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희생해가면서 얻는 세상의 인정, 성공, 그리고 인간관계의 평화는 영적으로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오히려 생명의 뿌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누가복음 23:1-7).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1-7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은 후 제일 먼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7장
1-2, 11-14절과 마가복음
15장
1-5절과 요한복음
18장
28-38절과 비교하여 종합적인 줄거리를 알고 싶습니다.
1.
빌라도 관정으로의 압송과 고발
(새벽)
새벽이 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
서기관 등 산헤드린 공회 전체 무리가 결의를 마치고 예수님을 결박하여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관정(프라이토리움)으로 끌고 갑니다[여기서 관정(프라이토리움)이란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머물며 재판 등 공식 업무를 처리하던 총독 관저를 의미합니다(로마 총독이 거처 및 집무실)].
종교적 금기와 위선(요한복음): 유대 지도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 자신들이 더러워지는(의식적 부정)
것을 피하고자 빌라도가 있는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머뭅니다.
이에 빌라도가 직접 밖으로 나와 고발 내용을 묻습니다.
세 가지 고발 항목(누가복음): 유대인들은 밤새 산헤드린 공회에서 다룬
'신성모독' 죄목으로는 로마법에 따른 사형 판결을 받아낼 수 없음을 알았기에,
빌라도가 민감하게 반응할 법한 정치적 반역죄로 바꾸어 고발합니다.
백성을 미혹하고 소란하게 함.
로마 황제(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함(거짓 선동).
자칭
'왕 그리스도'라 칭함.
2.
빌라도와 예수님의 신문
(관정 내부)
빌라도는 고발당한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신문을 시작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사복음서가 공통으로 기록한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당신이 말하고 있소)"라고 답변하십니다.
킹덤(Kingdom)에 대한 영적 정의(요한복음): 요한복음에서는 이 대화가 더욱 상세히 묘사됩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언하시며,
만약 세상에 속했다면 내 종들이 싸웠을 것이라 하십니다.
빌라도가 다시
"그러면 네가 왕이냐?"
묻자,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라고 답하십니다.
빌라도는 이에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냉소적인 질문을 남깁니다.
3.
예수님의 침묵과 유대 지도자들의 악착같은 고소
빌라도는 예수님이 로마 제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종교적·철학적 인물임을 간파합니다.
예수님의 침묵(마태·마가복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옆에서 끊임없이 수많은 항목으로 예수님을 맹렬히 고발하지만,
예수님은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에 빌라도는
"저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저렇게 많은데 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느냐"며 매우 놀랍고 이상하게 여깁니다.
4.
빌라도의 무죄 선언과 갈릴리 관할권 이관
(누가복음)
심문을 마친 빌라도는 다시 관정 밖으로 나가 유대 대제사장들과 군중에게 공포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무리의 반발과 헤롯에게로의 이송:
무죄 선언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더욱 격분하여
"그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온 유대 땅에서 백성을 소동하게 한다"며 압박 수위를 높입니다.
이 와중에
'갈릴리'라는 말을 포착한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임을 확인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맞아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가 와 머물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골치 아픈 유대교 종교 재판의 책임을 회피하고 동시에 헤롯과의 정치적 관계를 개선하고자,
예수님을 헤롯 안디바에게로 압송(이관)하라고 명령하며 본문이 마무리됩니다.
줄거리 요약 흐름:
산헤드린의 결박 및 빌라도 압송(마태/마가) à 의식적 정결을 위한 유대인들의 관정 밖 대기(요한) à 정치적 반역죄
3가지 고발(누가) à "유대인의 왕"
문답 및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변론(공통/요한) à 이어진 고발 앞에서의 침묵(마태/마가) à 빌라도의 무죄 선언(누가/요한) à
갈릴리 소동 고발에 따른 헤롯 안디바에게로의 이송 결정(누가)(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왜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였는가(눅23:1-2)라는 의문이 좀 들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을 먼저 전임 대제사장인 안나스가 밤중에 예비 심문을 한 후,
현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온 공회가 예수님을 밤중에 공식 심문을 한 후,
날이 새자마자 새벽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곧 백성의 장로회(산헤드린 공회)가 정식으로 모여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 판결을 확정 짓은 후 왜
23장에 와서 그 무리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예수님을 고발한 것인지 좀 자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i)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 판결을 확정 짓고도,
왜 굳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다시 끌고 가 고발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이유는 크게 법적인 한계,
정치적 책임 회피,
그리고 종교적 명분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인터넷):
a.
사형 집행권의 박탈
(가장 결정적인 법적 이유)
당시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치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지만,
사형을 선고하고 직접 집행할 수 있는 권한[Jus
Gladii (유스 글라이다),
라틴어로”칼의 권한”(Right
of the Sword)]만큼은 엄격하게 박탈했습니다[여기서 ‘유스 글라이다,
칼의 권한’이란 고대 로마법에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형사 재판권을 의미합니다. 로마 제국에서
'칼(Gladius)'은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권력을 상징했습니다.
이 권한을 가진 총독만이 피지배 주민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최고 사법권의 상징)].
요한복음의 증언:
이 사실은 병행구절인 요한복음
18장 31절에 가장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즉, 산헤드린 공회에서 아무리
"이 사람은 신성모독죄이므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의했더라도,
로마 총독의 최종 승인과 사형 명령이 없으면 합법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가야만 했습니다[당시 유대인의 최고 의회였던 산헤드린은 종교적인 유죄 판결은 내릴 수 있었으나,
로마법상 사형을 직접 집행할 권한(Jus
Gladii)이 없었습니다(유대 법정(산헤드린)의 한계)].
b.
민중의 폭동 두려움과 정치적 책임 회피
당시 예수님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수많은 평민(민중)들에게 큰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때는 유대인의 최대 축제인 유월절 기간으로,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민족주의적 열기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두려움:
만약 유대 지도자들이 산헤드린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돌로 쳐서)
사형시켰다면,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 위험이 매우 컸습니다.
책임 전가:
따라서 이들은 예수님을
'로마 제국에 항거하는 정치범'으로 몰아 빌라도의 손을 빌려 처형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과 민중의 분노를 유대 지도자들이 아닌 로마 당국으로 돌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c.
나무에 달린 자의 저주
(종교적 명분)
유대 지도자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를 따르는 무리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죄인으로 낙인찍히기를 원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 유대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형 방식은 주로
'돌로 치는 것'이었지만, 로마식 사형 방식은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압박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께 저주받아 처형당한 가짜'임을 백성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d.
죄목의 의도적인 변경
(종교죄 à 정치범)
산헤드린 공회에서 확정된 예수님의 죄명은
"신성모독(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죄목을 그대로 빌라도에게 가져가면,
빌라도는
"로마법과 상관없는 너희의 종교 문제"라며 재판을 기각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복음
23장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죄목을 로마법상 최고 사형죄에 해당하는
'대역죄[Rebellio
(레벨리오)]' 및 '반역죄'로 교묘하게 변조하여 고발한 것입니다[여기서 “대역죄[Rebellio
(레벨리오)]”란 라틴어로 “반란,
폭동, 무장 봉기”를 뜻하는 단어로,
넓은 의미에서 로마 국가와 황제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역죄(반역죄)의 가장 대표적인 실행 형태였습니다].
백성을 미혹함 à
사상적 선동죄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함 à
로마 제국에 대한 경제적 도발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함 à
로마 황제(가이사)의 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
요약하자면,
유대 지도자들은 법적으로 사형 권한이 없었기에 빌라도를 찾아가야만 했고,
정치적으로는 백성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종교적으로는 예수님을 완벽하게 저주받은 자로 매장하기 위해 사형 집행권을 가진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무리를 이끌고 갔던 것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한 무리가 예수님의 죄목을 종교죄에서 정치범으로 변경한 것과 그들의 의도가 단순히 예수님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지금도 사탄의 의도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이나 아니면 둘다다 의문하고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부인하게 만들어 완전히 예수님을 떠나 영원한 생명을 못 얻게 하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죄목을
'종교죄(신성모독)'에서 '정치범(반역죄)'으로 바꾸고,
단순히 목숨을 끊는 것을 넘어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자'로 만들려 했던 저저변에는 사탄의 치밀한 영적 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 한 분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시작될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고,
그분을 따를 제자들과 오늘날의 우리(교회)를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통찰을 바탕으로 사탄이 사용하는 세 가지 영적 공격 방식을 주석학적·신학적 맥락에서 더 깊이 나누고자 합니다(인터넷):
1.
‘예수님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본질적 공격
(신성과 인성)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창 3:1)나 예수님을 시험할 때(마 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썼던 가장 첫 번째 무리는 늘
'의심(의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흔들기 위해 끊임없이 의심의 화살을 쏩니다.
신성(Divinity)에 대한 의심:
"예수가 정말 하나님이실까?
그저 고결한 인간 성인 중 한 명이나 훌륭한 도덕 교사에 불과한 것 아닐까?"라는 회의주의를 심어줍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면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능력을 잃고,
한 인간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인성(Humanity)에 대한 의심:
반대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우리처럼 아파하고 절망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겠어?
나와는 먼 존재야"라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과 은혜를 체휼(Empathy)할 수 없게 되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2.
‘본질’을 ‘현실의 문제’로 위장하는 전략
(프레임의 전환)
유대 지도자들이
'메시아(종교적 본질)'라는 쟁점을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정치·경제적 현실)'이라는 프레임으로 바꾼 것처럼,
사탄은 지금도 본질적인 영적 전쟁을 세상의 현실 문제로 교묘하게 위장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영원한 생명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정치, 경제, 사회적 성공,
생존의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에만 매몰되게 만듭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염려를 끊임없이 주입하여,
"지금 당장 먹고사는 문제,
성공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무슨 영원한 생명이냐"며 복음의 가치를 퇴색시키려 합니다.
이는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빌라도여, 이 자는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하는 자입니다"라며 총독의 현실적인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3.
궁극적 목적인
‘영적 뿌리 뽑기’와 ‘분리’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고 싶어 했다"는 점은 사탄의 가증한 종말론적 목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보라, 너희가 따르던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받아 비참하게 죽은 사기꾼일 뿐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져 제자들을 흩어버리려 했습니다.
사탄의 종착지는 항상
'완전한 부인과 분리'입니다. 의심으로 시작해 낙심하게 만들고,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하여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적 승리를 위한 묵상:
그러나 복음서의 반전은 사탄의 이 가장 잔인하고 치밀했던 전략(십자가 처형)이 오히려 사탄 자신의 머리를 깨뜨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와 승리의 통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탄은 뿌리를 뽑으려 했으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영원히 접붙임바 되는 생명의 뿌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십자가로 예수님을 죽여 신앙의 싹을 잘라버리려 했으나,
예수님은 도리어 그 십자가로 우리를 살리는 영원한 생명의 뿌리가 되어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영원히 연결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사탄이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혹은 현실의 고난을 통해 의심을 심어줄 때,
우리는 빌라도 법정 앞에서 당당히 침묵하시며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통치(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
"내 삶의 진짜 주인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를 선포하며,
세상과 다른 가치관(사랑, 진리, 거룩함)으로 당당하게 승리하는 영적 시선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무리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한 “고발”[κατηγορεῖν (카테고레인)]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하고 싶습니다. 그 고발 내용은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διαστρέφοντα
τὸ ἔθνος ἡμῶν (디아스트레폰타 토 에스노스 헤몬)]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κωλύοντα
Καίσαρι φόρους διδόναι (콜뤼온타 카이사리 포루스 디도나이)]와 “자칭 왕 그리스도라”[λέγοντα
ἑαυτὸν Χριστὸν βασιλέα εἶναι (레곤타 헤아우톤 크리스톤 바실레아 에이나이)](눅22:2)입니다. 여기서 사탄이 노린 것은 무엇일까요?
(a)
유대 지도자들의 입을 빌려 총독 빌라도 앞에서 행해진 세 가지 고발 항목(κατηγορεῖν)은, 겉으로는 로마의 법률을 자극하는 정치적 문구이지만 그 이면에는 성도들의 영적 뿌리를 완전히 초토화하려는 사탄의 가증하고 정밀한 영적 공격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절의 헬라어 표현과 구절들을 깊이 묵상하며,
사탄이 궁극적으로 노린 영적 음모를 인공지능이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 번째 고발: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헬라어: διαστρέφοντα τὸ ἔθνος
ἡμῶν (디아스트레폰타 토 에스노스 헤몬)
핵심 단어:
διαστρέφω (디아스트레포):
‘뒤틀다’, ‘비틀어 왜곡하다’,
‘바른길에서 벗어나게 하다’
사탄이 노린 것:
'진리의 기준'을 뒤틀어 영적 분별력 상실시키기
예수님은 백성을 미혹(왜곡)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거짓에 속아 뒤틀려 있던 죄인들을 바로잡으러 오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프레임을 완전히 뒤집어 예수님을
‘진리를 왜곡하는 자’로 고발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 전략을 씁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와 성경의 기준을 세상의 문화,
타협,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관으로 교묘하게 뒤틀어[διαστρέφω(디아스트레포)] 버립니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만들어,
성도들이 스스로 바른 신앙의 궤도에서 이탈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2.
두 번째 고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헬라어: κωλύοντα Καίσαρι φόρους διδόναι (콜뤼온타 카이사리 포루스 디도나이)
핵심 단어:
κωλύω (콜뤼오): ‘방해하다’, ‘금지하다’, ‘거부하다’
사탄이 노린 것:
'현실의 삶'을 옭아매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게 만들기
유대인들의 이 고발은 완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0:25)고 분명히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탄이 이 문제를 들고나온 이유는 빌라도가
‘로마의 경제적 주권(세금)을 흔드는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에게 재정과 물질,
먹고사고 생존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와 신앙을 방해[κωλύω(콜뤼오)]합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당장 눈앞의 물질과 세상의 시스템(가이사)에 순응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어,
삶의 실제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고 물질의 노예로 묶어두려는 전략입니다.
3.
세 번째 고발:
"자칭 왕 그리스도라"
헬라어: λέγοντα ἑαυτὸν
Χριστὸν βασιλέα εἶναι (레곤타 헤아우톤 크리스톤 바실레아 에이나이)
핵심 단어:
βασιλεύς (바실레우스):
‘왕(King)’, 통치권을 가진 자
사탄이 노린 것:
예수님의 '메시아 권세'를 무력화하고 교회의 왕권을 찬탈하기
유대 지도자들은 '메시아(구원자)'라는 영적 단어를 로마 황제에게 대적하는 세상의
'정치적 왕(βασιλεύς)'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이룩하실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세상적인 음모와 권력 다툼 수준으로 떨어뜨려 무력화하고자 했습니다.
사탄이 노리는 최종 목적은 성도들의 마음의 보좌에서 예수님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자 왕이 되시는 것을 막고,
대신 '자기 자신(자아)'이나 '세상의 우상'이 그 왕좌를 차지하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천국 시민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 권세 잡은 사탄의 통치 아래 머물게 하려는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인터넷).
(i)
이 세 가지 사탄의 무서운 음모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방어하고 대적할 수 있는 것일까요?
a.
[미혹 대적]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으로 분별력을 세워야 합니다.
사탄이 진리를 뒤틀어 우리를 미혹하려 할 때,
가장 강력한 방어 무기는
"성경의 왜곡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의 미혹을 받으실 때 오직
"기록되었으되"라며 말씀의 검으로 승리하셨습니다(마 4:4).
영적 방어법:
내 생각이나 세상의 문화,
타협적인 가치관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말씀의 문맥과 본질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사탄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그 본질을 미묘하게 뒤트는 교활한 존재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Wholesome
Truth)을 바르게 배우고 확신에 거해야 미혹의 영을 분별하고 대적할 수 있습니다.
b.
[현실·재정 방해 대적]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주권을 맡겨야 합니다.
사탄이 세금(물질)과 생존의 문제로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고 염려의 덫에 가두려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늘의 경제 원리로 맞서야 합니다.
영적 방어법: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눅 20:25)이라 선언하셨던 것처럼,
내 삶의 물질과 소유의 진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 나라'에 고정할 때,
사탄이 물질을 통해 주는 염려와 통제력은 힘을 잃게 됩니다.
c.
[왕권 찬탈 대적]
날마다 내
‘마음의 보좌’를 주님께 양도해야 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의 메시아 권세를 가리고 우리 마음의 왕 자리를 세상 우상이나
'자아'로 채우려 할 때,
우리는 날마다 자기 부인과 영적 왕권의 인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 방어법: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를 선포해야 합니다.
내 삶의 결정권,
미래의 계획,
감정의 주인 자리를 내가 쥐고 있으면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날마다 무릎 꿇고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통치자이자 왕으로 모셔 들일 때,
사탄은 결코 내 삶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왕이신 주님이 친히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에베소서 6장 11절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합니다.
사탄의 음모는 정교하지만,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는 한(접붙임),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습니다.
사탄을 대적하십시오.
그리하면 피할 것입니다(약 4:7).
(3)
셋째로,
저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Σὺ εἶ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쉬 에이 호 바실레우스 톤 이우다이온)]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Σὺ λέγεις (쉬 레게이스)](눅22:3)하고 답변하신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볼 때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You
say so)"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답변하신 것일까요?
1.
긍정의 의미를 담은 당시 유대인들의 관용적 표현
(완곡한 시인)
당시 고대 유대 사회(셈어적 배경)에서 이 표현은 상대방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내 입으로 거칠게 직접 확언하기보다 완곡하고 엄숙하게 시인하는 독특한 화법이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그러나 그것은 내 주장이 아니라,
네가 방금 네 입으로 선포한 움직일 수 없는 진리다"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빌라도는 예수님을 신문하고 책잡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빌라도 자신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진짜 왕이시다"라는 우주적 진리가 선포되게 만드신 주님의 주권적인 답변입니다.
2.
빌라도가 생각하는
'정치적 왕'
개념과의 차별화
(단어의 재정의)
만약 예수님이 빌라도의 질문에 로마식으로
"그렇다(Yes)"라고 단순하게 답하셨다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로마 제국에 칼을 들이밀고 폭동을 준비하는 정치적·군사적 반역자'로 단정 지었을 것입니다.
"의미의 분리":
예수님은
"네가 방금
'왕'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네가 생각하는 왕의 개념과 내가 진짜 왕인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라는 것을 명확히 하신 것입니다.
이 의도는 병행구절인 요한복음
18장 34절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라고 되물으십니다.
즉,
빌라도 네가 생각하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나는 진리를 다스리는 하늘의 왕이라는 점을 선을 그어 표현하신 것입니다.
3.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침묵과 당당함'의 조화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와 빌라도 법정의 재판이 불의하고 거짓된 프레임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아셨기에,
굳이 장황한 논리로 자신을 변호하거나 로마법의 허점을 파고들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의 성취: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시는 과정이었습니다.
불필요한 논쟁은 피하시되(침묵), 본인의 신분인
'메시아 왕'으로서의 정체성만큼은 비겁하게 부인하지 않고 가장 당당하고 신성한 방법[Σὺ λέγεις (쉬 레게이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으로 증언하신 것입니다.
묵상 결론:
결국 예수님의
"쉬 레게이스(네가 말하고 있다)"라는 답변은,
세상의 거짓 고발과 신문 기법에 말려들지 않으시면서도,
온 우주의 주권자로서
"세상이 나를 어떻게 정의하든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참된 왕이다"라는 사실을 선포하신 위대한
'역설의 답변'이었습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사도행전
11장 26절 하반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시 세상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라는 의미로 부르기 시작한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네가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i)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결하신 방식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너무나 강력하고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의 배경과 예수님의 답변을 대조해 보면,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인터넷):
a.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의 진짜 의미
당시 안디옥의 세상 사람들이 제자들을 향해 불렀던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ός
(크리스티아노스)]이라는 단어는,
사실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과 조롱이 섞인 별명이었습니다.
헬라어 접미사
'-아노스(-ανός)'는 '누구에게 속한 노예',
'정치적 추종자'를 뜻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제자들은
"인생의 모든 기준이 예수에게만 얽매여 있는 사람들",
"입만 열면 그리스도만 말하는 예수 중독자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우리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광고하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과 행동,
가치관이 세상과 너무나 달랐고 오직 예수로만 가득 차 있었기에,
세상 사람들이 참다못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b.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의 위대한 확장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굳이 말로
"나 교회 다녀요",
"나 신앙인입니다"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우리의 정직함,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거룩함,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먼저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을 보니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군요.
당신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세상을 향해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쉬 레게이스(Σὺ λέγεις) — 네가 방금 그렇게 말하였다.
네 눈에 보인 대로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인이 맞다."
c.
세상의 입을 통해 증명되는 신앙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입을 통해
"유대인의 왕"이라는 진리가 선포되었습니다.
안디옥의 불신자들은 제자들을 조롱하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속한 존귀한 자들"이라는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우리를 미혹하고,
현실의 문제로 흔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빼앗으려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의 뿌리이신 예수님께 단단히 접붙여져서 천국 시민답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우리를 보며 결코 우리의 신앙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Οὐδὲν εὑρίσκω
αἴτιον ἐν τῷ ἀνθρώπῳ
τούτῳ (우덴 휴리스코 아이티온 엔 토 안드로포 투토)](눅22:4)하고 선언한 것에 대해 좀 묵상하고 싶습니다. 문맥상 그리 선언한 것이 이해하기에 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병행 구절도 참조해서 좀 묵상함으로 우리의 이해도를 높이고 싶습니다.
(a)
누가복음
23장 4절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의 한마디 답변(“네 말이 옳도다”)만 듣고 곧바로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공식 선언한 것은 문맥상 전개가 다소 급작스럽고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로마의 철저한 직업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의 거센 고발 속에서 왜 이런 결론을 내렸는지,
사복음서의 병행 구절과 당시 역사적 배경을 입체적으로 연결하여 묵상해 보면 그 이면에 숨겨진 놀라운 진실을 보게 됩니다.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묵상해 보겠습니다(인터넷):
1.
요한복음
18장의 비하인드:
철저하고 상세했던 관정 안의 독대
누가복음은 재판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주지만,
병행구절인 요한복음
18장 28~38절은 빌라도가 무죄를 선언하기 직전 관정 안에서 예수님과 나누었던 깊은 종교적·철학적 대화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권의 성격 규명:
빌라도의 심문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요 18:36).
빌라도의 결론:
이 대화를 통해 빌라도는 예수님이 로마 제국의 전복을 꾀하는 군사적·정치적 혁명가(열심당원 같은 반역자)가 아니라,
'진리'를 전하는 영적·종교적 지도자임을 단번에 간파했습니다.
로마법은 사상이나 종교적 교리 문제로 사람을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빌라도는 법적으로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대역죄의 혐의(αἴτιον, 기소 사유)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여기서 “αἴτιον”(아이티온)은 고대 로마 시대의 헬라어 법정 용어로,
현대 법률 용어의
'혐의', '기소 사유',
'소송 원인(Cause
of Action)'에 정확히 부합하는 단어입니다].
2.
마태·마가복음의 비하인드:
고소자들의 '시기심'을 간파함
마태복음 27장 18절과 마가복음
15장 10절은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로서 유대 사회의 동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들고 온
'세금 거부'나 '황제 반역'이라는 죄목이 위장된 거짓말이며,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중적 인기를 질투하여 일어난 종교적 파벌 싸움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소자들의 고발에 일절 대답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당당한 침묵(마
27:12-14)을 보며,
빌라도는 예수님이 비겁한 죄인이 아니라 종교적 음모에 희생당하고 있는 무고한 자임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3.
영적·구속사적 의미:
흠 없는
'유월절 어린 양'의 공포
누가복음 23장 4절의 헬라어 선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Οὐδὲν
εὑρίσκω αἴτιον ἐν τῷ
ἀνθρώπῳ توύτῳ"(우덴 휴리스코 아이티온 엔 토 안드로포 투토)["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범죄의 근거(책잡을 만한 원인)도 찾지 못하노라"].
로마 총독의 이 공식적인 법정 선언은 단순히 인간 재판관의 판결을 넘어,
온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는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반드시
'흠과 점이 없어야'
했습니다(출 12:5).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이게도 이방인이자 이 세상 권력의 정점인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입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에 아무런 흠이 없으신
'완전하고 무죄한 유월절 어린 양'이심을 세상 앞에 공식적으로 확증하신 것입니다.
묵상 결론:
세상은 예수님을 뒤틀린 프레임으로 정죄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도리어 세상을 대표하는 재판관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사탄의 정죄와 세상의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뿌리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천국 시민들은 세상의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법정은 우리를 정죄할지라도,
온 우주의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고 우리를 향해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의롭도다)"라고 선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참소하는 자”(계 12:10)인 사탄(사탄이라는 이름 자체가 원래 히브리어로 “대적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법정 용어에서 유래했음)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존재를 공격하여 ‘너는 죄인이다’라고 정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시사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기에(고후5:2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즉,
저는 사탄의 정죄와 하나님의 칭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a.
하늘 법정의 고발자 사탄의 좌절
히브리어 ‘사탄(שָׂטָן)’과 헬라어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는 모두 법정에서 피고를 무참히 깎아내리는
‘대적자, 고발자, 참소자’라는 뜻을 가진 사법적 용어입니다.
사탄은 날마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우리의 실제 죄와 허물,
연약함을 들추어내며
“하나님, 저 사람은 저런 죄를 지었으니 당신의 법대로 지옥에 가야 마당합니다”라고 악착같이 정죄합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악독한 거짓 고발을 쏟아부었던 성경의 장면은,
영계에서 사탄이 우리를 향해 퍼붓는 정죄의 가시적인 모형이었습니다.
b.
위대한 교환(The
Great Exchange): 죄가 되신 예수님
사탄의 고발 앞에 우리는 스스로를 변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탄의 말대로 우리는 실제로 죄를 지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판결을 내리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고린도후서
5장 21절의 ‘위대한 교환’입니다.
우리의 죄 à
예수님께 전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무죄 선언(눅 23:4)을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 덩어리(Sin
자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 à
우리에게 전가:
그 결과,
예수님의 완전한 의(Righteousness)가 그분을 믿고 그분에게 접붙여진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c.
영원한 판결: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생명으로
'완불(Paid in
full)'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정에서 사탄의 고발장은 법적 효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서 ‘결코 ~ 없다’에 사용된 헬라어
‘우덴(οὐδέν)’은 강력하고 절대적인 부정을 뜻합니다.
이 판결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 선언했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Οὐδὲν
εὑρίσκω αἴτιον (우덴 휴리스코 아이티온)]라는 선언과 영적으로 완벽하게 대칭을 이룹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했고,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향해
"너는 죄인이다"라고 속삭여도,
이미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법정 깨끗이 판결을 끝내셨기에(칭의), 그 어떤 고발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최종 결론:
오늘 누가복음
23장 본문에서 시작된 대화가 참으로 놀랍게 연결됩니다. 사탄은 유대 지도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거짓 죄목을 씌워 뿌리를 뽑으려 했으나,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의 무죄 선언 속에서도 묵묵히 십자가로 걸어가 가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참된 왕이신 예수님께 영원히 접붙임바 되어,
사탄의 정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인터넷).
(5)
다섯째로,
저는 무리들이 “더욱 강하게 말하”였다[οἱ δὲ ἐπίσχυον
λέγοντες (호이 데 에피스퀴온 레고네스)]는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 및 적용과 예수님이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ἀνασείει τὸν λαόν (안아세이에이 톤 라온)](눅22:5)라는 주장을 생각할 때 오히려 그 종교지도자들과 무리가 “소동”하게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던진 고발 죄목을 정면으로 뒤집어 보면,
실제로 민중을 뒤흔들고 난폭한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그 종교 지도자들과 눈먼 무리였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절의 핵심 헬라어 단어들을 주석학적으로 묵상하며,
사탄이 부추긴 이 종교적 광기의 구체적인 의미와 적용을 살펴보겠습니다(인터넷):
1.
"더욱 강하게 말하되"의 주석학적 의미
헬라어: οἱ
δὲ ἐπίσχυον λέγοντες (호이 데 에피스퀴온 레고네스)
핵심 단어: ἐπίσχυω (에피스퀴오): ‘더욱 완강해지다’,
‘기세를 올리다’,
‘압박의 강도를 높이다’
빌라도가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눅 23:4)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자,
유대 지도자들은 법적인 논리나 정당한 증거를 제시하는 대신 악착같은 기세와 목소리의 크기[ἐπίσχυον (에피스퀴온): '더욱 힘을 떨치다',
'우겨대다', '완강히 고집하다',
'더욱 세지다’(사전적 의미)]로 재판관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이성적인 재판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적인 기세를 밀어붙이는 영적 발악이자 광기였습니다.
사탄은 진리가 통하지 않을 때,
세상의 거대한 힘과 수조(다수)의 목소리를 빌려 성도들을 위협하고 압박하는 전략을 씁니다.
2.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의 역설과 진실
헬라어: ἀνασείει
τὸν λαόν (안아세이에이 톤 라온)
핵심 단어: ἀνασείω (안아세이오): ‘위아래로 흔들다’,
‘선동하다’, ‘폭동을 선동하다’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온 백성을 흔들어 소동[ἀνασείω (안아세이오)]하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복음서 전체를 보면 진짜 백성을 흔들고 충동질한 자들이 누구인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음서의 증언: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5장 11절은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백성을 충동하여[ἀνέσεισαν (안에세이산)]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충동하다'에 쓰인 단어가 바로 본문의
'안아세이오(ἀνασείω)'입니다.
영적 적반하장:
예수님은 뒤틀린 백성들의 마음을 천국 복음으로 평안케 하시고 바로잡으셨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시기심 때문에 죄 없는 민중을 영적으로·정치적으로 거세게 흔들어 폭도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본질상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죄악을 예수님께 그대로 뒤집어씌우는 사탄의 전형적인
'적반하장' 전략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으로의 영적 적용:
이 역설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매우 중요한 영적 분별력을 제공합니다.
a.
세상의 프레임에 속지 마십시오.
세상은 종종 진리를 따르는 교회를 향해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
"독선적이다",
"사회를 소동하게 한다"며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실상을 보면,
진리가 없는 세상 문화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불안과 분노로 뒤흔들고(소동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거짓된 고발에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b.
사탄의
'소동'에 '예수님의 평안'으로 맞서십시오.
우리 마음속에 환경의 두려움,
염려, 시기심을 집어넣어 영혼을 흔들어 대는 사탄의 소동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거센 압박 앞에서도 끝까지 고요함과 당당함을 유지하셨던 예수님의 침묵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이 커질 때일수록 우리는 생명의 뿌리이신 주님께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인터넷).
(6)
마지막 여섯째로,
저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확인한 후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다(눅22:6-7)는 말씀을 좀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빌라도는 재판의 책임과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회피’로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냈기 때문이요(인터넷), 둘째는, 그 결과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눅23:12).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a)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재판 책임을 떠넘긴 빌라도의
'정치적 회피'와, 그 결과로 일어난
"원수가 친구가 된 사건"(눅 23:12)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깊고 엄중한 세 가지 영적 교훈을 줍니다(인터넷):
1.
사탄은
'진리를 대적할 때'에만 한마음이 됩니다.
빌라도(로마 총독)와 헤롯 안디바(유대 분봉왕)는 본래 영토 주권과 정치적 이권 문제로 극심한 갈등 관계에 있던 정치적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정죄하는 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영적 연대:
이는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 권세와 가치관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평소에는 자기들의 이익과 이념에 따라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분열하던 세상 세력들이,
교회를 핍박하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고 짓밟는 일에는 신속하게 손을 잡고 야합합니다.
우리의 분별:
세상이 보여주는 일시적인 평화와 연대는 진정한 정의가 아니라,
진리를 대적하기 위한 악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음을 분별해야 합니다.
2.
책임 회피와 타협은 죄의 자리에 머물게 만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눅 23:4)임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의 거센 소동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을 피하고자
'갈릴리 관할권'을 핑계 삼아 헤롯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비겁한 타협의 결말:
빌라도는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자신은 의롭고 깨끗하게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비겁한 회피와 타협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
진리를 알고도 현실적인 손해,
인간관계의 불편함,
혹은 정치적 경제적 부담 때문에 침묵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타협적 태도는,
결국 사탄의 손에 놀아나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 서게 만든다는 엄중한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3.
세상의 우정은 진리를 잃어버린
'비극적 야합'일 뿐입니다.
"그날에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친구가 되었다"는 누가의 기록은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아름다운 화해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시선으로 보면 가장 가증하고 비극적인 야합이었습니다.
그들의 우정은 죄 없는 메시아를 조롱하고 피 흘리게 만든 대가로 얻은
'피 묻은 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진리를 조금만 양보하고 타협하면,
세상과 좋은 친구(관계)가 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4장 4절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진리를 희생해가면서 얻는 세상의 인정,
성공, 그리고 인간관계의 평화는 영적으로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오히려 생명의 뿌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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