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무너질 성벽을 쌓거나 마른 나무로 살지 말고, 지금 당장 눈물의 회개와 순종을 통해 유일한 피난처이자 푸른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과 자녀들의 삶을 던지라”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누가복음 23:26-31).
(1)
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말씀인 누가복음
23장
26-43절이 너무 길어서 좀 나눠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26-31절 말씀만 묵상하려고 합니다. 먼저 저는 이 부분의 말씀을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7장
32절과 마가복음
15장
21절과 비교하여 종합적인 줄거리를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1.
십자가 길의 종합 줄거리
(마태·마가·누가 종합)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후,
온갖 채찍질과 희롱으로 온몸이 찢기어 더 이상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질 기력이 없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던 중,
마침 시골(밭)에서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을 발견합니다.
군인들은 그를 붙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우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이 거룩하고도 비극적인 행렬의 뒤편에는 백성들과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수많은 여인들의 큰 무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참한 고통 속에서도 발걸음을 돌이켜 여인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예루살렘에 닥칠 참혹한 심판의 날(AD
70년 예루살렘 멸망)을 내다보시며,
차라리 임신하지 못하는 이가 복이 있다고 말할 날이 올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라는 말씀을 남기시며,
죄 없으신 푸른 나무(예수님)에게도 이러한 심판이 임한다면 죄로 가득 찬 마른 나무(인류와 예루살렘)에게 임할 진노가 얼마나 무서울지를 준엄하게 선포하시며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2.
복음서별 관점 차이로 보는 묵상 포인트
세 복음서를 대조해 보면,
각 기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묵상의 핵심이 더욱 또렷해집니다.
마태·마가복음의 시선 (억지로 진 십자가가 축복으로):
마가복음은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는 뜻입니다.
억지로 붙잡혀 재수 없게 십자가를 졌다고 생각했던 시몬과 그의 가족이,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초대 교회의 핵심적인 믿음의 명문 가문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참고: 롬 16:13).
누가복음의 시선
(고통 속에서도 타인을 향하는 자비):
누가는 오직 자신에게만 기록된 누가복음
23장 27-31절을 통해,
죽음을 코앞에 둔 순간에도 사적인 슬픔에 잠기지 않으시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초연함과 자비를 극대화하여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심판자이자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눅23:26)에 대해서 좀 묵상하고 싶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던 중,
마침 시골(밭)에서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을 발견하고 그를 붙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우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했는게 그 결과 시몬과 그의 가족이,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초대 교회의 핵심적인 믿음의 명문 가문이 되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1.
억지로 진 십자가가
'최고의 축복'이 됩니다.
시몬은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로마 군인들이 그를
"붙잡아 억지로"(마 27:32, 막 15:21) 지웠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라 군인이 강제로 징집하면 거부할 수 없었기에,
시몬은 엄청난 불운이자 수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옷은 예수님의 피로 더러워졌고,
명절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교훈: 우리 삶에도 내 선택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억지 십자가'가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난,
원치 않는 책임,
가정이 나 직장에서 떠맡게 된 무거운 짐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억지로 시작된 사명'도 영원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내 계획이 깨진 그 자리가 주님의 계획이 시작되는 자리가 됩니다.
2.
주님의 뒤를
'가장 가까이서'
따르는 특권을 얻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6절은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니라"고 묘사합니다.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 도망쳤을 때,
역설적으로 이름 없던 이방 지역(북아프리카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 예수님의 거룩한 피 흘리심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주님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그 발자취를 그대로 밟아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훈: 주님을 따르는 길은 말로만 하는 다짐이 아니라,
시몬처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발걸음입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를 견디며 주님의 뒤를 묵묵히 따를 때,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의 심장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제자'가 됩니다.
3.
한 사람의 순종이
'가문 전체를 살리는 명문가'를 만듭니다.
성경학자들은 마가복음
15장 21절에 언급된 시몬의 아들들(알렉산더와 루포)과, 로마서 16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고백한 인물이 동일 가족이라고 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 길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몬은 집에 돌아가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아들들은 초대 교회의 든든한 리더가 되었고,
아내는 사도 바울이
'내 어머니'라 부를 만큼 존경받는 신앙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교훈: 내가 오늘 지고 가는 신앙의 십자가와 눈물의 순종은 나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모가 지고 간 십자가의 흔적은 자녀들에게 거룩한 영적 유산으로 대물림됩니다.
오늘 나의 작은 인내와 순종이 미래의 내 자녀와 가문을 믿음의 명문가로 세우는 주춧돌이 됩니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그 넓은 예루살렘 성안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지목하여 역사상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인물'로 성경에 그 이름을 영원히 새겨주셨습니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또는 이웃을 위해 지는 무거운 짐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외로운 봉사와 희생일지라도,
주님은 시몬의 이름을 기억하셨듯 우리의 이름을 생명북에 기록하시고 영원한 하늘의 영광으로 갚아주십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억지로라도 주님의 교회를 봉사하고 수고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경 베드로전서
5장 2절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i)
베드로전서
5장 2절의 말씀대로 성경은 분명히
“자원함과 기쁨으로 하는 봉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구레네 시몬의
‘억지 십자가’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 겉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두 말씀 사이에는,
우리의 신앙 성장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숙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질문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영적 원리를 나누고자 합니다(인터넷):
a.
억지로 시작했으나,
자원함으로 ‘완성’되는 신앙
성경이 말하는 억지(구레네 시몬)와 자원함(베드로전서)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신앙의 여정 속에서 일어나는 점진적인 변화 과정입니다.
시몬의 시작은
‘억지’였습니다: 군인들의 칼날 아래서 도망칠 수 없어 마지못해 어깨에 십자가를 멨습니다.
그러나 그의 끝은
‘자원함’이었습니다: 주님의 곁에서 피 흘리심을 보고,
그 음성을 들으며 시몬의 마음은 깨졌습니다.
억지로 멘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에 이르렀을 때는 주님을 향한 평생의 감사와 자원하는 헌신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의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직분 때문에,
체면 때문에,
혹은 누군가의 강권에 의해
‘억지로’ 자리에 앉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아니었다면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기회조차 없었을지 모릅니다.
억지로 시작된 봉사일지라도 주님을 만나면 결국 감격과 자원함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b.
‘자원함’은 내 감정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자원함’을 ‘내 마음에 감동이 오고 기분이 좋을 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5장 2절의 자원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자원함입니다.
내 감정이 아닌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내 감정은 피곤하고 쉬고 싶지만(인간적으로는 억지로 느껴질지라도),
주님의 뜻이기에 내 의지를 꺾고
“주님,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결단하는 것 자체가 가장 높은 차원의
‘믿음의 자원함’입니다.
내 마음의 기쁨이 차오를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보다,
때로는 내 몸을 쳐서 순종의 자리에 나아갈 때 비로소 성령께서 기쁨의 감정을 부어주시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c.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억지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내가 편한 선까지만 자원하여 봉사하려고 합니다.
그 안전지대(Safe
zone) 안에만 머물면 우리의 믿음은 절대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지경을 넓히시고 믿음의 가문을 세우기 위해,
우리 삶에 구레네 시몬처럼
‘강제적인 브레이크’나 ‘거룩한 밀어붙이심(억지)’을 허용하십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는 무거운 짐을 억지로라도 지고 갈 때,
내 힘이 아닌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을 경험하게 되며,
비로소 베드로가 말한
‘더러운 이득’이 아닌
‘기꺼이 하는’
순수한 영적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종합적인 묵상의 결론:
"억지로라도 봉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입니다.
첫 발걸음은 억지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동하지 않아도 교회의 필요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무릎을 꿇고 짐을 지는 수고는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베드로전서로 향해야 합니다:
"주님, 구레네 시몬처럼 비록 지금은 내 환경과 의무 때문에 억지로 매달려 있는 사명이고 봉사이지만,
이 길 끝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하사 결국에는 감격과 자원함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기쁨을 회복시켜 주옵소서"(인터넷).
(b)
또한 여기서 저는 억지로 진 십자가였지만,
그 길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시몬은 집에 돌아가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그 결과 아들들은 초대 교회의 든든한 리더가 되었고,
아내는 사도 바울이
'내 어머니'라 부를 만큼 존경받는 신앙의 거목이 되었다는 것을 묵상할 때 오늘 나의 작은 인내와 순종이 미래의 내 자녀와 가문을 믿음의 명문가로 세우는 주춧돌이 된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특히 모태 신앙이 아니라 집안에서 예수님을 처음으로 믿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생각할 때 큰 소망과 위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a.
당신은 가문의 영적 지형을 바꾸는
‘구레네 시몬’입니다.
모태 신앙이 아닌 집안에서 처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들의 불이해,
외로움, 때로는 제사나 명절 문제 등으로 겪는 갈등은 마치 시몬이 길 가다 붙잡혀 느꼈던
‘예기치 못한 당혹감과 억울함’과 닮아 있습니다.
영적 영웅의 자리:
그러나 하나님 관점에서
1세대 신앙인은 결코 외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가문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집안의
‘구레네 시몬’으로 가장 먼저 택해 부르신 것입니다.
시몬이 골고다 길에서 흘린 눈물과 땀방울이 아들 루포와 아내에게 그대로 흘러갔듯,
오늘 1세대 신앙인들이 가정에서 흘리는 눈물의 기도와 인내의 시간은 가문의 영적 대물림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꾸는 거룩한 주춧돌이 됩니다.
b.
‘십자가의 흔적’은 자녀에게 가장 강력한 복음이 됩니다.
시몬이 예루살렘에서 집(북아프리카 구레네)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몸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면서 묻은 피와 상처,
즉 십자가의 흔적(스티그마)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그 흔적을 보며,
아버지가 만난 예수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아버지가 직접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보며 자녀들의 가슴에 신앙이 심겼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복음화하고 자녀를 믿음의 명문가로 세우는 힘은 화려한 말에 있지 않습니다. 부모가 삶에서 겪는 억울함과 고난을 주님 때문에 묵묵히 참아내는 모습,
손해를 보더라도 자원하여 교회를 섬기는 모습,
즉 내 삶에 새겨진
‘작은 인내와 순종의 흔적’을 보며 자녀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묵상 요약과 격려:
"지금 당신이 지고 있는 외로운 십자가는,
장차 당신의 가문을 비출 영광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시몬의 아내를 향해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롬 16:13)고 고백할 만큼 위대한 가문이 될 줄을,
그날 십자가를 지고 쩔쩔매던 시몬은 상상이나 했을까요?
지금 집안에서 홀로 신앙의 싸움을 싸우며 눈물 흘리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면 이 시몬을 바라보며 힘을 내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당장은 외롭고 무겁지만,
그 순종을 통해 내 자녀의 세대,
혹은 그 아랫세대에는 반드시
'알렉산더와 루포'
같은 영적 거목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눈물의 첫 페이지를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랐던 구레네 사람 시몬 외에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πολὺ πλῆθος … γυναικῶν
αἳ ἐκόπτοντο
καὶ ἐθρήνουν αὐτόν (폴뤼 플레도스
… 귀내콘 하이 에콥톤토 카이 에드레눈 아우톤)](눅23:27)에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Θυγατέρες
Ἰερουσαλήμ, μὴ κλαίετε ἐπ’ ἐμέ· πλὴν ἐφ’ ἑαυτὰς κλαίετε καὶ ἐπὶ
τὰ τέκνα ὑμῶ (뒤가테레스 이에루살렘,
메 클라이에테 에프 에메,
플렌 에프 헤아우타스 클라이에테 카이 에피 타 테크나 휘몬)](28절)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리 말씀하신 것일까요?
1.
감정적
‘동정(Sympathy)’을 넘어 영적인
‘통회(Repentance)’로 초청하십니다.
원어에서 여인들이 행한
‘에콥톤토(ἐκόπτοντο)’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는 행위이고,
‘에드레눈(ἐθρήνουν)’은 장례식에서 부르는 슬픈 애가를 의미합니다.
즉,
여인들은 예수님을 무력하게 고통당하는 비극적인 영웅이나 불쌍한 희생자로 바라보며 인간적인 연민과 동정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
예수님은 결코 동정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무력하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교훈: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감상적인 눈물이나 인간적인 동정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진짜 흘려야 할 눈물은 주님의 아픔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내 죄가 주님을 저 십자가에 못 박았구나'라는 영적인 직시와 회개의 눈물이어야 합니다.
2.
눈앞의 고난보다 닥쳐올
‘역사의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그 대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약
40년 뒤(AD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수많은 어린 자녀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역사의 비극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
"지금 피 흘리는 나보다,
메시아를 거부한 죄의 대가로 장차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 마주하게 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훨씬 더 두렵고 참혹하다"는 경고입니다.
교훈: 영적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는 눈앞에 보이는 일시적인 세상의 고통보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들이 맞이하게 될 영원한 영적 파멸과 심판을 더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다음 세대를 향한
‘거룩한 눈물의 기도’를 촉구하셨습니다.
여인들의 눈물은 자녀 세대의 안위와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부모 세대가 메시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영적 무지는,
고스란히 그 자녀 세대에게 비참한 심판의 결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
주님은 어머니들에게 심판의 날을 대비하여,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 지금부터 눈물로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교훈: 이 말씀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부모 세대에게 주시는 강력한 경종입니다.
자녀들의 세상적인 성공,
성적, 진로를 위해서는 밤잠을 설치며 애타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지,
다가올 심판의 때에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지를 위해서는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자녀를 위한 가장 위대한 유산은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의 영혼을 위해 제단 앞에 쏟아부은 거룩한 눈물입니다.
오늘의 묵상 결론:
"울음의 방향을 바꾸라.
감정의 눈물을 멈추고,
회개와 영혼 구원의 눈물을 흘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온몸이 찢기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여인들을 바라보시며 그들과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셨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나 자신이 아니라 영혼들을 향해 있었습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예수님의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눅23:29)하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왜 이 세 그룹[(1)
“잉태하지 못하는 이”(αἱ στεῖραι, 하이 스테이라이),
(2) “해산하지 못한 배”(αἱ κοιλίαι αἳ οὐκ ἐγέννησαν,
하이 코일리아이 하이 우크 에겐네산),
(3) “먹이지 못한 젖”(μαστοὶ οἳ οὐκ
ἔθρεψαν, 마스토이 호이 우크 에드렙산)]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a)
이 구절은 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적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예수님의 가장 충격적이고도 비참한 종말론적 경고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불임)은 하나님의 저주나 큰 수치로 여겨졌고,
반대로 자녀를 낳고 젖을 먹여 기르는 것은 가장 큰 축복과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올 심판의 날에는 그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정반대로 뒤바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세 그룹이 차라리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자녀의 비참한 고통을 눈앞에서 보지 않는 것이
'차라리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성안에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참혹한 기근과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기 자녀를 삶아 먹는 비극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로마 군인들은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어린아이들을 돌에 메어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의 의도:
자녀를 낳아 기른 어머니들은 그 심판의 날에 자녀가 굶어 죽고 참혹하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고스란히 목격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자녀가 없는 여인들(잉태·해산·양육을 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고통만 견디면 되지만,
어머니들은 자녀의 고통까지 배로 겪어야 했기에 차라리 자녀가 없는 것이 그 비참한 날에는
'복(자비)'이 된다는 뜻입니다.
2.
영적 무지가 가져올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유대 백성들은 마태복음
27장 25절에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돌릴지어다"라고 경솔하게 외쳤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무심코 내뱉은 저주의 고백은,
정확히 한 세대 뒤(약 40년 후)
그들의 자녀 세대에게 고스란히 임했습니다.
교훈: 죄의 대가와 심판은 반드시 찾아오며,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합니다.
부모의 영적 눈먼 선택이 자녀 세대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비극을 물려줄 수 있는지 보여주며,
눈앞의 안일함에 속지 말고 다가올 영적 현실을 직시하라고 경고하십니다.
3.
환난의 날에
‘영적 영양 공급(양육)’의 무거운 책임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 말씀은 영적인 의미로도 다가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믿음의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μαστοὶ οἳ οὐκ
ἔθρεψαν” [마스토이 호이 우크 에드렙산(먹이지 못한 젖)]:
자녀에게 젖을 먹여 기르듯,
자녀의 영혼에 생명의 말씀을 먹여야 하는 부모의 책임은 너무나 엄중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거센 유혹과 환난 속에서 자녀들이 믿음을 잃고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영적 고통은 살을 찢는 것보다 아픕니다.
교훈: 이 경고는 오늘날 부모 된 우리에게
"과연 나는 내 자녀에게 환난을 이겨낼 만한 단단한 영적 양식(말씀)을 먹여 기르고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의 묵상 결론:
"축복이 저주가 되고,
저주가 축복이 되는 날이 오기 전에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당할 육체적 고통보다 인간의 죄가 불러올 미래의 비극과 자녀 세대의 고통을 더 아파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애끓는 경고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취해 자녀의 영혼을 방치하고 있는 부모 세대의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주님의 이 애끓는 경고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취해 자녀의 영혼을 방치하고 있는 부모 세대의 가슴을 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가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주님은 해결하기를 원하실까요?
a.
부모가 먼저
'울음의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부모의 영적 각성).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시기 전에,
"너희와(ἐφ’ ἑαυτὰς)"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28절). 자녀의 문제이기 전에,
자녀를 세상 가치관으로 길러온 부모 자신의 영적 맹인 됨과 세속주의를 먼저 통회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해결 방식:
주님은 자녀를 바꾸기 전에 부모의 눈물샘을 터뜨리길 원하십니다.
"내 자녀가 좋은 대학에 못 갈까 봐"
잠 못 이루는 눈물이 아니라,
"내 자녀가 주님을 떠나 영원한 파멸로 향할까 봐"
가슴을 쥐어뜯는 애통함이 부모에게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영이 깨어나 울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가문을 덮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이 깨어집니다.
b.
가정을
'가장 첫 번째 교회'로 리셋(Reset)해야 합니다.
유대 사회의 비극은 신앙 교육을 성전이나 율법학자들에게만 맡겨두고,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쉐마 말씀'(신 6:4-9)을 잃어버렸을 때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부모들도 자녀의 신앙 교육을 주일학교나 교회 시스템에
'위탁'해 버리고,
가정에서는 세상 교재와 세상 성공만을 주입합니다.
주님의 해결 방식:
주님은 부모가 다시 가정의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녀의 영혼에 생명의 젖을 먹이는 주체는 학원 강사나 유튜버가 아니라 바로 부모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매일 짧게라도 말씀을 나누고,
부모의 거룩한 삶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가정의 중심 구조를
'세상 성공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완전히 리셋해야 합니다.
c.
'푸른 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여져야 합니다(31절의 예고).
오늘 본문의 결론인
31절에서 예수님은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란 자녀들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국 불에 타 사라질
'마른 나무'에 불과합니다.
마른 나무 스스로는 이 심각한 중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해결 방식:
유일한 해결책은 죄 없으신
'푸른 나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자녀들을 접붙이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세상의 스펙이 아니라,
어떤 환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예수 생명'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마른 나무로 살다 심판받지 않도록,
날마다 기도로 자녀를 주님의 보혈 아래 고정시키고 푸른 나무이신 주님의 은혜를 공급받게 해야 합니다.
묵상 적용을 위한 결단:
"부모의 가치관이 자녀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화려하고 거창한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당장 우리의 삶에서 세상 가치관에 빼앗겼던 시선을 돌이켜,
자녀의 영혼을 대면하고 눈물의 기도를 시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내 자녀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라는 이 엄중한 질문 앞에 부모가 먼저 무릎 꿇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가정을 치료하시고 믿음의 명문가로 변화시켜 가실 것입니다(인터넷).
(5)
다섯째로,
저는 예수님의 “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τότε
ἄρξονται λέγειν τοῖς ὄρεσιν· Πέσετε ἐφ’
ἡμᾶς, καὶ τοῖς βουνοῖς· Καλύψατε ἡμᾶς (토테 아르크손타이 레게인 토이스 오레신,
페세테 에프 헤마스,
카이 토이스 부노이스,
칼뤼프사테 헤마스)](눅23:30)하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a)
누가복음
23장 30절에 기록된 이 말씀은 구약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호 10:8)을 인용하신 것으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렵고 철저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묵시록적 선포입니다.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
6장 16절에서도 종말의 때를 묘사할 때 그대로 다시 등장합니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와 오늘날 우리 삶에 주는 적용점을 나누고자 합니다(인터넷):
1.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
①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수치
(산들아 우리 위에 무너지라)
사람이 거대한 산들을 향해
"우리 위에 무너지라(Πέσετε
ἐφ’ ἡμᾶς)",
작은 산들을 향해
"우리를 덮으라(Καλύψατε
ἡμᾶς)"고 부르짖는 것은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산이 무너져 내리거나 자신을 덮치면 비참하게 압사당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표현은 "살아남아 마주해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차라리 산에 깔려 흔적도 없이 죽는 것이 훨씬 덜 고통스럽겠다"는 극한의 공포와 절망을 표현한 문학적 묘사입니다.
②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피할 길 없는 절망
이 말씀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나타나는 본능적인 반응을 보여줍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의 시선(눈빛)을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온갖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는 수치와 공포가 너무나도 무섭기에,
거대한 자연물인 산과 언덕 뒤로 자신을 가려버리고 싶어 하는 죄인의 피할 길 없는 절망을 의미합니다.
역사적 성취: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당시,
로마 군대를 피해 실제로 성안의 지하 동굴과 바위 틈새로 숨어들었다가 굶어 죽고 매장당했던 유대인들의 비참한 역사로 성취되었습니다.
2.
오늘날 우리 삶을 향한 영적 적용
① '영적 안전지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산(ὄρεσιν)'과 '작은 산(βουνοῖς)'은 견고함과 안전의 상징이었습니다.
환난이 오면 산으로 도망쳐 숨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는 그들이 평소에 안전하다고 믿었던 그 산들을 향해
"차라리 무너져라"고 비명을 지르게 됩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며 안전망으로 삼고 있는 세상의
'산들'(돈, 권력, 건강, 스펙, 부동산 등)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영원한 진노의 날이 이르면,
세상이 자랑하는 그 어떤 견고한 성벽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② 심판의 공포를
'구원의 감사'로 바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메시아를 거절한 자들이 맞이할 결말입니다.
반면,
푸른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접붙여진 성도들에게는 이 두려운 심판의 날이 도리어 눈물이 씻겨지고 영원한 승리가 선포되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적용: 십자가 길 위에서 이토록 두려운 심판을 경고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우리는 "산들아 나를 덮으라"고 비명 지를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죄의 운명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대속의 은혜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여전히 세상의 무너질 산을 피난처 삼아 살아가고 있는 이웃과 자녀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속히 구원의 방주이신 예수께로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묵상 결론:
"하나님의 진노의 시선을 피하려 산 밑으로 숨는 자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자가 되라."
주님은 우리를 공포에 질리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찰나의 평안함에 속아 영원한 파멸의 길을 걷지 말고,
지금 은혜를 베푸실 만한 때에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도망치라고 사랑의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영원한 진노의 날이 이르면,
세상이 자랑하는 그 어떤 견고한 성벽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음을 신뢰해야 합니다.”라는 교훈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 교훈을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일까요?
a.
내가 의지하는 세상의
'산들'을 매일 십자가 앞에 내려놓기
(우선순위의 재조정)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의 안전감은 은행 잔고,
직장의 안정성,
세상의 평판에서 찾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날에 우리를 덮어주지 못할 세상의
'산들'입니다.
실천 방법:
아침에 눈을 뜰 때나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내가 은연중에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불안해하는 대상(재정, 자녀의 성공,
노후 대책 등)을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손에서 놓아 예수님의 십자가 밑으로 밀어 넣는 상징적인 믿음의 고백을 드리십시오.
"주님,
이것들이 나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견고한 성벽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오늘 나의 진짜 안전망은 오직 주님의 보혈뿐입니다."라고 선포하며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양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b.
고난과 억울함이 찾아올 때
'인간적인 산'으로 도망치지 않기
(반응의 변화)
삶에 갑작스러운 위기나 억울한 일,
환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인맥, 세상적인 권모술수,
감정적인 폭발)이라는 '작은 산'으로 숨으려고 합니다.
실천 방법:
문제가 터졌을 때 가장 먼저 세상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십자가의 자리(골방 기도의 자리)로 먼저 도망치십시오.
내 억울함과 부끄러움을 산 밑에 숨기지 말고,
나를 위해 이미 피 흘려 모든 죄와 수치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날것 그대로 쏟아내십시오.
세상이 주는 임시방편의 위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하늘의 평강을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이 십자가를 피난처 삼는 자의 구체적인 행동 양식입니다.
c.
무너질 성벽을 쌓는 수고를 멈추고
'영원한 가치'에 투자하기
(시간과 재정의 사용)
심판의 날에 산과 언덕이 무너진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인 성취와 화려한 스펙들이 한순간에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은 오직 주님의 나라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실천 방법: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피난처에 내 삶의 자원을 저축하십시오.
내 시간과 재정,
열정의 배분율을 점검하여,
한순간에 사라질 세상의 성벽을 더 높이 쌓는 데만 에너지를 쓰고 있다면,
그것을 멈추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
다음 세대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자원함으로 섬기는 일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다가올 영원한 진노의 날을 준비하며 유일한 피난처이신 주님과 연합하는 삶입니다.
묵상 적용을 위한 매일의 기도:
"주님,
오늘 제가 쌓아 올린 세상의 성벽이 저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의 십자가 그늘 아래 머무는 것만이 내 영혼의 유일하고 완벽한 안전지대임을 믿고,
오늘도 내 삶의 닻을 오직 주님께만 내리게 하옵소서."
(6)
마지막 여섯째로,
저는 예수님의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ὅτι εἰ ἐν τῷ
ὑγρῷ ξύλῳ ταῦτα ποιοῦσιν, ἐν τῷ ξηρῷ τί γένηται (호티 에이 엔 토 휘그로 크쉴로 타우타 포이우신,
엔 토 크세로 티 게네타이)](눅23:31)라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a)
이 말씀은,
당시 유대 사회의 격언이나 잠언 형식을 빌려 심판의 필연성과 엄중함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고도의 비유적 말씀입니다. 이 짧지만 강렬한 비유에 담긴 구체적인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인터넷):
1.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
(비유의 해석)
이 비유를 이해하는 핵심은 “푸른 나무”[τῷ ὑγρῷ ξύλῳ (토 휘그로 크쉴로)]와 “마른 나무”[τῷ ξηρῷ (토 크세로)]가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불을 붙일 때,
수분이 가득한 푸른 나무는 잘 타지 않고 건조하게 바른 마른 나무는 순식간에 불타버리는 자연의 이치를 영적인 현실에 대입하신 것입니다.
① 푸른 나무(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의미: 푸른 나무는 죄가 없으시며 생명력이 가득하신
'예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죄나 흠이 없고,
불의를 행한 적이 없는 푸른 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로마 정권과 유대 지도자들이 아무런 죄도 없고 생명으로 가득 찬 푸른 나무이신 예수님께조차 이토록 잔인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불심판)을 가했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에게까지 이토록 철저한 진노의 불길을 허락하셨다면,
이라는 뜻입니다.
② 마른 나무(땔감)인 인류와 메시아를 거부한 예루살렘
의미: 마른 나무는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 생명력이 없고,
불에 타 없어질 땔감에 불과한
'죄인 유대 백성들(인류)'을 상징합니다.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죄 없으신 주님께 임한 심판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웠다면,
장차 하나님의 은혜를 발로 차버리고 메시아를 거절한 채 죄로 바짝 마른 채 살아가는 유대 백성들과 인류에게 임할 하나님의 공의의 불심판이 얼마나 더 참혹하고 철저하겠느냐는 준엄한 의문문(수사학적 경고)입니다.
2.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
①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철저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푸른 나무 비유는 하나님의 공의가 결코 죄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지 않으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푸른 나무'에게 십자가라는 가장 잔인한 형벌을 쏟아부으셨습니다.
교훈: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공의의 극치입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영적 경외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② 스스로 '마른 나무'로 살아가는 비극에서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공급을 거부한 인생은 아무리 겉보기가 화려해도 결국 심판의 불길에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릴
'마른 나무'일 뿐입니다.
내 힘과 내 자원으로 성벽을 쌓고 살아가는 인생의 끝은 마른 나무의 운명과 같습니다.
교훈: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내 지혜와 세상의 스펙으로 바짝 마른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께 단단히 붙어 있는가?"
③ '푸른 나무'이신 예수께 접붙여지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마른 나무가 심판의 불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푸른 나무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푸른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 바 되는 것뿐입니다(참고: 로마서 11장).
교훈: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할 때,
푸른 나무의 생명력과 진액이 마른 나무 같던 우리에게 흘러들어와 우리를 살리고 푸르게 만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장차 임할 심판의 불길이 우리를 태우지 못하며,
도리어 영원한 생명의 성숙을 이루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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