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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imacy with God as “Abba, Father” Was the Driving Force That Enabled Jesus to Fulfill His Mission to the End

Intimacy with God as “Abba, Father” Was the Driving Force That Enabled Jesus to Fulfill His Mission to the End         “Now it was about the sixth hour, and darkness came over the whole land until the ninth hour, while the sun’s light failed; and the curtain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Then Jesus, calling out with a loud voice, said,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And having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Now when the centurion saw what had taken place, he glorified God, saying, ‘Certainly this man was righteous!’   And all the crowds that had assembled for this spectacle, when they saw what had taken place, returned home beating their breasts.   And all his acquaintances and the women who had followed him from Galilee stood at a distance watching these things” (Luke 23:44–49).     (1)   After reading today’s passage, Luke 23:44–49, in both the Korean Bible and the Greek New Testament, I first...

‘아빠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게 만든 원동력입니다.

아빠 아버지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게 만든 원동력입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말씀을 하신 숨지시니라 백부장이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일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멀리 서서 일을 보니라”(누가복음 23:44-49).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 44-49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은 제일 먼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7 45-56절과 마가복음 15 33-41절과 요한복음 19 28-30절과 비교하여 종합적인 줄거리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1.      복음서 종합 줄거리 (시간 순서별)

 

초자연적인 어둠 ( 12 ~ 오후 3)

 

6( 12)부터 9(오후 3)까지 땅에 햇빛이 가려지고 어둠이 임합니다(, , 누가).

 

고통의 부르짖음과 가갈 (오후 3 전후)

 

예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크게 외치시자, 무리는 엘리야를 부른다며 오해합니다(, ).

 

예수께서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내가 목마르다" 하시자, 사람이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입에 댑니다(요한).

 

마지막 선언과 운명

 

포도주를 받으신 " 이루었다"(요한) 말씀하시고, 소리로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 외치신 고개를 숙이고 숨을 거두십니다(공통).

 

경이로운 이적들과 반응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찢어지고(, , 누가),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 성도들이 부활합니다(마태).

 

백부장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이자 "정녕 의인"(누가)이라 고백하고, 구경꾼들은 가슴을 치며 돌아갑니다(누가).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은 광경을 멀리서 지켜봅니다(, , 누가).

 

2.      복음서별 강조점 차이점 비교

 

마태복음: 왕으로 오신 메시아와 우주적 권세

 

마태복음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왕으로서의 메시아 강조합니다.

 

종말론적 표적: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뿐만 아니라,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며 무덤 성도들이 부활하는 우주적인 초자연적 이적을 유일하게 기록하여 사단의 사망 권세가 깨어졌음을 선포합니다.

 

고독한 부르짖음: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고독한 부르짖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짊어진 대속 제물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백부장의 증언: 모든 권세 있는 표적을 목격한 백부장과 군인들로 하여금 "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두려움 섞인 신앙 고백을 이끌어냅니다.

 

마가복음: 거친 고난을 묵묵히 담당한

 

마가복음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장 날것 그대로 묘사하며고난받는 으로 오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현장성과 침묵: 초자연적인 이적을 최소화하고 십자가 위의 거친 조롱과 어둠, 그리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처절한 부르짖음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고난의 무게를 그대로 전달합니다.

 

휘장의 깨어짐과 이방인의 고백: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사건을 백부장의 고백과 바로 연결합니다.  이를 통해 성전 제사가 폐해지고, 성전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입을 통해 "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구원의 선언이 터져 나오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없으신 온전한 인자와 용서

 

누가복음은 소외된 자들을 품으시는온전한 인간이자 의인이신 예수 깊이 있게 묘사합니다.

 

휘장의 배치와 즉각적 단절: 다른 복음서와 달리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을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기직전 배치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즉각적인 통로가 되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신뢰와 용서의 마지막 한마디: 처절한 절규 대신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평온하고 주체적인 기도로 마지막을 장식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온전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무리의 회개와 의인의 선포: 백부장의 고백을 "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도덕적·법적으로 강조합니다.  또한 광경을 무리들이 냉소적인 구경꾼으로 남지 않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돌아가는' 회개의 역사로 마무리합니다.

 

요한복음: 구속사를 주도하시는 신성의 하나님 아들

 

요한복음은 십자가 위에서도 무력하게 당하지 않고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신성을 지닌 모습을 강조합니다.

 

성경의 성취와 구원의 주도권: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아시고, 구약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스스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구속 사역을 통제하시는 통치자의 면모를 보입니다.

 

당당한 승리의 선언: 고통의 부르짖음이나 유언 대신 " 이루었다"라는 당당한 구원 성취의 선언을 남기십니다.

 

존엄한 죽음: 타의에 의해 영혼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사명을 완수하신 왕으로서 스스로 고개를 숙이시고 영혼을 넘겨주시는(내어주시는)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셨음을 강조합니다.

 

3.      핵심 차이점 분석 (묵상 포인트)

 

마태·마가복음의 고독감 vs 요한복음의 주도권

 

마태·마가복음은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메시아의 극심한 고통("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날것 그대로 보여주지만, 요한복음은 철저히 계획된 구속사를 완성하시는 통치자로서 " 이루었다" 선언하십니다.

 

누가복음이 바라본 예수님의 '의로움'

 

누가는 이방인 백부장의 입을 통해 예수를 '의인'으로 선포합니다.  이는 없으신 온전한 인간이 인류를 대신해 죽으셨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독특한 시선입니다.  또한 휘장이 찢어지는 타이밍을 운명 '직전' 배치하여, 예수의 죽음이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었음을 시각화합니다.

 

마태복음의 종말론적 현상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려 성도들이 일어난 사건' 예수의 죽음이 단지 인간의 끝이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는 우주적 사건이자 시대의 시작임을 선포합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누가는 휘장이 찢어지는 타이밍을 운명 직적에 배치하였다면 다른 복음서에서는 휘장이 찢어지는 타이밍이 다른지, 다르면 다른지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a.      복음서별 휘장이 찢어지는 타이밍 비교

 

마태복음 & 마가복음: 운명직후’ (결과와 선포)

 

순서: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숨을 거두심 → [그때에]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백부장의 고백

 

의미: 예수님의 죽음이라는사건 일어난 즉시, 구속사적인 결과로서 휘장이 찢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운명직전’ (원인과 목적)

 

순서: 해가 어두워짐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짐예수께서 소리로 부르짖으심("아버지 영혼을...") → 숨을 거두심

 

의미: 예수께서 죽으시는 과정의 클라이맥스 속에서 휘장이 먼저 열리고, 열린 길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혼을 의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b.     타이밍이 다르고, 누가는 직전 배치했을까요?

 

구조적인 순서를 바꿈으로써 누가가 강조하고자 했던 신학적 메시지는 크게 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새롭고 즉각적 개통 (히브리서적 맥락)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결과' 성전 제사가 폐지되었다는 점에 집중했다면,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동시성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찰나의 순간에 휘장이 한가운데로 찢어짐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단절이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 보좌 앞으로 직행하는 새로운 길을 여는 주체적인 사건임을 시각적으로 결합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온전한 신뢰와 교통 시각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가칠언은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입니다.  지극히 친밀하고 평온한 기도입니다.

 

누가는 기도 바로 앞에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을 배치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도 1년에 두려움으로 들어가야 했던 지성소의 막힌 (휘장)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하며 당당하고 평안하게 영혼을 의탁하시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연출한 것입니다.

 

성전 체제의 심판과 새로운 예배의 시작

 

누가는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집필한 저자입니다.  누가에게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 기능이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휘장을 가르심으로써, 기존 성전 체제는 심판을 받아 마감되고,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열방이 장소의 제약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있는 ' 시대' 열렸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과 달리 누가가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동시성을 강조한다(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찰나의 순간에 휘장이 한가운데로 찢어짐) 말이 흥미롭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누가에게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 기능이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말도 관심을 갖게됩니다.  이것을 현대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있을까요?

 

·         누가가 보여준 가지 핵심 메시지(‘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동시성건물 성전 기능의 종말’) 오늘날 현대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매우 강력하고 실제적인 도전을 줍니다.  이를 가지 차원의 현대적 적용점으로 정리할 있습니다”(인터넷):

 

1.      예배당 건물중심에서일상의 성전으로의 전환 (건물 성전의 종말 적용)

 

누가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의 유통기한이 끝났음을 선언했습니다.  예수의 죽음 직전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진 것은, 이상 하나님이 특정 건물이나 제한된 공간에 갇혀 계시지 않는다는 선포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주일 아침예배당이라는 공간에 들어설 때만 거룩함을 느끼고, 교회를 벗어나는 순간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성전 중심적 신앙 갇혀 있습니다.

 

실제적 적용: 우리는예배당에 가는 (Going to Church)’ 예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이 움직이는 성전(고전 3:16) 되었으므로, 거룩한 예배당 건물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정, 직장, 일터라는 세속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예배하는일상의 예배자 살아가야 합니다.

 

2.      중재자 필요 없는 1:1 친밀함 (즉각적 동시성 적용)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찰나, 휘장이 열린 공간 속으로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며 영혼을 맡기셨듯, 이제 모든 성도는 어떠한 영적 중재자 없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부르며 직행할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 현대 교회 안에는 은연중에 목회자, 선교사, 혹은 영적 리더들이 평신도보다 하나님과 가깝고, 그들의 기도나 중보가 있어야만 하나님께 상달될 것이라는변형된 사제주의(중재자 사상)’ 존재합니다.

 

실제적 적용: 영적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들의 기도를 받는 것은 유익하지만, 나에게 직접 열린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특권을 양보해서는 됩니다.  성도 개인이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1:1 직접 소통하는만인제사장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삶의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중간 대리인을 찾기 , 찢어진 휘장 사이로 친히 아버지가 되어주신 하나님께 담대히 직접 나아가는 영적 독립성이 필요합니다.

 

3.      영적 종교주의(종교적 절차) 타파와 즉각적인 소통

 

구약의 성전 체제는 복잡한 제사 절차, 짐승의 , 제사장의 순서 조건과 절차 까다로웠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담이 즉각 무너졌음을 시각화했습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 교회가 전통, 제도, 직분, 종교적 프로그램이라는절차와 형식 얽매여, 정작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영적 교통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적 적용: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적인 의무감이나 형식(: 예배 횟수 채우기, 직분적 체면 ) 머물지 않도록 끊임없이 본질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잡한 종교적 형식을 갖추어야만 만나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낙심한 자리에서, 죄로 인해 마음이 무너진 찰나의 순간에 "주님, 제가 지금 목마릅니다"라고 부르짖을 , 주님은 찢어진 휘장 사이로 우리를 즉각적으로 만나주십니다.  즉각적인 은혜의 동시성 신뢰하며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현대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은연중에 목회자, 선교사, 혹은 영적 리더들이 평신도보다 하나님과 가깝고, 그들의 기도나 중보가 있어야만 하나님께 상달될 것이라는변형된 사제주의(중재자 사상)’ 생겼는지 궁금해졌습니다. 

 

n  현대 교회 안에변형된 사제주의(중재자 사상)’ 은연중에 자리 잡게 배경은 역사적, 심리적, 그리고 구조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만인제사장 선언하며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있음을 천명했음에도, 사상이 다시 고개를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인간의 종교적 본성과의존 심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서는 것에 대해 두려움과 부담감을 느낍니다.

 

책임 전가와 대리 만족: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영적 책임을 지는 것보다 검증되고 훈련된영적 전문가에게 역할을 위임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두려워하여모세 당신이 대리인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에게 전해 달라( 20:19)” 요청했던 영적 의존성이 현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b.     한국 교회 역사적 배경: 유교적 위계질서와 샤머니즘의 융합

 

특히 한국 교회의 맥락에서는 기독교가 전래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문화적 토양이 강하게 투영되었습니다.

 

유교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 스승() 아버지() 전하는 가르침과 은혜가 같으므로, (一體)처럼 똑같이 존경하고 섬겨야 한다] 정서: 목회자를 영적스승이나아버지 같은 절대적 권위자로 대우하는 유교적 가치관이 교회 구조 내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었습니다.

 

샤머니즘적 신령주의: 무당(중재자) 신의 뜻을 받아 복을 빌어주던 영적 패러다임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영험하고 영빨이 좋은 목회자의 기도가 상달된다 복의 중재자 개념으로 변질된 측면이 있습니다.

 

c.      교회의 대형화와기능주의적 분업

 

현대 교회가 성장하고 제도화되면서 기업이나 조직과 유사한전문 경영/분업 구조 갖추게 되었습니다.

 

소비자가 평신도: 목회자는 설교와 기도, 영적 서비스를 제공하는공급자 되고, 평신도는 이를 소비하는수혜자 전락했습니다.  영적 사역이 철저히 전문화·분업화되면서,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영적인 일은 목회자의 고유 영역이며 자신들은 영역에 미치지 못한다는 심리적 격차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d.     영적 지도자들의 권위주의와신비주의 마케팅

 

때로 영적 리더들이 자신의 리더십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은연중에 차별성을 강조한 점도 원인입니다.

 

구약적 제사장 개념의 오용: 목회자 자신을 구약의주의 (모세나 선배 선지자들)’ 동일시하며, 자신에게 특별한 영적 권위나 기도 권세가 있는 것처럼 강조하는 가르침이 성도들에게중재자 사상 고착화시켰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독립을 돕기보다, 리더 자신에게 영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구조가 권위 유지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변형된 사제주의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서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의존적 본성, 문화적 가치관(유교·샤머니즘)과의 혼합, 현대 교회의 제도화·분업화, 그리고 리더들의 권위주의가 맞물려 탄생한 결과물입니다.

 

결국 누가가 보여준찢어진 휘장 사건은, 이러한 인간의 종교적 회귀 본능을 깨뜨리고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스스로 담대히 걸어 나가야 함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강력한 개혁의 메시지입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σκότος γένετο φ’ λην τν γν”(스코토스 에게네토 홀렌 )(“ 땅에 어둠이 임하여”)(23:44) “το λίου κλιπόντος”( 렐리우 에클리폰토스)(“해가 빛을 잃고”)(한국어 성경에는 44절에 나오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45절에 나옴) 문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육시쯤부터 제구시까지” “계속”(44)해서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것일까요?

 

1.      자연적 현상(일식) 불가능성

 

헬라어 사본 일부에는 45절의 헬리우 에클리폰토스(το λίου κλιπόντος)’해가 일식(eclipse) 일으켰다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영어 단어 eclipse 바로 에클리포(κλείπω: 빛을 잃다, 꺼지다)’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연적인 일식이 결코 아닙니다.

 

시기적 불가능: 예수님이 돌아가신 유월절은 음력 1 14일로, 달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는 만월(보름달) 때입니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끼어드는 일식은 과학적으로 보름달일 절대 일어날 없습니다.

 

시간적 불가능: 자연적인 개기일식은 해가 가려지는 시간이 최대 7~8분을 넘지 못합니다.  3시간( 12~오후 3) 동안 해가 완전히 빛을 잃고 암흑이 계속되는 것은 자연계의 법칙을 초월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입니다.

 

2.      구약 예언의 성취: 메시아적 심판과여호와의

 

성경 맥락에서 낮이 어둠으로 바뀌는 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누가는 표현을 통해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시각화했습니다.

 

아모스 8 9절의 성취: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요엘 2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가장 밝아야 12(6)부터 해가 빛을 잃었다는 것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쏟아지는심판의 임했음을 우주가 증언하는 것입니다.

 

3.      헬라어 동사에게네토(γένετο)’에클리폰토스(κλιπόντος)’ 깊은 의미

 

σκότος γένετο (스코토스 에게네토): “어둠이 존재하게 되었다

 

여기서에게네토(기본형: 기노마이)’ 단순한 날씨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영적·우주적 상태가 창조되듯 임했다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창세기 1 3절의빛이 있으라(γενηθήτω φς)” 정반대로, 십자가 위에서 창조주가 죽으실 세상의 빛이 거두어지고 원초적 암흑( 1:2) 땅을 덮은 것과 같은 영적 충격을 묘사합니다.

 

το λίου κλιπόντος ( 헬리우 에클리폰토스): “해가 파산했다 / 실패했다

 

에클리포 단순히 빛이 흐려진 것이 아니라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다, 고갈되다, 파산하다라는 강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상에 빛과 생명을 공급하던 태양조차도, 진짜 이시며 세상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잃어가시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기능을 완전히 멈추고 낮의 지위를 포기(파산) 버렸음을 뜻합니다.

 

4.      3시간 동안계속되었는가?

 

6시부터 9시까지의 3시간은 십자가 고통의 절정이자, 하나님과 아들 예수 사이의단절과 침묵 시간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죄를 대속하시는 예수님을 외면하심으로 영적인 단절이 일어났고, 영적 영역의 고통과 단절이 물리적인 피조 세계에 ‘3시간 동안의 지속적인 암흑으로 투영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임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빛이신 창조주의 죽음 앞에 피조물인 태양이 기능을 멈춘 사건이며,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독생자를 향한 심판이 얼마나 무겁고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우주적 징표입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어둠이 존재하게 되었다라는 헬라어 “σκότος γένετο” (스코토스 에게네토)에서에게네토(“임하였다”)’라는 단어가 창세기 1 3절에  빛이 있으라에서 있으라”(생겨나라)(γενηθήτω, 게네테토) 빛이 있었고”(생겨났고)에서 있었고”(γένετο, 에게네토) 정반대로, 십자가 위에서 창조주가 죽으실 세상의 빛이 거두어지고 원초적 암흑[( 1:2) “…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땅을 덮은 것과 같은 영적 충격을 묘사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존재했던 어둠”(23:44)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창조하신 ”(1:3) 대조적이면서 의미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새창조의 (구원의) 역사[우리가 피조물이 되는 (고후5:17)] 이루시고자 하신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i)                  창세기 1장의 창조(Old Creation)’ 십자가 위에서의 창조(New Creation)’ 대조는 헬라어 동사에게네토(γένετο)’ 연결을 통해 더욱 완벽하게 증명됩니다.   놀라운 영적 충격과 구속사적 의미를 인공지능이 가지 핵심 포인트로 확장하여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창조의 가역 현상: 심판을 통한 재창조의 준비


창세기 1 2~3절에서 하나님은 원초적 혼돈과 흑암(σκότος) 속에 말씀으로빛이 있으라하셨고, 결과 빛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γένετο φς).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빛이신 창조주가 죽으실 땅에 어둠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σκότος γένετο).

 

구조적 대조: 창세기가[흑암빛이 존재함(γένετο)] 과정이었다면, 십자가는[ 빛의 죽음흑암이 존재함(γένετο)]으로 창조의 질서가 역전되는 우주적 충격을 보여줍니다.

 

신학적 의미: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로 오염된 창조의 세상을 완전히 심판(가르심)하셨음을 뜻합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 기존 건물을 완전히 허물듯,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창조의 어둠을 스스로 온몸으로 받아내시며 대속의 심판을 완성하셨습니다.

 

b.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테텔레스타이)] 창조의 안식

 

창세기 1장에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으며, 7일째에 안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며 요한복음에서 "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테텔레스타이)]라고 선언하십니다.

 

3시간 동안의 원초적 암흑( 1:2 상태) 뚫고 터져 나온 선언은, 사단과 죄의 권세 아래 신음하던 피조 세계를 해방하고, 죄인을 거룩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재창조하는 영적 대공사가 완공되었음을 알리는 우주적 선포입니다.

 

창조의 빛이 물리적 생명의 시작이었다면, 십자가의 어둠을 뚫고 찢어진 휘장 사이로 흘러나온 예수의 보혈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창조의 되었습니다.

 

c.      현대적 적용: 우리 삶에 임하는에게네토’(γένετο)(“임하여”) 은혜

 

고린도후서 5 17(“새로운 피조물이라”) 역사는 오늘날 우리 삶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영적 무덤에서 일어나는 창조: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날 , 우리 자아의 어둠과 죄의 질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 완전히 기능 정지[κλείπω (에클리포)][“빛을 잃고”(23:44)]됩니다.   그리고 캄캄한 절망의 무덤 속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우리의 심령에빛이 있으라말씀하시며 신령한 창조의 역사(에게네토) 시작하십니다.

 

성도에게 주는 위로: 그러므로 성도가 삶에서 마주하는 깊은 영적·환경적 어둠(초라함, 낙심, 고통) 파멸의 징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삶의 구습을 깨뜨리시고, 전적으로 새로운 구원의 역사와 신령한 피조물의 은혜를 빚어내시기 직전에 행하시는 창조의 전주곡 것입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Πάτερ, ες χεράς σου παρατίθεμαι τ πνεμά μου (파테르, 에이스 케이라스 파라티테마이 프네우마 )](23:46)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7가지 말씀 중에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 46절의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이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인데 저자 누가만 일곱 번째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째 말씀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 번째 말씀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 누가만 기록하였음].  의미가 무엇이며 누가만 말씀을 기록한 것일까요?  사도행전과도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a)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예수님의 십자가 마지막 말씀인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유일하게 기록한 배경에는 누가 고유의 깊은 신학적 의도와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구속사적 포석이 깔려 있습니다.  제가 던진 가지 질문( 말씀의 구속사적 의미, 누가만 기록한 이유, 사도행전과의 연관성) 대한 인공지능의 깊이 있는 분석입니다(인터넷):

 

1.      말씀의 구속사적 의미: 시편 31편의 성취와 완벽한 신뢰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구약 시편 31 5(“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인용한 기도입니다.  당시 유대인 어머니들이 밤에 잠들기 자녀들에게 가르치던잠자리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Πάτερ(파테르)] 추가: 예수님은 구약 시편 말씀 앞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스스로 추가하셨습니다.  마태·마가복음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처절한 단절의 고통을 통과하신 , 마침내 하나님과의 친밀한 부자 관계가 완벽하게 회복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넘겨드림[παρατίθεμαι(파라티테마이)(“부탁하나이다”)(23:46): 단어는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가치 있는 보물을 맡기다라는 뜻의 상업적·법적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이나 로마 권력에 의해 생명을 강제로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사명을 완수하신 자신의 가장 고귀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의탁하셨음을 의미합니다.

 

2.      오직 '누가' 말씀을 기록했을까요? (누가의 신학적 이유)

 

누가는 복음서 기자 유일한 이방인이자 의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통 자체보다온전한 인간(의인)으로서 모델이 되시는 예수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누가복음 가칠언의 수수께끼 ( 번째, 번째, 일곱 번째): 누가는 1(용서의 기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2(낙원의 약속: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7(신뢰의 기도: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독점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아버지 시작해서아버지 끝나는 구조: 누가가 기록한 십자가의 시작(1) (7) 모두 "아버지" 수렴됩니다. 누가는 사형 집행장이라는 가장 잔혹한 공간을,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용서를 구하고 영혼을 맡기는가장 거룩하고 친밀한 소통의 으로 재정의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 부를 있는 길이 오직 예수의 죽음을 통해 열렸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3.      사도행전과의 필연적인 연관성: 스테반의 순교와 교회의 DNA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본래누가-행전(Luke-Acts)’이라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서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 모습을 통해, 사도행전에서 탄생할교회와 성도들이 걸어가야 완벽한 모델 제시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과의 데칼코마니(Decalcomania)(의미: 대상이 마치 판박이처럼 완벽하게 닮아 있거나 대칭을 이루는 현상)( 7:59-60): 사도행전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는 죽어갈 정확히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합니다.

 

예수(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 스데반( 7:60): "주여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예수( 23:46): "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스데반( 7:59): " 예수여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사도행전적 연관성의 핵심:

누가는 사도행전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DNA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사랑(1, 2)’죽음 앞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7)’ 예수님 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도행전의 성도들과 현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어야 하는성도의 마땅한 삶의 방식임을 스데반을 통해 선포한 것입니다.

 

4.      현대 성도를 향한 은혜와 적용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신뢰: 누가가 묘사한 예수님의 마지막은 평온한 안식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나 극심한 고난의 한복판에서, 영혼을 안전하게 받아주실 "아버지" 계심을 신뢰하며 "파라티테마이(의탁합니다)"라고 고백할 있는 영적 담대함을 줍니다.

 

사명자의 당당함: 예수님처럼 사명을 마친 자만이 기도를 드릴 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나의 정욕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고 마지막 주님의 손에 영혼과 삶의 열매를 기쁘게 올려드리는 사명자의 삶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일곱 말씀 번째 말씀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인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 비교할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Πάτερ(파테르)] 용서의 기도로 시작하여 의탁의 기도로 마치셨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합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Πάτερ(파테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1:2)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Πάτερ μου(파테르 )] 만일 만하시거든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하고 간구하셨는데 이렇게 십자가 상에서도 번이나 아버지”[Πάτερ(파테르)](23:34, 46) 간구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와 로마서 8 15절에 나오는 "아바 아버지(ββ πατήρ)" 아람어·헬라어 언어적 결합의 의미와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a.      십자가 "아버지" 호칭이 우리에게 주는 가지 교훈

 

예수님이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처음과 끝을 "아버지" 채우셨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지 거대한 영적 레슨을 줍니다.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관계의 견고함'

 

겟세마네 동산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고뇌 속에서도, 영혼이 찢어지는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 속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은 번도 흔들리지 않고 "아버지"였습니다.

 

교훈: 우리의 신앙과 기도는 환경에 따라 춤추지 않아야 합니다.  삶이 풍요로울 때나, 십자가처럼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의 한복판에 있을 때나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신실하신아버지이심을 신뢰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기도의 모범을 친히 (죽음)으로 증명하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엄숙하고 거리를 호칭 대신 "아버지”[Πάτερ(파르테)]라고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11:2).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가르치신 대로, 인생의 가장 참혹한 사형장 위에서 친히 하나님을 "아버지" 부르며 기도의 모범을 완벽하게 살아내셨습니다.

 

교훈: 예수님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은 추상적인 교리나 신학적 이론이 아니라,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붙들었던 실제적이고 유일한 생명선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형식적인 종교 언어가 아닌, 아버지를 향한 날것 그대로의 소통이어야 합니다.

 

사명의 시작과 끝을 담보하는 친밀함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하늘에서 "너는 사랑하는 아들"( 3:22)이라는 음성을 들으셨고, 공생애를 마치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부르며 운명하셨습니다.

 

교훈: 예수님의 생애를 지탱한 힘은 '아들 됨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사역의 성과나 사람들의 환호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친밀함이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b.     로마서 8 15 "아바 아버지(ββ πατήρ)"와의 연관성

 

로마서 8 15절의 "아바 아버지"(ββ πατήρ) 예수님이 보여주신 아버지”[Πάτερ(파르테)] 기도가 어떻게 우리에게 상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성령의 선언입니다["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8:15)].

 

     아람어 '아바(ββ)' 헬라어 '파테르(πατήρ)' 결합 의미

 

아바(Abba): 당시 유대인 가정에서 아기가 아버지를 부를 쓰던 가장 친밀하고 전적인 신뢰가 담긴 아람어(가정어)입니다.   우리말의 '아빠' 정확히 일치하는 뉘앙스입니다.

 

파테르( πατήρ): 헬라어 정관사가 붙은 형태로, 공적인 관계나 격식, 그리고 우주적 창조주이신 절대 존엄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부르는 표현입니다.

 

결합의 신비: 사도 바울이 단어를 결합한 이유는, 신구약과 유대인·이방인을 통틀어 "가장 친밀한 아빠(아바)"이신 분이 동시에 " 우주의 통치자이신 거룩한 하나님”[파테르(“아버지”)]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아바 아버지" 필연적 연결

 

구약 시대의 죄인 인간은 감히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를 없었습니다.  오직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의 고유한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이 "아버지!" 부르며 성전 휘장을 한가운데로 찢으시고( 23:45) 숨을 거두심으로써, 독점적 특권이 우리에게 양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 우리는 '양자의 (성령)'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감히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이 고통의 현장에서 부르셨던 "아버지" 향해 성령 안에서 똑같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있게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시작해 "아버지" 마치신 기도는, 단순히 그분의 유언을 넘어 인류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있는 양자의 권세' 선물하기 위한 대속의 통곡이었습니다.

 

묻은 기도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삶의 어떠한 위기와 두려움 속에서도 무서워하는 종처럼 떠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빠!"라고 당당하고 친밀하게 부르짖으며 그분의 손에 우리의 인생을 의탁할 있게 것입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말씀을 하신 숨지시니라”[τοτο επν ξέπνευσεν (투토 에이폰 엑셉네우센)](23:46)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특히 저는 예수님처럼 스데반 집사도 주여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말을 하고 자니라”[Κύριε, μ στήσς ατος τν μαρτίαν ταύτην. κα τοτο επν κοιμήθ (퀴리에, 스테세스 아우토이스 하마르티안 타우텐. 카이 투토 에이폰 에코이메테)](7:60)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이유는 저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주님 안에서 잠들기(죽기) 전에 스데반 집사나 예수님처럼 기도하길 기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   본문,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 23:46)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순교( 7:60) 평행 구조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한 누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그리스도인의 가장 영광스럽고 궁극적인 죽음의 모델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헬라어 본문의 세밀한 대조를 통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잠들기(죽기) 전에 품어야 가지 핵심 영적 교훈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헬라어 문장 구조의 완벽한 데칼코마니: “ 말을 하고...”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 스데반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연장선이자 완벽한 모방(Imitation)임을 시각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일한 헬라어 문장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23:46): κα τοτο επν ξέπνευσεν (카이 투토 에이폰 엑셉네우센): “그리고 말씀을 하신 숨지시니라

 

스데반 집사( 7:60): κα τοτο επν κοιμήθη (카이 투토 에이폰 에코이메테): “그리고 말을 하고 자니라(잠드니라)”

 

[교훈 ①] 사명자의 죽음은 '마지막 ' 결정합니다.

 

사람 모두 날아오는 돌맹이와 거친 호흡의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고 비참하게 죽어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해야 본질적인 영적 선언을 명확하게 마친 , 마치 계획된 스케줄을 완수하듯 당당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와 성도들의 역시, 인생의 마지막 호흡이 다하는 순간에 세상의 미련이나 고통의 비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과 영혼의 선언을 명확히 입술로 고백하는 존엄한 사명자의 마무리가 되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2.      동사의 대조: ‘엑셉네우센(숨지다)’에코이메테(자니라)’

 

누가는 예수님의 죽음에는숨을 내쉬다, 영혼이 떠나다라는 뜻의 엑셉네우센(ξέπνευσεν) 썼지만, 스데반의 죽음에는잠들다라는 뜻의 에코이메테(κοιμήθη) 사용했습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구속사적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엑셉네우센(숨지심): 예수님은 죽음의 무게와 공포, 하나님의 저주를 날것 그대로 온몸으로 받아내시며 진짜사망(숨짐)’ 당하셨습니다.

 

성도의 에코이메테(잠듦): 예수님이 먼저 진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성도인 스데반은 죽음이 이상 파멸이 아니라다시 되었습니다.  돌에 맞아 피를 흘리는 처참한 현장이었지만, 누가는 그것을잠들었다 평온하게 묘사합니다.

 

[교훈 ②]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잠듦 소망

 

예수 안에서 죽는 모든 성도의 죽음은종말 아니라수면입니다.  밤새 피곤하게 일한 자녀가 부모의 품에서 평안히 잠들듯, 주님을 위해 사명을 다한 성도는 눈을 감는 순간 주님의 품에서 단잠을 자고, 반드시 부활의 아침에 깨어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죽음관이 심겨질 , 삶의 마지막 순간에 두려움 없이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을 있습니다.

 

3.      기도의 전수: 용서와 의탁의 DNA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기도의 원형은 스데반에게 그대로 복사되어 나타나며, 이는 교회가 이어받아야 용서와 의탁의 DNA’ 어떻게 전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로, ‘용서의 기도 전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박는 자들을 바라보시며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스데반 집사 역시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죽어가는 처참한 순간에도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그대로 재현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주여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7:60)라고 기도함으로써, 원수까지도 품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DNA 성령을 통해 제자의 삶에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둘째로, ‘의탁의 기도 전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직전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라며 자신의 가장 고귀한 영혼을 아버지께 주체적으로 넘겨드리셨습니다.

 

스데반 집사 역시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여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7:59)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드리셨던 완벽한 신뢰의 기도가, 스데반에게 이르러서는 예수 향한 신앙 고백과 의탁으로 이어지며 성도의 죽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영광스럽게 보여줍니다. 

 

결국,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터져 나온 사람의 기도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온전히 묵상하고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인생의 가장 다급하고 고통스러운 찰나에도 내면 깊이 축적되어 있던 예수의 DNA 기도로 터져 나올 있었던 것입니다.

 

[교훈 ③] 마지막 기도는 일상의 삶의 축적입니다.

 

스데반이 죽기 직전 예수님과 똑같은 기도를 드릴 있었던 이유는, 그가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온전히 묵상하고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죽음 직전의 다급한 순간에는 평소 내면 가득 있던 것이 터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눈을 감기 원한다면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원수를 용서하는 삶을 살고, 순간 나의 주권을 주님께 의탁하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일상이 의탁인 사람만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찰나에도 흔들림 없이 영혼을 주님께 맡길 있습니다.

 

요약이자 성도를 향한 축복:

 

성도들이 주님 앞에 가기 스데반처럼 기도하길 원한다면 우리 교회가 선포해야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진짜 죽으심 덕분에 우리의 죽음은 평안한 잠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날마다 삶의 자리에서 용서와 의탁의 삶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성도들은 인생의 황혼에서 "그리고 말을 마치고"라고 고백하며,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평안히 잠들게 것입니다(인터넷).

 

(5)   마지막 다섯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사람들의 반응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각자 자신에게 반영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번째 사람은 백부장으로서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δόξαζεν τν θεν λέγων· ντως νθρωπος οτος δίκαιος ν (에도크사젠 테온 레곤· 온토스 안트로포스 후토스 디카이오스 )](23:47)라고 말했습니다.  번째는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로서 그들은 일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습니다[θεωρήσαντες τ γενόμενα, τύπτοντες τ στήθη πέστρεφον (테오레산테스 게노메나, 팁톤테스 스테테 휘페스트레폰)](48).  번째는 예수를 아는 자들”[ο γνωστο ατ (호이 그노스토이 아우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멀리 서서 일을 보니라”[μακρόθεν σττες ρντες τατα (마크로텐 헤스토테스 호론테스 타우타)](49)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a)   십자가 아래 있던 부류의 사람들의 반응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영적 주소와 내면을 고스란히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헬라어 본문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가지 반응을 우리 각자의 삶에 깊이 반영해 있는 묵상 노트입니다(인터넷):

 

1.      백부장: ‘에도크사젠(δόξαζεν)’(“영광을 돌려”) 찬양과디카이오스(δίκαιος)’(“의인”) 선포

 

이방인이자 사형 집행관이었던 백부장은 초자연적인 징조와 예수님의 존엄한 죽음을 목격한 가장 먼저 반응합니다.

 

원어적 의미: 본문의영광을 돌려 해당하는 헬라어에도크사젠(δόξαζεν)’ 미완료 과거형 동사입니다.  이는 백부장이 감탄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충격을 받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고백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또한 그는 예수를디카이오스(δίκαιος: 의인)’라고 선포합니다.

 

스스로에게 반영하기: 가장 복음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이방인의 입에서 지속적인 찬양과 예수님의 무죄함에 대한 선포가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매일 십자가를 묵상할 백부장처럼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찬양(미완료 과거)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진정 삶의 유일한 의인이자 구원자로 세상 앞에 당당히 선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      구경하러 모인 무리: ‘팁톤테스(τύπτοντες)’(“치며”) 후회와 가슴

 

예수님을 조롱하고 구경하던 유대 무리는 해가 어두워지고 바위가 터지는 목격한 두려움과 심리적 타격을 받습니다.

 

원어적 의미: 무리들은팁톤테스 스테테(τύπτοντες τ στήθη)’, 자신들의 가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며 돌아갔습니다[휘페스트레폰(πέστρεφον)].  이는 자신들이 메시아를 죽였다는 뒤늦은 자책과 두려움, 그리고 통렬한 후회의 시각적 표현입니다.


스스로에게 반영하기: 무리들의 가슴 침은 일종의 영적 각성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슬퍼하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나는 주일 예배나 말씀 앞에서 죄에 대한 찔림으로 가슴을 치는 감정적 눈물은 흘리면서도, 정작 삶의 방향을 주님께로 돌이키지 못한 다시 나의 일상과 구습으로 그냥 돌아가 버리는구경꾼의 신앙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3.      아는 자들과 여인들: ‘마크로텐(μακρόθεν)’(“멀리”) 침묵과 멀리 있음

 

예수님과 친밀했던 제자들을 포함한아는 자들 신실하게 물질과 기도로 돕던갈릴리에서 여인들 차마 고통의 현장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원어적 의미: 성경은 그들이마크로텐 헤스토테스(μακρόθεν σττες)’, 멀리 서서 모든 일들을 바라보았다고 묘사합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 로마 군병들의 칼날이 두려워 심리적·물리적 거리를 두고 있는 제자들의 영적 무력함과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스스로에게 반영하기: 주님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 앞에서는멀리 서서(마크로텐)’ 구경하는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주님과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마크로텐(멀찍이)’ 신앙입니까?  주님의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는 가까이 가고 싶어 하면서도, 주님이 원하시는 고난의 자리, 헌신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에서는 슬그머니 발자국 물러나 멀리 서서 지켜보기만 하는 비겁함이 안에 있지는 않은지 가슴 깊이 반영해 보아야 합니다.

 

종합적인 자기 성찰:

 

십자가 아래의 풍경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처럼 십자가 앞에서 삶이 뒤바뀌어 주님을 지속해서 높이는예배자입니까?  말씀 앞에 가슴은 치지만 이내 삶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후회하는 구경꾼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고난과 책임 앞에서는 멀리 도망쳐 있는거리두기 제자입니까?

 

부류의 인간 군상을 묵상할 , 우리는 '멀리 있던' 발걸음을 옮겨 십자가 바로 아래로, 그리고 가슴만 치던 자리에서 진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거룩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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