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
[골로새서 1장 1-8절]
새해 2022년을 맞이하여 우리 승리장로교회의 목표는
더욱더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표어 성경 말씀은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중심으로 우리는 1월 2일 주일 신년 예배 때 “내 증인이 되리라”는 제목 아래 5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알아가야 합니다(호6:3; 빌3:8),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롬10:17),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빌1:27), (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입술로도 전해야 합니다(행16:10), (5)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 안에서 및 교회 밖에 직장이나 사회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이웃과 함께하는 동안 그 이웃에게 선한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20:24).
그리고 우리는 1월 8일 토요새벽기도회 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제목 아래 4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행13:38-39), (2)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43절), (3)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언제나 믿음에서 살라고 격려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4:21-22,
현대인의 성경), (4)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다가 죽습니다(13:36,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1월 15일 토요새벽기도회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란 제목 아래 2가지 교훈인 (1) 우리는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사람과 팀 사역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과
(2)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중 한 가지인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4가지 하위 교훈 중 2가지만
생각했었습니다: (1)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 선교 사역에 있어서 성령님께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사역지를 막으시고 또 허락지 않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에는 분명히 열어주시는
길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성령님의 막으심과 여심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바른 인도하심을 따르기 위한 성령 충만함과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참고: 행16:6-10, 현대인의 성경), (2)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과 그 일행이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썼을 때에도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6-7절).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그 날 밤
바울이 환상을 보았는데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습니다(8-9절, 현대인의 선경). 바울이 그 환상을 본 후에 그 일행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이성으로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판단”(현대인의 성경)]하고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습니다(10절). 이렇게 성령님께서는
바울과 그 일행을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지만 유럽 선교를 위해 마게도냐로 인도하셨습니다[나머지
2가지 교훈은 (3) 우리는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복음 전도 선교 사역의 열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4) 복음 전파자는 기도하는 사람이요,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만남을 주십니다].
오늘 비록 골로새서 말씀 묵상을 시작 못했지만 새해 2022년 1월 2일 신년 예배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말씀과 1월 8일 토요새벽기도회 때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1:8; 13:22)이라는 말씀과 1월 15일 토요새벽기도회 때 주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16:1-34)이란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할 때 결론적인 교훈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1:8)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므로(16:1-34)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세워주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 골로새서 1장 1절 말씀을 보면 누가 이 골로새서
편지를 쓰고 있는지 저자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저자는 바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입니다(1절).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는 이 부분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사도행전 9장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9장에 주님께서는 사울(바울)을 “회심”(conversion)시키시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명”(commission)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도록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시사 예수님의 이름(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골1:1)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도 아니었기에 그 교회 성도들에게는 바울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unknown
to the Colossians)(KJV 성경주석).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주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으므로 다른 12 사도들과 동등함을 알리기 위해 골로새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1절)(KJV
성경주석).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골로새서 편지의 수신자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 골로새서 편지의 수신자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좀 잠깐이라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첫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성도들”이란 단어입니다.
“성도들”이란
거듭난 신자들로서 원어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는 ‘분리된 사람들’(separated
ones)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성도들”이란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성도들이란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분리)시킨 사람들입니다(The
saints are separated to God, separated by God, and separated from the
world). 달리 설명하자면, 성도들이란 하나님의 목적(God’s purpose)과
하나님의 일(God’s service)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입니다(KJV
성경 주석). 성경을 보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자들이요(시31:23), 예수님의 증인들이요(계17:6),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는 자들이요(시30:4), 기도하는 자들이요(계5:8), “옳은 행실”을 하는 자들이요(계19:8),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요(계14:12),
영광중에 즐거워하는 자들(시149:5)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다운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성장하여 성숙한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성도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누가 육신에 속한 성도들입니까?
(a)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어린 아이들’과 같아서 잘 속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영적으로 미성숙한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어린 아치처럼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엡4:14). 그리고
그들은 이런저런 잘못된 교훈, 잘못된 가르침에 귀가 솔깃하여 마음의 믿음이 쉽게 흔들립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영적으로 온전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연약하여 쉽게 유혹 당하고 쉽게 흔들립니다. 결국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잘 속아 넘어가 세상의 간사한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b)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젖’을 먹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영적으로 갓난아기인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바로 밥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젖을 먹어야 합니다. ‘젖’이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기본 교리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인 교훈(the
elementary teachings about Christ)’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6:1, 현대인의 성경).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초보자들로서(5:12)
기본 교리는 알고 있지만 더 깊은(더 차원 높은) 교리는 듣는 것이 둔하여(11절)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결과 깊은 영적 분별력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단과 이
죄악 된 세상이 유혹할 때 선과 악을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하여 그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c)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시기와 분쟁으로 교회의 연합을 깨는
자들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육신에 속한 자들이란 불신자라는 뜻이 아니라 부패한 성질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자란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서(3절)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natural
man)의 성품을 따라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기보다 아직도
예수님을 믿기 전처럼 옛 사람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 가운데 불신자와 너무나 비슷하게 살아가는 육신에 속한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살기보다 옛 죄악 된 습관대로 육체의 일을 추구하면서 세상과 짝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교회 밖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육체의 일을 생각하고 육체의 일을 좇으면서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육신에 속한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신령한 공동체가 되기보다 점점
더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불신자들의 공동체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신실한 형제들”이란 단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읽거나 인터넷에서 도전 받은 기사 글 내용들이 있으면 제 개인 블로그나 페이스 북 등에다가 적는 습관이 있습니다.
제 신앙생활에 유익합니다.
지지난 주에도 한 3개의 도전 글들이 있어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a)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마티 루터).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말씀 묵상의
글을 써서 나눌 때에 말씀의 능력과 말씀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쓰고 나눠야겠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b) ‘이혼은 관계, 상황 및 위치를 변경하지만 마음은 변경하지
않습니다. 이혼을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관계에서 동일한 문제를 반복합니다. 변경해야 할 한 가지는 변경되지 않은 채로 있기 때문입니다’(Paul David Tripp).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의 변화가 관계나, 상황이나 위치를 변경하는 것보다 우선이 돼야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c) ‘위대함(greatness)을 달성하거나 특별해지는(being
special) 목표는 신실함(faithfulness)과 자족(contentment)의 목표로 대체(replace)되어야 합니다’(Brad
Hambrick).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비록
우리의 본능은 위대해지는 것이요 또한 특별해 지는 것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신실함과 자족의 비결을 우리가 배우는 것이라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자족의 비결’을 생각할 때 빌립보서
4:11-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리고 저는 ‘신실함’을 생각할 때 디모데후서 2장
13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신실성이 없지만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셔서 약속하신 것을 어기실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말씀했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즉, “신실한 형제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신실하게 믿는 형제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실한 형제들”이란 (1) 믿음이 충만한 자들이요(full of
faith), (2) 신뢰하는 사람들(trustful)이요, 또한 신뢰할 만한 사람들(trustworthy)로서 (3)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loyal to Christ)입니다(KJV 성경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은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서(계1:5)
흠 없이 정직하게 주님을 따르며(시101:6, 현대인의 성경),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하며(눅16:10),
죽도록 충성하여(계2:10) 주님 앞에서 설
때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는 주님의
칭찬(눅19:17)과 더불어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사람들입니다(계2:10).
골로새서 편지를 쓴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된 자입니다(골1:1). 그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이 골로새서 편지를 썼습니다(2절). 여기서 “성도들”이란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요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믿음이 충만한 자들이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보시기에 성도다운 성도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 자매들이 되어서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요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는
주님의 칭찬(눅19:17)과 더불어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계2:10).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에베소서 2장8-9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바로 로마서 6장 23절,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자격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먼저 사랑해주셔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범사에, 평생에 또한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자신을 뒤돌아 볼 때 저는 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고 있을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아가지 못할 때가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정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면 구원 받은 자답게,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답게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제 "이웃을 네(제) 자신 같이 사랑하"해야 하는데(마22:37, 39)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살아가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사도 요한의 요한일서 말씀으로 재해석해서 제 자신에게 반영한다면 저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히려 세상을 미워해야 하는데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눈의 욕심)과 삶에 대한 자랑(요일
2:15-17)을 은근히 마음속으로라도 사랑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 중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말씀을 ‘형제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요일2:3-11)고 재해석을 했는데 저는 마음속으로라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죄를 범할 때가 있기에 저는 하나님의 구원(영생)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또 한 가지,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내
육체의 가시보다 하나님의 족한 은혜에 초점을 맞추자”는 저의 짧은 말씀 묵상 글(2019. 6. 21.)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길 그리도 수없이 수년 동안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내
육체의 가시"가 그리도 없어지길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허락하신 목적은 나로 하여금 너무나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그 육체의 가시가 내게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더 자만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이제부터 내 육체의 가시가 아니라 내 육체의 가시 가운데
내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족한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겸손히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누리고자 한다. 누리되 나는 나의 연약함을 나눌 뿐만 아니라 자랑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더 경험하고 싶다. 고린도후서
12장 7-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행13:43). 그리고
우리는 은혜 의식이 강해야 합니다(공로 의식을 배척해야 함).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의식이 강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10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맨 나중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내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마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내게 주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내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더 많이 주님의 일(수고)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우리의 고백은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여야 합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골로새서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인사(greeting)하는 말로서 사도 바울의 13개 편지들 중 11개 편지들을
보면 이러한 비슷한 인사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고전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후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엡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1: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딤전1: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딤후1: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딛1:4) “…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몬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서 저는
2가지 흥미로운 점을 좀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첫 번째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의 11개 편지들의 인사의 말씀을 보면 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디모데후서만 ‘은혜와 평강’이란 인사 외에 “긍휼”이란 단어가 추가돼 있음)입니다. 여기서 “은혜”(grace)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이해를 제일 분명하게 표현하는 신학적인 개념(a central
theological concept)입니다(WBC 주석)[(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한 “은혜”라는 단어는 바울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고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른 복음”은
율법의 행위(인간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강조했음(2:16)](WBC
주석).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렇게 구원이란 “은혜”는 로마서 6장 23절 현대인의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거주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인사말이 무엇입니까?
주로 “안녕하세요”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의 인사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인터넷)
일본: “곤니찌와”(‘오늘은?’이란 뜻으로 낮에 하는 인사말이라고 함)
중국: “니하오마”(‘당신 좋으십니까? 안녕하십니까?’라는 뜻)
스페인: “올라!”(친한 사이와 만났을 때 쓰는 인사라고 함)
독일: “할로”(영어의 ‘헬로’와 같다고 함)
프랑스: “봉주르”(‘좋은 날’이라는 뜻) 등등 …
이스라엘: “샬롬”(‘평안’이라는 뜻임).
저는 여태까지 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말인 “샬롬”을
그저 “평안” 또는 ‘평강’ 또는 ‘평화’란 뜻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연세대대학원장(구약학) 박준서 교수님의 인터넷 글을 통해 “샬롬”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좋은 뜻을 가득 담고
있다는 것을 좀 알게 되었습니다(인터넷). 본래 히브리어 "샬롬"의 어원적 의미는 "완전하다,
온전하다, 꽉 찼다"(be sound, complete,
full)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샬롬”이란 흠이 있거나, 깨어져 손상되거나,
모자라고 부족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가운데 온전하고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뜻에서 이 말이 사용되는 여러 가지 경우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몸, 신체와 관련해 샬롬이 사용되었을 때 이 말은 조화를 이룬 온전한 신체적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즉 건강이라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심리적인
측면에서 이 말은 평안이라는 뜻도 된다고 합니다. 샬롬은 농사와 관련해서도 사용된다고도 합니다.
농작물을 추수하는 샬롬의 추수라고 말하면 그것은 온전한 추수, 즉 풍작의
추수를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풍작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물질적인”풍요” 또는 “풍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전쟁과 관련해 이 말이 사용되는 경우에는 승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전투를 마치고 샬롬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말은 승리의 귀향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관계를
표현하는데 쓰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샬롬이 있다든가, 혹은 샬롬의 관계라고 말할 때 사랑과 우애가 넘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사회공동체와 관련해 사용될 때 “정의”라는 뜻도
갖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샬롬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은 정의가 세워지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시편에는 샬롬이 이루어진 공동체에서는 “정의와
샬롬이 서로 입 맞춘다”고 노래한다고 합니다. 박준서 교수님의 말입니다: “사실 인간의 언어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최상의 좋은 말로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건강하십시오. 승리하시고 사랑과 우애가 넘치시고 평화와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정의롭고
조화로운 풍성한 삶을 기원합니다』라고 하는 축복의 인사인 것이다.
이 이상 더 좋은 인사가 또 있을까. 샬롬이 갖고 있는 본래의 뜻, 즉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온전함」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들은 샬롬이 깨어진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갈등과 대결,
분열과 분쟁, 편견과 편 가름, 독선과 아집,
이기심과 탐욕으로 조화(Harmony)는 깨지고, 샬롬 부재(不在)의 세계가 돼버렸다”(박준서). 이러한 상황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니라”마5:9). 화평케 하는 자란 말씀은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샬롬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힘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박준서).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최선을 다해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적어도 우리 가정과 교회에 어떻게 힘쓰고 노력해야 할까요? 교회란 공동체 안에는 3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
(2) 화평을 깨는 자(peace-breaker), (3) 화평을 지키는 자(peace-keeper). 우리는 화평을 깨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돼야 하며 또한 화평을 지키는
자가 돼야 합니다. 교회란 공동체 안에는
평안(Shalom)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한 일원(지체)으로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엡
4:3). 어제 토요 새벽기도회 때 어떻게 우리가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야 할지 로마서 14장 1-3절과 15장 1-3절 말씀 중심으로 3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특히 로마 교회처럼 우리 교회나 어느 교회나 두 부류의 그룹인 믿음이
강한 성도들과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있다는 전제 아래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 3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서로 공존해야 합니다.
서로 공존하기
위해선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며(롬14:3),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믿음이 강한 성도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3절). 오히려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약한 지체들이나 서로 받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약한 지체들을 다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3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합니다(15:7). 그리할 때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행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6-8절에서 “주를 위하여”라는 말씀을 5번이나 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믿음이 약한 지체들 모두가
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해야 한다는 귀한 교훈입니다. 주님을 위해 하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또한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15:1-2).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3절).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보다 믿음이 강한 지체들은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기쁘게 하고 믿음이 약한 지체들은 믿음이 강한 지체들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먹는 음식 때문에 서로 앞에 장애물을 놓아 근심하게 하므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여(14:13, 15, 현대인의 성경) 다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6절). 그리할 때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3)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교회의 화목과 서로 덕을 세우는데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19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화목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씁시다.”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믿음이 약한 지체들이나 믿음의 성숙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은 자기만을 위해서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6-7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믿음이 약한 지체들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서로 받되(15:7,
현대인의 성경) 서로 따뜻이 맞아들여서 서로 기쁘게 하고 서로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워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2, 6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
위해선 믿음이 강한 지체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여 행하는 일이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넘어지게 하거나 꺼림칙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일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14:20-21, 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게 하시사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셔서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마16:18;
롬15:5-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를 기쁘게 하여 서로 유악하게 하고 화목하여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15:2, 5-6, 현대인의 성경). 그리할 때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강”(peace)이란 단어는 전쟁과 반대되는 단어로서 전쟁이 그치므로 누리는 결과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번영의 축복이 일어날 법과 질서의 상태를 나타냅니다(WBC
주석). 이
“평강”이란 단어가 신약 성경에 91번 나오는데 그 중에 바울의 편지에만 54번 나오는데 이 평강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특히 관계와 관련하여 온전함과 관련이 있되, 특히
질서로서의 평화는 평화의 하나님에 의해 확립됩니다(고전14:33; cf.롬15:33; 16:20; 빌4:9)(WBC 주석). 실제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그 화평의 중보자이시다 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롬 5:1, 골 1:20)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화평이시다 라고 말했습니다(엡
2:14-18). 그러므로 바울이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평강을 위해 기도할 때 그것은 단순히 영적 번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만족의 내적 상태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오히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평화의 관계의 본질을 더 온전히 이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WBC
주석).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이렇게 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두 번째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의 11개 편지들의 인사의 말씀을 보면 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라고만 말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말씀을 빠뜨렸습니다. 제 생각엔 사도
바울이 이 골로새서 편지를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쓴 목적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그 당시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 당면한 큰 어려움은 골로새
지역에 퍼져 있었던 복잡한 혼합 종교들의 영향이었는데 그 영향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는 위험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스도의 구원자로서의 유일성과 절대성, 그리고 세상의 통치자로서의 유일성을 위협받게 되었을
것입니다(인터넷). 특히 골로새 교회의 주된 구성원들이 이방인이었고(1:12, 27; 2:13) 그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과거에 지니고 있었던 이방사상이나 또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이방 종교적 전통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런 거짓 가르침에 쉽게 넘어갈 위험성이 많았기에(인터넷)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절과
18-19절 상반절에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 일부러 겸손한 체하며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의 상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본 환상을
과장하며 헛된 생각으로 들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골로새서 편지를 쓰면서 인사의 말씀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2)라고만 말한 후 3절에 가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심을 말씀함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기 하나이심(Jesus
is one in nature with God)을 말씀하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합니다(an
affirmation of Christ’s deity)(MacArthur),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요(3절) 또한 “우리(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에게는 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요 “우리 아버지”이신 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하는(2절, 현대인의 성경) 인사의 말을 한 후 어떻게 그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받았는지 골로새서 1장 13-22절에서 말씀(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나라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13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 흘린 대가로 속량(자유)을 얻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14절)이요 그 하나님의 “평강”이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화평”을 이루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20절). 전에는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을 통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것입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3-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한 3가지 관찰을 통해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1:3),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현대인의 성경)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엡1:16),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빌1:3-4),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살전1:2),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현대인의 성경) “나는 밤낮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조상 때부터 깨끗한 양심으로 섬겨 온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딤후1:3),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현대인의 성경)
“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생각하며 언제나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몬1:4). 이 말씀들을 생각할 때 먼저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도 바울의
편지 내용들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조금이나마 습관이 된 것이 있습니다.
그 습관이란 제가 기도하고 있는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에게 카카오톡이나
문자나 글을 써서 보낼 때 ‘나는 기도 가운데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당신을 생각나게 하시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등등 라고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하며 기도합니다’라는 문장은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 성도들을 기억(또는 생각)하며 기도하였다는 말씀을 통해 배운 것이고,
‘성령님께서 당신을 생각나게 하시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살아생전에 한국에
사시는 안 모 권사님께 제가 저와 우리 승리장로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렸을 때 그 권사님께서 저에게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시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을 때 제가 그 권사님에게 배운 것입니다. 또한 저는 이 사도 바울의 말씀들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엡6:18)라고 권면했다는 것은 그는 자기가 편지를 쓴 내용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Continually,
Paul practices what he preached(Eph.6:18)”(KJV 성경 주석)][(엡6:18, 현대인의 성경)
“성령님 안에서 항상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며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참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목사나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모든 성도님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라고 가르치고 나서 우리가 실제로는 모든 성도님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고 쉬는 죄를 범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이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중단함으로 여호와께 범죄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 선하고 옳은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입니다”](삼상12:23).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자였습니다.
여러분, 육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결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 좋은 성경적인 예가 바로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쳐해 있었던 상황은 결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밤낮 3일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욘1:17). 그는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2:2). 그는 바다 깊은 곳에 던져졌습니다(3절). 그는 주님 앞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습니다(4절).
그리고 그의 생명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7절).
그는 죽음의 땅에 갇혀 있었습니다(6절). 이런 상황에서도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1,
9절).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요나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기억한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1:14)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므로 그가 밤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입니다(17절).
이것이 바로 요나가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요나가 기도하며 기대했던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기대했던
구원은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시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2:10). 그러나 주권자이신 하나님 구원은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2:1, 9).
우리 기도의 응답이 우리 기대대로 현실화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응답의 현실화는 우리가 기도한 내용대로,
우리가 기대한 대로 돼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어졌음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므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9절)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현재에도 구원을
베풀어 주실 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3:8)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사 요나를 육지에 토해 내게 하셨습니다(욘2:10).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나의
상황은 드디어 변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이 아닌 육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도 상황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지난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복음성가 “날 구원하신
주 감사”를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찬양 2절 가사입니다: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셨는데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면 가능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제일 사랑하시고, 우리를 제일 잘 아시며 또한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으신 이유 또한
분명히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인 줄 믿기에 우리는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6편 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우리는 평생 기도하면서
평생 감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평생 감사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감사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2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마14:19, 현대인의 성경). 또한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도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1:41).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들리 때마다 감사합시다.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마다 감사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시다.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마태복음
16장 18절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계심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가정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대로 가정의 모든 역경과
고통 등을 통해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 믿고 감사합시다. 개개인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디모데후서
2장 13절의 말씀대로 비록 우리는 신실하지 못했을지라도 진실하신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해 나아가고 계심을 믿음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억(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3절
말씀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1장 16절, 빌립보서 1장 3-4절,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 디모데후서 1장 3절, 빌레몬서 1장 4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한다고 편지를 썼는데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기도”와 “감사”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결성(connection)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연결성이란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기억(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로 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그 성도들의 마음과 삶 속에 역사하시고 계시므로
말미암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교훈은 저의 책임은 담임 목사로서 저의 책임이 여러분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면서 하나님께 기도로
여러분들을 다 맡기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과 삶 속에 역사하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므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3절에서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를
드렸는데 9절과 12절 하반절에서도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그치지(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서(9절)
그들도 자기와 디모데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5절 하반절에서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고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권면을 했고 16절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현대인의 성경), 17절에서는 “그(예수님)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4장 2절에서는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현대인의 성경) “항상 기도에 힘쓰십시오. 기도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고 그들에게 권면을 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하며 또한 서로를 위하여 기억하며 계속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다.
셋째로,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디모데후서 편지를 보면 바울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 세대(후세대)를 이해하십니까? 어느
한 기독교 웹사이트에서 “Z세대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여섯 가지”란 제목 아래 기사가 있어서 읽어보았습니다. 여기서 “Z세대”란
일반적으로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세대라고
합니다(인터넷). 제가 이 Z세대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몇까지 좀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점들이 있습니다:
(1) 먼저 Z세대는 (일종의)
무신론자이다고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Z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성경을 읽을 가능성이 적다고 합니다. Z세대가 다른 어떤 세대보다 덜 종교적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성경에
들어 있다고 믿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 합니다. 그들 중 삶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많은 경우에 미디어를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2) Z세대는
(병적일 정도로) 디지털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Z세대는 때때로 아이젠(iGen)이라고도 불리며 항상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세대라고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시각과 기준을 만드는 게 온라인이라고 합니다. 금식하면 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소셜미디어 금식이라고
합니다. (3) Z세대는 이 세상이
상처투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삶의 의미나 정의 추구 같은 어려운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더 나은) 공동체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4) Z세대는 (열정적으로)
원칙을 따지는데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원칙 하나는 말에 행동을 맞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을 말로 설명하지 말고, 행동으로 말하라.” 저는 이 몇 가지 점들만 생각을 할 때에 우리 자녀들(후세대들)의 영혼 구원과 신앙생활을 위해 우리가 부모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자녀들(후세대)은 삶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많은 경우에 미디어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점과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원칙 하나가 말에 행동을
맞추는 것을 생각할 때 그 기사를 쓴 저자의 말대로 우리 부모(할아버지/할머니도) 우리의 믿음을 말로만 설명하지 말고,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3절을 보면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디모데후서 편지를 보면 바울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현대인의 성경) “나는 밤낮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조상 때부터 깨끗한 양심으로 섬겨 온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2절)를 쉬지 않고 생각(기억)하면서 밤낮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3절)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디모데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여기서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신실한 믿음,
위선이 없는 믿음, 가짜가 아닌 믿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4장
18-21절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3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현대인의 성경) “아브라함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었으므로 '네 후손도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다.'
라고 하신 약속대로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거짓된 믿음, 신실하지
못한 믿음, 위선이 있는 믿음, 가짜 믿음은 바랄 수 있는 중에는 바랄지
모르겠지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지 못합니다. 오히려 바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의심을 “믿음”이라는 말로 덮습니다. ‘나는 믿노라’고 믿음 있는 척은 하지만 실상 마음속으로는
‘이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디모데처럼 거짓이 없는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돼야 합니다. 바랄 수 있을 상황만 아니라 바랄 수 없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랄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돼야 합니다.
소망이 전혀 없어 보일 때도 소망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이 눈의 아무 증거 없어도 걸어가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믿음이
연약해 지지 않고 오히려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 19-20절을 보십시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현대인의 성경) “아브라함은 자기 나이가 백세가 다 되어 몸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나이가 많아 도저히 출산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더욱 굳게
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거짓된
믿음, 신실하지 못한 믿음, 위선이 있는 믿음, 가짜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면 믿음이 연약해집니다.
상황이 점진적으로 불가능해져 갈 때에 믿음 또한 점진적으로 연약해져 갑니다. 이러한 거짓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상황에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불신 속에서 믿음
있는 척 하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가리게 됩니다. 위선이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돌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디모데처럼 거짓이 없는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돼야 합니다.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이 연약해 지지 않고 더욱더 강해지고 견고해지는 믿음으로 우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점진적으로 어려워지고 불가능 해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의심하지 않으며 믿음이 연약해지지 않고 더욱더 강해지는 ‘불가능제로’의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 21절을 보십시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거짓된 믿음, 신실하지
못한 믿음, 위선이 있는 믿음, 가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믿고 의지합니다. 결코 거짓된
위선적인 믿음은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철저히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자기의
능력을 더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가운데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여 가능한 일을 해결하므로 말미암아 더욱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 결과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노라 합니다. 위선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위선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 붙잡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야 합니다. 결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이끌려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면 일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을 철저히 깨달아가는 가운데 더욱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충분히 설득 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3절에서는 사도 바울은 이러한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디모데와 함께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를 기억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는 자신과 디모데와 함께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사도 바울처럼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감사하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신실한
성도는 또 다른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둘이 함께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함께 감사하는 모습이 참 본이 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
적용을 해본다면 제가 거짓이 없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윤 장로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장로님과 제가 함께
우리 거짓이 없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승리교회 성도님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면 이 얼마나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까!
새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가사
3절과 후렴입니다: (3절) 끝까지 이긴 사람은
흰 옷을 입히고 또 영생 복을 주시니 참 기쁜 일일세 이 어둔 세상 지나서 저 천성 가도록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후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우리 모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히12:2)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탄과 죽음과 싸우되
끝까지 싸워 이기므로 흰 옷을 입힘 받아서 저 천성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믿음의 성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듣는데서 생기고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말씀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부지런히 규칙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힘쓰고
속히 해야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추구하고 싶은 믿음은 ‘죽음 후에도 말하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그가(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는 죽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더 나은 제사를 드렸던 아벨은 죽었지만
지금도 그의 핏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피인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핏 소리를 듣게 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핏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듣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전파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디모데를
쉬지 않고 생각하며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딤후1:3)는 바로 바울은 디모데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신실한 믿음, 위선이 없는 믿음, 가짜가 아닌 믿음)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이 거짓이 없는 믿음을 우리는 로마서 4장 18-21절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3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롬4:18). 우리도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되 소망이 전혀 없어 보일 때도 소망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믿음이 연약해 지지 않고 오히려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었습니다(롬4:19-20). 우리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이 연약해 지지 않고
더욱더 강해지고 견고해지는 믿음으로 우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점진적으로 어려워지고 불가능 해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의심하지 않으며 믿음이 연약해지지 않고
더욱더 강해지는 ‘불가능제로’의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롬4:21).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면 일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 더욱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4-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를 4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4절 상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현대인의 성경)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잘 믿고”]. 여러분, 장로님과 저의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당회의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온 교회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게 아니겠습니까? 모든 성도님들의 믿음이 계속 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한삼서 1장 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에게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생활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요한이서1장 4절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의
기쁨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사랑하셔서 매일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여러분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진리를
행하고 진리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나 소식을 들으면 매우 기쁘지 않으십니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디모데와 함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골1:4).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말한다면, 바울과 디모데가 감사한 첫 번째 이유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한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의 믿음이
어떻게 잘 믿고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일까요? 골로새서 2장
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내가 몸은 여러분을 떠나 있으나 마음은 여러분과
함께 있어서 여러분이 질서 있는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선 것을 보니 기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한 이유를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굳게 서 있다’라는 헬라어 원어(stereōma)
단어는 군대 용어(military word)로서 ‘견고함’(solidity)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참되고 확고한 믿음의 불굴의
본성을 말해줍니다(This speaks of the unyielding nature of their faith which was
firm and true to Christ)(KJV 성경 주석).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2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현대인의 성경)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분을 기초로 여러분의 인생을 건설하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미국 캘리포니아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있는 “셔면 장군 나무”(The
General Sherman Tree)라고 합니다. 그 나무의 키는 84미터(275피트), 허리둘레 31미터(103피트)라고 하고 해마다 자라나는 가지의 양은
18미터(60피트) 크기의 나무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이 셔먼 장군 나무의 수령은
약 2,200살 정도로 추산된다고 합니다(인터넷). 제가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계시는 골로새서
2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현대인의 성경)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선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박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 말은 우리기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선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게 급선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잘 믿는 견고한 신앙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움직이지 않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견고한 뿌리입니다[(잠12:3) “…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뿌리 깊은 믿음(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핍박과 박해가 있다 할지라도 뿌리가 움직이지 않는(잠12:3)
견곤한 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23절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현대인의 성경) “만일 여러분이 믿음에 굳게 서서 여러분이 들은 기쁜 소식의 희망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하늘 아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고 있으며 나 바울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우리가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은 믿음(신앙) 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고전3:11).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며,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며 또한 우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살전1:6-8).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4-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를 4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였습니다[(골1:4상)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말한다면,
바울과 디모데가 감사한 첫 번째 이유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다는 말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 있었다는 말입니다(견고한 믿음).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우리가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은 믿음(신앙) 생활을 하려면(1:23) 우리는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2:7).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고전3:11).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 결과 우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질 수 있길 기원합니다(살전1:8).
둘째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의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4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현대인의 성경)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자녀들이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에 감사하고
기쁘지 않습니까? 교회로 말하자면,
장로님과 제가 여러분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요한일서 편지에서 묵상한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3:23-24).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죽음에서 벗어나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3:14,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인 천국 시민권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받았습니다(빌3:2). 여기서 천국 시민권자답게 산다는 것은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마22:37-39). 특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 적어도 3가지로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자는 (1)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요일3:16). (2)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도와줍니다(17절). (3)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18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약2:14, 17, 20, 26)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요일3:11)에 불순종하고 있으면서
“말로만 사랑”하고 있다는 것(18절)은 죽은 사랑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인 것처럼 순종이 없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거짓된 믿음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요 거짓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4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왜 하나님께 감사한지 그 두 번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처럼 진정으로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면(4절, 현대인의 성경) 분명히 우리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좀 반대로 생각한다면, 만일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Love
is the evidence of faith)(요13:35; 15:12; 갈5:6;
약2:14-20, 요일3:14)(KJV 성경
주석).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던 두 번째 이유가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3-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바울은 “에바브라”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쁜 소식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배웠습니다. …”(7절상,
현대인의 성경). 이 에바브라 하는 사람은 바울과 디모데와 함께 하나님의 종인 된 사람이요 바울과 디모데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7절) 주석가들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개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죤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하고 있었을 때(행19장)
시작이 되었고, 골로새서 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서 에바브라(1:5-7)
골로새 교회를 시작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맥아더).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4장 12절에 가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에바브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여러분에게서 온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에바브라가 문안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굳게 서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보면 에바브라도 사도 바울과 디모데처럼(1:3)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 내용이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굳게 서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4:12,
현대인의 성경). 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기도입니까? 성도들이 (1) 하나님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확신하는 것과 (2) 믿음에 굳게 서 있는 것과 (3)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 이 3가지 기도 제목이 얼마나 우리에게도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서 바울에게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에바브라라 하는 예수님의 종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상황을 바울에게 전달해 준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달해 준 내용 중에 하나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잘 믿고 모든 성도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1:4, 현대인의 성경). 사도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 또 들은 소식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성령님 안에서” 그들이 “사랑으로 생활한다는 소식”입니다: (8절, 현대인의 성경)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현대인의 성경) “성령님 안에서 여러분이 사랑으로 생활한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준 사람입니다”]. 여기 골로새서 1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 안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사랑으로 생활한다는 에바브라를 통해 들은 소식을 말했는데
2장 2절에 가서는 그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하”길 원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성령님 안에서”란 말과 “사랑 안에서”란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어 묵상할 때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의 근거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 제가 볼 때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기에 성령님 안에서 사랑으로 생활하므로 사랑 안에서 (잘) 연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4절에 가서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하나로 묶어 주는 띠와 같은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지난 주 화요일 암투병중인 심수은 사모님이 선배 사모님을
통해 사모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카카오톡 방에 마음의 글을 나눴습니다. 그 글의 일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제 자신을 보며 눈물만 흘리고 또 흘리고 있습니다. 한참 울다보니 당연한 듯 항암치료는 시작되었고 아무 이유도,
반항도 없이 이 독한 약을 제 몸에 넣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
상황에서, 이 아픔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지쳤나봐요. 아프지도 않고, 슬프거나 외롭지도
않게 쉬고 싶어요. 주님 품에 안겨 편히 쉬고 싶어요." 쉼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편한 안식처가 되어주시는 주님,
지금 저에게 가장 따뜻하고 편한 안식처가 되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주님의 넓고 따뜻한 품에 안겨 쉬길 바랍니다. 지치거나 낙심하지 않고 슬픔에 잠겨 하염없이 울지 않도록,
이 시간을 잘 보내고 어린아이처럼 주님 품에 안겨 찬양 부르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힘주시길 기도합니다.
...” 저는
제 자신도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게 제 마음이 좀 무겁고 우울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주 지난 주 목요일 아침에 에베소서
6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제 자신이 완전 무장해야 할 하나님의 무기 중에 마귀의 불화살을
막을 수 있는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한다는 것(엡 6:11, 16, 현대인의 성경)을 좀 더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마음에 사랑하는 투병 중에 있는 지체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만들어 그들의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들므로 제 마음을 우울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요기도회 때 원로 목사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6)"(요
19:28-30) 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멸망시키시고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종살이하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는 진리(히2:14-15, 현대인의 성경)로 제 우울한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심으로 말미암아(16절) 제 우울한 마음을 소성케 되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 영적 싸움에 승리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오늘 밤 비행기로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한국에 나아갑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심수은 사모님과 가족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또한 4월 20일이 다섯 번째 심장 수술을 앞둔 이종미
자매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덩달아 인터넷 사역을 감당하고자 나아가려고 합니다. 제가 다음 주일과 고난 주간을 지나서 부활주일 전날 토요일에 다시 돌아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함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과 성금요일 기도회
등 함께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특히 고난주간을 생각할 때 매년 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고난 주간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reach
out(다가가길) 또 다시 미리 권면합니다. 비록 우리 교회는 고난 주간 특별 새벽기도회는 없고 성금요일
기도회와 토요 새벽기도회 밖에 없지만 기도하면서 실제로 행동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조금이나마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 수 있길 기원합니다. 제 생각엔
우리가 그럴 수만 있다면 주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고난 주간이라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고
기념을 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되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지체들을 사랑하므로 근심 걱정
물러가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경험하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 각자 마음속에서 충만하게 비취므로 우리가 가서 주님의 사랑을 비취므로 주님이 주시는 화평함과 기쁨을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의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현대인의 성경) “이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이
전에 진리의 말씀인 기쁜 소식을 들어서 확신하고 있는 하늘나라의 소망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아오시면서 동서남북으로 갇힌바 되었던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실제로 지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갇힌바 되지 않았나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이 보기에 갇힌바 된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 바다 앞에서 애굽 왕
바로가 보기에 갇힌바 되었고(출14:2), 다윗도 그일라에서 이스라엘
왕 사울이 보기에 갇힌바 되었습니다(삼상23:7).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건지심)의 능력을 나타내시므로
더욱더 구원의 하나님을 믿게 만드시고자 그러시는 게 아닐까요?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만이사람들 보기에 갇힌바 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0장
3절을 보면 요셉도 옥에 갇힌바 되었었고, 예레미야 38장 6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도 구덩이에 갇힌바 되었으며, 요나서 2장을 보면 요나 선지자도 큰 물고기 뱃속에 갇힌바 되었으며,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사도 바울 및 실라도 감옥에 갇힌바 되었었습니다(행12:5;
16:23-24). 그렇게 우리도 갇힌바 되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잠잠히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갇힌바 되었을 때 모세가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중요한 것은 우리도 갇힌바 되었을 때, 그래서 우리가 동서남북을 아무리 보아도 문제의 해결점이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건질 수 없을 때, 구원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반드시 건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스가랴 9장
1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동서남북 갇혀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소망을 품은 자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갇힌바 되었을 때, 아무리 동서남북을 보아도 문제의 해결점이 안보여 낙심되고 불안해 할 때 시편 42편
5, 11절과 43절 5절에
3번 반복해서 시편 기자가 자기 자신에서 선포하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기억나곤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고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임스야,
너는 왜 낙심하고 불안해하느냐. 너는 주님께 소망을 두라!”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하는지 세 번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즉,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의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도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살전1:2-3). 실제로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던 이유는 동일하게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 때문이었습니다(골1:3-5; 살전1:2-3). 특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망”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던 구체적인 이유는 그들은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을 보십시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러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던 세 번째 이유인 그들의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골로새서 3장 4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현대인의 성경)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요한일서 3장 2-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리고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이 생각났습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비슷한 바울의 기도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왜 바울은
이렇게 간구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너희의 거룩함이”(4:2)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3절). 결국 요한일서 3장
2-3절 말씀이나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과
5장 23절 말씀의 일관된 메시지는 주님을 향하여 예수님의 재림의 소망을 가진 우리는
주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신 레위기 11장 45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은 그들이 전에 들은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서(골1:5) 바울과 디모데뿐만 아니라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골로새 교회 신실한 성도들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3:4).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하늘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2절, 현대인의 성경),
“위에 있는 것을 찾으십시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1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하늘에 간직한 축복을 여러분이 받도록 하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하늘에 간직한 축복이 여러분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들 중에서와 또한 온 세계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나고 있었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6절을 보십시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이 기쁜 소식을 듣고 진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은 것처럼 그 말씀이 온 세계에서도 그렇게
열매를 맺으며 전파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가정을 꿈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저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 가정’을 꿈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씨앗을 심어 사랑의 뿌리가 보이지 않는 땅 밑에 깊이 넓게 많이 자라나므로 사랑의 싹이
조금씩 땅 위로 보이면서 사랑의 나무가 견고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나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주님 중심된 우리 가정이 되길 기원합니다.” 특히 저는 예수님의 이중적인 계명(twofold command)을 순종하므로 이중적인 열매(twofold fruit)를 맺는 주님 중심된 가정이 되길 꿈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중적인 계명대로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할 때에(마22:37, 39) 맺는
이중적인 열매(twofold fruit)란 2가지입니다:
(1)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벧후1:4)으로서 그 의미는 성령님의 성화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또한 (2) 성령님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맺는 것입니다(갈5:22-23). 그러므로 저는 주님 중심된 가정,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가정, 예수님의 증인 공동체를 꿈꾸면서 하나님께
기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주는 가정, 복음의 열매는 맺는 우리 가정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골로새서 1장3-5절 말씀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 3가지 이유를 이미 묵상했습니다. 그 이유는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말한다면 첫째로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들이 모든 성도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요, 셋째로 그들에게는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하는지 마지막 네 번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들 중에서와 또한 온 세계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여기서 저는 한 3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골로새 교회에 신실한 성도들이 전에 들은 “이 복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5절에서 이 복음을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복음”이란 “진리의
말씀”이라고 말한 것인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 저는 이 두 말씀을
좀 연관해서 묵상 적용할 때에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들은 복음이요 우리가 들은 복음은 “진리의 말씀”으로서 한 마디로 그 복음, 그 진리의 말씀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구원의 복음”이요 우리의 “구원의 복음”입니다. 저는 “이 복음”(골1:6)을 골로새서 말씀 중심으로 한 4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a) 이 “구원의 복음”은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능력)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것’[참고: (골3:1상)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을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2장 12-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땅에 묻혔고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할례 받지 못한 육적인 욕망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
로마서 6장 3-4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b) 이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은 것을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을 보십시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이 아들이 피 흘린 댓가로 자유를 얻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참고:
(엡1:14) “이는 (성령님이)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 여기서 “속량”이란 노예의 값을 지불하여 사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의 노예와 사탄의 노예에서 자유케 하시고자 지불하신 값은 바로 자신의 생명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c) 이 “구원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죽음과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을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1장 20-22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 평화의 길을
열어[“화평을 이루사”(개역개정)]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을 그분을 통해 자기와 화해하게[“화목하게”(개역개정)]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전에 여러분의 악한 행실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죽음을 통해 여러분과 화해하셨습니다[“화목하게 하사”(개역개정)]. 이것은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22절). 로마서 5장 10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 고린도후서 5장 18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
(d) 이 “구원의 복음” 골로새서 1장 1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출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어두움의 권세”는 “사탄의 권세”(행26:18)를 말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는 “주(님)의 나라”(마20:21; 히1:8)요 “하나님의 나라”(마21:31; 눅18:17)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하여(건지시사/구원하시사) 주님(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주신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사도 요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3장 14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영적으로 죽었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에서 옮겨 생명(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사도 요한의
관점에서의 구원의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시사 생명(영생)으로 옮기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의 구원의 복음과 연관해서 정리한다면
‘구원의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영적으로 죽었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사망) 우리를 죄의 노예와 사탄의 노예에서 자유케하시사(속량)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생명으로) 옮기신 것’을 말씀합니다.
(2)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으십니까? 가정을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고, 주님의 교회를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까지
왔으며 나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지금까지 지내왔음을 인정하며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1절 가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그리고 진정 우리가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알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그 은혜의 힘으로 마땅히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고 행함으로 수고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헛되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고전15:10).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한 3가지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골로새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임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6절). 사도 바울이 이 골로새서 편지를 쓸 당시에는 골로새에 있는
불신자들이 이미 복음이 그들에게 이르러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 신자가 된 상태였지만 그 복음이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는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르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까 질문할
때 골로새서 2장 1절을 보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닌 것을 짐직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내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를 여러분(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알기 바랍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죤
맥아더 목사님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3년간 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 골로새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 교회를
개척한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7절에 언급하고
있는 “에바브라”라고 말하고 있고 에바브라는 에베소서를 방문했을 때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후 다시 골로새로 돌아와서 골로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골로새 교회를 개척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맥아더).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주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보내시사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을 듣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복음을 아예 듣지도 못했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 수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3-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도 않은 분을 어떻게 부르며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보내심을 받지 않고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이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라고 한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골1:6). 주님께서 에바브라를 구원하시사 그를 통하여 골로새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므로 그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골로새서 1장 13-14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사 흘리신 피의 대가로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두움의 권세에서 건지사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또한 골로새서 1장
21-22절의 말씀대로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골로새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사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워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 말씀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2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가 장차 주님에게 하늘의 축복의 상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란 골로새인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2:6,
현대인의 성경).
(c)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골1:6).
제가 2009년 7월
22일에 “하나님의 은혜”란 제목 아래 이런 짧은 말씀 묵상 글을 썼었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롬5:12).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19절).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12절).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20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은사)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습니다(15절).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합니다(16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입니다’(17절).
우리는 한 사람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18절).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이 되었습니다(19절). 그의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은 바로 ‘영생’입니다(21절). 이 선물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 묵상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인용한 로마서 5장 12절부터의 성경 구절 한절
한절 말씀을 믿고 깨달아 간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짧은 말씀 묵상의 글입니다. 2021년 11월
30일에 “나중에라도 깨달음은 은혜입니다”라는 제목아래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 말씀대로 행하고 계셨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일을 깨닫지 못했다가 예수님께서 나중에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깨달았습니다(요12:16, 현대인의 성경). 나중에라도 깨닫게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라도 깨닫지 못함은 불신과 더불어 이해가
아닌 충분히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말씀 묵상의 글 하나만 더 나누고 싶습니다. “깨달음을 간구해야 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2021년 2월 22일에 쓴 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그 상황에서 건져주시길 간절히 부르짖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시119:169). 그
깨달음이란 (1) 나는 무력한(helpless) 존재라는 사실과
(2) 하나님은 나의 진정한 도와주시는 분(Helper)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오늘 본몬 골로새서
1장 6절에서 “… 너희가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라고 말했을 때 편지를 받는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란 3가지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임했다는 것(6절), (2)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6절), (3)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6절).
(3) 골로새 교회 ‘성도들 중에서와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나고 있다’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골1:6).
탈무드에 감출
수 없는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3가지란 “기침과 가난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감기는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기침” 때문에 숨길 수 없으며, 가난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출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열매”입니다(인터넷). 마태복음
7장 16절과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것처럼 선지자들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진짜 선지자들인지 거짓 선지자들인지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은 17-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현대인의 성경). 또한 그 유명한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와 “열매 맺는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2, 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제자들과 열매를 맺는 제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요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로서(4,
7절) 예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7,
16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이렇게 말씀했음: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이 기쁜 소식을 듣고 진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은 것처럼 그 말씀이 온 세계에서도 그렇게 열매를 맺으며 전파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어 자란다’는 말씀은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keeps on bearing fruit) 또한 증가한다(increasing)라는 의미인데(KJV 성경 주석) 그 의미에는 특히 ‘말씀의
열매’를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 그 말씀이 온 세계에서도 그렇게 열매를 맺으며 전파되고 있습니다”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6절,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할 때 물론 하나님께서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로 하여금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고전3:7, 새번역)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 책임이란 주님의 종인 에바브라를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말씀(골1:7)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살전2:13).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했습니다(히4:2).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 그러므로 그들이 들은 말씀이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습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사도 바울은 쉬지 않고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져서 주님을 믿는 성도다운 생활을 하여 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골1:9-10, 현대인의 성경).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주님께 받은 사명을 따라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아낌없이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요(2:2, 현대인의 성경) 또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1:28).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습니다(골1:4-6). 그 이유는
(1)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기 때문이요(4절상,
현대인의 성경), (2) 그들이 모든 성도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요(4절하, 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하늘에 쌓아 둔 소망(하늘나라의 소망) 때문이요(5절),
(4)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들 중에서와 또한 온 세계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절). 이러한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우리 모두에게 있으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더욱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리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22년 7월 17일, 골로새서 1장 1-8절 중심으로 17번 주일 설교를 마친 후 목양실에서 사랑하는 영어사역 두 형제들과 함께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식탁 교제를 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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