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전도는 지식의 설득이 아니라, 내 물동이를
버려둔 ‘생생한 변화의 증언’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한복음 4:25-30).
(1)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신 내용의 말씀인
요한복음 4장
3-42절 말씀 중 네 번째 부분인 4장 25-30절 말씀만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25-30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된
점은 이 사마리아 여인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알고 기대하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25절).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절)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녀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기다렸던 것일까요? 유대인의 메시아적 기대(Messianic Expectation)와 다른가요?
(a)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아를 오랫동안 갈망하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성격은 유대인들의 메시아적
기대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온 성도와 사명자들이 성경의 역사적 흐름과 주님의 입장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신학적 배경을 인공지능이 3가지 차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사마리아인들의
메시아 대망 ➔ ‘타헤브(Taheb)’: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
[타헤브(Taheb)는 사마리아교(Samaritanism)에서 종말의 때에 나타날 것으로 믿는 구원자이자 예시야적 인물입니다. 아람어로 '돌아오는 자'
또는 '회복시키는 자'를 뜻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과 상종하지 않으면서도 메시아를 기다릴 수 있었던 비밀은 그들이 고수하던 ‘정경(성경)의
범위’에 있었습니다.
성경의 제한과 신명기
18장: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보던 역사서나 다윗의 왕권을 예언한 선지서(Prophets)를 전면 배격하고, 오직 ‘모세오경(사마리아 오경)’만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요 4:22). 따라서 그들의 메시아 사상은 다윗의 혈통을 타고 올 정치적
왕이 아니라, 모세가 신명기 18장 15절에서 예언했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라는 말씀에
절대적인 기초를 두고 있었습니다.
가르쳐 주시는 이
(요4:25하): 사마리아인들은 장차 올 이
메시아를 사마리아어(아람어 계열)로 ‘타헤브(Taheb,
돌아오는 자, 회복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여인이 25절 하반절에서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고백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전쟁을 일으키는 군사적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어진 예배와 모든 종교적 난제를 완벽하게 해설해 줄 ‘참된 신령한 교사이자 선지자’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2.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 사상과의 결정적 차이 대조
이 두 세력의 메시아적 기대(Messianic
Expectation)를 대조해 보면, 왜 주님이 유대 땅을 떠나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비로소 자신을 그리스도로 최초 선언하셨는지 그 비밀이 풀리게 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메시아 대망 사상 비교:
첫째, 메시아를 기다리는 ‘기초 성경’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과 역사서, 그리고 선지서 전체를 정경으로 보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성경을 다 버리고 오직
신명기 18장 15절의 약속이 담긴 ‘모세오경’만을 기준으로 삼아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둘째, 소망했던 메시아의 ‘핵심 인물상’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영웅적인 왕권을 지닌 ‘다윗 왕의 자손’이자 강력한 군사적 통치자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다윗의 왕권 대신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를 기다렸으며, 그를 아람어로 ‘타헤브’(돌아오는 자,
회복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셋째, 그들이 부여한 메시아의 ‘핵심 임무’가 완전히
어긋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는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과 교세를 세계 위에
흥왕하게 세우는 것이 임무라 착각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의 메시아는 하나님의 완전한 하늘의 비밀과 참된 진리를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친히 다 가르쳐 주시고 알려 주시는
분이라 확신했습니다(요4:25).
넷째, 그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태도’ 역시 확연하게
갈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정치적 왕으로 삼으려고 종교적 열광을 보일 때마다,
주님은 그들의 가짜 믿음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시고 자리를 피하셨습니다(2:23-24, 6:15).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이 순전하게 진리를 구하자,
주님은 주저 없이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라며 자신의 신적 주권을 최초로 완벽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4:26).
3. 모든 성도와 사명자의 삶 위에 주는 위대한 교훈:
①
겉모습의 ‘종교적 타이틀’보다 중심의 ‘말씀 갈망’이 있는
자를 주님이 찾으십니다.
니고데모와 유대인들은 완벽한 율법의 지식과 46년짜리 거대한 건물 성전 체제라는 기득권의
울타리를 가졌으나, 정작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를 거부하고 사상 검증하려 들었습니다. 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은 혈통적으로 소외되고 도덕적으로 깨어진
삶을 살면서도, 그 심령 한복판에는 “그분이 오시면 모든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라는 순전한
말씀의 갈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온 성도는 내가 가진 직분, 직함, 사역의 크기라는 껍데기 상(Table)을 주님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드려야 합니다.
내 힘과 경험을 신뢰하지 않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가난한 심령이 될 때, 비로소 우리 내면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성령의 한량없는 생수가 터져 나오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내 계산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버릴 때, 완료형의 기쁨이 임합니다.
여인이 “메시아가 오실 줄 아나이다” 탄식하듯 외쳤을
때, 주님은 요한복음 역사상 최초로 거룩한 신적 자존심인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의 주권을 활짝 열어 계시해 주셨습니다(4:26). 이 찬란한 복음의 빛을 대면하자마자,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낮 12시 정오에 길으러 왔던 ‘물동이’를 우물가에 과감히 내던져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6, 28절).
성도는 세상의 물질, 평판(연회장의
자리), 세상적인 성공 여부에 목숨을 의탁하며 목말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목말라해 주심으로 내 모든 결핍과
저주를 끊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빌 3:8, 요 19:28), 오늘 내 눈앞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 자체에 귀를 조율하며 완료형의 기쁨 속에 당당하게 행진하는 진짜 그리스도인(교회)으로 살아가야 마땅합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아가 오실 줄 아나이다”(요4:25) 탄식하듯 외쳤을
때, 주님은 요한복음 역사상 최초로 거룩한 신적 자존심인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26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묵상할 때
제가 신학교 때 배운바로는 요한복음 전체에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서 ‘내가 … 이다’[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란 말씀을 일곱 마디만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26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라고 최초로 말씀하셨다면 도합 여덞 마디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예수님의 이 “내가 그라”[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는 말씀은 ‘내가 바로 (네가 말한) 그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이것도
예수님의 ‘내가 .. 이다’”[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라는 일곱 마디에 포함되는 것인지요? 아니라면 왜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26절에서 요한복음 역사사 최초로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는 네가 그라”[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는 말씀을 기록한 것일까요?
(a) 제가 신학교에서 배운 ‘7대 선언’에 오늘 본문 4장 26절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문법 구조와 신학적 성격에 따라 두 가지
형태의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나는
… 이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온 성도와 사명자들이 이 찬란한 신적 선언의 실체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도록, 두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나는 … 이다)]의 차이점과 사도 요한이 왜 이 선언을 사마리아 땅에서 최초로 기록했는지 그 의도를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해설: 뒤에 명사가 붙는
‘서술적 7대 선언’과 홀로 쓰인 ‘절대적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나는 … 이다)]의 차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나는 … 이다)]는 크게 두 종류로 분류됩니다.
①
서술적
에고 에이미 ➔ 신학교에서 배운 ‘7대 선언’
이 선언들은 헬라어 문법상 ‘에고 에이미’
뒤에 반드시 보어(명사)가 결합하는 구조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자적 성격과 속성을 비유를 들어 가르쳐 주신 선언들입니다.
목록: (1) 생명의 떡(6:35), (2)
세상의 빛(8:12), (3) 양의 문(10:7), (4) 선한 목자(10:11), (5) 부활이요 생명(11:25), (6)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7) 참포도나무(15:1).
②
절대적 에고 에이미 ➔
오늘 본문(4:26)을 포함한 ‘신적 주권의
선언’
오늘 본문 4장 26절의 원문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로 번역되어 뒤에 ‘메시아’라는 보어가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헬라어 원문은 뒤에 아무 명사도 붙지
않고 오직 “내가 이니라[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로만 끝나는 ‘절대적(Absolute)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는 구약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던 명칭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스스로 계신 자)”의 70인역(LXX) 번역인 ‘에고 에이미’를 예수님이
자신의 입술로 직접 복사하여 선포하신 것입니다. 즉, 비유적 속성을 나타내는 7대 선언과 달리,
“내가 바로 구약의 그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다!”라는 본질적인 창조주로서의 신성을
완전하게 드러내신 주권적 선언입니다(요 1:1, 4:26).
2.
둘째
해설: 사도 요한이 왜 사마리아
땅에서 최초로 이 선언을 기록했는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수많은 변론 속에서도
자신을 감추셨던 주님이, 왜 하필 유대인들이 개처럼 멸시하던 사마리아의 이름 없는 한 여인 앞에서 이 장엄한 최초의 신적 자존심[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나는
… 이다)]을 선포하셨을까요?
유대인들의 가짜 ‘다윗적 영웅주의’ 차단: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정치적·군사적 왕으로만 대망했기
때문에, 주님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선포하는 순간 인간적인 조급함으로 예수를 왕 삼아 폭동을 일으키려 했습니다(6:15).
그래서 주님은 유대 땅에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그들의 가짜 열광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2:24-25).
사마리아 여인의 ‘모세적 진리 갈망’에
대한 완벽한 응답: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다윗의 정치적 왕권이 아니라, 모세오경 신명기 18장 15절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완전한 하늘의 비밀과 참된 진리를 친히 가르쳐 줄 선지자를
순전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4:25). 여인이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라고
진리를 구하는 그 순전한 고백의 타이밍에 맞춰, 주님은 주저 없이 “너에게 지금 하늘의 생생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며 은혜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젖혀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3:34,
4:6, 26).
3.
모든
성도와 사명자의 삶 위에 주는 교훈:
①
내
의지를 완전히 헐어버리고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나는 … 이다)]의 주권만 의지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다섯의 수치와 인생의
타 들어가는 목마름 속에서 인간의 방법론인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며 방황했습니다(요 3:4, 9, 4:9, 15). 그러나 주님이 “내가 그라[에고 에이미]” 선포하시며 인생 한복판에 찾아오시는 순간, 모든 한계와 절망은 끝이 납니다(4:26).
온 성도는 내가 가진 직분, 사역의 크기, 46년짜리 인간의 가짜 건물이라는 기득권의 울타리를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드려야 합니다. 내 힘과 경험을 신뢰하는 바리새인적 영성을 다 헐어버리고,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스스로 계신 주님의 전능하심과 성령의 한량없는 이끄심만을 100% 전적으로 의지하며 행진하는 자가 진짜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②
내
계산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버릴 때, 마르지 않는 완료형의 안식이 시작됩니다.
여인은 예수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마주하자마자, 그토록 집착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낮 12시 정오에 길으러 왔던 ‘물동이’를 우물가에 과감히 내던져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요 4:6, 28). 최고의 고상한 지식인 예수를 소유했기에 (빌 3:8), 이전까지 목말라하던 세상의 물동이를 기쁘게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의 평판(연회장의 자리), 물질의 크기, 세상적인 성공의 여부에 내 목숨을 의탁하며 목말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자녀의
DNA는 사망 권세를 이긴 확실한 승리의 영수증입니다(요 1:13,
요일 3:9). 비록 현실의 광야가 피곤할지라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목말라해 주심으로 내 모든 정죄함을
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단번에 가득 차오르는 완전한 완료형의 기쁨을 소유하십시오. 땅의 생각을 버리고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일상을 천국 잔치로 변화시키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마땅합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었다[ἐπὶ τούτῳ ἦλθαν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καὶ ἐθαύμαζον ὅτι μετὰ γυναικὸς ἐλάλει· οὐδεὶς μέντοι εἶπεν· Τί ζητεῖς; ἤ· Τί λαλεῖς μετ᾿ αὐτῆς (에피 투토 엘단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카이 에다우마존 호티 메타 귀나이코스 엘랄레이; 우데이스 멘토이 에이펜;
티 제테이스? 에 티 랄레이스 메트 아우테스?)](요4:27)는 말씀을 묵상할 때 왜 그들은 “이상히 여겼으나”[ἐθαύμαζον (에다우마존)] “무엇을 구하시나이까”[Τί ζητεῖς
(티 제테이스)] ‘어찌하여 그녀와 말씀하시나이까?’ 라고 묻는 제자가 없었던 것일까요? 특히 여기서 저는 “무엇을 구하시나이까”라는 헬라어 문장의
단어인 “ζητεῖς”(제테이스)에 관심을 갓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도 요한은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a) 왜 제자들이 이상히 여기면서도 감히 주님께 물어보지 못했는지, 그리고 사도 요한이 이 단락에서
‘제테오’를 통해 온 교회의 심령 위에 던지는 3가지 구속사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의도: 인간의 얕은 지식과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창조주의 엄숙한 위엄’ 때문입니다 (4:27).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당대 유대인 사회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상히 여긴 이유
[ἐθαύμαζον (에다우마존)(“이상히 여겼으나”)]: 원어
‘에다우마존(ἐθαύμαζον)’은 미완료 과거형으로, “눈앞의 광경에 압도되어 입을 쩍 벌린 채 지속적으로 경악하고 당황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당대 유대 사회에서 랍비가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율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하물며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며 상종하지도 않던 사마리아 여인과
랍비이신 주님이 단둘이 밀도 높은 진리의 대화를 나누고 계셨으니, 제자들은 영적인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당황했던
것입니다.
감히 묻지 못한 이유
(침묵의 원리): 제자들이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대화하시나이까”라고 감히 입을 열어 묻지 못한 진짜 목적은, 그 우물가 현장을 휘감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신적 위엄과 주권에 압도당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탈진하여 툭 주저앉으신 유약한 인간의 모습이었지만(요 4:6),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본질을 완벽하게 열어 계시하시는 주님의 진리의 권위 앞에(26절),
제자들은 자신들의 얄팍한 신학적 지식과 고정관념의 상(Table)이 완전히 뒤집어엎어
지는 엄숙함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둘째
의도: ‘제테오(ζητέω)’(찾다/구하다)의 대조를 통한 요한복음 구원론의 완벽한
성취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와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 ‘제테오(찾다/구하다)’라는 단어를 구속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배치하여 인간과 하나님의 격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죄악된 ‘제테오(ζητέω)’(찾다/구하다) ➔
"자기를 위해 예수를 사냥하고 죽이려 찾음"
공생애 초기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46년짜리 가짜 성전 건물의 기득권과 서열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의 자격을 심문하고 어떻게든 책잡아 죽이려고 예수를 ‘추적하고 찾았습니다[제테오(ζητέω)]’(요 2:20,
4:1, 5:18, 7:1).
또한 군중들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요행만을 채우기
위해 이기적인 목적으로 예수를 ‘찾아다녔습니다[제테오(ζητέω)]’(6:26).
요한복음 1장 38절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향해 최초로 던지신 질문 역시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티 제테이테(Τί ζητεῖτε)]”라는 동기 분별의 칼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테오(ζητέω)’(찾다/구하다) ➔ "잃어버린 영혼을 살리려 추적하여 찾아내심"
이 인간의 완악한 추악함과 완벽하게 대조를 이루는 거룩한 단어가 바로 앞 구절인 요한복음 4장 23절에 선포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제테이, ζητεῖ].”
연관성의 신비:
제자들이 던지려 했던 질문인 “무엇을 구하시나이까[티 제테이스(Τί ζητεῖς)]”에 대한 진짜 정답은 이미 주님의 발걸음 속에 나와 있었습니다(27절). 주님은 지금 육신의 양식을 구하러[제테오(ζητέω)] 사마리아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창세 전에 사랑하사 택하신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드시 찾아내어 건지시기 위해, 태초부터 작정된 구원의
시간표에 내 온 존재를 실어 뙤약볕 정오에 ‘그녀의 영혼을 절박하게 추적하여 찾아내고 계셨던[제테오(ζητέω)]’ 참된 목자의 심장이셨음을 선포하는 웅장한 설계입니다(4:4, 6, 23).
3.
모든
성도와 사명자의 삶 위에 주는 교훈:
①
인간적인 고정관념과 숫자의 장벽을 깨부수고, 오직 주님의 ‘만물 위의 주권’ 앞에 복종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유월절, 명절이라는 화려한 유대교적 시스템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땅의 현상만을 보며 이상히 여기고 판단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 역시 일상과 사역 속에서 "저 사람은 자격이 없다, 저 환경은
가망이 없다"라며 인간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의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약하려 드는 어둠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 자신을 신뢰하는
바리새인적 영성을 날마다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헐어버려야 합니다. 나를 지우고 오직 위로부터 오셔서 만물 위에 계신 주님의 전능하신
시선만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복음은 인간이 그어놓은 모든 교단과 노회와 상종하지 않는 장벽을 단숨에 부수고
침투하여 역사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땅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던져버릴 때, 완료형의 기쁨이 작동합니다.
제자들이 이상히 여기며 서성거리는 바로 그 타이밍에, 예수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인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요 4:26). 그녀는
그토록 집착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다녔던 옛 자아의 상징인 ‘물동이’를 우물가에 과감히 내던져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와서 보라”라며
주님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1:46, 4:28, 29).
성도는 세상의 물질,
평판(연회장의 자리), 눈앞의 일시적인 요행에
목숨을 의탁하며 목말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저주의 나무에 대신 달리사 내 모든 결핍을 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요 3:14, 빌 3:8), 오늘 내 가슴에 안겨 있던
땅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 자체에 귀를 조율하며 완료형의 기쁨 속에 당당하게 걸어가야 마땅합니다(요 3:29, 36, 엡 5:27, 요일
5:12)(인터넷).
(4) 마지막 넷째로, 저는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δεῦτε ἴδετε ἄνθρωπον ὃς εἶπέν μοι πάντα ὅσα ἐποίησα, μήτι οὗτός ἐστιν ὁ χριστός (듀테 이데테 안드로폰 호스 에이펜
모이 판타 호사 에포이에사, 메티 후토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요4:28-29)라고 말한 내용 중에 “와서 보라”[δεῦτε ἴδετε (듀테 이데테)]는 말씀을 묵상할 때 이 “와서 보라”(Come and see)라는 전도적 선포와 고백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라”[Ἔρχεσθε καὶ ὄψεσθε (에르케스데 카이 옵세스데)](1:39)하신 말씀과 빌립이 나다니엘에게 “와서 보라”[Ἔρχου καὶ ἴδε (에르쿠 카이 이데)](46절)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세 성경구절 다 한국어 성경으로는 “와서 보라”라고 기록되 있지만 헬라어 문장은 다 다릅니다. 이 “와서 보라”는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하신 후
빌립이 나다닐에게 “와서 보라”, 그리고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29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무리 전체에게 와서 보라”고 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세
가지 “와서 보라”의 원어적 신비와 구속사적 전개
①
요한복음 1장 39절 ➔ Ἔρχεσθε
καὶ ὄψεσθε (에르케스데 카이 옵세스데)(“와서 보라”)
원어적 성격:
현재 명령형 복수 동사(에르케스데)와 미래
직설법 복수 동사(옵세스데)의 결합입니다.
구속사적 의미:
구원의 근원이자 참빛이신 예수님이 인간들을 향해 “지금 즉시 와서 나와 함께 머물자, 그리하면 장차 하늘의 비밀을 보게 되리라” 하고 친히 초청하신 ‘존재론적 초대’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인간의 자격을 보지 않으시고, 성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자리(우물가, 광야)로 먼저 찾아오셔서 관계를 맺어주시는 구원의 절대 주권을 상징합니다.
②
요한복음 1장 46절 ➔ Ἔρχου
καὶ ἴδε (에르쿠 카이 이데)("와서 보라”)
원어적 성격:
현재 명령형 단수 동사(에르쿠)와 부정과거
명령형 단수 동사(이데)의 결합입니다.
구속사적 의미:
주님과 함께 머물며 완료형의 확신(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을 소유하게 된 빌립이, 편견에 가취어 방황하던 나다니엘이라는 ‘단 한 명의 영혼[단수]’을 향해 단호하게 외친 ‘인격적 전도’의 형태입니다. 내 지혜로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독보적인 인격을 직접 직면하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신실한 징검다리(소리)의 영성입니다(23절).
③
요한복음 4장 29절 ➔ δεῦτε ἴ데τε (데우테 이데테)("와서 보라”)
원어적 성격:
‘이리로 오라’라는 강력한 유도 부사와 부정과거 명령형 복수 동사의 결합입니다.
구속사적 의미:
물과 성령 세례를 통해 영혼이 완전히 거듭난 사마리아 여인이(3:5, 4:14), 이제 한 개인을 넘어 ‘동네 무리 전체(공동체와 세상, 복수형)’를 향해 거침없이 뿜어내는 ‘전방위적인 복음의 폭발’을 뜻합니다(4:28-29).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참빛을 대면한 영혼이,
인간이 그어놓은 모든 기득권과 상종하지 않는 장벽을 단숨에 부수어버리고 온 세상을 천국 잔치(가나의 포도주)로 초청하는 복음 전파의 최종적인 완성 단계입니다( 2:10,
4:9, 39).
2.
이
말씀들이 모든 성도와 사명자들의 삶 위에 주는 교훈:
a.
참된
전도는 지식의 설득이 아니라, 내 물동이를 버려둔 ‘생생한 변화의 증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낮 12시 정오에 물을 길으러 올 만큼 수치와 상처로
얼룩진 인생이었습니다(4:6, 7).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고상한 지식을 얻는 순간(빌 3:8), 그녀는 자기가 집착하던 옛 자아의 상징인 ‘물동이’를 우물가에 과감히 내던져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요 4:28).
온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거나
정죄하듯 사상 검증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는 내 생각의 계산을 다 허물고, “내가 세상의 썩어질 평판(물동이)을 배설물로 버릴 만큼
내 안에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성령의 생수를 주신 예수를 보라!” 하고 내 삶의 변화된 실상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순전한 소리의 사명임을 가르쳐 줍니다(1:23, 4:14, 빌 3:8).
b.
“와서 보라”의 선포는 인간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오직 ‘예수의 인격’ 앞에 직면하게 만듭니다.
빌립이 나다니엘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편견을 마주했을 때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고
오직 “와서 보라” 외쳤듯이(요 1:46), 사마리아 여인 역시 동네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오직 예수께로만 시선을 고정시킵니다(4:29).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자꾸
"교회 프로그램이 얼마나 훌륭한가, 내 행위가 얼마나 깨끗한가"라는 46년짜리 인간의 가짜 건물과 시스템을 자랑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 아시고 뒤엎으실 장사꾼의 상일 뿐입니다.
복음의 진짜 권위는 오직 십자가 대속과 독생자의
사랑(3:16)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의 아름다움에만 있음을 인정하고, 세상의 영혼들을 오직 주님과 1:1로 결합(도킹)시키는 단독자의 처소로 인도해야 마땅합니다(2:19, 21, 4:8).
c.
내가
기쁘게 ‘쇠하여지는 소리’가 될 때, 마침내 온 동네가 주님 품으로 돌아옵니다.
세례 요한이 고백했듯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셨던 그 하나님의 거룩한 필연성이 여인의 순종을 통해 성취됩니다(3:30).
여인은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지 않고 오직 예수만
흥왕하게 높였으며, 그 결과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게
만드는” 대부흥의 역사를 일구어냈습니다(4:30).
성도의 삶과 섬김은 내 이름표와 내 유익을 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신랑의 친구로서 오직 신부(교회)를 순결하게 단장시켜 신랑 예수의 목소리와 결합시켜 주는 중매의 사역입니다(3:29).
우리가 가정과 일터와 승리장로교회 속에서 나를 비워내고
오직 주님의 통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전진할 때, 주님은 우리의 그 순전한 “와서 보라”의 외침을 보증서로
삼으사,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뜨리시고 온 교회를 완료형의 기쁨과 영생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실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
(a) 여기서 저는 “와서 보라”(요1:29)는 말씀을 묵상할 때 (1)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2) 와서 “쉬어라”(막6:31), (3)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 그리고
(4) 와서 “내게로 오라”(마11:28)는 말씀들을 함께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와서” 시리즈가 성도의
신앙 여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1) 와서 보라(요1:39):
복음과의 첫 만남과 확인, (2)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 결단과 제자의 삶, (3) 와서 쉬어라(막6:31): 영육 간의 안식과 충전, (4)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 실패를 덮는 사랑과 친밀한 교제(인터넷). 저는 이 4개 중 “와서 쉬어라”와 “와서 조반을 먹으라”는 말씀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a.
와서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 ➔ 인간의 46년짜리 건물과 계산을 멈추는 안식
원어적 신비와 배경
[ἀναπαύσασθε (안아파우사스데)(“쉬어라”)]: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 “먹을 겨늘도 없을” 만큼 사역의 피로감 속에 둘러싸여 있을 때, 주님이 던지신 초청입니다(막 6:31, 요
4:6). 여기서 ‘쉬어라’의 원어 ‘안아파우오(ἀναπαύω)’는 단순히 잠을 자는 물리적 휴식을
넘어, ‘숨 가쁘게 돌아가던 땅의 바퀴와 내 지혜의 계산기를 멈추고 창조주의 그늘 아래 온전히 사로잡혀 머물다’라는
재창조의 안식을 뜻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을 위한 실제적 삶의 적용:
내 힘으로 쌓으려는 종교적 강박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섬기거나 일상을
살 때, 내 열정과 노력으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바리새인적 외식의 울타리 ‘안에’ 갇혀
스스로를 고갈시키곤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실적과 46년짜리 화려한 건물을 쌓아 오라”고 다그치지 않으십니다(요 2:20).
성도의 진짜 실력은 내 주도권의 상(Table)을 주님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드리고(15절), 주님이
마련하신 ‘따로 한적한 골방(무화과나무 아래)’으로 들어가 나를 철저히
비워내는 것입니다(1:48, 3:30). 사역의 분주함을 멈추고 위로부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100% 전적인 선물인 성령의 임재에만
나를 온전히 노출시킬 때, 비로소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영원한 영생의 생수가 내면에서 다시
펄쩍펄쩍 뛰어오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 내 실패와 수치의 숯불을 덮어버리는 대속의 사귐
원어적 신비와 배경
[ἀριστήσατε (아리스테사토)(“조반을 먹으라”)]: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처절한 영적 파산을 겪고 있던 제자들(시몬 베드로의
옛 자아)을 찾아오신 장면입니다(요 1:42,
21:3, 12). 주님은 제자들이 밤새 실패하고
도망쳤던 부끄러운 실상과 허물의 목록을 일절 캐묻거나 사상 검증하듯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을 친히 아귀까지 가득 채워 구워놓으시고,
“디도미(δίδωμι, 거저 주다)”의 손길로
제자들에게 생선과 떡을 손수 떼어 쥐여 주시며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청하셨습니다(21:13).
모든 성도님들을 위한 실제적 삶의 적용:
내 부끄러운 물동이를 배설물로 버리고 주님의 식탁으로 나아오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 다섯의 수치와 인생의 실패를 숨기려 했을 때, 주님이 “네 말이 참되도다”라며 그녀의 정직한 자복을
오히려 은혜의 도장으로 받아 안아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성도는 내 허물과 실수가 두려워 참빛의 말씀 앞에서 도망쳐 어둠의 울타리 속으로 숨는 존재가 아닙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내 처절한 무능력 그대로, 부서진 심령 그대로 정직하게 주님의 참빛 앞으로 내 전 존재를 던지며 걸어 나와야
합니다(3:21). 세 번째 유월절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외치시며 우리의 모든 실패와 저주의 잔을 대신 다 마셔주시고 구원을 완료형으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에게는(19:28, 30), 그 어떤 정죄함도 상시 머물 수 없습니다. 내 실패의 숯불을 주님의 대속의 사랑으로 완벽하게 덮어버리시고,
다시 사명의 길로 행진하게 만드시는 아들의 손을 굳게 붙잡으십시오(롬8:14)(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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