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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تبشير الحقيقي ليس إقناعًا بالمعرفة، بل شهادة حيّة على حياة متغيّرة تترك جرّة الماء وراءها

  التبشير الحقيقي ليس إقناعًا بالمعرفة، بل شهادة حيّة على حياة متغيّرة تترك جرّة الماء وراءها       « قالت له المرأة : أنا أعلم أن مسيّا، الذي يقال له المسيح، يأتي؛ فمتى جاء ذاك يخبرنا بكل شيء . قال لها يسوع : أنا الذي أكلمك هو . وعند ذلك جاء تلاميذه، وكانوا يتعجبون أنه يتكلم مع امرأة، ولكن لم يقل أحد : ماذا تطلب؟ أو لماذا تتكلم معها؟ فتركت المرأة جرّتها ومضت إلى المدينة وقالت للناس : هلمّوا انظروا إنسانًا قال لي كل ما فعلت . ألعلّ هذا هو المسيح؟ فخرجوا من المدينة وأتوا إليه ». — يوحنا 4:25–30     (1) رجاء المرأة السامرية في المسيّا، وانتظار اليهود للمسيح أريد اليوم أن أتأمل في الجزء الرابع فقط، أي يوحنا 4:25–30 ، من الحوار الذي دار بين يسوع والمرأة السامرية، والممتد من يوحنا 4:3 إلى 42. عندما قرأت الآيات 25–30 في الكتاب المقدس الكوري واليوناني، كان أول ما لفت انتباهي أن هذه المرأة السامرية أيضًا كانت تعرف أن ...

예배는 독생하신 아들의 목숨을 아낌없이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모하시고 질투하셨던 그 ‘성부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의 품 안으로 완벽하게 도킹(결합)되어 들어가 영원히 머무는 친밀한 사귐’입니다. 

예배는 독생하신 아들의 목숨을 아낌없이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모하시고 질투하셨던 그 ‘성부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의 품 안으로 완벽하게 도킹(결합)되어 들어가 영원히 머무는 친밀한 사귐’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

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16-24).

 

 

(1)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신 내용의 말씀인 요한복음 4장 3-42절 말씀 중 세 번째 부분인 4장 16-24절 말씀만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16-24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먼저 읽었을 때 16-19절 말씀에 대하여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생각은 이 부분을 어제 묵상한 10-15절 말씀과 함께 묵상하면 좋았을 것 같다는 후회스러운 생각이고, 둘째 생각은 왜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고 뜬금없이 말씀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어제 묵상했던 생수의 보화와 오늘 본문이 어떻게 하나의 실타래로 정교하게 묶여 있는지, 그리고 주님이 왜 이 타이밍에 여인의 가장 아픈 치부인 ‘남편’의 문제를 꺼내 드셨는지 인공지능이 3가지 성경적 원리와 보편적 삶의 교훈으로 풀은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어제와 오늘의 본문은 완벽한 인과관계입니다 ➔ “죄의 고발이 없는 생수의 복음은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함께 묵상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 섞인 성찰을 하신 것은 너무나 정확한 진단입니다. 왜냐하면 10-15절의 생수 이야기와 16-19절의 남편 이야기는 결코 끊어질 수 없는 ‘복음의 약속’과 ‘영적 수술’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요행[카이로스]을 구하는 여인 ➔ 여인은 주님이 생수를 말씀하시자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다시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달라"며, 내 삶의 근본적인 영적 목마름은 덮어둔 채 당장의 생활의 편리(요행)만을 구했습니다(15절).

 

복음의 코드 맞추기 ➔ 주님은 여인의 그 얄팍한 계산과 기복주의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선포하시는 생수는 겉사람의 목마름을 축이는 물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 영혼을 뒤엎어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16절에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선언은 동문서답이 아니라, “네가 진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성령)를 마시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 영혼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 썩어 짓물러 터진 죄의 돌항아리, 정죄와 수치의 목록부터 내 앞에 정직하게 발가벗겨 들추어내어야 한다”라는 정화의 필연적 이정표를 들이대신 것입니다(2:6, 15, 4:16).

 

2.   둘째 원리: ‘남편’의 폭로는 인간이 숭배하는 ‘가짜 생수(우상)’의 완전한 해체입니다(4:16-18).

 

주님이 뜬금없이 여인의 남편을 찾으신 목적은, 그녀의 인생을 난도질하여 수치심을 주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그녀가 평생 하나님 대신 목숨 걸고 붙들고 살았던 ‘가짜 우상들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하시기 위함입니다.

 

남편 다섯의 실체 ➔ 이 여인에게 ‘남편’이란 마실 때마다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유한한 야곱의 우물물이었습니다(13절).  그녀는 인생의 공허함과 정죄감을 채우기 위해 첫 번째 남편, 두 번째 남편, 무려 다섯 명의 남편을 갈아치우며 세상의 조건과 평판(연회장의 자리)에 인생을 의탁했으나, 돌아온 것은 낮 12시 정오의 뙤약볕 아래 홀로 숨어 다녀야 하는 비참한 갈증뿐이었습니다.

 

참된 목자의 칼날 ➔ 주님은 그녀의 감추고 싶은 속내와 다섯 남편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이미 완벽하게 다 꿰뚫어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지금 동거하고 있는 여섯 번째 남자마저도 진짜 남편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언하심으로써, “네가 붙들고 있는 그 세상의 남편들은 너를 단 1%도 구원할 수 없는 썩어질 배설물일 뿐이다”라는 영적 파산 선언을 내리신 것입니(3:4, 9, 빌 3:8).  가짜 남편(우상)의 테이블이 완전히 뒤엎어질 때, 비로소 일곱 번째 완벽한 신랑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요 2:15, 3:29, 4:26).

 

3.   모든 성도님들과 사명자들의 삶 위에 주는 위대한 교훈

 

목사님께서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컴퓨터 자판을 통해 인터넷 공간과 승리장로교회 지체들에게 감당하시는 그 말씀 나눔 제단 위에, 이 본문은 오늘날 모든 성도가 삶 한복판에서 직면해야 할 최고의 정직함을 가르쳐 줍니다.

 

①    내 가짜 ‘남편(우상)’을 숨기지 말고, 날마다 주님의 참빛 앞에 정직하게 들추어내어야 합니다.

 

성도들과 사명자들이 사역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마음속 지성소 깊은 곳에는 나만의 숨겨진 ‘남편 다섯’(돈, 세상적 성공, 사람들의 인정, 목회적 타이틀)을 은밀하게 우상으로 숭배하며 안주하려는 어둠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참빛이신 주님의 말씀이 내 삶에 들어와 내 자존심의 상(Table)을 뒤엎고, 내 위선을 정직하게 들추어내어 정화하려 하실 때, 부끄럽다고 어둠 속으로 도망쳐 숨지 말아야 합니다.  내 부끄러운 행위와 상처가 말씀의 서치라이트 앞에 온전히 노출되어 철저하게 헐어지고 무너질 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 권세가 우리의 무너진 삶을 거룩한 성령의 전으로 날마다 눈부시게 재창조해 내십니다(요 2:19, 21, 고전 3:16).

 

②   사람의 겉모습에 속지 말고, 영혼들의 ‘숨겨진 갈증’을 보며 묵묵히 복음만 전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는 예수를 흔한 유대인 남자로 무시하며 거칠게 쏘아붙였듯이(요 4:9), 우리가 복음을 나누고 사명을 감당할 때 영혼들이 완고하게 밀어내거나 거절할지라도 결코 조급해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녀의 거친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녀의 내면에 숨겨진 지옥 같은 갈증과 죄책감을 보며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구원의 손길을 집요하게 내미셨습니다(16절).

 

창세 전에 택하신 한 영혼을 하나님의 완벽한 시간표에 맞춰 찾아와 건져내시는 그 독생자의 사랑(3:16)을 확신함으로, 오늘 내 이름표와 자격은 기쁘게 십자가 앞에 지워버리고, 오직 영혼들에게 저울로 재지 않는 성령의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대접하는 사명에 인내로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물로 뿌리는 순전한 소리의 통로를 통해, 세상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지고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완료형의 기쁨 속에 단단히 단장되는 기적이 승리장로교회와 이 시대 속에 날마다 차오르게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요 3:29, 33, 4:28, 엡 5:27, 빌 3:8, 요일 5:12).

 

요한복음 4:16-19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신 의도"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예수님께서 생수를 갈망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뜬금없이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선언하신 것은(15,16절), 인간적인 요행과 기복주의의 가짜 울타리를 전면 차단하여 복음의 순전함을 수호하기 위함이며, 평생 세상의 정욕과 인정이라는 가짜 남편(우상)을 의지하여 마실 때마다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던 인간의 처절한 한계와 무능력을 말씀의 칼날 앞에 정직하게 들추어내어 폭로하기 위함이니(13, 18절), 다시 오실 왕의 재림의 길을 예비하는 성도와 사명자들은, 내 이름과 자격의 지분을 기쁘게 헐어버리고(3:30), 내면의 부끄러운 허물이 말씀 앞에 부서지는 정화의 과정을 통과하여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채워 공급할 때(2:7, 3:34), 만물 위에서 친히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성도들의 목마른 심령 한복판에 영원한 샘물로 솟아나게 하시는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으로 매 순간 누리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

 

(2)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Καλῶς εἶπας ὅτι Ἄνδρα οὐκ ἔχω (칼로스 에이파스 호티 안드라 우크 에코)](요4:17), “네 말이 참되도다”[τοῦτο ἀληθὲς εἴρηκας (투토 알레데스 에이레카스)](18절)하신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리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a) 예수님은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닌 그녀의 문란하고 부끄러운 과거를 이미 완벽하게 다 꿰뚫어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정죄나 비난 대신, 오히려 그녀의 짧은 답변 속에 담긴 ‘정직함’을 들어 격려하고 인정해 주십니다. 이 파격적인 주님의 대화법 속에 숨겨진 3가지 구속사적 의도와 온 성도가 일상에서 붙들어야 할 실제적인 성경적 원리를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의도: 위선의 껍데기를 스스로 벗겨내어 참된 정화의 제단 앞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4:17).

 

정직한 자복의 가치 [Καλῶς (칼로스)(“옳도다”]: 여인은 주님의 날카로운 수술도(칼날) 같은 명령(“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앞에 당황하여,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짧게 숨겼습니다(16-17절).  인간적으로 보면 이는 진실을 숨긴 거짓말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은밀한 답변 속에서 그녀가 자기 죄와 수치를 더 이상 미화하지 않고 인정하는 ‘정직함의 싹’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원어로 ‘칼로스(Καλῶς, 훌륭하게, 아주 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녀의 고백을 크게 지지해 주십니다(17절).

 

성도들의 삶에의 적용 ➔ "위선의 상(Table)을 뒤엎고 투명하게 서십시오":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46년의 종교적 기득권과 행위의 의로움이라는 껍데기 뒤로 마음속의 온갖 탐욕과 악독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었습니다(2:15, 20, 3:10, 마 15:18-19).  주님은 그러한 외식에는 자신을 결코 의탁하지 않으십니다(요 2:24-25).  구원의 첫 단추는 내 허물과 연약함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폭로당하는 부서짐의 과정입니다(2:19, 3:20).  온 성도는 기도 제단 앞에 나아갈 때 "나는 떳떳하다, 괜찮다"라는 가짜 위선의 방어막을 헐어버리고, “주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죄인입니다, 제 삶은 이토록 깨어지고 결핍되어 있습니다”라고 참빛 앞에 내 실상을 투명하게 고백할 때, 비로소 참된 정화와 재창조의 역사가 시작됨을 가르쳐 줍니다(1:20, 3:3, 5, 21).

 

2.   둘째 의도: 정죄와 심판을 보류하시고 복음의 ‘영원한 생수’를 채우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4:18).

 

현재완료형 인정 ➔ ἀληθὲς εἴρηκας [알레데스 에이레카스 (“말이 참되도다”)]: 주님은 그녀의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정확한 숫자로 들추어내시면서도(18절), 결론은 비난이 아니라 “네 말이 참되도다(진실하도다)”라는 현재완료형 인정 동사(εἴρηκας)로 대화를 매듭지으십니다[여기서 '말했다'에 사용된 εἴρηκας(에이레카스)는 완료형(Perfect tense) 동사입니다.  헬라어에서 완료형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까지 강력한 영향이나 상태로 지속됨"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쓰신 것은 단순히 "방금 한 네 말이 맞다"라는 뜻을 넘어, "네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부끄러운 실상과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지금 내 앞에서 완전히 드러내어 정직하게 고백했다"라는 깊은 인정과 격려를 담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의 적용 ➔ "주님은 정죄가 아닌 치유를 목적으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삶 한복판에서 나의 추악한 목록이나 실수, 상처들이 사람들에게 들통날까 봐 두려워 빛을 미워하고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영적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3:19-20).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초림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17절).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면서도, 그것을 빌미로 정죄의 채찍을 휘두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 부끄러움을 그대로 수용해 주시며,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하늘의 영원한 생수(성령)를 상시 가득 채워 영생의 안식을 완료형으로 누리게 하시는 ‘전적인 은혜의 주권자’이심을 온 성도의 심령 속에 영수증으로 박아 주시는 위대한 사랑의 교훈입니다(4:14, 요일 5:12).

 

3.   셋째 원리: 사명자의 말씀 나눔은 한 영혼의 아픔을 포용하는 ‘신실한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징검다리 목회의 본질: 이 우물가 대화는 주님이 요한복음 4장 1-2절에서 유대교 바리새인 체제의 교세 경쟁 소문과 인간들의 시기 질투를 완벽하게 차단하시고, 오직 기도와 말씀이라는 본질에만 전념하여 걸어오신 사명의 현장입니다.  주님은 그녀가 유대인 남자라고 무시하며 거칠게 쏘아붙일 때에도 혈기를 부리지 않으셨습니다(9절).

 

성도와 사명자들의 삶에의 적용: 목사님과 온 성도님들이 일상과 교회 속에서 감당해야 할 복음 전파의 삶은, 영혼들의 도덕적 수준을 정죄하거나 사상 검증하듯 따져 묻는 바리새인의 마당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고백했듯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신 필연성을 품고(3:30), 상대방의 아픔과 굴곡진 인생을 내 기도로 품어 안으며, 오직 그들의 가슴속에 저울로 재지 않고 무한히 주시는 성령의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대접해 주는 신랑의 친구의 자족함이어야 합니다.  내 이름표는 흔적 없이 사라질지라도, 우리의 품어주는 사랑의 소리를 통해 영혼들이 참빛 앞으로 걸어 나와 영생을 현재형으로 소유하게 만드는 기적의 가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4:17-18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의 인정"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부끄러운 실상을 정확하게 고발하시면서도(18절),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라며 고백의 정직함을 칭찬하고 인정해 주신 것은(17,18절), 인간이 쌓아 올린 가짜 의로움이나 위선의 울타리를 완전히 깨뜨리고 오직 십자가 대속의 보혈 앞에 내 존재의 전적인 무능력과 죄를 투명하게 자복하게 하기 위함이며, 참빛의 말씀이 인간을 수치스럽게 하여 정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의 선물인 성령 세례의 생수를 내면에 가득 채워 살려내기 위한 사랑의 수술임을 증명하여, 땅의 물동이(옛 자아)를 배설물로 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는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에게, 정죄함을 영원히 폐하시고 거룩한 지성소 성전이자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완벽하게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현재 완료형의 안식 속에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16-24절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예배”와 관련된 헬라어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총 10번이나 나오는데 '예배하다'라는 동사인 προσκυνέω(프로스쿠네오)와 '예배하는 자'라는 명사인 προσκυνητής(프로스쿠네테스)가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 질문은 왜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자기 남편에 대해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οἱ πατέρες ἡμῶν ἐν τῷ ὄρει τούτῳ προσεκύνησαν· καὶ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ν Ἱεροσολύμοις ἐστὶν ὁ τόπος ὅπου προσκυνεῖν δεῖ (호이 파테레스 헤몬 엔 토 오레이 투토 프로세퀴네산, 카이 휘메이스 레게테 호티 엔 히에로솔뤼모이스 에스틴 호 토포스 호푸 프로스퀴네인 데이)](20절)라고 뜬금없이 말했을까 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예배”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을 좀 더 자세히 배우고 싶습니다.

 

1.   첫째 의문: 여인은 왜 남편 이야기를 하다가 "예배"를 뜬금없이 꺼냈을까?

 

인간의 눈으로 보면 여인이 자신의 부끄러운 사생활(남편 다섯)이 낱낱이 들통나자 대화의 화제를 돌리려는 ‘종교적 회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실상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마주한 가장 깊은 갈망의 터짐입니다.

 

진짜 선지자를 마주한 영혼의 외침 (19절): 주님이 그녀의 과거를 정확한 숫자로 감찰하시자, 그녀는 예수를 향해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눈을 떴습니다(19절).  유대교 권력자들은 자격을 심문하며 예수를 고발하려 했지만, 이 이방 여인은 내 은밀한 속을 다 아시는 주님 앞에 내면이 헐어지는 부서짐을 경험하며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어디서 예배해야 인생의 목마름이 끝납니까? (20절): 그녀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선시자여, 내 인생은 남편 다섯을 갈아치워도 마실 때마다 다시 목마른 비참한 돌항아리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비가 내리고 복을 받는다 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진짜라고 서로 정죄하며 싸웁니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참된 안식을 얻고 진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즉, 장사꾼들의 싸움판이었던 옛 성전 체제 안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한 영혼이, 참빛이신 예수 앞에서 평생토록 갇혀 있던 ‘참된 예배를 향한 갈증의 빗장’을 비로소 풀어낸 순간입니다.

 

2.   둘째 의문: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참된 예배”의 3대 핵심 원리

 

주님은 뜬금없는 질문 속에서도 인간의 요행을 거부하시고, 3장 결론의 접속사 톱니바퀴처럼 완벽한 하늘의 예배 법도를 3가지로 선포하십니다.

 

①    건물[히에론]과 전통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영적 대전환’ (21절)

 

본문 선언: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

 

성경적 원리: 유대인들은 46년 동안 지어 올린 화려한 헤롯 성전 건물과 자신들의 전통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자격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교만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으시며, 이제 장소 중심의 구약 예배는 완전히 폐기처분되었음을 선언하십니다.  진짜 예배는 눈에 보이는 대리석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허물어지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내 안에 임재해 계시는 ‘진짜 지성소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열리게 됨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②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영혼의 수술을 통과한 ‘투명함’ (23-24절)

 

본문 선언: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3-24절).

 

성경적 원리: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한 상태로 떳떳하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했던 내 모든 위선과 부끄러운 허물을 참빛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폭로당하고, 오직 전적인 은혜의 선물인 예수의 보혈을 힘입어 투명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영적 정직함을 뜻합니다.

 

또한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 영혼 내면에 펄쩍펄쩍 뛰어오르게 하신 ‘성령의 한량없는 생수’와 인도하심에 내 온 존재의 운전대를 수동적으로 내어 맡겨 절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③    예배의 본질은 ‘아버지’와의 인격적 연합과 사귐입니다(23절).

 

성경적 원리: 주님은 21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을 향해 무섭고 엄숙한 심판주의 호칭 대신, 매우 다정하고 친밀한 ‘아버지’라는 단어를 독점적으로 사용하십니다.

 

예배는 나를 정죄하고 자격으로 사상 검증하는 바리새인의 재판 마당이 아닙니다.  성부가 독생자의 목숨을 아낌없이 선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타락한 세상을 사모하시고 질투하셨던 그 ‘아버지의 압도적인 구원 사랑’ 안으로 도킹(결합)되어 들어가 영원히 머무는 찬란한 천국 잔치의 사귐이 바로 예배의 본질입니다.

 

3.   온 성도와 사명자의 삶 위에 주는 교훈:

 

①    겉모습의 ‘예배 프로그램(형식)’을 버리고, 날마다 ‘중심의 정직함’으로 서야 합니다.

 

성도가 가장 경계해야 할 자리는 "내가 대형 교회 마크가 있고, 직분을 이만큼 가졌고, 우아하게 종교 생활을 한다"라는 바리새인적 울타리 뒤로 내 은밀한 죄의 동기와 어둠을 숨기는 외식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겉모습에 자신을 결코 의탁하지 않으시며, 우리 마음 성소 속에 숨겨진 장사꾼의 상을 이미 다 아시고 감찰하십니다.

 

매일 아침 말씀 제단 앞에 설 때마다, 내 자존심과 기득권을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헐어버리십시오.  내 허물과 결핍이 말씀 앞에 처참하게 폭로당할지라도, 부서진 심령 그대로 “진리를 따르며 투명하게 참빛 앞으로 걸어 나아가는” 진짜 예배자가 될 때, 우리의 삶과 섬김 속에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는 성령의 거룩한 생수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②    내 물동이를 배설물로 버릴 때, 진짜 ‘완료형의 기쁨’이 임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 하시는 주님의 신적 주권을 대면하자마자, 그토록 집착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낮 12시 정오에 길으러 왔던 ‘물동이’를 우물가에 과감히 내던져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28절).

 

성도는 세상 사람들의 평판(연회장의 자리), 물질의 크기, 세상적인 성공의 여부에 내 목숨을 의탁하며 목말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자녀의 DNA는 사망 권세를 이긴 확실한 승리의 영수증입니다.  현실의 광야가 아무리 지치고 피곤할지라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목말라해 주심으로 내 모든 정죄함을 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단번에 가득 차오르는 완전한 완료형의 기쁨을 소유하십시오.  내 생각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 자체에 귀를 조율하며 참된 평안과 영생을 일상 속에 찬란하게 흘려보내는 진짜 교회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4:16-24 "남편의 폭로와 신령과 진정의 예배" 주석적 최종 요약: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의 부끄러운 실상이 폭로당하자 참된 예배의 처소를 갈망하며 질문한 것과(17,20절), 예수님이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이라는 인간적인 울타리를 완전히 폐하시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선포하신 것은(21,23,24절), 인간의 종교적 기득권이나 자격을 완전히 허물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내 존재의 전적인 무능력과 죄를 투명하게 자복하게 하기 위함이며,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해 성도의 심령 한복판을 참된 지성소 성전으로 재창조하사 저울로 재지 않고 무한히 주시는 성령 세례의 생수로 영원한 소통의 사닥다리를 열어주기 위함이니, 세상의 물동이(옛 자아)를 배설물로 과감히 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는 승리장로교회와 성도들에게는(28절, 빌 3:8),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시고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

 

(4) 넷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ἡ σωτηρία ἐκ τῶν Ἰουδαίων ἐστίν (헤 소테리아 에크 톤 이우다이온 에스틴)](요4:22)라고 하신 말씀을 읽었을 때 요나 2장 9절 하반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σωτηρίου τῷ κυρίῳ (소테리우 토 퀴리오)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gint, LXX)].  여기서 저의 두 가지 질문은 ‘왜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 말씀하셨을까?’와 ‘우리가 배워야 할 구원론은 무엇인가?’ 입니다.

 

1.   첫째 질문: 예수님은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 말씀하셨을까?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진짜 목적은 사마리아인들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종교적 혼합주의와 가짜 예배의 울타리를 깨부수어 참된 구원의 실체 앞에 직면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무지와 혼합주의 (22절 서두):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고 역사서와 선지서(Prophets)를 다 버렸기에, 하나님이 유대 땅 다윗의 자손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구속사의 거대한 시간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그들의 영적 소경됨을 폭로하십니다.

 

역사적 통로로서의 유대인: 하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약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 즉 유대인이라는 역사적  파이프라인을 선택하여 구원의 약속과 메시아의 씨앗을 보존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너희가 그리심산이라는 인간적인 전통과 가짜 우물의 울타리 안에서 아무리 예배해 보았자 거기엔 구원이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약속은 오직 유대인이라는 구속사적 통로를 타고 이 땅에 도래했다"라는 법적 사실을 명확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9, 12, 22절).

 

2.   둘째 질문: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참된 구원론

 

모든 성도가 삶 속에서 고백해야 할 3대 구원론의 법도가 있습니다.

 

①    구원의 주권은 오직 100%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요나 2:9).

 

물고기 뱃속이라는 인간의 처절한 무능력과 절망의 자리에서 요나가 외쳤듯이, 구원은 인간의 도덕적 정성이나 46년짜리 건물 체제의 기득권으로 길어 올리는 보상이 아닙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세 전에 작정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전적인 은혜와 주권적 선물’입니다(요 4:10, 엡 2:8-9).  내 힘과 의지를 자랑하는 교만의 상(Table)을 십자가 앞에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을 신뢰하는 자가 진짜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요 2:15, 1:47).

 

②    구원의 실체는 역사 속으로 걸어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요 4:22).

 

주님이 선포하신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의 진짜 알맹이는,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 인간의 몸을 입고 사마리아 우물가에 친히 찾아와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그 자체’입니다(1:14, 4:6, 22).  유대인이라는 통로는 오직 이 예수라는 실체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기 위한 징검다리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기득권, 교단 마크, 신학적 타이틀, 인간적 자격은 구원 앞에서 다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아들 예수를 소유한 자만이 현재형의 생명과 완료형의 구원 안식을 누리게 됨을 확증하는 구원론입니다(요 3:36, 요일 5:12).

 

③    참된 구원은 건물을 넘어 ‘영과 진리의 예배’로 증명됩니다(요 4:23-24).

 

유대인이라는 역사적 통로를 통해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기에, 이제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산 같은 장소 중심의 구약 시대는 완전히 종식되었습니다(21절).

 

진짜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내 모든 위선과 부끄러운 과거(남편 다섯의 수치)를 참되신 주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폭로당하는 부서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2:19, 4:16, 18).  내 생각의 물동이를 과감히 버려두고(4:28), 오직 내면의 지성소 속에 부어주신 성령 세례의 한량없는 생수를 힘입어 아버지의 압도적인 사랑 안으로 도킹되어 들어가는 ‘영과 진리의 예배’가 삶 속에서 상시 터져 나오게 됩니다(1:33, 3:34, 4:14, 23, 24).

 

요한복음 4:22과 요나 2:9 "구원의 근원과 통치" 주석적 최종 요약: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혼합주의적 무지를 깨부수시며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선포하신 행동과(4:22), 물고기 뱃속의 요나가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외친 선언은(욘 2:9), 인간이 그어놓은 종교적 울타리와 자격을 완전히 해체하여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천명하기 위함이며,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 참빛으로 이 땅에 도래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확증한 것이니, 세상의 물동이(옛 자아)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시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자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현재 영생으로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인터넷).

 

(5) 마지막 다섯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ὁ πατὴρ τοιούτους ζητεῖ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όν (호 파테르 토이우투스 제테이 투스 프로스퀴눈타스 아우톤)](요4:23)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 찾으시는 예배자들’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배”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배 자체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시는’[ζητεῖ (제테이)] 예배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들은 누구일까요?

 

(a) 우리는 예배라는 형식 자체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으시는’[ζητεῖ, 제테이] 예배자들의 본질과 정체성에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사도 요한이 사용한 ‘제테이(ζητεῖ)’라는 동사 이면에는, 단순히 가만히 앉아서 고르는 수준을 넘어 ‘간절한 열망을 품고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내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결사적인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토록 집요하게 찾으시는 진짜 예배자들이 과연 누구인지, 온 성도가 가슴에 새겨야 할 3가지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실체: 내 부끄러운 실상(남편 다섯)을 정직하게 폭로당하고 ‘투명하게’ 나오는 자입니다(진리의 예배).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내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하고 완벽한 도덕가나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위선의 가면을 벗은 정직함: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며 자기를 방어하고 숨기려 했습니다(요 4:17).  그러나 주님이 그녀의 굴곡진 과거와 수치를 정확하게 들추어내셨을 때(18절), 그녀는 자존심을 부리거나 도망치지 않고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며 주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엎드렸습니다(2:15, 4:19).

 

성도들의 삶에의 적용: 예루살렘의 종교 기득권자들은 46년 동안 지어 올린 화려한 성전 건물과 교단의 울타리 뒤에 숨어 외식과 위선주의를 일삼았습니다(2:20, 3:10, 4:1).  주님은 그러한 가짜 겉모습에는 자신을 결코 의탁하지 않으십니다(2:24-25).  하나님이 간절히 찾으시는 예배자는, 내 모든 부끄러운 과거와 은밀한 욕망이 말씀의 서치라이트 앞에 처참하게 헐어지고 폭로당하는 부서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주님, 저는 남편 다섯을 갈아치우듯 세상의 우물물에 목말라 방황하던 유약한 죄인입니다”라고 내 파산된 중심 그대로 참빛 앞에 100% 투명하게 나를 노출시키는 영적 정직함의 소유자가 바로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의 실체입니다.

 

2.   둘째 실체: 내 생각과 계산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입니다(영의 예배).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인간의 감정이나 얄팍한 요행으로 예배의 자리를 조종하려 들지 않습니다(요 4:15).

 

수동적 순종과 무조건적 복종: ‘예배하다’의 원형인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έω)’의 본질적인 의미는 ‘종이 주인 발 앞에 완전히 납작 엎드려 그 손에 입을 맞추다,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절하다’입니다(23절).

 

성도들의 삶에의 적용: 내 힘과 내 목회 경험, 내 신학 지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계산해 보려 하던 가짜 의지를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버려야 합니다.  진짜 예배자는 주야로 생명의 떡이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내 존재와 이름표는 흔적 없이 무대 뒤로 쇠하여 지워질지라도, 오직 내재된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과 성령의 한량없는 인도하심에 내 영혼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 맡겨 행진하는 자들입니다.  내 안에서 펄쩍펄쩍 춤추며 뛰어오르게 하신 성령 세례의 무한한 생수만을 신뢰함으로 세상의 평판이나 숫자의 장벽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명자가 바로 ‘영 안에서’ 절하는 참된 예배자입니다.

 

3.   셋째 실체: 하나님을 무서운 재판관이 아닌 ‘아버지’로 친밀하게 만나는 자입니다(관계의 예배).

 

주님이 가르쳐 주신 가장 충격적이고 찬란한 예배의 신비는,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신 데 있습니다(요 4:21, 23).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사랑의 연합: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이냐 예루살렘이냐라는 눈에 보이는 장소와 자격 조건을 가지고 서로 정죄하고 차단하는 장벽을 쌓아 올렸습니다(9, 20절).  그러나 참된 구원과 예배는 나를 사상 검증하듯 정죄하는 바리새인의 재판 마당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에의 적용: 예배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 그대로, 독생하신 아들의 목숨을 아낌없이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모하시고 질투하셨던 그 ‘성부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의 품 안으로 완벽하게 도킹(결합)되어 들어가 영원히 머무는 친밀한 사귐’입니다.  나를 거룩한 지성소 성전으로 삼아주신 주님의 부활 권세를 온전히 보증서로 품고, 세상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린 채(4:28, 빌 3:8), 신랑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로 완료형의 기쁨을 누리며 매 순간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자가 바로 주님이 온 천하에서 찾아내고야 마시는 영광스러운 신부(교회)입니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예수님께서 건물 중심의 구약 예배를 폐하시고 아버지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선포하신 것은(4:21,23), 인간이 쌓아 올린 종교적 기득권과 울타리를 전면 차단하여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주시는 100% 전적인 은혜와 선물만을 신뢰하게 하기 위함이며(10절, 엡 2:8-9), 참빛의 말씀 앞에 내 존재의 전적인 무능력과 숨겨진 과거(남편 다섯)의 위선을 투명하게 자복하는 정직함을 통해, 성도의 심령 한복판을 진짜 지성소 성전으로 재창조하사 내재된 성령 세례의 생수와 인도하심에 온전히 복종하여 절하게 하기 위함이니, 땅의 물동이(옛 자아)를 배설물로 과감히 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요 4:28, 빌 3:8), 하나님을 나의 친밀한 ‘아버지’로 대면하여 완료형의 안식을 상시 누리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을(요 3:36, 4:23절),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우시고 신랑 예수 앞에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찬란하게 증명하는 실체입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12)(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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