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침묵하시는 쇼같은 예배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누가복음 23:8-12).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8-12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ὁ δὲ Ἡρῴδης ἰδὼν τὸν
Ἰησοῦν ἐχάρη λίαν (호 데 헤로데스 이돈 톤 이에순 에카레 리안)](눅23:8)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a)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ἦν γὰρ θέλων ἐξ ἱκανοῦ
ἰδεῖν αὐτόν, διὰ τὸ ἀκούειν
πολλὰ περὶ αὐτοῦ
(엔 가르 델론 엑스 히카누 이데인 아우톤,
디아 토 아쿠에인 폴라 페리 아우투)]와 (b)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ἤλπιζέν τι σημεῖον ἰδεῖν ὑπ’
αὐτοῦ γινόμενον (엘피젠 티 세메이온 이데인 힢 아우투 기노메논)](8절). 이 두 가지 이유를 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a)
여기서 헤롯 안디바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는 표현은 단순한 영적 기쁨이나 경외감이 아닌,
정치적 호기심과 구경거리(엔터테인먼트)를 기대하는 세속적 기쁨이었습니다.
누가가 제시한 두 가지 이유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소문을 듣고 오랫동안 보고 싶어 했던 이유
헤롯은 오래전부터 예수에 대한 소문과 평판을 듣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불안감과 호기심:
헤롯은 이미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인 인물입니다(눅 9:7-9). 이후 예수의 사역이 확장되자,
민중들 사이에서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거나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헤롯은 당혹감과 함께 예수가 누구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오랜 기다림의 변질:
헬라어 본문의
"오랫동안 보고자 원했다”[ἦν γὰρ θέλων ἐξ
ἱκανοῦ ἰδεῖν αὐτόν (엔 가르 델론 엑스 히카누 이데인 아우톤)]는 표현은 진리를 향한 갈망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인물,
혹은 세간의 핫이슈인 인물을 향한 관음증적인 호기심이 오랜 시간 축적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이적 행하심을 보고 싶어 바랐던 이유
헤롯은 예수를 메시아나 선지자가 아닌,
일종의 마술사나 기인(奇人)으로 취급했습니다.
시각적 자극과 유희: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이적”)은 표적(Sign)을 뜻하지만,
헤롯에게 이 표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궁정의 지루함을 달래줄 초자연적인 쇼(Show)에 불과했습니다.
종교의 수단화:
헤롯은 예수의 능력과 이적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얻으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서 신기한 볼거리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안일하고 이기적인 기대[ἤλπιζέν (엘피젠) (“바랐던”)]만 있었을 뿐입니다.
요약하자면, 헤롯의 기쁨은 진리를 만난 기쁨이 아니라,
소문으로만 듣던 유명인을 마침내 대면하여 사적인 호기심을 채우고 신기한 이적을 구경하려 했던 철저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의 투영이었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지금도 헤롯처럼 사적인 호기심을 채우고 신기한 이적을 구경하려 했던 철저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의 투영하는 교인들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
2,000년 전 헤롯의 모습은 오늘날 교인들 안에서도 다음과 같은
'현대판 헤롯의 욕망'으로 투영되어 나타나곤 합니다.
이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보면 본문의 메시지가 더욱 강력해집니다(인터넷):
a.
'소문'과 '평판'만 쫓는 인플루언서 신앙
(헤롯의 첫 번째 이유)
현대적 투영: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을 가졌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보다
'유명한 목회자',
'소문난 대형 교회',
'트렌디한 기독교 문화'를 소비하듯 쫓아다닙니다.
본질적인 문제: 이는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나 삶이 변화되는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적 브랜드를 즐기는
'관객(Spectator)
신앙'에 가깝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유명세를 즐길 뿐,
주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과 순종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b.
'이적'과 '체험'만 구하는 엔터테인먼트 신앙
(헤롯의 두 번째 이유)
현대적 투영: 헤롯이 예수에게 기적이라는
'쇼'를 기대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축복,
즉각적인 기도 응답,
신비로운 영적 체험(은사)만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 해결과 내 삶의 지루함을 달래줄
'종교적 마술사'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좁은 길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나를 기쁘게 해줄 시각적·감정적 자극(표적)만 바라는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c.
결국 침묵하시는 예수님 앞에서의 태도
(9절과의 연결)
이어서 나오는
9절을 보면,
헤롯이 여러 말로 물으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적 호기심과 세속적 욕망으로 접근하는 자에게 주님은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현대의 헤롯들 역시 자신이 원하는
'이적'과 '기쁨'이 주어지지 않으면(주님이 침묵하시면),
결국 헤롯과 그의 군인들처럼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11절) 쉽게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버리곤 합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A. W. Tozer 목사님이 쓴 “예배인가 쇼인가!”(Tozer
on Worship and Entertainment)란 책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이 지경까지 온 것입니까?
n
A.W. 토저(A.W.
Tozer) 목사님의 날카로운 지적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대 교회 예배의 변질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는 선지자적인 경고입니다.
토저 목사님은 일찍이
"교회가 세상에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엔터테인먼트를 도입하는 순간,
교회는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린다"고 탄식했습니다. 소문과 이적(구경거리)을 기대했던 헤롯의 세속적 욕망이,
오늘날 현대 교회의
'예배(Worship)'가 아닌
'쇼(Entertainment)'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 예배가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영적 배경과 원인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현대 교회 예배는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Worship vs Show)
현재 많은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경외함)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무대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에서
'청중 중심'으로의 이동:
예배의 유일한 대상과 관객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는
'예배를 보러 온 교인들(청중)'이 관객이 되었고,
목회자와 찬양팀은 그 관객을 만족시켜야 하는
'연기자(쇼맨)'가 되었습니다.
영적 감동이 아닌
'감각적 자극'의 추구:
어두운 조명,
화려한 사운드,
세련된 영상 기법 등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연출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은혜'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헤롯이 기대했던 시각적·감각적 유희(쇼)에 반응한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통회 없는
'값싼 위로':
십자가의 좁은 길,
거룩함, 회개와 같은 무거운 진리는 거부됩니다.
대신 헤롯의 호기심을 채워주듯,
듣기 좋은 긍정의 메시지와 번영신학,
심리학적 위로가 설교단을 채우고 있습니다.
2.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원인 분석)
성공의 기준이 '거룩함'에서 '숫자'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는 교회의 부흥과 성공을 영적인 성숙이 아닌 출석 성도 수와 재정의 규모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세상의 마케팅 기법과 소비주의적 엔터테인먼트를 교회 안으로 무분별하게 들여오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십자가 없는
'값싼 위로와 재미'만 원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사적인 호기심과 즐거움을 채우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많은 교인 역시 자아의 죽음이나 회개의 고통 없이 종교가 주는 감정적 자극과 위로만을 소비하고 싶어 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선포하기보다 이러한 성도들의 입맛에 맞추어 기쁨을 연출하는
'공급자' 역할을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사라진 자리를
'인간의 기획'으로 대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와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자,
교회는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세련된 조명,
화려한 사운드,
치밀하게 짜인 프로그램으로 그 영적 공백을 메우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기획과 연출이 들어앉으면서 예배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거대한 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예배의 관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유일한 관객이자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예배는 회중석에 앉아 있는
'교인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무대로 변질되었고,
목회자와 찬양팀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인도자가 아니라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연기자(쇼맨)'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했던"
헤롯의 종말
결국 본문에서 헤롯은 자신이 원하는 쇼(이적)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이 침묵하시자,
곧바로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는 자로 돌변합니다(눅 23:11).
오늘날 교회가 교인들의 호기심과 재미를 채워주는
'쇼'로 예배를 유지한다면,
그 교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자극과 유익이 없어지는 순간 언제든 주님을 조롱하고 떠날
'현대판 헤롯'으로 자라나게 될 뿐입니다.
토저 목사님의 경고대로,
우리는 지금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꾼 무서운 우상숭배를 경계해야 합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헤롯이 예수님에게 “여러 말로 물으나”[ἐπηρώτα δὲ αὐτὸν
ἐν λόγοις ἱκανοῖς (에페로타 데 아우톤 엔 로고이스 히카노이스)]
예수님께서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αὐτὸς δὲ
οὐδὲν ἀπεκρίνατο αὐτῷ (아우토스 데 우덴 아페크리나토 아우토)](눅23:9)란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왜 예수님이 침묵하신 것일까요? 혹시 지금도 주님께서는 쇼 같은 예배에 침묵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a)
헤롯의 수많은 질문 앞에서도 철저하게 침묵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화려함 속에 갇힌 현대 교회를 향한 가장 무서운 심판이자 경고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오늘날 쇼처럼 변질된 예배 가운데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헬라어 본문의 의미와 성경적 배경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침묵하신 이유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을 인공지능이 세 가지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진리가 아닌
'수단'으로 접근하는 자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의 맥락: 헤롯은 예수님께
"여러 말로 물었습니다(ἐπηρώτα δὲ αὐτὸν ἐν
λόγοις ἱκανοῖς)."
여기서 '로고이스 히카노이스'(λόγοις
ἱκανοῖς)는 단순히 말이 많았다는 뜻을 넘어,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정교하고 수많은 질문들을 쏟아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헤롯에게는 진리를 깨닫고 삶을 돌이키려는
'회개의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그저 호기심을 채워줄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의 적용:
현대 교인들이 예배당에 나와 수많은 기도를 쏟아내고,
화려한 찬양을 부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그것이 나의 성공,
나의 평안,
나의 종교적 만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주님은 그 수많은 말(기도)에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도구로 전락하기를 거부하시며,
그런 예배자 앞에서는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2.
성령의 부재를 인간의 기획으로 채운 곳에는 주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본문의 맥락: 헤롯은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가려진 채 육신의 눈으로 이적(쇼)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이 만든 유희의 무대에 서서 춤추는 광대가 되기를 거부하시며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적용: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사라진 자리를 화려한 조명,
세련된 음악,
치밀한 감정 연출로 채워놓고
"은혜로운 예배"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연출한 쇼에는 주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감동하고,
자기들끼리 눈물 흘리며 축제를 벌이는 동안,
정작 예배의 주인이신 주님은 그 화려한 무대 뒤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침묵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쇼에 동참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3.
'이미 주어진 말씀'을 거부한 자에게 주시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본문의 맥락: 헤롯은 이미 광야의 선지자 세례 요한을 통해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입니다(막 6:20). 그러나 그는 들은 말씀에 순종하기는커녕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요한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이미 주신 선지자의 메시지를 짓밟은 헤롯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단 한 마디의 말씀도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헤롯이 자초한 영적 심판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적용: 오늘날 홍수처럼 쏟아지는 설교와 성경 말씀 속에서도,
정작 내 죄를 지적하는 말씀은 거부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만 찾아다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예배를 쇼처럼 소비하는 세대를 향해,
주님은 마침내
'말씀의 기갈'과 '영적 침묵'이라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십니다.
예배를 드려도 아무런 영적 감동이 없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상태,
그것이 바로 지금도 침묵하시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묵상의 결론:
침묵의 무서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침묵하시자 곧바로 그분을 업신여기며 희롱했습니다(11절). 오늘날 쇼 같은 예배에 익숙해진 교인들 역시,
주님의 침묵(즉각적인 응답이 없거나 재미가 없어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주님을 떠나거나 조롱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예배의 자리에 뜨거운 열기와 화려한 프로그램은 가득하지만,
정작 주님의 세미한 음성과 진정한 임재가 사라진
'침묵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두려움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주님이 내리시는 ‘말씀의 기갈'과 '영적 침묵'이라는 무서운 심판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특히 저는 ‘말씀의 기갈’을 묵상할 때 아모스
8장 11절 말씀이 즉각 생각났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 속에서 영적 침묵의 무서운 심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
아모스
8장 11절 말씀은 예수님의 침묵과 현대 교회의 쇼 같은 예배를 연결하는 완벽한 구약적 배경입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수많은 찬양이 불리고 매주 수천 편의 설교가 선포되지만,
정작 여호와의 진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 상태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가장 비극적인 영적 심판입니다. 이 무서운 영적 침묵과 말씀의 기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깨달아야 할지,
인공지능이 세 가지 본질적인 관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풍요 속의 빈곤: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를 지키고,
성회로 모이며,
화려한 찬양과 비파 소리로 예배를 드렸습니다(암
5:21-23). 오늘날로 치면
'최고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판의 실체: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배를 향해
"귀를 막겠다"고 하셨고,
마침내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사실:
예배당의 화려함,
넘쳐나는 기독교 콘텐츠와 설교의 홍수가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 귀를 즐겁게 하는 종교적 언어는 가득하지만,
내 영혼을 쪼개고 변화시키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이 사라진 상태라면 우리는 이미 무서운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b.
가장 무서운 심판은
'내버려 두심'(Abandonment)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는 불이나 칼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과 가짜 예배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롬 1:24,
26, 28)"입니다.
심판의 실체:
헤롯이 온갖 말로 물을 때 예수님은 소리를 지르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헤롯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버려 두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사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마케팅과 엔터테인먼트를 들여와 쇼를 벌여도,
아무런 제재나 즉각적인 징계 없이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너희들끼리 마음대로 해보라"며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일 수 있습니다.
진짜 말씀이 사라졌음에도 아무런 영적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집단적 불감증이야말로 영적 침묵의 극치입니다.
c.
말씀의 기갈은 인간의
'듣기 거부'에서 시작된 자초한 심판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기갈을 예언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강요했습니다(암 2:12). 헤롯 역시 죄를 지적하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차단했습니다.
심판의 실체:
하나님이 처음부터 입을 닫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듣기 싫다고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자,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침묵이라는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사실:
오늘날 성도들이 회개와 십자가,
거룩한 삶의 결단을 촉구하는 참된 말씀을 거부하고,
귀를 즐겁게 해줄
'쇼와 엔터테인먼트'만 찾아다닌 결과가 바로 이 기갈입니다.
주님의 침묵은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이 초래한 영적 형벌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묵상의 적용과 결론:
"주림과 갈함"을 느끼는 자가 사는 길입니다.
아모스 8장 12절은 말씀의 기갈을 만난 사람들이 말씀을 구하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돌아다녀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 심판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올바른 태도는,
지금 우리 예배 안에 흐르는 화려한
'쇼'가 실은 영적 가뭄을 감추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었음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내 귀를 즐겁게 하던 가짜 소리들을 멈추고,
"주님, 화려한 예배는 있으나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라고 우리의 영적 굶주림을 정직하게 직면할 때,
비로소 침묵을 깨시는 주님의 자비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εἱστήκεισαν δὲ οἱ ἀρχιερεῖς καὶ οἱ γραμματεῖς
εὐτόνως κατηγοροῦντες αὐτοῦ (헤이스테케이산 데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호이 그람마테이스 유토노스 카테고룬테스 아우투)](눅23:10)는 말씀을 묵상할 때 이미 묵상한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한 말씀(1-2절)이 생각났습니다. 이렇게 “고발”(2절)했던 사람들이 “힘써 고발”[εὐτόνως κατηγοροῦντες (유토노스 카테고룬테스)](10절)했다는 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요?
(a)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빌라도 법정에 이어 헤롯의 궁정까지 끈질기게 쫓아와
"힘써 고발했다"는 누가의 기록은,
악을 향한 인간의 지독한 열심과 종교적 위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미 빌라도 앞에서 고발했던 자들이 헤롯 앞에서
'더욱 힘써'
고발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무서운 영적 실체를 가르쳐 줍니다(인터넷):
1.
'유토노스(εὐτόνως)': 격렬하고 필사적인 악의 열정
헬라어 부사
'유토노스(εὐτόνως)'는 '격렬하게', '필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vehemently)'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상태처럼 온 신경과 에너지를 집중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교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세워진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자신들의 모든 지성과 열정,
에너지를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악을 향한 지독한 열심'이 들어앉을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2.
주님의
'침묵'이 가중시킨 종교 기득권자들의 분노와 불안
빌라도 앞에서도,
헤롯 앞에서도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9절). 예수님의 이 거룩한 침묵은 고발자들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교훈: 그들은 예수님이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헤롯 앞에서 기적을 행하다가 실수하여 꼬투리가 잡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철저한 침묵으로 그들의 권위와 질문을 무력화하시자,
그들은 도리어 깊은 불안감과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고발 목소리가
'격렬한 비명(유토노스)'처럼 커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는 집요한
'정죄의 영'
그들은 누가복음
23장 1-2절에서 이방인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유대인의 왕인 헤롯 안디바에게 또다시 예수를 고발합니다.
교훈: 이들은 예수를 죽일 수만 있다면 빌라도(로마 권력)든, 헤롯(유대 분봉왕)든, 누구에게라도 머리를 숙이고 정치적 결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종교적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끝까지 쫓아가 정죄하는
'집요한 종교적 위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묵상의 현대적 적용:
"우리는 무엇에
'유토노스(힘써)' 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 속에서도 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열심'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쇼 같은 예배를 유지하려는 열심: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말씀의 기갈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무대와 프로그램을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유토노스) 기획하고 에너지를 쏟아붓는 현대 교회의 눈먼 열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열심: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순종하는 일에는 게으르면서,
내 기준과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고발하는 일에는 온 힘을 다해(유토노스) 격렬해지는 종교적 중독 상태를 뜻합니다.
결국 이 본문은 우리에게
"당신이 지금 온 힘을 다해 쏟아붓고 있는 그 열심이,
혹시 주님의 침묵 앞에 당황하여 지르는 종교적인 비명은 아닌가?"라는 두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쇼 같은 예배를 유지하려는 열심”과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열심”을 묵상할 때 저는 로마서
10장 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도 바울의 지적은,
본문의 고발자들과 오늘날 쇼 같은 예배를 유지하려는 우리의 모습이 왜 그토록 파괴적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 두 본문을 연결하여 얻을 수 있는 깊은 영적 교훈입니다(인터넷):
a.
올바른 지식(에피그노시스)이 없는 열심은
'우상숭배'가 됩니다.
바울이 말한
'올바른 지식’[ἐπίγνωσις (에피그노시스)]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깊이 인격적으로 아는 참된 지식입니다.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예수를 고발했고,
현대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열심으로 화려한 쇼를 기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 빠진 열심은,
결국 하나님이 아닌
'자기만족'과 '자기 의'를 예배하는 정교한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맙니다.
b.
주님의 침묵(심판)을 '인간의 열심'으로 가리려 합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심의 가장 큰 특징은,
예배에 주님의 임재와 말씀이 사라졌을 때(침묵과 기갈)
이를 회개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더 격렬한 종교적 행위[유토노스(“힘써”)]로 덮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설교가 재미없을까 봐 더 화려한 영상을 준비하고,
성령의 감동이 없을까 봐 더 감정적인 음악을 연출하는 식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 없이도 예배가 무리 없이 진행되도록 만드는
'위험한 열심'이며, 결국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무서운 심판을 스스로 은폐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c.
'내 의'를 세우기 위해
'남'을 정죄하는 열심으로 변질됩니다.
로마서 10장 3절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다"고 이어집니다.
올바른 지식(복음)을 따르지 않는 종교적 열심은 필연적으로
'자기 의'를 낳고,
그 자기 의는 반드시
'형제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열심'으로 표출됩니다.
본문의 대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를 격렬히 고발했던 것처럼,
오늘날 올바른 지식 없이 열심만 가득한 교인들 역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보다 타인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정치적·종교적 싸움에 온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묵상의 결론:
활시위를 멈추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대제사장들의 '유토노스(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열심)'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있는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 눈먼 열심"
역시 예배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의 속도를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눈먼 열심을 멈추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주님,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올바른 지식 안에서 행하고 있습니까?"라고 정직하게 묻는 것입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ἐξουθενήσας δὲ αὐτὸν
ὁ Ἡρῴδης σὺν
τοῖς στρατεύμασιν αὐτοῦ καὶ
ἐμπαίξας, περιβαλὼν ἐσθῆτα
λαμπρὰν ἀνέπεμψεν αὐτὸν τῷ
Πιλάτῳ (엑수데네사스 데 아우톤 호 헤로데스 쉰 토이스 스트라튜마신 아우투 카이 엠파익사스,
페리발론 에스데타 람프란 아네펨프센 아우톤 토 필라토)](눅23:11)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했던 헤롯이(8절)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낸 것일까요?
(a)
"매우 기뻐했던(8절)" 헤롯이 순식간에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는 자(11절)"로 돌변한 배경은,
자신이 원하는
'쇼(이적)'를 보여주지 않고 철저히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세속적 인간의 극단적인 분노와 멸시를 보여줍니다. 헬라어 단어들의 깊은 의미와 흐름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 안에도 존재할 수 있는 무서운 영적 실체가 드러납니다(인터넷):
1.
엑수데네사스(ἐξουθενήσας)(“업신여기며”): '가치 없는 존재'로 취급함
본문의 의미: '업신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엑수데네사스(ἐξουθενήσας)'는 '제로(0)로 만들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헤롯은 소문으로 듣던 대단한 예수가 자신의 호기심을 채워줄 기적을 행하지도 못하고,
질문에 한 마디 대답도 못 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지,
단숨에 그를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로 격하시켜 버린 것입니다.
현대적 투영: 오늘날 교인들이 쇼 같은 예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감정적 자극,
즉각적인 축복,
문제 해결이라는 기적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가치를 단숨에
'제로(0)'로 만들며,
"예수 믿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고 주님을 업신여기며 신앙을 팽개쳐 버립니다.
2.
엠파익사스(ἐμπαίξας)(“희롱하고”):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며 조롱함
본문의 의미: '희롱하다'의 헬라어 '엠파익사스(ἐμπαίξας)'는 '어린아이처럼 대하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라는 어원을 가집니다.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장난감 취급하며 즐겼음을 뜻합니다.
자신이 기대했던 엔터테인먼트(이적)를 거부당하자,
도리어 예수를 조롱하는
'사학한 엔터테인먼트(희롱)'의 도구로 삼아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현대적 투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내 유익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주님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기도를 멈추고 주님을 내 삶의
'장난감'이나 '장식품' 정도로 취급하며 조롱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3.
에스데타 람프란(ἐσθῆτα
λαμπρὰν)(“빛난 옷”):
가짜 영광의 옷으로 진리를 가림
본문의 의미: '빛난 옷(ἐσθῆτα
λαμπρὰν)'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는 화려하고 눈부신 옷입니다.
헤롯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를 비꼬기 위해 이 화려한 옷을 입혀 광대처럼 만들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의 비하와 고난을 조롱하기 위해 세상의 화려한 껍데기(빛난 옷)를 덮어씌운 것입니다.
현대적 투영: 이것이 바로 토저 목사님이 경고한
'쇼가 된 예배'의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낮아짐,
거룩함이라는 예수의 본질은 감추어 버린 채,
인간들의 눈을 현혹하는 화려한 조명,
세련된 프로그램,
번영신학이라는 '빛난 옷'을 예수님께 억지로 입혀놓고 자기들끼리 즐거워하는 위선입니다.
묵상의 결론: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가 주는 경고
헤롯은 결국 예수를 귀찮은 존재,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삶이 변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은혜의 기회'를 영영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과 사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께 나아오는 자는,
주님이 침묵하시는 순간 언제든 주님을 업신여기고(엑수데네사스), 장난감처럼 희롱하며(엠파익사스), 세상의 화려한 껍데기(에스데타 람프란)로 진리를 가려버린 채 주님을 삶 밖으로 도로 쫓아내 버립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우리 삶의 진짜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기쁨을 주지 않는다고 언제든 업신여기고 도로 보내버릴
'광대'로 취급하고 있습니까?
(인터넷)
(5)
마지막 다섯째로,
저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ἐγένοντο δὲ φίλοι ὅ τε Ἡρῴδης καὶ
ὁ Πιλάτος ἐν αὐτῇ τῇ
ἡμέρᾳ μετ’ ἀλλήλων· προϋπῆρχον γὰρ ἐν ἔχθρᾳ ὄντες πρὸς
ἑαυτούς (에게논토 데 필로이 호 테 헤로데스 카이 호 필라토스 엔 아우테 테 헤메라 멧 알렐론;
프로위페르콘 가르 엔 에크트라 온테스 프로스 헤아우투스)](눅23:12)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시편
2편 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리고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한 사도행전
4장 25-27절 말씀도 연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여.” 왜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
4장 25-27절에서 시편
2편 1-2절 말씀을 인용한 것일까요? 누가가 헤롯과 빌라도에 관하여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12절에서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4장 27절에서도 왜 그리 반복해서 기록한 것일까요?
(a)
누가가 이 사실을 누가복음와 사도행전에서 반복하여 기록하고 시편을 인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가 우연한 정치적 비극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된 거대한 구속사적 사건임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구체적인 세 가지 이유를 통해 누가가 전하고자 했던 영적 메시지를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시편
2편 '메시아 예언'의 문자적·역사적 성취 증명
시편 2편은 세상의 통치자들이 연합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대적할 것을 예언한 대표적인 메시아 시편입니다.
예언의 성취:
시편에 예언된 "세상의 군왕들"은 '헤롯 왕'으로, "관리들(관원들)"은 '본디오 빌라도 총독'으로 역사 속에서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누가의 의도:
누가는 사도행전
4장에서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를 통해 이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유대인의 왕 헤롯(이스라엘 백성의 대표 격)과 이방인 총독 빌라도(열방의 대표)가 손을 잡은 이 기괴한 연합이 바로 시편
2편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된 역사적 사건임을 교교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2.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관통하는 신학적 통일성
(누가-사도행전 구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본래
'누가'라는 한 저자가 데오빌로에게 보낸 전편과 후편의 구조를 가집니다.
복음서에서의 씨앗:
누가복음 23장 12절에서 두 권력자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역사적 사실로 먼저 던져놓습니다.
사도행전에서의 열매:
이후 사도행전
4장에서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가 영적인 눈을 떠 이 사건을 다시 해석합니다.
"아! 그때 헤롯과 빌라도가 합세했던 것이 바로 시편
2편의 성취였구나!"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즉,
누가복음에서 일어난 사건의 영적 의미를 사도행전에서 명확하게 풀어내며 두 책의 신학적 통일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3.
악의 연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선포
평소 영토 문제와 관할권 문제로 척을 지고 원수로 지내던 두 정적(헤롯과 빌라도)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밀어내는 일에는
'당일에 즉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악은 진리를 대적할 때 가장 완벽하게 하나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4장 28절은 이 인용구 바로 뒤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하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결정적인 가르침:
세상 권력자들이 제아무리 힘을 합쳐(유토노스) 예수를 대적하고,
업신여기고, 조롱할지라도, 그 모든 악한 연합마저도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주권적인 섭리 아래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예수를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지만(눅 23:11)', 실상은 하나님의 손길이 인류 구원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적 적용:
'쇼 같은 예배'
뒤에 숨은 세상과의 타협
이 묵상은 앞서 '쇼 같은 예배를 유지하려는 눈먼 열심(롬 10:2)'과도 아주 날카롭게 연결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올바른 지식을 잃어버리고 예배를
'쇼'로 만들 때 발생하는 비극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가 세상(헤롯과 빌라도)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은 종교는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마케팅,
세상의 권력과 기가 막히게 야합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삶의 자리에서 밀어내기 위해 세상과 짝하는
'현대판 헤롯과 빌라도의 연합'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누가는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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