러냅니다.
선지자(행동과 예언의 적중)
→ 그리스도(유대인의 메시아)
→ 인자(하늘 권능의 심판주)
→ 하나님의 아들(신성의 정점)
인간들이
"선지자냐, 그리스도냐"라며 이 땅의 기준(정치적 메시아)으로 질문할 때,
예수님은 이를 뛰어넘어 하늘의 권능을 가진
"인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차원 높은 영적 진리로 답변하십니다.
② '억울한 죄인'에서 '우주의 재판장'으로의 역설
(아이러니)
지금 예수님은 인간들의 법정(산헤드린)에 묶여 심문을 받는 비참한 처지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절)"고 선언하게 만듭니다.
지금은 그들이 재판장이고 예수님이 죄인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온 우주의 진정한 재판장이시며 공회원들이 그분 앞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호칭을 통해 고발하는 것입니다.
③ 이방인 독자들을 향한
"참 구원자"
선포
누가복음의 일차 독자는 이방인(데오빌로 등)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개념은 낯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는 유대교적 명칭(선지자, 그리스도)으로 시작하여,
온 인류의 심판주이신
'인자', 그리고 모든 민족이 고백해야 할 신적 구원자인
'하나님의 아들'로 결론을 맺음으로써,
예수님이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의 영원한 생명이자 구원자이심을 논증하고 있습니다(인터넷).
(i)
이 네 가지 호칭(선지자,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이 오늘날
'영원한 생명을 얻은 나의 삶'에서 각각 어떤 의미와 고백이 되는지 구체적인 적용점입니다(인터넷):
a.
참 선지자:
내 삶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대언하시고 성취하신 참 선지자이십니다.
고백: "예수님은 오늘도 기록된 성경 말씀과 성령을 통해 내 삶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뜻)을 대언해 주시는 분입니다."
구체적 적용:
세상의 수많은 소리(성공, 유행, 염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매일 아침 묵상하는 말씀을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대언으로 받습니다.
요셉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감옥살이 같은 순간이 와도,
내 생각보다 선지자 되신 주님이 주신 말씀을 더 신뢰하며 묵묵히 말씀에 걸음을 맞추는 삶을 살겠습니다.
b.
그리스도(메시아): 삶의 모든 영역의 주도권을 주님께 양도하는 삶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내 삶의 참된 왕이자 제사장이며 선지자이십니다.
고백: "예수님은 내 영혼의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내 삶 전체를 통치하시는 나의 참된 왕(주인)이십니다."
구체적 적용:
내가 주인 되어 내 미래를 계획하고 염려하던 습관을 내려놓습니다.
가정,
직장, 재정, 자녀 양육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왕이십니다"라고 인정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내 욕망이 아닌 왕이신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통치 받는 삶'을 훈련하겠습니다.
c.
인자(사람의 아들):
고난 속에서도 영광스러운 하늘의 승리를 바라보는 삶
인자는 이 땅에서 낮아지셨으나,
결국 하나님의 권능 우편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영광의 재판장(다니엘 7장)이십니다.
고백: "비록 지금은 이 땅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살아갈지라도,
나는 결국 하늘 권능의 인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승리할 자입니다."
구체적 적용:
오늘 내 삶에 억울하고 불의한 상황이 겹쳐 오더라도,
이 땅의 법정과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겠습니다.
최종 재판장이신 예수님이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심을 기억하며,
억울함을 스스로 풀려고 피를 흘리기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배후의 주권을 신뢰하며 고난을 견뎌내겠습니다.
d.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답게 거룩한 자부심으로 사는 삶
예수님은 온전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12)'를 주셨습니다.
고백: "나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구체적 적용:
세상의 물질적 결핍이나 사람들의 무시 때문에 영적 위축감을 느끼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다운 영적 자부심(거룩한 배짱)을 가지고,
죄 유혹과 세상 타협의 자리에서 과감히 돌아서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하고 품격 있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겠습니다.
묵상 결론:
요셉의 고난 배후에
'생명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이 네 가지 신분을 삶으로 고백해 낼 때 우리 삶의 모든 악은 선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대언(선지자)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통치(그리스도)에 복종하며,
하늘의 영광(인자)을 바라보고,
신분(하나님의 아들)의 비밀을 누릴 때,
우리 삶은 주변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흘려보내는 가장 복된 통로가 될 줄 믿습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공회원들[“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눅22:66)]에게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라”[Ἐὰν ὑμῖν εἴπω,
οὐ μὴ πιστεύσητε· ἐὰν
δὲ ἐρωτήσω, οὐ μὴ ἀποκριθῆτε (에안 휘민 에이포,
우 메 피스튜세테 에안 데 에로테소,
우 메 아포크리테테)](67-68절)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a)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던지신 이 말씀은 이미 마음을 닫아걸고 자신을 죽이기로 결정한 자들을 향한 엄중한 책망이자,
인간의 완악함에 대한 영적 진단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와 오늘날 우리 삶에 선명하게 다가오는 구체적인 적용점을 나눕니다(인터넷):
1.
예수님 말씀의 깊은 의미
(헬라어 문맥 분석)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강한 부정을 뜻하는 헬라어 문법인
‘우 메(οὐ μὴ,
결코 ~하지 않다)’를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공회원들의 상태가 단순한 의심을 넘어 절대 깨뜨릴 수 없는 단단한 불신과 거부 상태에 이르렀음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67절):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아무리 명백하게 말씀하시고 증명하셨을지라도(이미 수많은 표적과 교훈을 보여주셨음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종교적 틀을 지키기 위해 결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진리를 수용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라"
(68절)
과거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눅
20:4)" 또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눅
20:44)"라고 성경적 질문을 던지셨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대답을 회피하고 침묵했습니다.
진리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의도적으로 대답을 거부하고 도망치던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정면으로 꼬집으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너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재판을 열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죽일 꼬투리를 잡기 위해 연극을 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불법 재판에 대한 강력한 고발입니다.
2.
오늘날 우리를 향한 구체적인 적용점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두 가지 차원(내면적 성찰과 외면적 사명)에서 매우 무거운 영적 경종과 교훈을 줍니다.
① 내면적 성찰:
내 안의
'답을 정해놓은 완악함'을 경계하십시오.
우리는 종종 공회원들처럼
'내가 원하는 답'을 이미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적용: 기도를 드리면서도 은연중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해 달라"고 고집부리거나,
말씀을 읽으면서도
"내 마음에 드는 위로의 말씀만 수용하고,
내 삶을 책망하시는 말씀은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내 고집 때문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성령님이 내 양심에 물으셔도 모른 척 침묵(무대답)으로 일관하는 내 안의
'산헤드린 공회원 같은 완악함'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기득권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즉각
"아멘"으로 반응하는 부드러운 마음밭을 유지해야 합니다.
② 외면적 사명: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끝까지 신뢰하십시오.
예수님은 상대방이 믿지 않고 대답하지 않을 것을 다 아시면서도
69-70절에서 자신이
'인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
적용: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삶 속에서 선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요셉처럼 주변의 억울한 오해를 받거나 상대방이 완악하게 거부하는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해도 듣지 않는데 무슨 소용인가"라며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상황과 사람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진리를 말하고 주님의 뜻을 선포해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불신과 악함마저도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 구원'이라는 거대한 선을 이루는 도구로 바꾸어 사용하실 것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해도 믿지 않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완악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을 신뢰하며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삶을 어떻게 살아드려야 할까요?
·
그 방법은,
우리의 말과 인격,
그리고 삶의 선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세상에 번역해 주는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이 불의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삶으로 증명해 냈듯,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가 완악한 세상에서 살아드려야 할 구체적인 대언의 삶은 세 가지 단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a.
‘내 뜻’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먼저 내 삶에 대언하십시오.
세상에 말씀을 대언하기 전에,
가장 먼저 나 자신의 완악한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게 해야 합니다.
삶의 방식:
매일 아침 묵상하는 말씀을 단순한 지식으로 남겨두지 마십시오.
"내가 말해도 믿지 않으려 했던"
내 안의 고집과
"성령님이 물으셔도 침묵하려 했던"
이기적인 욕망을 말씀의 거울 앞에 철저히 굴복시켜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첫 번째 청중'이 될 때,
내 삶은 비로소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는 진짜 대언의 통로가 됩니다.
b.
결과에 낙심하지 말고
‘묵묵한 성실함’으로 진리를 보여주십시오.
공회원들이 결코 믿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당당히 진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처럼,
그리고 형들의 미움과 감옥살이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요셉처럼 결과와 환경에 지배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방식: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비웃고,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나를 미련하다고 조롱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반응(믿지 않고 대답하지 않음)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내가 처한 가정과 일터에서 정직,
친절, 묵묵한 성실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말로만 전하는 복음은 세상이 귀를 막을 수 있지만,
억울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공의와 사랑을 선택하는
'삶의 대언'은 세상이 결코 거부할 수 없습니다.
c.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끝까지 신뢰하십시오.
예수님의 억울한 십자가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이룬 것처럼,
세상이 나에게 행하는
'악'과 '불의한 상황'이 결코 나를 무너뜨릴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삶의 방식:
삶에 억울한 일이나 고난이 찾아올 때,
세상의 방법처럼 똑같이 분노하거나 인간적인 편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상황의 배후에 계시며,
결국 이 악을 선으로 바꾸사 누군가를 구원하는 생명의 통로로 삼으실 것이다"라는 거룩한 배짱(영적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고난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하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도리어 요셉처럼 품어주는 그
'초자연적인 사랑의 태도'야말로 완악한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대언이자 복음의 선포가 됩니다.
한 줄 결론: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삶이란,
세상의 완악함에 맞서 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답게 끝까지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의 발자취 그 자체입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ἀπὸ τοῦ
νῦν δὲ ἔσται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καθήμενος ἐκ δεξιῶν
τῆς δυνάμεως τοῦ θεοῦ (아포 투 뉜 데 에스 타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카데메노스 에크 덱시온 테스 뒤나메오스 투 데우)](눅22:69)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고 싶습니다.
1.
헬라어 문구로 보는 깊은 의미
"그러나 이제부터"
[ἀπὸ τοῦ
νῦν δὲ (아포 투 뉜 데)]
'아포 투 뉜'(ἀπὸ
τοῦ νῦν)은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히"라는 강력한 시점의 전환을 뜻합니다.
지금 인간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묶여서 신문을 당하는 무력한 죄인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사탄과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인자가"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구약 다니엘 7장 13-14절에 예언된 '하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영원한 권세와 나라를 받으실 초자연적인 심판주'의 신분을 공식적으로 취하시는 명칭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καθήμενος ἐκ δεξιῶν τῆς δυνάμεως τοῦ
θεοῦ (카데메노스 에크
덱시온
테스
뒤나메오스
투
데우)]
‘우편’은 성경에서 최고의 영광,
승리, 그리고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앉아 있으리라'는 모든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온 우주의 통치자이자 재판장으로 좌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불법 법정이 내릴 사형 판결은 끝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시는 왕위 등극식의 시작이 될 것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2.
구속사적 역설
(아이러니)과 요셉과의 연결
이 선언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사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악:
안나스, 가야바,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완전히 제거(악)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기 위해 연 불법 재판정을 도리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 우편에 앉아 계신 분"임을 온 천하에 공포하는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요셉과의 평행이론: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애굽의 감옥에 갇혔을 때,
그것은 요셉의 끝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 보좌(우편)로 나아가는 시작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공회에 붙잡히신 비참한 순간은 하늘 보좌에 앉아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진정한 구원자로 공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 삶으로의 적용
이 말씀은 세상 한복판에서 억울함과 고난을 겪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위로와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세상의 평가에 주눅 들지 않는
'거룩한 자부심'
세상은 가끔 우리를 실패자처럼 취급하거나,
말씀대로 사는 우리를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개를 들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지금도
'하나님의 권능 우편'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왕의 자녀 된 신분(요일 5:20)을 기억하며 세상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내 억울함을 주님께 맡기는
'신뢰'
내가 삶에서 마주하는 억울한 일들,
말해도 믿지 않는 완악한 환경을 만날 때 내가 직접 피를 흘려 복수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주님이 나의 최종 재판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나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요셉의 삶처럼 모든 악을 바꾸어 생명의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는 주님의 당당한 선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역시 결국에는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승리로 끝나게 될 것임을 보장하는 강력한 약속입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눅22:69)이란 말씀을 묵상할 때 로마서
8장 34절(“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말씀과 히브리서
12장 2절(“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과 연관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어졌습니다.
(i)
이 세 구절을 연결할 때,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은혜와 능력이 되시는지 세 가지 대지로 깊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a.
로마서
8장 34절: 정죄함을 이기는 완벽한 승리와 변호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씌워 정죄하고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도리어 세상의 모든 정죄를 무력화하시는 참된 재판장이 되셨습니다.
성경 말씀:
"누가 정죄하리요...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영적 교훈:
사탄과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과거,
연약함, 혹은 억울한 상황을 이용해 우리를 정죄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온 우주의 재판장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 피 묻은 손을 들고 친히 변호(간구)하고 계십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은 예수님을 정죄했으나,
하늘 법정의 재판장이신 주님은 우리를 향해
"무죄"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불의한 평가와 정죄감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영적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b.
히브리서
12장 2절: 고난과 부끄러움을 이기게 하는
'영광스러운 소망'
예수님은 공회원들의 조롱,
침 뱉음,
눈을 가리고 때리는 수치(부끄러움)를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비참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늘의 기쁨을 보셨기에 십자가를 참아내셨습니다.
성경 말씀:
"...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영적 교훈: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나,
우리가 삶에서 말해도 믿지 않는 완악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
우리는 깊은 수치심과 억울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 우편의 자리는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는 최종 영광의 자리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8). 예수님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십자가를 통과해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의 부끄러움과 억울함에 매이지 않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는 영적 끈기를 배우게 됩니다.
c.
세 구절의 종합: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권능의 보좌'
누가복음의
"권능의 우편",
로마서의
"우리를 위한 간구",
히브리서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을 종합하면,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주의 모든 통치권을 쥐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아무리 불의하고 악해 보일지라도,
권능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결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그 상황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공회의 악을 인류 구원의 선으로 바꾸신 주님은,
오늘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우리의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시며,
삶의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사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묵상 결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나를 오해하고 정죄하는 이 땅의
'산헤드린 공회'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권능의 우편에서 나를 위해 간구하시며,
영광의 승리를 예비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요셉처럼 묵묵히,
그리고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오늘의 걸음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인터넷).
(5)
다섯째로,
저는 공회원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휘메이스 레게테 호티 에고 에이미)](눅22:70)하신 말씀에서 “내가 그라고”[“내가 그니라”(개역한글)][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고 일곱 마디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가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어떠한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가 되야 하는 것일까요?
1.
‘내가 그니라’[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는 구약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라고 계시하셨던 바로 그 신적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공회의 사형 판결 앞에서도 이 이름을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언이 오늘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주님의 제자 된 우리에게 각각 어떠한
‘에고 에이미’로 경험되고 고백되어야 하는지,
요한복음의 일곱 선언과 매칭하여 구체적인 적용점을 나눕니다(요한복음의 7가지 선언과 제자의
'에고 에이미'
고백)(인터넷):
a.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제자의 고백: "예수님만이 내 영혼의 유일한 만족(에고 에이미)이십니다."
삶의 적용: 세상의 물질,
명예, 성공이 내 배고픔을 채워줄 것처럼 좇아가던 발걸음을 멈추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족의 삶을 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적 풍요함을 매일 누리겠습니다.
b.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제자의 고백: "예수님만이 내 어두운 삶을 밝히는 유일한 지표(에고 에이미)이십니다."
삶의 적용: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억울한 상황이라는 어둠이 엄습할 때,
내 경험이나 인간적인 꾀를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내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참 선지자의 대언)만을 묵묵히 따르며 세상 속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겠습니다.
c.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7)
제자의 고백: "예수님만이 내 삶의 유일한 보호막이자 안전지대(에고 에이미)이십니다."
삶의 적용: 세상이 아무리 나를 흔들고 불의하게 정죄할지라도,
나는 이미 예수님이라는 구원의 문 안에 들어온 안전한 자임을 확신하겠습니다.
세상의 위험한 유혹과 음성들을 문 밖으로 차단하고,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겠습니다.
d.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
제자의 고백: "예수님만이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책임자(에고 에이미)이십니다."
삶의 적용: 요셉이 구덩이와 감옥을 지날 때도 목자 되신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것처럼,
내 삶의 배후에서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완벽한 인도를 신뢰하겠습니다.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를 믿고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e.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제자의 고백: "예수님만이 내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능력(에고 에이미)이십니다."
삶의 적용: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내 삶의 무너진 관계,
막막한 재정,
깨어진 환경 등 모든
'죽어 있는 것 같은 상황'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께서 내 삶의 모든 죽어가는 자리에 다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실 것을 믿고 소망을 선포하겠습니다.
f.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제자의 고백: "예수님만이 내가 걸어가야 할 유일한 방향과 가치(에고 에이미)이십니다."
삶의 적용: 말해도 믿지 않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완악한 세상 속에서,
타협하거나 방황하지 않겠습니다.
유일한 길이자 변하지 않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정표를 굳게 붙잡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답게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고 좁은 길을 당당히 걷겠습니다.
g.
"나는 참포도나무다"(요 15:1)
제자의 고백: "예수님만이 내가 매 순간 붙어있어야 할 생명의 근원(에고 에이미)이십니다."
삶의 적용: 내 힘과 노력으로 선한 열매를 맺으려 몸부림치지 않겠습니다.
포도나무 가지처럼 철저히 주님 안에 거하며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이 연합하겠습니다.
그럴 때 내 삶을 통해 내 주변의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자연스럽게 흘러가 열매 맺게 될 줄 믿습니다.
묵상 결론:
제자의 삶을 통해 세상에 들려주어야 할
"에고 에이미"
예수님이 공회 앞에서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라고 당당히 선포하셨던 이유는,
그 진리가 온 우주를 구원할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완악한 세상 한복판에서 이
7가지 주님의 성품과 신분을 내 삶으로 살아낼 때,
세상 사람들은 억울함 속에서도 평안하고,
고난 속에서도 당당하며,
부끄러움 속에서도 기뻐하는 우리를 보며
"도대체 당신이 믿는 그 예수님이 누구이기에 그렇습니까?"라고 묻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삶과 입술을 통해 세상에 이렇게 대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당신 영혼의 떡이요,
빛이요, 문이요, 목자요, 부활이요, 길이요, 참포도나무(에고 에이미)이십니다!"
(a)
“'에고 에이미'의 주님을 향한 최종 결단과 선포의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라는 세상의 겹겹이 쌓인 악과 불법 속에서도 오직 생명 구원이라는 거대한 구속사적 선을 이루신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을 찬양합니다.
요셉의 고난을 총리의 보좌로 바꾸사 가족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수치를 하늘 보좌 우편의 영광으로 역전시키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의 완벽한 섭리를 신뢰합니다.
오늘 이 시간,
공회의 사형 판결 앞에서도 자신이 온 우주의 심판주이신 인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라고 당당히 선포하신 주님의 음성을 마음에 새깁니다.
세상이 비웃고 조롱할지라도 결코 가둘 수 없었던 그 신적 권위와 영원한 생명이 오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제 삶의 능력임을 선포합니다.
‘말해도 믿지 않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완악한 세상 속에서 이번 한 주를 시작합니다.
때로 요셉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예수님처럼 불의한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이 땅의 법정과 세상의 평가에 낙심하거나 주눅 들지 않게 하옵소서. 이미 모든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권능의 우편에 앉으사 나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세상의 정죄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하늘의 기쁨을 보며 승리하신 주님처럼,
저 또한 거룩한 영적 자부심을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게 하옵소서.
내 영혼의 '에고 에이미'가 되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번 한 주,
세상의 썩어질 양식이 아닌 생명의 떡이신 주님으로만 만족하겠습니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말씀만을 따라 걷겠습니다.
사탄의 참소와 위협 속에서도 안전한 양의 문이 되시는 주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겠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실 선한 목자를 절대 신뢰하겠습니다.
막막하고 죽어있는 것 같은 상황 앞에서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소망을 선포하겠습니다.
완악한 세상의 타협 유혹 앞에서도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하겠습니다.
내 힘이 아닌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철저히 붙어있어,
내 삶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열매가 맺히게 하옵소서.
내가 먼저 주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첫 번째 청중이 되게 하시고,
억울함 속에서도 묵묵한 성실함과 용서의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내 삶 자체가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 번역해 주는 거룩한 대언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 삶의 발자취를 보는 이들마다 ‘예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고백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보좌 우편에서 오늘도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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