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대화와 강단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신앙의 표현 가운데 하나가 ‘내려놓기’일 것입니다.
한 신실한 몽골 선교사의 저서를 통해 이 표현이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깊은 영적 울림을 주었고, 이후 ‘내려놓기’는 직분과 사명을 넘어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사용하는 익숙한 표현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이 표현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저는 ‘내려놓기’보다 ‘비우기’라는 표현이 성경이 말하는 제자도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려놓기’에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잠시 내려놓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집착을
내려놓고, 때로는 내가 가진 권리나 유익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의 중요한 훈련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그것을 움켜쥐려는 마음까지
변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내려놓았지만 내일 다시 움켜쥘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욕심을 내려놓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내가 주인이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면 다시 내 뜻과 욕망을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내려놓는 행위에 머물지 않습니다.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 자체를 비우고, 내 삶의 중심과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야말로 더 깊은 차원의 제자도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광과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낮추어 종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자기 비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비우기’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비우고, 그 자리를 그리스도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 고집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자랑을 비우고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욕심과 두려움을 비우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비움은 단순한 포기가 아닙니다.
비움은 새로운 충만을 위한 준비입니다. 내 생각을 비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내 욕심을 비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교만을 비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품기 위해서입니다.
내 미움을 비우는 것은 사랑으로 채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비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단순히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묻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서 무엇을 비워야 하는가?’ 그리고
‘그 비운 자리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을 함께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 질문 앞에 날마다 자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내 생각과 욕망, 자존심과
고집, 탐욕과 두려움, 미움과 상처, 세상에 대한 집착을 말씀 앞에서 살피고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 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오래된 죄의 습관과 자기중심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비우기’는 바로 이 은혜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성경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삶의 여러 영역에 숨어 있는 ‘비워야 할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만을 비우고, 탐욕을 비우고, 위선을 비우고,
거짓을 비우며, 미움과 악한 생각과 음란과 원망과 질투를 비우는 길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우리를
끊임없이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먼저 비우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비우려고 애써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다시 채워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비움의 자리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비워 내신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채워 가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거울 앞에 조용히 서 보려 합니다. 나는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내가 아직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빈자리에 나는 무엇을 채우고 있는가? 이 질문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할 때,
‘비우기’는 단순한 신앙의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제자도의
길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이 그 길을
걷는 작은 안내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제가 오랜 시간 성경을 묵상하고 목회 현장에서 말씀을 전하며 기록해 온 묵상과 나눔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기록해 온 말씀 묵상과 설교의 내용들을
인공지능이 참고하여 주제와 흐름을 정리하고, 제가 전하고자 하는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을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신앙적 방향과 성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무엇을 비우고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에 대한 묵상의 중심은
저의 책임 아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살피고 분별하며 다듬고자 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사람의 글보다 성경의 말씀을 바라보고,
글을 쓴 사람보다 우리를 먼저 비우시고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거룩한 비우기의 역사를 겸손히 사모하며, 오늘도 내 안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비우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기도하며,
제임스 김 나눔
2026년 9월
12일
내 중심을 온전히 비워 내지 못하고, 때로는 비워야 할 것조차 붙잡고 있는 나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긍휼을 구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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