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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교만” 비우기

4 장 : “ 교만 ” 비우기                 앞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비움이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나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 이 제부터는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하나씩 말씀 앞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   그 첫 번째가 ‘ 교만 ’ 입니다 .   비움은 내 안에 있는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   교만을 발견하면 교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 그 교만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   내 안에 있는 명예욕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 , 남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 ,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고집을 말씀의 빛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   그때 비로소 진정한 비움이 시작됩니다 .   인간의 타락한 본성 가운데 가장 뿌리 깊은 죄악 중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   교만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하고 ,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자리와 은혜를 감사하기보다 그것을 발판 삼아 스스로를 높이게 만듭니다 .   우리가 일터와 가정 ,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주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기대하고 , 내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분노하며 , 다른 사람의 허물은 크게 보면서 내 허물은 보지 못한다면 , 우리는 내 안에 교만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교만은 단순히 자존심이 강한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   하나님보다 나를 앞세우는 마음의 방향이며 ,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내가 차지하려는 죄의 태도입니다 .   그러므로 내 ...

4장: “교만” 비우기


4: “교만비우기

 

 

            앞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비움이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나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제부터는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하나씩 말씀 앞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교만입니다.

 

비움은 내 안에 있는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드러내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교만을 발견하면 교만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 교만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명예욕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남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고집을 말씀의 빛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비움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 가운데 가장 뿌리 깊은 죄악 중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하고,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자리와 은혜를 감사하기보다 그것을 발판 삼아 스스로를 높이게 만듭니다.

 

우리가 일터와 가정,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주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기대하고, 내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분노하며, 다른 사람의 허물은 크게 보면서 내 허물은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 안에 교만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만은 단순히 자존심이 강한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앞세우는 마음의 방향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내가 차지하려는 죄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의 교만을 말씀 앞에 드러내어 비워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사람을 섬긴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히 품은 종의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교만은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먼저 교만이 무엇인지 말씀 앞에서 분명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잠언 16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고 매우 엄중하게 말씀합니다.  교만은 단순히 사람 사이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신데 내가 주인처럼 행동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데 내가 이룬 것처럼 자랑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있는데 내 생각과 판단을 그 위에 세우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잠언 16 18절은 다시 이렇게 경고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은 언제나 사람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처음에는 성공과 명예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며 자신의 영혼까지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교만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에 지나치게 민감하지는 않은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가?  다른 사람이 나보다 인정받을 때 질투하지는 않는가?  내가 한 수고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하지는 않는가?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먼저 변명부터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면서 정작 나는 배우려 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마음이 불편해진다면, 바로 그 불편함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의 거울을 통해 내 안의 교만을 보여주시는 순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게 합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보다 낮은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43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며 자기 생각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분명한 말씀을 주셨지만, 그 말씀보다 자신들의 판단과 계산을 앞세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선지자 뒤에 다른 사람의 음모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이나 말씀에 근거한 권면이 내 생각과 다를 때, 그 내용을 말씀 앞에서 살피기도 전에 즉시 거부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욕심과 충돌할 때 말씀을 고치려 하거나, 말씀을 전한 사람의 동기를 의심하거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받아들이려 한다면 그것 역시 교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먼저 자신을 살핍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잘못 보고 있습니까?  “제가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제 안에서 무엇을 깨뜨리기 원하십니까?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말하지?  “저 말씀은 나와 맞지 않아.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이처럼 교만은 말씀을 자신에게 맞추지만, 겸손은 자신을 말씀에 맞춥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작게 여기게 합니다.

 

교만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6장에서 고라는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구별하여 성막에서 섬기게 하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상기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고라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미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그것을 작게 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교만은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당연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당연하게 여기고, 내가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당연하게 여기며,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바라보면서 “왜 나는 저 자리에 있지 못하는가?”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 순간 감사는 사라지고 비교와 불평이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비우는 길은 감사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주님, 제가 지금 가진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섬길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제가 가진 재능과 기회와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두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우리는 내 손에 쥔 것을 내 공로로 착각하지 않게 됩니다. 

 

교만은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교만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결국 공동체로 흘러나옵니다.  고라의 교만은 자기 혼자만의 불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습니다. 교만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면 사람을 편 가르고, 서로를 의심하게 하며, 지도자를 대적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평안을 깨뜨립니다. 

 

교만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은 쉽게 사람을 모읍니다. 자신의 불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도 의심을 심습니다.  결국 개인의 감정이 공동체의 갈등으로 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사람을 모으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감정을 관철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있는가?  “내가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편을 만들고 있는가?  “내가 진리를 세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인정받게 하려는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교만은 성공할 때 더욱 쉽게 드러납니다.

 

교만은 실패할 때보다 성공할 때 더 쉽게 드러납니다.  에스겔 28 17절은 두로의 교만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사람이 가진 아름다움과 지혜와 성공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이어지지 않고 자기 자랑으로 바뀌는 순간, 은혜가 교만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에스겔 28 5절 역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큰 지혜와 무역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물질과 성공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가 주셨는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신명기 8 17~18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라고 말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노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공부하고 준비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생명과 건강과 지혜와 기회를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공할수록 더 낮아져야 합니다.  많이 가졌다면 더 감사해야 하고, 더 많이 받았다면 더 많이 섬겨야 합니다.  성공이 나를 높이는 이유가 아니라, 더 낮아져 섬기게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웃시야는 강성해진 후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역대하 26장은 웃시야 왕의 실패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웃시야의 성공 뒤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강성해진 후 마음이 교만해졌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사람은 약할 때 하나님을 찾다가도 강해지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업이 잘될 때, 사역이 성장할 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줄 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길 때, 내가 가진 영향력이 커질 때,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내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올라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 일을 이루었다.  “이제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자기 능력으로 바꾸어 버리게 됩니다.  웃시야의 비극은 강성해진 것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강성해진 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은혜를 받은 후에도 교만해졌습니다.

역대하 32 24~25절은 히스기야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히스기야는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에 응답받았고,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경험한 후에도 마음이 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신앙의 경험이 많다고 해서 교만에서 자동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경험했으니 괜찮다.  “나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니 괜찮다.  “나는 많은 사역을 했으니 괜찮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자신을 높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 12절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영적으로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히려 넘어질 수 있는 순간입니다.

 

교만의 가장 깊은 곳에는 ‘자기의 의’가 있습니다.

 

교만은 물질과 성공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은밀한 형태의 교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의’입니다.  누가복음 10 29절에서 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질문한 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교만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습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  “나는 성경을 더 잘 압니다.  “나는 더 오래 믿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겉으로는 신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사실상 자신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금식과 십일조를 자신의 공로처럼 내세우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높이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의를 붙잡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붙잡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말씀은 우리의 교만을 발견하게 하는 거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교만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신명기 17 19~20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평생 읽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마음이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말씀을 읽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저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우리 교회에 저런 사람이 있는데.  “우리 가족 중에 저런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읽는다면 말씀을 읽고도 내 교만은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먼저 나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주님, 이 말씀에서 제가 보입니다.  “주님, 제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주님, 제 안에도 이런 교만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 앞에 설 때 비움이 시작됩니다.  교만을 비운다는 것은 내가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교만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 교만을 하나님 앞에 날마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만은 말싸움과 분쟁으로 나타납니다.

 

디모데전서 6 3~5절은 바른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교만과 변론과 언쟁,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을 연결합니다.  교만한 마음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필요한 논쟁에 집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은 사과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과하는 순간 내가 작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작아지는 길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패배가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옳게 판단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인정하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함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만은 죄를 죄로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 1~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심각한 죄가 있음에도 그들이 오히려 교만해져서 슬퍼하지 않았다고 책망합니다.  이 말씀은 교만의 또 다른 무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교만은 죄를 짓게 할 뿐 아니라 죄를 죄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변명합니다.  잘못했는데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책망을 들으면 회개하기보다 자신을 방어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집니다.  가장 두려운 상태는 죄를 짓고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다들 이 정도는 하지 않나?  “저 사람도 잘못했는데 왜 나만 그래?  이렇게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교만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비움의 사람은 자신의 죄를 발견했을 때 먼저 회개합니다.  변명보다 회개가 먼저이고, 남을 판단하기보다 자신을 살피는 것이 먼저이며,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울은 겸손에서 교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저는 교만의 문제를 묵상할 때마다 사울 왕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교만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상 15 17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처음의 사울은 자신을 작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힘을 얻으면서 그의 마음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겸손은 한 번 얻었다고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겸손했다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을 의지했다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사울의 첫 번째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앞의 상황을 더 크게 보았을 때 나타났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몰려오고 백성들이 흩어지자 사울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환경이 믿음을 압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던 눈이 상황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게 되었습니다.  교만은 바로 이렇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너무 급하니까 어쩔 수 없다.  “내가 판단해서 처리해야 한다.  “말씀대로 하면 손해를 본다.  “이번 한 번만 예외로 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보다 상황을 크게 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사울의 또 다른 모습은 사무엘상 15 12절에서 나타납니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교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내 능력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공을 내 이름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후에도 진심으로 회개하기보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라고 요청했습니다(30).  하나님보다 사람의 평가가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사람 앞에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교만을 비우는 길은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교만에서 어떻게 돌이킬 수 있습니까?  히스기야에게서 중요한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대하 32 2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히스기야도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고 뉘우쳤습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의 목표는 “나는 절대로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만을 발견했을 때 즉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교만했습니다.  “제가 제 이름을 높였습니다.  “제가 사람의 인정을 더 원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 능력으로 착각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음에도 변명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움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만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과 이웃을 높이는 삶입니다.

 

잠언 16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니라.  성경은 겸손을 단순히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높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나는 잘난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권리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을 대접보다 섬길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공동체의 평안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높아질 때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랑에는 교만이 머물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 4절은 사랑의 본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는 교만이 머물 수 없습니다.  교만은 “내가 높아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은 “당신이 잘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교만은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은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면 된다”고 말합니다.  교만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은 “내가 먼저 이해하고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낮추지만, 사랑은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합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자존심을 억누르거나 자신을 무조건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인정하고,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더 이상 내 의와 명예와 권리를 삶의 중심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가 인정받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섬기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만을 비운다는 것은 나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우기’의 본질입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그 교만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비추어 주시는 내 마음의 교만을 하나씩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며,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채워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끊임없이 “나를 높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를 높이라”고 말씀합니다.  교만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로 만족하게 합니다.  교만은 “내 권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때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마음을 비우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진리를 세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나는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을 드러내어 나의 의로움을 나타내려는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에서부터 교만을 비우는 일이 시작됩니다.  교만은 너무나 은밀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교만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교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정작 내 안에 있는 교만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비우는 첫걸음은 다른 사람의 교만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비추어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139:23).  내가 보지 못하는 교만까지도 주님께서 드러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교만은 특별히 거만한 사람에게만 있는 죄가 아니라, 나를 중심에 두려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직분이 높다고 해서 교만한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만 교만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도 교만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것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며 겸손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비운다는 것은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내 공로로 착각하지 않고, 내가 가진 지혜와 능력과 재물과 직분까지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공할 때에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실패할 때에도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칭찬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책망을 받을 때에는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에는 정죄하기보다 긍휼을 베풀고,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사랑으로 섬길 길을 찾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만을 비워낸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입니다.

 

교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내 안에서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내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내 권리보다 이웃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마음을 비워 주십시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워 주십시오.

내 이름을 높이고 싶은 마음을 비워 주십시오.

내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을 비워 주십시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으로 채워 주십시오.

 

이 기도가 우리의 삶이 될 때, 교만은 조금씩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종의 자리로 내려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교만' 비우기의 원리와 실천 지침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교만을 어떻게 비워 갈 수 있을까요?  교만은 한 번의 결단으로 사라지는 죄가 아니기에 날마다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교만 비우기의 원리와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교만을 발견할 때 즉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십시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마음의 교만함을 정직하게 뉘우쳐 여호와의 진노를 멈추었던 것처럼, 내 힘만으로 교만을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께서 내 교만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도록 구하십시오(대하 32:26).

 

2.     성공할수록 내 이름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일터와 사역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그것을 내 능력과 이름을 높이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사울처럼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기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인정하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삼상 15:12).

 

3.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와 사명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고라처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를 작게 여기며 더 높은 자리를 탐하지 마십시오. 교회와 일터에서 내가 맡은 자리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가르치려고만 하기보다 배우고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16:9).

 

4.     신앙생활을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근거로 삼지 마십시오.

 

금식과 십일조를 자신의 의로 삼아 다른 사람을 판단했던 바리새인의 태도를 경계하십시오. 자신의 신앙 경력이나 성경 지식, 봉사와 헌신을 자랑하기보다 세리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18:13).

 

5.     높아지는 자리보다 낮아져 섬기는 자리를 선택하십시오.

 

사람에게 인정받고 높아지는 자리를 좇기보다 겸손한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낮추십시오.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도 기꺼이 섬기십시오( 16:19).

 

그러나 이 모든 실천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교만을 비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내 힘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마저 또 다른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비우는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참된 비우기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려는 고행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말씀과 성령의 다스리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성령께서 우리 안의 교만을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도록 도우십니다( 17:19~20).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안의 교만을 보여 주시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게 하십시오.  제 힘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제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비우게 하십시오.’  교만 비우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그 은혜에 순종하여 날마다 자신을 낮추는 제자도의 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자신을 높이기보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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