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의 무지에 대한 긍휼로 ‘아버지, 제임스를 사하여 주옵소서 … 제임스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며 선제적 용서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의 무지에 대한 긍휼로 ‘아버지, 제임스를 사하여 주옵소서 …
제임스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며 선제적 용서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선제적 용서 기도: 가해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거나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 형틀이 세워지는 가장 참혹한 고통의 정점에서 용서를 먼저 선포하셨습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32-43).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32-43절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은 후 제일 먼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7장
33-43절과 마가복음
15장
22-32절과 요한복음
19장
17-24절과 비교하여 종합적인 줄거리를 알고 싶습니다.
1.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골고다로의 여정
출발: 사형 판결을 받으신 예수님은 자색 옷을 벗고 자기 옷을 입으신 채,
처음에는 요한복음의 기록대로 직접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성문 밖 골고다를 향해 출발하십니다.
구레네 시몬의 대리 수행:
예수님이 채찍질과 탈진으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없게 되자,
로마 군인들은 마침 시골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합니다.
여인들의 애곡: 수많은 백성과 슬피 울며 따르는 여인들의 무리를 향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며 장차 임할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다른 두 행악자(강도)도 사형을 받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끌려갑니다.
2.
골고다 도착과 십자가 처형
(오전 9시)
음료의 권유와 거부:
'해골'이라 하는 곳(골고다)에 도착하자,
군인들은 먼저 못 박히기 전 고통을 줄여주는 마취 성분이 든 쓸개 탄 포도주(몰약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맛보시고 마시기를 거부하십니다.
십자가 처형 집행:
이어 제삼시(오전 9시)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두 행악자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각각 하나씩 배치되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립니다.
용서의 기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며 처형자들을 위해 첫 번째 기도를 올리십니다.
3.
옷깃 제비뽑기와 죄패 부착
속옷과 겉옷 분배: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단 후 그 아래 앉아,
예수님의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눠 각각 한 깃씩 가졌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않고 누가 가질지 제비를 뽑아 구약 성경(시편 22:18)을 성취합니다.
삼개국어 죄패: 예수님의 머리 위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죄패를 붙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써달라고 빌라도에게 항의했으나 빌라도는 거절합니다.
이 패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히브리,
로마(라틴), 헬라 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4.
사방에서 쏟아지는 조롱과 희롱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모욕: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고,
지나가던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합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도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며 비웃습니다.
군인들의 조롱: 군인들도 신 포도주를 대하며 희롱하고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합니다.
5.
두 강도의 상반된 반응과 낙원 약속
초기의 반응: 처음에는 십자가 처형대에 함께 매달린 두 행악자(강도) 모두가 예수님을 모욕하고 함께 욕을 퍼부었습니다.
한 강도의 회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예수님의 기도와 모습을 본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을 비방하는 다른 편 달린 행악자를 꾸짖으며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예수님을 변호합니다.
낙원 선포: 그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하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그의 영혼을 구원하십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두 행악자도 예수님처럼 못 박혔던 것[ἐσταύρωσαν (에스타우로산)]인지(눅23:33), 아니면 못 박히지는 않고 그저 끈같은 것으로 매달렸던 것[κρεμασθέντων
(크레마스텐톤)]인지(39절) 좀 혼동이 되었습니다.
(i)
여기서 헬라어 에스타우로산(ἐσταύρωσαν)(33절)과 39절의 크레마스텐톤(κρεμασθέντων)의 단어 관계를 헬라어 원어의 문맥으로 해석하면 혼동을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한다면,
두 행악자는 끈으로만 묶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39절의 단어는 못 박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못 박혀 매달린 상태를 가리키는 중첩된 표현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바탕으로 한 상세한 구별과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33절:
행위의 구체적 방식
— 에스타우로산 (ἐσταύρωσαν):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ἐσταύρωσαν)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
원어적 의미: '스타우로오(σταυρόω)'의 과거 능동태 형태로,
당시 로마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에 못 박다'를 뜻하는 가장 명확하고 고유한 단어입니다.
문법적 구조: 누가는 예수님을 못 박았다고 선언한 직후,
두 행악자 역시 "그렇게 하니"라는 결합 구절을 씁니다.
만약 행악자들은 끈으로 묶기만 했다면 이 단어를 함께 쓸 수 없습니다.
즉,
처형의 '방식'에 있어서 세 사람 모두 손과 발에 못이 박혔음을 뜻합니다.
b.
39절:
처형대의 현재 상태
— 크레마스텐톤
(κρεμασθέντων): "달린(κρεμασθέντων)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
원어적 의미: '크레만뉘미(κρεμάννυμι)'의 과거 수동태 분사형으로,
본질적인 뜻은 '매달리다',
'걸려 있다'입니다.
단어의 성격: 이 단어는 끈으로 묶었는지,
못으로 박았는지 같은
'결박의 도구'를 한정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어떤 방식을 썼든 결과적으로
'공중에 높이 매달려 처형대에 걸려 있는 상태'
그 자체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33절에서 이미
'못 박혔음(에스타우로산)'을 명시했기 때문에,
39절의 '크레마스텐톤'은 "못 박혀서
(십자가 높이)
매달려 있는"
행악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문맥이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c.
왜 누가는
39절에서 단어를 바꾸어 썼을까요?
(구약의 배경)
누가가 39절에서 이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명기
21장 23절의 메시아적 배경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성경 헬라어 번역본(70인역)에서 "나무에 달린(κρεμάμενος)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할 때 이 동일한 어원의 단어가 사용됩니다.
즉, 누가는 39절에서 두 행악자 역시 예수님과 함께 '저주의 틀에 높이 매달려 고통당하고 있는 비참한 처지'임을 시각적·신학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이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기술할 때 이 단어(κρεμάμενος)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요약하자면,
두 단어는 반대되는 개념(못 박힘
vs 끈으로 묶임)이 아닙니다.
에스타우로산(ἐσταύρωσαν)(33절)은 손발에 못을 치는 '처형의 행동'을 보여주는 단어이며,
크레마스텐톤(κρεμασθέντων)(39절)은 그 결과로 처형대 높이 걸려 고통받는 '비참한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두 행악자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못 박혀 매달린 것이 맞습니다(인터넷).
(b)
또한 여기서 저는 “음료의 권유과 거부”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십자가 처형 집행”이 먼저였는지 좀 혼동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33절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한 후에
36절에 가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줬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i)
이 혼동을 풀기 위한 핵심 비밀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포도주 음료가
'처형 전에 준 마취용 음료'와 '처형 후에 준 조롱용 음료'로 서로 다른 두 가지라는 점에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구절과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됩니다(인터넷):
a.
처형
'전'의 음료:
몰약(쓸개) 탄 포도주 ➡️ 예수님이 거부하심
성경 구절: 마태복음
27:34, 마가복음 15:23
시점: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
의도 (의료용/자비): 로마 군인들은 사형수를 처형틀에 눕히기 전,
극심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마취 성분이 있는
'몰약(혹은 쓸개)을 섞은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결과: 예수님은 이를 맛보신 후,
인류의 죄 값을 온전한 정신과 고통으로 다 짊어지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시지 않고 거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처형 전 음료'에 대한 기록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b.
처형
'후'의 음료:
신 포도주
(옥소스) ➡️
군인들이 조롱하며 줌
성경 구절: 누가복음 23:36
, 마태복음
27:48, 마가복음
15:36, 요한복음 19:29
시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
(매달려 계신 동안)
의도 (희롱/갈증): 누가복음 23장 36절은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라고 기록합니다.
이 음료는 당시 로마 군인들이 마시던 값싼 시큼한 포도주(옥소스)인데, 목말라하시는 예수님을 골려주고 조롱하기 위해 입에 대며 희롱한 것입니다.
요약 및 타임라인 정돈:
누가복음 23장만 읽으면
"처형(33절) ➡️
신 포도주 조롱(36절)"의 순서만 나오지만,
사복음서를 통합하여 시간 순서대로 재배치하면 다음과 같이 음료가 두 번 등장하게 됩니다.
[처형 직전]
고통을 줄여주는
'몰약 탄 포도주'를 권함 ➡️ 예수님이 거부하심
(마태·마가 기록)
[처형 집행]
예수님과 두 행악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림
(사복음서 공통)
[처형 이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 군인들이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조롱함(눅 23:36 등)
·
그러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것입니다:
왜 로마 군인들이 처형 직전에는 예수님에게 고통을 줄여주는 ‘몰약 탄 포도주’를 권했다가,
처형 이후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신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조롱한 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
로마 군인들이 처형 직전과 처형 이후에 완전히 상반된 태도로 예수님께 음료를 건넨 이유는 당시 로마의 처형 관습과 군인들의 심리적 변화,
그리고 신학적인 메시지가 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관점으로 그 이유를 인공지능이 명확하게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역사적·처형 관습상의 이유:
'통제'와 '배급품'의 차이
처형 직전의 '몰약 탄 포도주'
(강제적 마취 목적):
처형 직전에 건넨 음료는 사형수를 향한 순수한 자비라기보다는 로마 군인들의 원활한 처형 집행을 위한 매뉴얼에 가까웠습니다.
사형수가 맨정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발악하거나 요동을 치면 군인들이 다치거나 처형 시간이 지체됩니다.
따라서 고통을 둔화시키는 일종의 마취제를 먹여 죄수를 유순하게 통제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
처형 이후의 '신 포도주'
(군인들의 일상 음료):
여기서 '신 포도주(옥소스)'는 로마 군인들이 경비 근무를 서며 마시던 포스카(Posca)라는 값싸고 시큼한 일상 음료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통상 몇 대의 시간이 걸리는 지루하고 고된 감시 작업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자신들의 음료를 마시며 대기하다가,
십자가 위에서 목말라 신음하는 예수님께 이를 대는 척하며 주의를 끌었습니다.
2.
군인들의 심리적 이유:
'유대인의 왕'에 대한 비웃음과 유희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3장 36-37절은 군인들의 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군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붙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는 비웃음거리였습니다.
초라하게 못 박힌 사형수가
'왕'이라고 하니,
왕에게 잔을 올리는 신하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며(패러디)
"왕이시여, 우리 군인들이 마시는 이 싸구려 신 포도주나 한잔 받으시지요"라고 조롱하며 유희를 즐긴 것입니다.
3.
신학적·구속사적 이유:
고통의 감내와 예언의 성취성경 저자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두 음료를 대하신 태도는 메시아적 사명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첫 번째 거부:
예수님은 인류의 죄 값을 대속하기 위한 고통을 약물로 도피하지 않고,
온전한 정신과 감각으로 십자가의 저주를 친히 다 감당하시기 위해 마취 성분의 음료를 맛보신 후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두 번째 수용:
이후 온몸의 수분이 말라가는 극심한 갈증 속에서 군인들이 조롱하며 신 포도주를 대었을 때(요 19:28-30),
예수님은 이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 시편
69편 21절("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의 예언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마지막 가언인
"내가 다 이루었다"를 외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로마 군인들에게 처형 전 음료는
'처형 효율을 위한 통제 도구'였고, 처형 후 음료는
'무력한 왕을 놀려먹는 조롱의 장난감'이었던 것입니다.
군인들의 이러한 악의적인 행동마저도 결과적으로는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철저히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십자가 사건의 깊은 역설입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Πάτερ,
ἄφες αὐτοῖς, οὐ
γὰρ οἴδασιν τί ποιοῦσιν (파테르, 아페스 아우토이스,
우 가르 오이다신 티 포이우신)](눅23:34)라며 처형자들을 위해 올린 첫 번째 기도(용서의 기도)[가칠언(십자가 위 일곱 말씀)
중 ‘가장 먼저 하신 말씀’]를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a)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가장 먼저 올리신 이 첫 번째 기도(눅 23:34)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관통하는 세 가지 거룩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헬라어 원어의 성경적 뉘앙스와 함께 묵상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조건 없는 선제적 용서:
고통의 순간에 선포된 은혜
원어 묵상: 예수님은 "사하여 주옵소서"를 헬라어로 ‘아페스’(ἄφες)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빚을 탕감하다',
' 결박을 풀어 완전히 자유롭게 놓아주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아피에미(ἀφίημ)'의 명령형입니다.
묵상 교훈: 가해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거나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 형틀이 세워지는 가장 참혹한 고통의 정점에서 용서를 먼저 선포(선제적 용서)하셨습니다. 인간은 상대방이 사과해야 비로소 용서를 고민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이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먼저 찾아와 결박을 푸는 은혜임을 가르쳐 줍니다.
2.
죄인의 무지에 대한 긍휼:
미움이 아닌 불쌍히 여김
원어 묵상: 예수님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알지 못하다'의 헬라어 ‘우 오이다신’(οὐ οἴδασιν)은 단순히 지식적인 모름을 넘어,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행이 영적으로 어떤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 상태'를 뜻합니다.
묵상 교훈: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는 군인들과 조롱하는 무리를 향해 분노나 저주를 쏟아내지 않으시고,
그들의 악함을 '영적인 무지와 무능'으로 바라보시며 긍휼(불쌍히 여김)의 시선을 유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을 대할 때,
미움의 감정에 갇히기보다 그들의 영적 연약함과 무지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배우게 하십니다.
3.
끊임없는 중보의 기도:
미완료 시제의 은혜
원어 묵상: 34절 앞부분의
"예수께서 이르시되"에서 '이르시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겐’(ἔλεγεν)은 문법적으로 미완료 과거 시제입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 시제는 과거에 단 한 번만 말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하여 말씀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묵상 교훈: 즉,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용서의 기도를 단 한 번 읊조리신 것이 아닙니다.
못 박힐 때도,
망치 소리가 울릴 때도,
사람들이 비웃을 때도 숨을 몰아쉬며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신실한 사랑을 확증해 주는 대목입니다. 이 첫 번째 기도는 십자가 아래에 있던 한 행악자의 마음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죄인의 무지에 대한 긍휼로 예수님은 끊임없이 조건 없는 선제적 용서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 한 행악자의 마음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말에 놀라움과 동시에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의 무지에 대한 긍휼로 ‘아버지,
제임스를 사하여 주옵소서 … 제임스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며 기도하신다고 생각할 때 나 같은 죄은을 위해 쉬지 않으시고 중보하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에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저는 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성령님께서 더욱더 깨달아 알게하실 수록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주님의 긍휼로 불쌍히 여기면서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용서의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3)
셋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계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좀 주의 깊게 묵상하고 싶습니다:
(a)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눅23:35), (b)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35절), (c)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36-37절), (d)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39절). 이 네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반응을 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졌습니다.
(a)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둘러싼 네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반응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메시아를 대하는 다양한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23장의 흐름을 따라 각 부류의 반응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인공지능이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입니다(인터넷):
1.
백성들:
"서서 구경하는데"
(35절 상)
영적 상태: 냉담한 방관과 영적 무관심
구체적 분석: 여기서 '구경하다'의 헬라어 이오레이(θεώρει)는 연극이나 볼거리를 관람하듯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모습을 뜻합니다.
불과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던 군중들이었으나,
예수님이 무력하게 처형대로 끌려가자 아무런 책임감 없이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듯 서 있습니다.
묵상 교훈: 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지만,
진리와 은혜가 고난받을 때 침묵하고 방관하는
'냉담한 다수'의 전형입니다.
2.
관리들(종교 지도자들):
"비웃어 이르되..."
(35절 하)
영적 상태: 악의적인 조롱과 교만한 확신
구체적 분석: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등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라며 비웃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능력을 오직
'눈앞의 물리적 힘과 자기 구원'으로만 제한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옳았다.
저 자는 가짜다"라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비아냥거린 것입니다.
묵상 교훈: 자신의 기득권과 종교적 교만에 갇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메시아의
'대속적 사랑'을 전혀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모습입니다.
3.
로마 군인들:
"희롱하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36-37절)
영적 상태: 세상 권력의 조롱과 정치적 희롱
구체적 분석: 이방인 군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제거되는 무력한 죄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시던 싸구려 신 포도주를 입에 대는 척하며,
십자가 죄패에 쓰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소롭게 여겼습니다.
"네가 진짜 왕이냐?
로마 군대의 힘 앞에 꼼짝 못 하면서 무슨 왕이냐?
능력이 있으면 내려와 봐라"
하며 권력의 우월감 속에서 유희를 즐겼습니다.
묵상 교훈: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력만을 숭배하며,
십자가를 통해 죄와 사망을 깨뜨리시는 진정한
'하늘 왕'의 통치를 비웃는 세상 권세의 실상입니다.
4.
달린 행악자 중 하나:
"비방하여 이르되...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39절)
영적 상태: 절망 속의 분노와 이기적인 구원 요구
구체적 분석: 십자가에 함께 매달려 죽어가는 비참한 처지였음에도,
그의 입에서는 회개가 아닌 비방[블라스페메이(βλασφήμει):
신성모독적 비난]이 터져 나옵니다.
그의 요구는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도 살고 우리도 여기서 내려가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아픔이나 영혼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현실의 고통과 육체의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요구하며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묵상 교훈: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끝내 마음을 완악하게 닫은 채,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이기적인 해방만을 부르짖는 타락한 인간성의 종착지를 보여줍니다.
네 부류의 공통점과 반전:
"너 자신을 구원하라"
놀랍게도 관리,
군인, 행악자 모두가 예수님을 향해 던진 핵심 요구는 똑같았습니다:
"네 자신을 구원하라(σῶσον σεαυτόν)."
이것은 과거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했던 시험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입을 빌려
"너 자신을 먼저 구원하여 메시아임을 증명하라"고 끝까지 유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냉담한 방관과 영적 무관심이란 영적 상태에 있었던 서서 구경하였던 백성들(35절상)을 묵상할 때 열왕기상
18장 2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
두 본문을 관통하는 핵심은 결단하지 않는 중립은 결국
‘악에 대한 방관이자 동조’가 된다는 영적 진리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서서 구경만 하던 백성들(눅 23:35)과, 갈멜산에서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눈치만 보며 말 한마디 대답하지 않던 백성들(왕상 18:21)의 영적 상태는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 두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깊은 교훈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a.
‘머뭇머뭇하는 방관’은 침묵의 거부입니다.
말씀 묵상: 엘리야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라고 다그칠 때,
백성들은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대놓고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알을 버리지도 않은 채 상황을 저울질(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교훈: 영적인 세계에서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경거리로 바라보며 침묵하는 것,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결단을 미루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는 영적 상태임을 경고합니다.
b.
눈에 보이는 상황과 다수를 따르는 나약함입니다.
말씀 묵상: 골고다의 백성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이적을 보며 환호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힘없이 체포되고 관리들과 군인들이 그를 비웃자,
대세에 밀려
‘서서 구경하는 다수’로 전락했습니다.
갈멜산의 백성들 역시 아합 왕과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침묵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교훈: 신앙은 대세나 다수를 따르는 관람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모두가 조롱하는 순간에도 진리 편에 서는 외로운 결단임을 가르쳐 줍니다.
상황이 불리해 보인다고 해서 진리 앞에서 구경꾼으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c.
하나님은 차갑든지 뜨겁든지 명확한 태도를 요구하십니다.
말씀 묵상: 엘리야는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며 차라리 한쪽을 명확히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에서도 주님은 미지근하여 방관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훈: 주님은 우리에게 양다리를 걸친 안전한 신앙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라면,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회색분자로 머물지 말고,
삶의 주권을 온전히 주님께 내어드리는 명확한 고백과 삶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묵상 마무리:
구경꾼으로 서 있던 백성들은 결국 예수님이 숨을 거두실 때 땅이 흔들리고 어두워지는 초자연적 현상을 보고서야 가슴을 치며(눅 23:48) 후회했습니다. 갈멜산의 백성들 역시 하늘에서 불이 내린 후에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라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표적을 보고 뒤늦게 후회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나의 유일한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따르는 진정한
‘예배자이자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인터넷).
(ii)
또한 여기서 저는 “관리들”(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이 자신의 기득권과 종교적 교만에 갇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메시아의
'대속적 사랑'을 전혀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모습을 생각할 때 이 모습이 지금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종교적 교만에 갇혀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
2천 년 전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을 비웃었던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의 모습은 결코 역사 책 속에만 갇힌 과거의 인물들이 아닙니다.
그 모습은 오늘날 기득권과 종교적 교만에 갇혀 주님의 대속적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교회와 지도자들)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이 엄중한 질문을 마음에 품고,
우리가 왜 그 대속적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지 두 가지 깊은 영적 원인을 대면해야 합니다(인터넷):
a.
‘자기 구원’의 신학에 갇힌 교회의 실상
십자가 아래의 관리들:
그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며 조롱했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에서 성공과 능력은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는 것(자기 구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
오늘날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
그리고 우리 자신 역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에서 내 힘을 증명하고,
내 자리를 견고히 하고,
내 기득권을 지켜내려는
'자기 구원'의 논리로 살아갑니다.
"내가 이만큼 대접받아야 하고,
내 교회가 이만큼 커져야 하고,
내 권위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 아래에서 자기 구원을 부르짖던 관리들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b.
‘대속적 사랑’은 내 힘을 증명하는 자에겐
‘실패’로 보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신 주님: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었지만(마 26:53), 우리를 살리시려는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자신의 권리와 생명을 완전히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대속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왜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내가 손해 보고,
내가 낮아지고,
내가 억울한 자리에 서는 것을
‘실패’와 ‘수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교만은 늘 나를
'의로운 자',
'존경받는 자'의 위치에 올려놓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을 위해 기꺼이 밟히고 찢기며,
내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는 십자가의 실제적인 삶은 삶의 자리에서 자꾸만 실종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영적 위로와 도전:
우리가 이 모습을 아파하며 눈물 흘릴 때,
성령님은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골고다의 본질로 초청하십니다.
기득권과 교만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가셨던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는 길",
즉 내가 살아남으려는 본성을 꺾고 내 곁의 연약한 이들을 위해 내 시간과 마음과 기득권을 기꺼이 내어주는 하루의 작은 순종부터 시작됩니다(인터넷).
(iii)
여기서 저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끝내 마음을 완악하게 닫은 채,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이기적인 해방만을 부르짖는 타락한 인간성의 종착지를 보여준 한 행악자를 묵상할 때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우리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여(잠4:23) 우리 마음이 완악해지면 하나님과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만 채우려고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죽음의 문턱,
즉 인생의 가장 참혹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끝내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비방을 쏟아낸 한 행악자의 모습은,
마음을 지키지 못한 인간의 내면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적 경고판입니다. 잠언
4장 23절 말씀("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의 렌즈로 이 완악한 행악자의 모습을 조명해 보면,
우리가 왜 매일의 삶에서 마음을 지켜야 하는지 세 가지 엄중한 유익과 교훈을 얻게 됩니다(인터넷):
a.
고난은 마음의
'포장지'를 찢고
'실상'을 드러냅니다.
평소에는 누구나 교양 있고 의로운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고통과 결핍이 찾아오자,
이 행악자의 내면에 가득 차 있던 독소와 원망,
이기적 욕망이 여과 없이 밖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 역시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지만,
내 삶이 십자가처럼 짓눌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숨겨져 있던 원망과 완악함이 겉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 마음의 진짜 성적표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b.
완악해진 마음은 눈앞의 메시아도
'수단'으로만 봅니다.
이 행악자는 우주의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단 몇 센티미터 거리에 함께 매달려 있었습니다.
주님의 온유하심과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사랑의 기도를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해지자 영적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예수님을 영혼의 구원자로 보지 못하고 오직
'나를 이 고통에서 꺼내줄 유용한 도구(수단)'로만 바라보았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그렇다면 증명해 봐라.
너도 살고 우리도 살려내라!"라는 부르짖음은 회개가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인 생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주님을 협박하는 조롱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기보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c.
마음의 완악함은
'길가 밭'처럼 은혜를 튕겨냅니다.
똑같은 십자가의 고통을 겪고 똑같이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들었지만,
한 편 강도는 마음이 깨어져 구원을 받았고(좋은 땅),
다른 한 편 강도는 끝내 완악함을 고수하다가 영원한 파멸로 걸어갔습니다(길가 밭).
마음을 지키지 못해 단단하게 굳어버린 심령은,
아무리 강력한 십자가의 은혜와 복음이 쏟아져도 그것을 흡수하지 못하고 모두 튕겨내 버립니다.
결국 상황이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상태'가 문제임을 이 행악자는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영적 매듭:
"우리 마음이 완악해지면 하나님과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만 채우려고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백은,
매일 아침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 마음의 밭을 기도로 기경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됩니다.
끝까지 완악했던 이 행악자의 비참한 종착지를 거울삼아,
날마다 성령님께
"주님, 내 마음에 굳은 살을 제거하여 주시고,
은혜에 반응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켜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겸손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인터넷).
(4)
마지막 넷째로,
저는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 좀 묵상하고 싶습니다. 그는 다른 행악자에게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οὐδὲ φοβῇ
σὺ τὸν θεόν, ὅτι ἐν τῷ αὐτῷ
κρίματι εἶ; καὶ ἡμεῖς
μὲν δικαίως, ἄξια γὰρ ὧν ἐπράξαμεν
ἀπολαμβάνομεν· οὗτος δὲ οὐδὲν
ἄτοπον ἔπραξεν (우데 포베 쉬 톤 테온,
호티 엔 토 아우토 크리마티 에이?
카이 헤메이스 멘 디카이오스,
악시아 가르 혼 에프락사멘 아폴람바노멘;
후토스 데 우덴 아토폰 에프락센)]하고 “꾸짖”었고[ἐπετίμα (에페티마)](눅23:40-41)
그 후에는 예수님에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Ἰησοῦ, μνήσθητί μου ὅταν ἔλθῃς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σου (이에수, 므네스테티 무 호탄 엘테스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수)]((42절)라고 말했는데 그 구체적인 의미를 좀 자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1.
거룩한 두려움과 철저한 자기 성찰:
"꾸짖어 이르되"(40-41절)
다른 편 강도가 비방을 쏟아낼 때,
이 강도는 그를
"꾸짖었다[ἐπετίμα (에페티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페티마(ἐπετίμα)의 뉘앙스:
이 단어는 단순히 잔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거나 바람과 바다를 명하여
'엄히 꾸짖고 잠재우실 때'
쓰였던 강력한 어조의 단어입니다.
그는 동료의 비방 속에 담긴 영적 완악함과 독소를 단호하게 차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οὐδὲ
φοβῇ σὺ τὸν
θεόν (우데 포베 쉬 톤 테온)]:
그는 인간의 재판(빌라도)을 넘어,
죽음 이후에 마주해야 할 하나님의 최종 심판과 거룩한 두려움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보응[καὶ ἡμεῖς μὲν δικαίως (카이 헤메이스 멘 디카이오스)]:
그는 "우리는 공의롭게(디카이오스), 우리가 행한 악한 일에 상당한(악시아)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언합니다.
구원의 첫 단추는 자신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온전히 인정하는
'철저한 회개'임을 보여줍니다.
2.
예수님의 완전한 의를 알아봄: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절 하)
원어 묵상: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οὗτος δὲ οὐδὲν ἄτοπον
ἔπραξεν (후토스 데 우덴 아토폰 에프락센)]"
구체적 의미: 여기서 '옳지 않은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토폰(ἄτοπον)은 부적절한 것,
비상식적인 것,
악한 것을 뜻합니다.
즉,
이 강도는 예수님의 삶과 행적 속에서 단 하나의 흠이나 허물,
부적절한 악을 찾을 수 없다고 대중 앞에서 선포한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수로 정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사형수인 이 강도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죄 없으심과 완전한 의로우심을 증언하는
'참된 증인'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3.
부활과 메시아 왕국을 바라본 최고의 신앙 고백:
"나를 기억하소서"(42절)
원어 묵상: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Ἰησοῦ, μνήσθητί μου ὅταν
ἔλθῃς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σου (이에수, 므네스테티 무 호탄 엘테스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수)]"
이름을 부른 유일한 인물: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을 향해 랍비나 주님(퀴리에) 같은 호칭 대신,
친근하고도 간절하게
"예수여(Ἰησοῦ)"라고 그 이름을 직접 부른 사람은 이 강도가 유일하다시피 합니다.
“기억하소서”[μνήσθητί μου (므네스테티 무)]:
이 기도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구원할 때 쓰던 언어입니다.
그는 사후에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자비에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했습니다.
“당신의 나라”[τὴν βασιλείαν σου (바실레이안 수)]:
이 고백이 위대한 이유는 시각적 정황을 완전히 뛰어넘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예수님은 로마 권력에 짓밟혀 피 흘리며 죽어가는 무력한 사형수입니다.
왕관 대신 가시관을 쓰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강도는 영적인 눈이 열려,
저 비참한 예수님이 죽음 너머에 진짜 자기의 나라를 가지고 계시며,
죽음을 깨뜨리고 왕으로 임하실
'진정한 메시아'임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조차 도망치고 의심하던 그 절망의 순간에,
가장 빛나는 종말론적 천국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영적 종합:
이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주님의 용서의 기도("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를 가장 가까이서 들었습니다.
그 사랑이 그의 완악한 심령을 깨뜨렸고,
거룩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했으며,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왕이 바로 곁에 계심을 보게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행할 수도,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릴 수도,
침례를 받을 수도 없는,
손과 발이 못 박힌 무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왕이심을 믿고,
그분의 자비만을 구했을 때,
주님은 그 자리에서 즉시 완벽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인터넷).
(a)
여기서 예수님의 완벽한 구원 선포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Ἀμήν σοι λέγω, σήμερον μετ’ ἐμοῦ
ἔσῃ ἐν
τῷ παραδείσῳ (아멘 소이
레고,
세메론
메트
에무
에세
엔
토
파라데이소)](43절)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a.
맹세로 보증된 절대적 확실성:
"아멘 소이 레고"
(Ἀμήν σοι λέγω)
원어적 의미: "내가 진실로(아멘) 네게 이르노니"
구체적 의미: '아멘'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타인의 말에 동의하거나 기도의 끝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할 때 썼던 단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단어를 항상 문장의
'맨 앞'에 배치하셨습니다.
묵상 교훈: 자신의 신적 권위를 바탕으로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을 입증하고 맹세한다"는 선언입니다.
십자가라는 극심한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당신을 믿은 한 영혼의 구원을 온 우주 앞에 확실하게 보증하시는 왕의 엄숙한 선포입니다.
b.
지체 없는 즉각적인 구원:
"세메론"
(σήμερον)
원어적 의미: "오늘"
구체적 의미: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먼 미래의 어느 날)"
나를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42절).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오늘(세메론)"이었습니다.
묵상 교훈: 구원은 먼 미래로 유예되거나,
죽음 이후 오랜 대기 시간을 거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 강도는 몇 시간 뒤 다리가 꺾여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 숨이 끊어지는 바로
'그날(오늘)', 그의 영혼은 즉시 눈을 떠 주님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즉각적인 구원의 타임라인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c.
구원의 본질인 영원한 연합:
"메트 에무 에세"
(μετ’ ἐμοῦ ἔσῃ)
원어적 의미: "네가 나와 함께 있으리라"
구체적 의미: 천국과 구원의 가장 본질적인 정의가 이 짧은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황금 길이나 화려한 보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묵상 교훈: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던 흉악범이,
십자가 위에서 마음을 돌이킨 단 한 번의 고백으로 인해 우주의 왕이신 주님의 가장 친밀한 동반자이자 영원한 동거인으로 초청받았습니다.
구원은 주님과의 완벽하고 영원한 분리 없는 연합입니다.
d.
회복된 에덴과 하나님과의 친밀함:
"엔 토 파라데이소"
(ἐν τῷ παραδείσῳ)
원어적 의미: "낙원에"
구체적 의미: '파라데이소스'는 본래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왕의 정원',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과수원'을 뜻합니다.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에덴 동산'을 가리킬 때 썼습니다.
묵상 교훈: 죄로 인해 인간이 쫓겨나야 했던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의 장소,
즉 에덴의 기쁨과 평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비참한 사형 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죄수에게,
왕의 비밀 정원(낙원)의 문이 활짝 열렸음을 선언하는 복음의 절정입니다.
우리를 위한 묵상 종합:
이 강도는 어떠한 종교적 공로나 선행,
율법의 행위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죄인 됨을 인정한 회개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고,
네가 살아서 지은 죄의 대가를 다 치르고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 그 즉시,
"아멘(확실성), 오늘(즉각성), 나와 함께(연합), 낙원에 있으리라(회복)"는 완벽한 구원을 거저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얻은 은혜이자,
기독교가 선포하는 가당치 않은 십자가 복음의 실체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낙원”[τῷ παραδείσῳ (토 파라데이소)]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익숙한 단어는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1.
단어의 유래:
"왕이 소유한 비밀 정원
"'파라데이소스'는 원래 고대 페르시아어 파리다이자(Paridaiza)에서 유래한 외래어입니다.
이는 사방이 성벽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인
'왕의 사유 정원'
또는 '황실의 사냥터'를 뜻했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왕이 허락한 사람,
왕과 가장 친밀한 특권을 가진 자만 초청받아 함께 거닐 수 있는 아름답고 안전한 정원의 뉘앙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2.
구약성경(70인역)에서의 의미:
"회복된 에덴동산"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 성경 저자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Garden
of Eden)을 번역할 때 바로 이 단어(파라데이소스)를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낙원은
"죄로 인해 문이 닫히고 쫓겨나야 했던,
그러나 언젠가 메시아를 통해 돌아가게 될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가 있던 최초의 에덴"을 소망하는 단어였습니다.
3.
신약성경 속
'낙원'의 중간 상태적 의미
(낙원 vs 천국/하나님의 나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신학적 개념이라면,
‘낙원’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장차 맞이할 최종 부활과 심판 전까지 주님과 함께 머무는 안식의 처소(중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회개한 행악자는 먼 미래에 완성될 눈에 보이는 거대한 메시아 영토인
"당신의 나라"를 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오늘 즉시 그의 영혼이 들어가 눈을 뜨고 안식할 구체적인 장소이자 왕의 정원인
"낙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낙원’은 단 세 번만 사용되었는데,
그 용례를 보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누가복음 23:43 (오늘 본문):
죽음 직후 신자가 영혼으로 즉시 주님을 만나 위로와 안식을 누리는 처소.
고린도후서 12:4: 사도 바울이 환상 중에 이끌려 올라갔던 셋째 하늘(하나님이 계신 곳)을 ‘낙원’이라 칭함.
요한계시록 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에덴의 생명나무가 낙원에서 완벽히 회복됨을 묘사)(인터넷).
·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낙원”과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낙원(Paradise)'과 가톨릭 교리의
'연옥(Purgatory)'은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성경적·신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두 개념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미 완벽한 구원과 안식인가',
아니면 '남은 죄를 씻기 위한 형벌과 정화의 과정인가'에 있습니다.
a.
신약성경과 개신교 신학이 증언하는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죽은 성도의 영혼이,
장차 맞이할 최종 부활 전까지 어떠한 고통이나 형벌 없이 주님과 함께 즉시 거하는 완벽한 안식과 위로의 처소입니다.
반면 가톨릭 교리의
'연옥'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죽었으나 세상에서 지은 죄에 대한 대가(잠벌)를 다 치르지 못한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남은 죄를 씻어내기 위해 불 같은 고통을 겪으며 정화 과정을 거치는 사후의 중간 상태이자 장소를 뜻합니다.
b.
오늘 본문(회개한 강도)을 통해서 본 결정적인 차이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3장 43절의 사건은
'낙원'과 '연옥'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적 기준이 됩니다.
가톨릭의 연옥 관점이라면:
이 행악자는 평생 흉악한 죄를 지었고,
침례(세례)를 받지도 않았으며,
선행을 행하거나 교회에서 보속(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행위)을 행할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의 보속과 연옥 교리에 따르면,
이 강도는 죽은 후 연옥에 들어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극심한 정화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낙원 선포: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강도에게
"너는 죄의 대가를 덜 치렀으니 연옥에 가서 정화를 거치고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강도가 한 일은 오직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자비를 구한 것뿐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피가 그의 모든 죄를 단번에,
완벽하게(Once
for all) 씻었기 때문에 그날 즉시 아무런 고통이 없는 완벽한 안식의 처소인
'낙원'으로 직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c.
교리적 배경의 차이
낙원 (오직 성경): 신약성경에 명시된 단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로 우리 죄가 완전히 도말되었다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복음적 약속에 기초합니다(히 10:14).
연옥 (교회 전통과 외경):
연옥은 정경(66권)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가톨릭이 인정하는 외경(마카베오하 12장)과 교회의 오랜 유전 및 전통을 바탕으로 서기
6세기(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 시기)에 구체화되어
15세기 피렌체 공의회와 트렌트 공의회에서 공식 교리로 확정되었습니다.
이 교리는 산 자들의 기도나 미사,
시사(연미사)를 통해 연옥에 있는 영혼의 고통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묵상 마무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낙원은 인간의 공로나 사후의 정화 노력이 끼어들 틈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승리의 장소'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연옥이라는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정화의 관문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이미 나의 모든 죄패가 완전히 지워졌기에 숨을 거두는
'그날 즉시(오늘)' 주님의 품인 낙원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한 행악자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참된 평안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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