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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있는 한인 선교사님들이 본국에서 선교 후원금을 받아 건물을 짓고 땅을 사는 듯 소유권이 생길 때에 어떤 위험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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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으심 (2) [사도행전 1장 1-11절]

예수님의 죽으심 (2)

 

 

[사도행전 1 1-11]

 

 

사도행전 1 3 말씀입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서 고난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씀합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죽으심 (2)” 제목 아래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에서 미리 알려주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구약 말씀입니다:

 

이사야 52 13절부터 53 12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보라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3)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깎는 앞에서 잠잠한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3)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것이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구약 성경, 특히 이사야 52 13 ~ 53 12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 전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신 ,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랬음.  이것은 이사야 52 14절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무척노력했는데 그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것도 놓아주려고 그리한 것입니다(19:1).  당시 유대인 무리가 격렬하게 사형을 요구하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는 대신 '독한 채찍질을 가해 피투성이가 비참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유대인들의 분노와 동정심을 자극해 석방하려는 타협책'으로 채찍질을 명령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채찍질 예수님을 끌고 나와 "보라 사람이로다"(5)라며 무죄를 호소했습니다(인터넷).  이사야 53 5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라는 예언은 신약 성경,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다룬 복음서의 장면들과 놀랍도록 정교하게 연결(성취)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찔림(Piercing)’ 성경적 연관성과 안에 담긴 깊은 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신약 성경에서의 구체적인 성취 ( 가지 찔림):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 속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찔림'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육체적으로 매우 구체적이고 잔인하게 성취되었습니다: (1) 머리의 찔림 (가시관):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짓눌렀을 , 날카로운 가시들이 주님의 이마와 두피를 깊이 찔러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27:29, 19:2).  (2) 손과 발의 찔림 ( 박히심):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눕히고 굵은 대못을 손목과 발에 내리쳐 박았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의 수족(손과 ) 깊이 찔렸습니다( 19:18, 22:16 성취).  (3) 옆구리의 찔림 ( 자국): 예수님이 숨을 거두신 , 군인이 확인 사살을 위해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깊숙이 찔렀습니다.   즉시 심장과 장기가 찔려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9:34).  단어의 원어적 의미가 가진 깊은 연관성: 이사야 53 5절에서찔림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 '메홀랄(מְחֹלָל)' 단순히 핀에 살짝 찔리는 수준이 아니라, ‘관통당하다(pierced through)’,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구멍이 뚫리다라는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못과 창에 의해 예수님의 온몸이 관통당하고 구멍이 것을 수백 전에 정확하게 내다본 성령의 초자연적인 예언이었습니다(인터넷).  요한복음 19 36-37절의 직접적인 증언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이것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 다른 성경에 그들이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 19:37 / 스가랴 12:10 예언의 성취)(인터넷).

 

이사야 53 6 말씀입니다: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처럼 제멋대로 행하며 죄의 길로 갔지만,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악을 뭉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담당(전가)'시키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 21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이를 더욱 놀라운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죄를 전혀 모르시는 순결한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아예 ' 자체(Sin)' 취급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죄인들의 대표' 넘어 ' 덩어리'처럼 여기시고 심판하셨습니다.  내가 지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추악한 죄가 예수님께 완전히 넘어가 수수되어 처리되었음을 믿는 확신의 은혜가 있습니다.  구절을 연결하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공식인 '거룩한 교환(The Great Exchange)' 성립됩니다: (1) 예수님이 가져가신 : 우리의 죄악, 방황, 허물, 심판, 버림받음, (2) 우리가 선물로 받은 : 하나님의 (), 자녀 , 평안, 나음.  예수님이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나를 보실 죄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입은 완벽한 의인'으로 바라보십니다.  나의 행위나 자격이 아닌, 오직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완벽한 법적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 가슴 벅찬 은혜로 다가옵니다(인터넷).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모든 형벌은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 34 말씀입니다: “쓸개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1) 죄의 형벌과 고통을 우회하지 않으신 은혜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당시에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직전 사형수에게 주었던 '쓸개 포도주'(마가복음에서는 '몰약을 포도주') 일종의 마취제이자 진통제였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한 인도적인 조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입에 대어 맛을 보셨지만(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셨지만), 마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의 형벌을 '감각이 마비된 상태' 대충 넘어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죄의 참혹한 형벌,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기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마취제 없이 맨정신으로 온전히, 100% 그대로 겪어내셨습니다.  (2)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남김없이 마심: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잔은 바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이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주는 마취제의 (쓸개 포도주) 거절하셨지만,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내리신 고통스러운 진노의 잔은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시며 십자가의 고통을 정면으로 통과하셨습니다.  주님이 진통제를 거절하고 형벌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셨기에, 내가 치러야 죄의 대가는 1%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의 모든 형벌이 주님의 온전한 고통을 통해 완벽하게 청산되었음을 믿는 확신의 은혜가 있습니다(인터넷).

 

이사야 53 7 말씀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깎는 앞에서 잠잠한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1) 무죄하신 분의 자발적 침묵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기에 법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억울함을 호소하실 권리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실제로 빌라도나 대제사장들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 주님은 그들의 유도 신문과 거짓 고소에 대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아니하시고 잠잠하셨습니다 ( 27:12-14, 14:61).  주님의 침묵은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의지적인 침묵'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리에서 자신의 무죄를 완벽하게 변호하셨다면 주님은 풀려나셨겠지만, 대신 우리가 죄의 형벌을 받아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스스로 변호할 권리를 포기하신 은혜입니다.  (2)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대속: 구약 시대에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었던 제물(어린 ) 자기가 죽는지도 모른 도살장으로 끌려가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어린 '( 1:29)으로서, 자신이 당할 고통과 죽음의 결과를 아시면서도 묵묵히 걸음을 걸으셨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입을 열어 변명하고 분노하는 우리와 달리, 주님은 곤욕과 괴로움 속에서도 온전히 침묵하셨습니다.   거룩한 침묵 덕분에 우리의 수많은 말의 죄와 불순종이 덮어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주는 마취제(쓸개 포도주) 거절하여 형벌의 고통을 100% 몸으로 받아내셨을 뿐만 아니라( 27:34), 과정에서 마디의 불평이나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53:7) 온전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인터넷).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누릴 있는 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지심 (대속의 은혜):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종이 찔리고 상한 이유가 자신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형벌과 징계를 그분이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도리어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53:5).  나의 부끄러운 죄와 허물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믿고, 정죄감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을 누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2)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 같은 순종 (겸손의 은혜): 그분은 곤욕과 심문을 당하시면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깎는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묵묵히 길을 가셨습니다( 53:7).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깊은 겸손과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3) 여호와께서 원하신 뜻의 성취 (하나님 사랑의 은혜): 예수님이 상함을 받으시고 곤욕을 당하신 것은 우연이나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53:10).  그분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 성취되었습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기까지 나를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거절할 없는 거대한 사랑을 발견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4) 죽음 이후에 보장된 승리와 영광 (부활과 중보의 은혜): 이사야는 그가 죽음에 처했지만, 이후에 "그의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것이라" 예언합니다( 53:10).  또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의롭게 만드시는 위대한 승리의 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나를 위해 중보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인터넷).

 

시편 22 1 말씀입니다: “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가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구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박히셔서 운명하시기 직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외치신 말씀("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7:46)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심으로 인해 사랑하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영적 단절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십자가 위에서 지르신 예수님의 부르짖음 (철저한 버림받으심)].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저주와 버림받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와 버림받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 버림받지 않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철저한 외로움과 버림받으심 덕분에,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13:5)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머물게 되었음을 깨닫는 은혜가 있습니다(인터넷).


시편 22 6-8 말씀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삐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다윗은 고통 속에서 자신을 인간이 아닌 '벌레' 비유하며, 주변 모든 이들에게 비방과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27 39~44절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모욕했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시편 말씀과 똑같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건지실지라"라며 조롱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살리시기 위해 인간 이하의 대접(벌레) 받으시며 모든 수치와 비웃음을 묵묵히 견디셨습니다.  주님이 수치를 당하셨기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자녀의 옷을 입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나 보자"라며 예수님의 믿음과 사명까지도 조롱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사탄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인간들의 입을 빌려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조롱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셨고, 결국 부활로써 믿음이 옳았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세상의 비난과 조롱,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믿음이 흔들릴 , 나보다 먼저 조롱을 견뎌내신 주님으로부터 다시 일어설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인터넷).

 

시편 22 16, 18 말씀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수족을 찔렀나이다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이 기록될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손과 발에 못을 박는 처형)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요한복음 19 18절과 23 이하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음으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찔리신 것은 내가 손과 발로 지은 모든 행동의 죄와 방황을 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상흔을 바라보며 나의 삶이 주님의 찔리심으로 정결케 되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깃으로 나눠 각각 깃씩 나눠 가졌고, 통으로 속옷은 찢지 않고 사람이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19:23-24).  성경은 일이 일어난 이유가 바로 "시편(구약) 말씀을 응하게 하려 "이었다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 남은 옷가지마저 인간들에게 빼앗기신 , 철저한 벌거벗겨짐의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박탈당하시고 벌거벗겨지신 덕분에, 죄로 인해 벌거벗겨졌던 우리가 비로소 '그리스도로 입고'( 3:27) 하나님의 '의의 겉옷'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제비를 뽑고 옷을 나누는 지극히 우발적으로 보이는 행동조차도 이미 하나님의 정확한 계획과 성경의 예언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역사의 비극이나 우연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가장 정교하고 확실한 사랑의 드라마였습니다.   삶의 모든 고난과 걸음 역시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 속에 있음을 신뢰하는 위로를 얻습니다(인터넷).

 

다음에 신약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6 21 말씀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있은 직후, 비로소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정치적인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구속사의 한복판에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구원의 중심지(예수살렘) 향해 걸음씩 걸어가신 순종의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 원어에서 "~해야 한다(Greek: dei)" 단어는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필연적인 신적 작정' 의미합니다.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실패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가장 완벽하게 성취된 순종의 자리였습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필연적인 고난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주님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그리스도) 명확히 알게 '이때로부터' 주님은 십자가의 비밀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준비된 자들에게 감추어졌던 구원의 신비를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감당할 만한 믿음의 고백이 있을 , 고난의 깊은 신비와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게 하십니다.   삶에 다가오는 고난의 의미를 주님의 때에 정확히 깨닫게 하실 것을 신뢰하게 됩니다(인터넷).

 

마태복음 17 22-23 말씀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님의 죽음은 유다의 배신이나 대제사장들의 계략에 말려든 어쩔 없는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언제, 어떻게, 누구의 손에 의해 죽게 될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길을 향해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자원하여 걸어가신 주님의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에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을 말씀하실 결코 죽음 자체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부활의 소망을 함께 선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영원한 파멸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리라)'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패배가 아닌 승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난과 죽음 같은 절망의 순간에도, 주님이 약속하신 '제삼일의 부활과 회복' 반드시 있음을 믿는 소망을 얻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매우 근심'했습니다.  부활이라는 놀라운 승리의 약속을 함께 들었음에도, 당장 눈앞에 닥칠 고난과 상실의 두려움 때문에 귀를 닫아버린 것입니다.  때로 우리도 하나님의 크신 구원 계획과 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앞의 상황만 보고 근심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근심과 한계를 뛰어넘어 결국에는 선을 이루시고 부활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섭리를 신뢰하는 은혜를 누립니다(인터넷).

 

마태복음 20 17-19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박게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자리가 있는 예루살렘 턱밑까지 다다르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뭉뚱그려 말씀하지 않으시고, '종교 지도자들의 사형 결의', '이방인(로마 군인)에게 넘겨짐', '조롱과 채찍질', 그리고 '십자가 처형'까지 참혹한 과정을 세밀하게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조롱과 채찍, 박힘의 고통을 미리 안다는 것은 자체로 엄청난 심리적 고문입니다.  예수님은 다가올 지옥 같은 고통의 과정을 순간 선명하게 직시하시면서도, 오직 나를 살리시겠다는 일념 하나로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부정한 자들이며 외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부정한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어 잔인하게 처형하도록 방관하고 동조했습니다.  세상 가장 낮은 자들의 손에 넘겨져 온갖 수치(조롱과 채찍질) 당하신 주님을 봅니다.  주님이 이처럼 이방인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박히심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었던 우리까지도 주님의 보혈 안에서 차별 없이 구원받는 은혜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번에도 주님은 잔인한 고난의 나열 끝에 반드시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승리의 약속으로 말씀을 맺으십니다.  십자가는 사탄이 예수님을 죽여 승리한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깨뜨리신 승리의 전초기지였습니다.  우리 삶의 고난과 아픔이 아무리 구체적이고 잔인하게 찾아올지라도, 결론은 언제나 주님의 '부활과 생명'입니다. 마침표는 고난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삶의 모든 연약함도 결국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실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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