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로 보내신 주님께서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심으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한복음
4:35-38).
(1)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신 내용의 말씀인
요한복음 4장
3-42절 말씀 중 다섯 번째 부분인 4장 35-38절 말씀만 묵상하고자 합니다. 저는 25-30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된
점은 “추수할 때”[ὁ θερισμός (호 데리스모스)](35절)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Ἔτι τετράμηνος ἐστιν καὶ ὁ θερισμὸς ἔρχεται (에티 테트라메노스 에스틴 카이 호
데리스모스 에르케타이)]고 말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ἐπάρατε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ὑμῶν καὶ θεάσασθε τὰς χώρας, ὅτι λευκαί εἰσιν πρὸς θερισμόν (에파라테 투스 옵탈무스 휘몬
카이 테아사스테 타스 코라스, 호티 류카이 에이신 프로스 데리스몬)](35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추수할 때”란 무엇이며 또한 그 때에 관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점의
차이와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a) 예수님이 말씀하신 ‘추수할 때’의 실체와, 제자들과 주님 사이에 격돌하는 관점의 차이가 오늘날 온 성도와 사명자들의 삶 위에
던지는 3가지 거룩한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제자들의 관점은 ‘크로노스’(χρόνος)(물리적 시간)에 갇혀 있고, 주님의 관점은 ‘카이로스’(καιρός)(영적 추수 때)로 임하십니다
제자들의 땅의 시선
(농경적 물리 시간): 제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의 자연계 법칙을 따라
"씨를 뿌린 후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χρόνος(크로노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아직 사마리아 땅이 영적으로 굳어 있고,
멸시와 증오의 장벽 때문에 열매를 맺으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하는 인간적 한계의 시선이었습니다(3:4,
9, 4:9).
주님의 하늘의 시선
(구속사적 주권 시간): 그러나 주님은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현재완료형태의 긴박한 구원 시간표[(καιρός(카이로스))를 선포하십니다. 35절의 *“밭을 보라[θεάσασθε(테아사스테)]”에 쓰인 원어는 단순히 슥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실체와 영광을 명확히 알아차려 경이롭게
응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시고(26절), 그 복음의 소리를 들은 여인이 세상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버려둔 채 동네로 뛰어가 “와서 보라” 외치자(4:28,
29, 빌 3:8), 마침내 사마리아 흰 옷을 입은 동네 무리 전체가 우물가를 향해
구름 떼처럼 몰려오고 있던 역동적인 영적 실상이 바로 주님이 선포하신 ‘이미 도래한 추수의 때[ὥρα(호라)]’입니다(요 4:6, 30).
2.
둘째
원리: 예수님이 말씀하신
“추수할 때”의 본질은 복음과 성령으로 영혼이 거듭나는 구원의 대부흥입니다(요4:35).
율법의 기다림을 폐하는 새 언약의 성취:
구약의 선지자들과 율법 시스템은 메시아가 오기까지 수백 년 동안 눈물로 씨를 뿌리며 기다려야만 했습니다(12절). 율법의 선생인
니고데모 체제는 46년 동안 지어 올린 가짜 건물 성전의 크기와 기득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전히 땅의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었습니다(2:20, 3:10, 4:1).
성령 세례의 즉각적인 수확:
그러나 만물 위에 계신 주님이 가져오신 새 언약의 복음은(3:31), 씨를 뿌림과
동시에 성령의 역사로 영혼들이 단숨에 거듭나 천국 안식으로 차오르게 만드는 ‘즉각적이고 한량없는 구원의 풍성함’입니다(1:33,
3:5, 34, 4:14). 예수의 십자가 대속과
독생자의 사랑(3:16)을 심령 한복판에 영접하는 바로 그 순간(14, 16절), 어둠 속에 갇혀 진노 아래 상시 머물던 영혼들이(19, 36절), 단숨에 정죄함을 폐하고 현재형의 생명과 완료형의 구원 기쁨 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신부(교회)로 추수되어 들어오게 됨을 확증하는 하늘의 대법칙입니다(3:29,
33, 엡 5:27, 요일 5:12).
3.
모든
성도와 사명자의 삶 위에 주는 교훈:
①
인간적인 조건과 숫자의 장벽을 버리고, 날마다 주님의 ‘보내신 뜻’에 전념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물 세례라는 실무 행정의 성과나 동네에서 먹을 양식을 사는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필요에만 온 마음의
주도권을 빼앗겨 서성거렸습니다(요 4:2, 8, 31, 33).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가짜 겉모습이나 계산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십니다(2:24-25).
온 성도는 일상의 현장에서
"사역 환경이 척박하다, 저 영혼은 가망이 없다"라며 내 목회적 경험의 시계(넉 달의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제약하려는 어둠의 교만을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버려야 합니다(2:15, 3:4, 9). 내 이름과 타이틀을 기쁘게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직 주님처럼 나를 가정과 일터와 교회로 보내신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하여 묵묵히 전진할 때(1:20,
3:17, 30, 34, 행 6:4), 주님은 우리가 그어놓은 모든 불가능의 장벽을
단숨에 부수어버리시고 영혼들이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기적의 추수 밭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요
4:4, 30, 로 8:14).
②
내 계산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버릴 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적 배부름이 임합니다.
제자들이 가짜 먹거리의 계산을 붙들고 웅성거리던 바로 그 틈새의 시간에(요 4:31, 33),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살려내어 온 동네의 구원 문을 열어젖히는 영혼 구원의 양식을 취하시느라 육체의 피로와 배고픔을 완벽하게 잊고
계셨습니다(6, 32, 34절).
성도는 세상의 물질,
평판(연회장의 자리), 일상의 얄팍한 요행에
목숨을 의탁하며 목말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최고의 고상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빌 3:8), 오늘 내 가슴에 안겨 있던 땅의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 자체에만 내 귀를 조율해야 마땅합니다.
내가 눈물로 무릎 꿇어 나를 녹여 다른 영혼을 살려내는
십자가의 순종을 온전히 이룰 때,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하늘의 거룩한
완료형의 기쁨과 충만함을 온 성도들의 심령 위에 날마다 폭포수처럼 상시 부어주실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
요한복음
4:35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제자들이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말한 육신의 시선과 대조하여(요4:35), 예수님께서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선포하신 신비는(35절),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계산해 보겠다며 두드리던 모든 땅의 패러다임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기 위함이며(2:15, 3:12), 나를 지우고 오직 위로부터 거저 주시는
100% 전적인 은혜와 선물 안에서 씨 뿌림과 동시에 영혼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세례의 즉각적인 대부흥을 확증하기
위함이니(1:33, 4:10, 14, 엡 2:8-9), 세상의 물질과
평판이라는 무거운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요
4:28, 빌 3:8), 내 중심과 사명을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에
온전히 복종시키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요 2:19, 4:26, 로 8:14), 음부의 권세를 영원히 폐하시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자 흠 없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현재 영생으로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12) (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ὁ θερίζων μισθὸν λαμβάνει καὶ συνάγει καρπὸν εἰς ζωὴν αἰώνιον (호 데리존 미스돈 람바네이 카이 쉬나게이
카르폰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요4:36)란 말씀과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ἐγὼ ἀπέστειλα ὑμᾶς θερίζειν ὃ οὐχ ὑμεῖς κεκοπιάκατε (에고 아페스테일라 휘마스
데리제인 호 우크 휘메이스 케코피아카테)](38절)란 말씀과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두 말씀 다 ‘거두다’[θερίζω (데리조)]라는 단어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특히 저는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는 모으”는 “거두는 자”와 예수님께서 그 거두는 자(들)을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로 보내셨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 구체적으로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a) 이 두 구절(36, 38절)의 결합은 사명자가 누리는 보상의 본질과, 구원 사역 이면에 흐르는 ‘100%
전적인 은혜의 주권’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로나 서열을 완전히 깨뜨려 버리는 이 장엄한 추수의 법칙이 오늘날 승리장로교회 모든 성도님과 주님의
사명자들이 삶의 현장(가정, 일터, 교회) 속에서 누려야 할 3가지 구체적인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사명자가 받는 ‘삯[μισθὸν(미스돈)]’은 세상의 보상이 아니라, 이미 영혼 속에 심겨진 완료형의 안식과 기쁨입니다(36절).
원어적 신비
[μισθὸν (미스돈)]
➔ “사역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늘의 품삯”: 주님은 거두는 자가 장차 미래에 무언가를 받을 것이라 하지 않으시고, “이미 삯도 받고[μισθὸν λαμβάνει, 미스돈 람바네이]”라고 현재형으로 선포하십니다(36절). 이는 성도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얻는 진짜 보상이 세상의 물질,
사역의 규모, 사람들의 칭찬과 같은 땅의 결과물이 아님을 뜻합니다.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돌볼 때 얻는 최고의 품삯은, 평생 남편 다섯의 수치와
인생의 갈증 속에 말라 죽어가던 한 영혼이 참빛이신 예수를 대면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그 현장 한복판에
내가 참된 신랑의 친구(징검다리)로 쓰임 받고 있다는 영광 그 자체’입니다(3:29,
4:36).
신랑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내 영혼 속에 천국의 안식이 단번에 가득 차올라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현재완료형으로
완벽하게 충만하다”라고 고백하는 진짜 사명자의 자족함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시 부어주시는 가장 눈부신 영적 삯입니다(3:29, 30).
2.
둘째
원리: 성도의 추수는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터 위에 거저 들어가는 ‘100%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4:38).
원어적 신비 ➔ 아페스테일라 [ἀπέστειλα] ➔ 우크 케코피아카테 [οὐχ
ὑμεῖς κεκοπιάκατε]: 38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거두러 보내었노니[ἀπέστειλα,
(아페스테일라)]”라고 권위의 과거형 단어를 쓰시며,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노력하지 아니하였다”라고 준엄하게
못 박으십니다.
여기서 ‘노력하다’의 원형인 ‘코피아오(κοπιάω)’는 바로
앞서 6절에서 예수님이 먼지 나는 광야 길을 한낮 정오까지 걸어오시며 육체적으로 완전히 탈진하여 주저앉으셨을
때[κεκοπιακώς (케코피아코스)] 쓰인 단어와 완벽하게 동일한
어원입니다(4:6, 38).
성경적 원리:
사마리아의 굳어 있던 밭이 희어져 대부흥의 추수를 맞이하게 된 진짜 배경에는, 제자들이
흘린 땀방울이 단 1%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오직 창세 전부터 영혼 구원의 시간표를 품고 이 땅에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1:14, 4:4), 가장 뜨거운 뙤약볕 아래 스스로 지치고 목마른 자가 되사
여인의 수치를 온몸으로 받아내 주시고 수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겨운 성육신적 비하와 자기희생[κεκοπιακώς (케코피아코스)]’이 심어놓은 완벽한 기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4:6, 7).
나아가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모세 등)가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며 눈물로 씨를 뿌렸던 기도의 터전 위에, 제자들은 그저 숟가락만 얹듯 기쁘게 거두러 들어갔을 뿐입니다(25절).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46년짜리 건물 체제의 공력으로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2:20, 3:4, 9), 이미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세 번째 유월절 날 “다 이루었다” 하신 그 선신하고 완전한 구원의 성취를 거저 선물로 받아 누리는 전적인 은혜임을 가르쳐 줍니다(19:30,
엡 2:8-9).
3.
셋째
원리: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천국 잔치의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요4:36 하반절).
중립 지대와 교세 경쟁의 타파:
유대교의 바리새인 체제와 세상 가치관은 언제나 "누가 더 많은 제자를 삼았는가,
누구의 교세와 지분(물 세례의 크기)이 더
큰가"를 따지며 끊임없이 서열을 매기고 경쟁하며 정쟁의 울타리를 칩니다(3:26,
4:1-2).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그러나 주님이 설계하신 하늘의 추수 파트너십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χαιρῃ, 카이레]” 거룩한 사귐이자 한 몸의 연합입니다(4:36). 내가 눈물로 씨를 뿌렸는데 당장 눈앞에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낙심할 필요가 없으며, 내가 심지 않은 밭에서 엄청난 영혼의 추수가 일어나도 내 능력을 자랑하며 교만을 부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나를 가정과 일터와 승리장로교회로 보내신 주님의 신실하신 시간표를 신뢰하며(3:17, 34), 내 이름표와 목사,
성도라는 직분의 타이틀을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헐어버리고, 골방의 기도와 생생한
말씀만을 아귀까지 가득 채워 공급할 때, 이미 내 안에 현재형의 생명과 완료형의 구원 안식으로 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단번에 가득 배부른 자가 되어, 주님이 일하시는 그 거룩한 추수의 마당 한복판에서
다 함께 춤추며 천국의 축제를 누리게 마땅합니다(2:10, 4:14, 29).
요한복음
4:36, 38 "거두는 자의 품삯과 은혜의 추수"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예수님께서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신다 선포하시고(4:36), 내가 너희를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냈노라 못 박으신 신비는(38절),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지분과 서열을 계산해 보겠다며 두드리던 모든 땅의 패러다임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기
위함이며,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친히 탈진하여 주저앉으셨던 주님의 완전하신 성육신적 비하와 자기희생의 터 위에(6절), 오직 위로부터 거저 주시는 100% 전적인 은혜와
선물 안에서 교회가 거저 추수의 영광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니(10절, 엡 2:8-9), 세상의 물질과 평판이라는 무거운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요 4:28, 빌
3:8), 내 중심과 사명을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에 온전히 복종시키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
음부의 권세를 영원히 폐하시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자 흠 없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실시간
현재 영생으로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마 16:18, 엡
5:27, 요일 5:12)(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ἐν γὰρ τούτῳ ὁ λόγος ἐστὶν ἀληθινὸς ὅτι Ἄλλος ἐστὶν ὁ σπείρων καὶ ἄλλος ὁ θερίζων (엔 가르 투토 호 로고스 에스틴
알레디노스 호티 알로스 에스틴 호 스페이론 카이 알로스 호 데리존)](요4:38)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 고린도전서 3장 6-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인 하나님뿐이니라”[ἐγὼ ἐφύτευσα, Ἀπολλῶς ἐπότισεν, ἀλλὰ ὁ θεὸς ηὔξανεν· ὥστε οὔτε ὁ φυτεύων ἐστίν τι οὔτε ὁ ποτίζων, ἀλλ’ ὁ αὐξάνων θεός (에고 에퓌튜사,
아폴로스 에포티센, 알라 호 데오스 에욱사넨; 호스테 우테 호 퓌튜온 에스틴 티 우테 호 포티존, 알 호 아욱사논 데오스)]. 이 말씀을 제 자신에게 비추게 하시사 저로하여금 쓰게 하신
글입니다: “주님의 몸된 승리장로교회의 제일 큰 문제는 저입니다. 저의
큰 문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은 모든 것(Everything)이 되시고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nothing)
제 자신이 뭔가가 되었다(something)는 착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의 큰 문제는 저에게는 하나님의 은혜 의식과 예수님의 겸손과 하나님의 지혜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의 큰 문제는 거짓된 믿음(가식적인 믿음, 진실하지 못한 믿음)과 거룩하지 못한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과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큰 문제는 세속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머리로는
제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회개할 능력조차 하나도 없습니다.
1987년 5월, 승리장로교회 대학부 수련회
때 성령님께서 흘리게 하신 회개의 눈물이 그립습니다.” 저의 질문은 오늘 본문 요한복음 4장 37절과 고린도전서
3장 6-7절과의 연관성과 저에게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무엇일까
입니다.
(a) 이 두 본문(요4:38 & 고전3:6-7)의 정교한 연관성과, 이 시대 모든 성도와
사명자들이 삶의 현장(가정, 일터, 교회) 속에서 심장에 새겨야 할 3가지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유약한 죄인(Nothing)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자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온갖 피로와 고초를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은혜를
100% 전적인 선물로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속사적 연관성:
주님은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두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노력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셨고(요 4:37-38), 바울
사도는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못 박았습니다(고전 3:7). 이 두
말씀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은 “구원과 부흥의 사역 한복판에 인간의 공로나 서열, 지분은 단
1%도 섞여 있지 않다”라는 은혜의 주권입니다.
사마리아의 메마른 밭이 변하여 구원의 큰 결실을 보게 된 진짜 배경에는, 제자들이 흘린 땀방울이 단 1%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한낮 정오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 온몸이 피곤해 지치실 때까지 묵묵히 걸어와 기다려 주신 주님의 전적인 사랑과 희생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요 4:6, 38).
모든 성도의 실제 삶에의 적용:
신앙생활의 가장 큰 비극은 내가 주님을 위해 무언가 대단한 씨를 심었고 물을 주었다고 착각하는 바리새인적 ‘의식(Something)’에 사로잡힐 때 찾아옵니다. 내 힘과 내 직분의 연륜, 내 지식을 전적으로 신뢰하려던 모든 교만의 상(Table)을 주님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주 앞에서 철저하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하고 유약한 죄인입니다(Nothing)”라고 고백하며,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구원을 단번에 다 이루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Everything)만을 100% 전적인 선물로 받아 누려야
마땅합니다(요 1:20, 4:10, 19:30, 엡
2:8-9).
2.
둘째
원리: 회개할 능력조차 없는
나의 철저한 파산 선언 위에, 성령의 ‘한량없는 생수’가 무한히 작동하기 시작합니다(요 3:34, 4:14).
구속사적 연관성:
머리로는 회개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나에겐 회개할 능력조차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며 성령님이 흘리게 하셨던 그 순전한 회개의
눈물을 그리워하는 상태는 신앙의 낙심이 아니라, 내 자아의 마지막 자존심의 껍데기까지 완벽하게 헐어버리는
진짜 성령의 정화 역사의 거룩한 증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 다섯의 수치와 인생의 밑바닥에서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며
땅의 이기적인 요행만을 구하며 코드가 맞지 않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을 때에도(4:15),
그녀에게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나 회개할 자격은 단 1%도 없었습니다(3:4,
9].
모든 성도의 실제 삶에의 적용:
참빛이신 주님은 바로 그 철저한 영적 소경 상태의 인간을 고발하시면서도(1:9, 3:19-20), 정죄나 심판의 채찍을 휘두르지 않으시고(3:17, 4:1), 오히려 “네 말이 참되도다”라며
그녀의 파산된 중심을 은혜의 도장으로 받아 안아주셨습니다(요 4:17, 18, 3:33). 성도는 내 가식적이고 연약한 믿음을 내 의지로 뜯어고쳐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자들이 아닙니다. 내 무능력을
주님 발 앞에 온전히 자복하며 엎드리는 그 틈새의 순간(4:31), 주님은 저울이나 자로 재서 제한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쏟아부어 주시는 성령 세례의 한량없는 생수를 통해(1:33, 3:34, 4:14), 우리 영혼의 마음 지성소를 근본적으로 다시 낳아주시고 새롭게 재창조해 내십니다(1:13, 2:19, 21, 3:5).
흘렸던 그 순전한 회개의 눈물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오늘 이 낮아진 심령 지성소 속에서 성령의 바람을 타고 실시간으로 다시 흐르고 있는 마르지 않는 영생의 샘물입니다(3:8,
4:14).
3.
셋째
원리: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χαιρῃ (카이레)]’
완료형의 천국 잔치를 누려야 합니다(요 4:36).
구속사적 연관성:
바리새인적 시기 질투에 눈이 멀어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라며 교단과
기득권의 울타리를 치고 교세 경쟁을 벌이던 자들을 향해, 바울은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고전 3:7). 그리고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하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연합과 신실한 언약의 성취 법칙을 선포하셨습니다(요
4:37).
모든 성도의 실제 삶에의 적용:
우리가 가정과 일터와 주님의 몸 된 교회 속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 내 가식적인
겉모습이나 세속화된 환경의 장벽에 내 마음을 의탁하며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세 번째 유월절 날 우리의 모든
거짓됨과 저주를 끊어내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는 신실하신 구원의 승리를 완벽하게 완성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요 19:30, 요일 5:12).
내 이름표와 직분의 자랑 지분을 기쁘게 배설물로 내던져버리고(요 4:28, 빌 3:8), 오직 내 안에 참빛으로 거하시는 아들 예수를 소유한 현재형의 생명 상태를 누릴
때(요 3:36, 요일 5:12), 성도는 사람들의 평판에 구걸하지 않고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 자체에 귀를 조율하며 단번에 가득 배부른 완전한 완료형의 기쁨을
상시 소유하게 됩니다(2:9, 3:29, 4:32). 내가 아무것도 아님(Nothing)을 자복하는 그 웅장한 가난함 위에,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함[πλήρωμα(플레로마),
Everything]이 성도들의 삶 속에 파도처럼 밀려와 음부의 권세를 완벽하게 깨부수고 온 교회를 흠 없고 영광스러운
신부로 날마다 찬란하게 단장시켜 가실 줄 확실히 믿고 확신합니다(요 1:16, 마 16:18, 엡 5:27).
요한복음
4:37과 고전 3:6-7 "철저한 자아 파산과 은혜의 연합"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신 주님의 선언과(요4:37),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 선포하신 신비는(고전 3:7), 인간이 주님의 몸 된 교회 앞에서 스스로 무언가가 되었다(Something)
착각하던 모든 땅의 패러다임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기 위함이며(요 2:15, 3:12), 사마리아 우물가에 친히 탈진하여 주저앉으셨던 주님의 완전하신 성육신적
비하와 자기희생의 터 위에(4:6), 회개할 능력조차 없는 인간의 철저한 파산(Nothing)을 고백하는 정직한 자복을 통해서만 위로부터 100%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인 성령
세례의 즉각적인 수확이 일어남을 확증하기 위함이니(1:33, 3:34, 4:10, 14절, 엡 2:8-9), 세상의 물질과 직분의 평판이라는 무거운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요 4:28, 빌
3:8), 내 중심과 연약함을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에 온전히 복종시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요 2:19, 4:26, 36, 로
8:14), 음부의 권세를 영원히 폐하시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자 흠 없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실시간
현재 영생으로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인터넷).
(4) 마지막 넷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ἄλλοι κεκοπιάκασιν, καὶ ὑμεῖς εἰς τὸν κόπον αὐτῶν εἰσεληλύθατε (알로이 케코피아카신,
카이 휘메이스 에이스 톤 코폰 아우톤 에이셀렐뤼다테)](요4:38)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a) 이 말씀은 구원의 모든 터전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세워져 있음을 밝히는 기독론적 마침표입니다. 주님이 선언하신 ‘노력한 다른 사람들’의 실체와,
성도가 그 수고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3가지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
삶의 적용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첫째
원리: ‘노력한 다른 이들’의 실체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38절).
구약의 씨 뿌림과 주님의 탈진:
여기서 ‘노력하다’의 원형인 ‘코피아오[κοπιάω
(탈진하다)]’는 앞서 6절에서 예수님이 뜨거운
정오 뙤약볕 길을 걸어오시며 육체적으로 완전히 주저앉으셨을 때[κεκοπιακώς (케코피아코스)]
쓰인 단어와 정확히 같습니다(6, 38절).
사마리아의 밭이 희어져 대부흥의 추수를 맞이하게 된 진짜 배경에는, 모세오경을 통해 메시아의 오심을 눈물로 예언하고
씨를 뿌렸던 구약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척박한 사마리아 땅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찾아오셔서 한 여인의 수치와
아픔(남편 다섯의 상처)을 완벽하게 다 아시고 감찰하사,
온몸을 녹여내며 수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희생과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14,
4:6, 18).
2.
둘째
원리: ‘참여하였다[εἰσεληλύθατε (에이셀렐뤼다테)]’는 것은 내 공로를 지우고 주님의 성취에 ‘거저 들어감’을 뜻합니다(4:38).
현재완료형태의 진입 ➔ 에이셀렐뤼다테 [εἰσεληλύθατε]: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그들의 수고와 노력 속에 ‘이미 진입하여 들어가 있다[εἰσεληλύθατε (에이셀렐뤼다테)]’라고 현재완료형으로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38절). 이는 제자들이 어떤 자격이나 공로를 세워서 추수의 기쁨을 쟁취해
낸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우리가 교회를 섬기거나 일상을 살아가며 전도할 때, 자꾸
"내가 이만큼 노력했고, 내가 이 교회를 이만큼 세웠다"라며 스스로 무언가가 되었다고 착각하는 바리새인적 영성(Something)의 울타리를 십자가
앞에 기쁘게 완전히 뒤엎어버려야 합니다(2:15, 20, 3:10, 4:1, 고전 3:7). 성도의 진짜 고백은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무익한
종입니다(Nothing)”라고 내 파산된 중심을 투명하게 자복하는 것입니다(요 1:20, 3:21). 우리의 모든 삶과 구원의 결실은, 오직 예수님이 세 번째 유월절 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해 주신 그 완전하신 대속의 약속 위에 거저 들어가 누리는 100%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4:10,
19:30, 엡 2:8-9).
3.
셋째
원리: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의 ‘서열’을 폐하고, 오직 주님만 높이는 천국 잔치를 누려야 합니다(요4:36).
교세 경쟁과 기득권의 타파:
세상 가치관과 유대교 바리새인 체제는 언제나 "누가 더 많이 세례를 베풀었는가,
누가 더 사역의 성과를 냈는가"를 따지며 끊임없이 교세 경쟁을 벌이고 주도권
싸움의 울타리를 칩니다.
모든 성도의 삶에의 적용:
그러나 주님이 완성하신 새 언약의 추수 법칙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3장
7절에서 외쳤듯이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하신 주권의
법도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내가 눈물로
씨를 뿌렸는데 당장 눈앞에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서운해할 필요가 없으며, 내가 노력하지 않은 밭에서 엄청난
영혼의 결실을 거두어도 내 지혜를 자랑하며 교만을 부릴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나를 가정과 일터와 승리장로교회로 보내신 주님의 신실하신 시간표만을 신뢰하며, 내 이름표를 기쁘게 완전히 헐어버리고,
오직 신랑 예수님의 목소리 자체에만 내 온 삶의 귀를 조율해야 합니다. 나를 지우고 주님의 온전하신 성취만을 의지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평판에 목마르지 않고, 주님이 부어주시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하늘의
진짜 양식과 완료형의 기쁨을 삶의 한복판에서 상시 충만하게 누리게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4:38 "타인의 수고와 참여함의 은혜" 주석적 최종 마침표 요약: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선포하신 신비는(요4:38),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지분과 서열을 계산해 보겠다며 두드리던 모든 땅의 패러다임의 상(Table)을 완전히 뒤엎기 위함이며, 사마리아 우물가에 친히 탈진하여 주저앉으셨던 주님의 완전하신 성육신적
비하와 대속적 수고의 터 위에, 회개할 능력조차 없는 인간의 철저한 파산(Nothing)을 고백하는 정직한 자복을 통해서만 위로부터 100%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인 성령
세례의 즉각적인 수확이 일어남을 확증하기 위함이니, 세상의 물질과 직분의 평판이라는 무거운 물동이를 배설물로
기쁘게 내던져버리고 오직 진리를 따라 빛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 내 중심과 연약함을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에 온전히 복종시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승리장로교회와 온 성도들에게는, 음부의 권세를 영원히 폐하시고 거룩한 성령의 전[나오스]이자 흠 없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부(교회)로 단단히
단장시켜 가시는 새 언약의 완전한 주권적 승리를 완료형의 기쁨 속에 실시간 현재 영생으로 상시 누리게 함을 가르쳐 줍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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