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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3가지 마지막 권면 (11)

바울의 3 가지 마지막 권면 (11)       우리는 입술로만 아니라 생활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말씀은 3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1)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 , 한 뜻으로 서서 서로 협력하는 것 ( 빌 1:27).   우리는 주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돕고 힘을 합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있어서 같은 의지와 욕망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     (2)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 (28 절 ).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사 그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 스도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 그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 상황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없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   (3)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 (29 절 ). 고난은 유익합니다 .     그 이유는 우리가 고난당하기 전에 그 릇행하였다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배우므로 그 말씀을 지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

자식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창세기 13장 9절)

자식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세기 13 9).

 

 

          지금 제가 알고 지내는 부부들 중에 몇 부부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고부 갈등)이 있습니다.  며느리 자매들 입장에서 많이들 힘들어 합니다.  여러모로 힘들 텐데 그 중에 제일 힘든 것은 제가 보기엔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남편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부인 자매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남편이 진짜 소위 말하는 남의 편이 되어서 자기보다 시어머니의 편을 드는 모습을 볼 때에 당연히 마음이 힘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자신들의 남편이 소위 말하는 마마보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더 마음이 괴로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내인 자기보다 남편의 어머니이 시어머니에게 강한 애착과 집착을 가지고 있어서 아내하고는 이렇게 대화를 했는데 또 다시 시어머니하고 밀착되어서 시어머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남편을 보면 부인 자매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것 같습니다.  아마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시어머니의 사이가 너무나 지나치게 애착과 집착과 밀착이 되 있어서요.  그 결과로 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고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고부 갈등 외에도 시부모님과 며느리와의 갈등도 있을 수 있고 또한 장인 장모님과 사위와의 갈등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 외에도 가족 안에서는 부부 갈등도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부모와 자녀와의 갈등과 자녀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원리를 오늘 본문 창세기 13 9절에서 작은 아버지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말한 한 마디 곧, “떠나가라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그 원리란 바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3 9절을 보십시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말씀은 작은 아버지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한 말로서 아브람은 롯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말했습니다.  왜 아브람은 롯에게 그리 말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서로 다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창세기 13 8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현대인의 성경) “그때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친척이다. 나와 너, 그리고 내 목자와 네 목자끼리 서로 다투지 말자”].  아브람과 롯은 한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엔 아브람과 롯이 직접 다투었다기보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아브람은 자신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기에 그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고 롯에게 말한 것입니다.  왜 그 목자들은 서로 다툰 것일까요?  그 이유는 창세기 13 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아브람과 롯에게 가축이 너무 많아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그 땅의 목초지가 부족하였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툰 이유는 아브람과 롯에게 가축이 너무 많았기에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그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던 땅의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 말로 간단하게 말한다면, 재산(“소유”)이 많아서 서로 다툰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많은 가족의 갈등이 재산 때문이 아닌가요?  왜 자녀들끼리 서로 다툽니까?  부모님의 재산 때문이 아닌가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아브람과 롯이 소유”(재산)(6) 많아졌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제 생각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대로(12:1-3) 아브람을 축복하시되(12:1-3) 심지어 아브람이 거주하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 심한 흉년이 들게 하시므로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집트에 내려가게 하시사(10, 현대인의 성경) 그곳에서 아름다운 아브람의 아내 사래 덕분에 이집트 왕 바로로 하여금 아브람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에게 양과 소와 나귀와 남녀종들과 낙타를 주게 하셨습니다(16,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아브람에게는 가축과 은금이 풍부하였습니다(13:2,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아브람의 조카 롯은 어떻게 가축이 많아졌을까요?  물론 창세기 13 5절에서 성경은 “롯에게도 소와 양과 종들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6절에 와서는 아브람과 롯에게 가축이 너무 많아”라고 말씀하고 있는데(6,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롯은 그리 가축이 너무 많았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제 생각엔 롯은 이미 죽은 아버지 하란의 유산을 받았기에 가축이 많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축이 더욱더 많아진 작은 아버지 아브람에게서도 가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참고: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2826284970)].  이렇게 아브람과 롯에게 가축이 너무 많아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퉜는데 그 이유는 아브람과 롯이 함께 살기에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땅의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땅이란 아브람은 자기 아내와 조카 롯과 함께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남쪽 네겝 지방으로 올라”가(1현대인의 성경) “거기서 그는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 벧엘과 아이 사이곧 전에 그가 천막을 치고 단을 쌓은 곳”입니다(3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전에”란 창세기 12 5-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그리고 하란에서 얻은 모든 재산과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5현대인의 성경)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서(6아브람이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을 받고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7) “그 곳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천막을 쳤는데 벧엘은 서쪽에 위치해 있었고 아이는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거기서도 그는 단을 쌓고 여호와께 경배”했던 곳입니다(8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하나님께 경배했던 곳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소유”(13:6)때문에서 한 친척인 작은 아버지 아브람과 조카 롯의 목자들끼리 서로 다툰 것입니다.  이 다툼, 이 갈등을 아브람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창세기 13 9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조카 롯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면 그는 롯에게 나를 떠나가라로 말했습니다(현대인의 성경은 서로 갈라서자라고 번역을 했음).  과연 아브람에게 있어서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쉬웠을까요?  저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창세기 12 4-5절을 보면 아브람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거라”(1, 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순종함에 롯과 함께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인 하란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람은 그의 친척”(1)인 조카 롯도 함께 고향인 하란을 떠난 것을 보면 그는 롯을 매우 사랑하는 작은 아버지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브람은 자기 형제인 하란(롯의 아버지)이 자기 아버지 데라가 아직 살아 있었을 때에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고(11:28, 현대인의 성경) 또한 사래와 결혼했지만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해 자식이 없었기에(30, 현대인의 성경) 조카 롯을 자기 아들처럼 여길 정도로 사랑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제 아브람은 롯에게 나를 떠나라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원하는 땅을 택하라. 네가 동쪽으로 가면 나는 서쪽으로 가고 네가 서쪽으로 가면 나는 동쪽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13:9).  여기서 동쪽이란 아이”(3) 쪽을 말하고, 서쪽이란 벧엘”(3) 쪽을 말합니다.  여기서 아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동쪽 아이 쪽은 소알 및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천막을 치고 거주하면서(3, 현대인의 성경) 그들의 목자들이 그들의 많은 가축을 목양하고 있었기에 아브람은 서로 목자들끼리 더 이상 다투게 하지 않고자(8) 롯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말하면서 롯이 동쪽으로 가면 자기는 서쪽으로 가고, 롯에 서쪽으로 가면 자기는 동쪽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9, 현대인의 성경).  과연 이렇게 조카 롯에게 말한 것이 아브람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까요? 

 

          가족 안에서 부모와 자녀와의 갈등이 있을 때 부모가 자식에게 나를 떠나가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2-30년 함께 살다가 갈등을 해소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화목을 위하여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의 독립심을 기르지 못하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동반 의존적이라면[여기서 동반의존”(Co-dependency, Co-addiction)이란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중독 혹은 탐닉(addiction), 정신 건강 약화, 미성숙, 무책임, 성취 저하(under-achievement) 등을 조장(enabling)하는 대인관계에서의 행동조건(behavioral condition)을 말한다. 인정을 받거나 정체성(sense of identity)을 찾기 위하여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이 공의존의 가장 큰 특성이다. 공의존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증상이 잠재되어 있거나 상황에 따라 다르거나 단편적으로 발생하는 행동 조건으로서, 의존성 성격장애(dependent personality disorder)와 유사한 것으로 정의된다”(인터넷)]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물리적 거리(physical distance)를 두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노력을 해서 시도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물리적 거리상 떠나보냈어도 정신적 거리(emotional distance)나 감정적 거리(emotional distance)상으로는 떠내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자식을 떠나보낸 게 아닙니다.  어쩌면 물리적 거리를 두므로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는 더 자식에게 밀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매우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종종 어머니가 자식에게 내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는지 …’등등 말하는 장면을 보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입장에선 자식을 최선을 다해서 희생적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하고 그리 말하겠지만 그것은 자식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의 최선의 사랑이 그 자식에게는 죄악의 고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자식이 이미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그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최선의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 자식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겪고 있는 고통은 죄악일 것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아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부부 관계가 원만할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둔 아내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안 그래도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안 좋아서 눈물을 흘리는데 위로한답시고 다가와서 자기의 어머니 편을 드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자기 아내를 자기 어머니로부터도 보호하지 못하는 남편을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어머니는 자식만 망치는 게 아니라 자식의 부부 관계도 망칠 확률이 많습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서쪽)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동쪽)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했을 때(9)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기에(10) 동쪽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그리 선택한 이유는 그가 보기에 동쪽은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했기 때문이었습니다(10).  아무래도 그에게는 가축이 많았기에 물리 넉넉한 곳이 그의 육신의 눈으로 보기엔 올바른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롯이 보기엔 그 동쪽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그 땅이 마치 에덴동산 같고 이집트의 비옥한 땅과 같았다”(현대인의 성경) “](10).  롯은 실용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의 선택의 기준은 제가 보기엔 자신의 풍부한 소유(재산)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려하지 못한 것은 그가 선택한 동쪽은 소돔 사람들은 대단히 악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고 있었다는 것(13, 현대인의 성경과 아직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는 것입니다(10,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가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싯딤 골짜기에서 싸웠을 때 패하므로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의 대적인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갈 때에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가고 그의 재산까지 다 약탈을 당했습니다(14:8-12, 현대인의 성경).  뿐만 아니라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였습니다(벧후2:7).  , 그는 악한 자들의 악한 짓을 날마다 보고 들으면서 몹시 괴로와했습니다(8,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바로 롯이 동쪽을 선택한 결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롯의 실용적인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재산)를 지키려고 동쪽을 선택한 결과 육신적으로도 전쟁 포로가 되고 재산도 다 약탈당했으며 그의 의로운 심령도 상했습니다(8). 

         

          이 모든 사실을 과연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나를 떠나가라”(13:9)고 말했을 때 알고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몰랐을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조카 롯으로 하여금 동쪽을 선택하도록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람은 조카 롯으로 하여금 그가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줬다는 것입니다(9).   그리고 그는 롯의 선택을 존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롯이 동쪽을 선택했었을 때 아브람은 롯에게 왜 너는 동쪽을 선택했느냐?,’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해서 선택한 것은 이해하지만 너의 가축을 위해서만 동쪽을 선택해서야 되겠느냐?,’ ‘너는 너의 재산을 지키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고 기도한 후 결정해라’, 등등 이러한말 없이 조카 롯의 선택을 존중했습니다.  제가 제 세 자녀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선택하여 실수하고 실패를 경험하는 것은 괜찮다.  다만 그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울 수만 있다면.  그러나 너희는 너희가 선택한 결과에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제가 이렇게 제 자녀들에 종종 말했던 이유는 저는 그들의 아버지로서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이 저처럼 원치 않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전제아래 실수와 실패도 경험할 수 있겠지만 그 쓴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저는 제 자신뿐만 아니라 제 세 자녀들도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 선택하므로 그 잘못된 선택의 결과인 인생의 쓴 맛을 볼 때에 회피하지 않고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작은 아버지 아브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는 롯이 동쪽을 선택했으므로 그 결과인 롯이 전쟁 포로가 되고 재산을 다 약탈당하는 결과도 보게 되었고(14) 또한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롯이 거하고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18:23-24)라고 말한 뒤 그 숫자가 45, 40, 30, 20, 심지어 10명까지 내려가서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라고까지 하나님께 여쭸습니다(25-32).  그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32) 결국 하나님께서는 의인 10명도 없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이 그 재앙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19:29, 현대인의 성경).  그 과정에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 전날 여호와 앞에 섰던 곳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바라보니 그 땅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27-28,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서 먼저 선택권을 주므로(13:9) 그 선택의 쓴 결과를 조카 롯이 겪는 것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롯이 동쪽을 선택하므로 이러한 인생의 쓴 맛을 보게 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자기가 동쪽을 선택하고 롯으로 하여금 서쪽을 선택하게 했었을까요?  아마 이것이 부모의 심정일 것입니다: ‘내 자식이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기보다 내가 그 고통을 겪는데 낫다.’  그러나 과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으시는 사랑일까요?  비록 아브라함을 사랑하는 조카 롯의 선택의 결과를 미리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시지 않나요? 

 

          저는 오늘 토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혼자 기도하면서 주신 말씀에 제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들을 떠나보내게 해주시길 구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는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 함께 살 것이지만 아내가 좋아하는 산에 가서 뛰고, 하이킹하고 심지어 암벽 등반까지 할 때에 믿음으로 아내를 보내게 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전에 몇 번이고 말했지만 히브리서 11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저는 믿음이 없이는 제 아내를 지지(support)하지 못합니다입니다. 하하.  아니, 산에 가서 뛰다가 퓨마(mountain lion)도 보고 곰(bear)도 보았다고 집에 와서 말하는 아내의 얘기를 들을 때 남편인 제 입장에서 어떠했겠습니까? ㅎㅎ  여기 저기 인터넷 뉴스에 여자 혼자서 하이킹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나 암벽 등반하다가 여러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으면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랑하는 아내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또 맡기면서 아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딜런은 지금 주님께서 사역의 마음을 주셔서 대학교 때 섬겼던 기독교 동아리에서 풀타임 임원으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7월 말이면 1년 사역의 섬김이 끝나는데 1년을 더 연장해서 섬긴다고 합니다.  그러 가운데서 딜런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연애를 하고 있습니다.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자매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영어사역은 자매들이 없기에 자기 여자 친구를 고려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오는 주일이 저희 교회에서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저와 제 아내와 영어 사역 담당 전도사님에게 오는 주일이 마지막 주일임을 말해줬습니다.  이미 저의 두 딸은 다른 교회를 함께 다니고 있는데 이젠 아들 딜런도 저희 교회를 떠납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여 그가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떠나는 것을 지지하고 있습니다(물론 제 어머님은 반대?하셨지만요. 지금도 아마 동의는 안하실 겁니다. ).  사랑하는 딸 예리는 요즘 무척 바쁩니다. ㅎ 남자 친구가 타주에서 여기 남가주로 내려와서 한 2주인가 자기 친척 집에 머물고 있는데 예리가 매일까지 아침에 가서 둘이 하루 종일 연애하다가 아마 새벽에서야 집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저희 부부는 이미 잠을 자고 있기에 ㅎㅎ).  참고로 그 형제는 외동아들이랍니다. ㅎㅎ  저희 부부가 볼 때에는 부모님에게 독립을 하지 못한 형제입니다.  아주 착한 아들인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에 저희 부부를 만나는 것도 자신의 부모님에게 여쭤본 것 같더군요.  그런 사실을 제 아내가 알았을 때 충분히 아내는 염려가 될 것입니다.  물론 저도 고부갈등을 겪고 있는 외동아들 형제들의 부부 관계를 생각하면 충분히 염려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예리도 하나님께 의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보다 예리를 제일 사랑하시기에 저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다시금 마음을 먹고 그녀를 믿음으로 계속해서 지지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그들의 연애 관계가 어떻게 될지 미래에 대한 생각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저희 부부가 염려하고 있는 데로 실제로 현실화가 된다고 할지라도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예리에게 신뢰를 주고 예리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떠할지라도 다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오늘 아침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막둥이 예은이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제 육신의 생명을 주님께 불러 가셔도 예은를 구원해 주시길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했는데 몇 달 전에 하나님께서 그녀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언니 예리랑 다니는 교회의 기독교 동아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인격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저에게까지 차 안에서 간증을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예은이도 주님의 뜻이라면 남자 친구도 새겨서 앞으로 결혼을 할 텐데 이 중대한 일도 그저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이미 제 마음에서는 이 세 자녀들을 다 떠나보냈고 지금도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제 자신과의 싸움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제 자녀들을 신뢰를 주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 결과도 다 하나님께 맡기고자 기도하면서 좀 애쓰고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여기서 맺고자 합니다.  저는 지난 주 토요일 새벽기도회 후 창세기 13 8절 말씀 중심으로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1)라는 제목 아래 말씀 묵상의 글을 적어서 여기 저기 나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기도회 후에 그 제목을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라고 수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말씀 묵상 제목을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2)라고 정하지 않고 자식을 떠나보내야 합니다!”라고 정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리 제목을 정한 이유는  제 마음에 자식을 믿음으로 떠나보내지 못한 부모님들로 인해(특히 어머니들?) 그들의 결혼한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엿보았고 지금도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어머님와의 갈등으로 인해 마음이 얼마나 아팠으면 제 앞에서까지 눈물을 흘렸던(심지어 남편 형제까지도 처음 보는 제 앞에서 눈물을ㅠㅠ) 자매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또 다른 부부는 제가 보기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 오랜 세월동안 지속돼 오면서 부부 관계에 지대한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그 부부도 보면 과부가 되신 시어머니가 외동아들을 믿음으로 떠내보내지 못해서 그녀의 아드님의 가정에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부부는 부인 자매가 자기의 시어머니와 남편의 관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저에게 말한 내용이 생각납니다.  남편과의 큰 다툼으로 그 가정에 큰 위가가 와서 지금도 겪고 있는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죽 했으면 그 큰 위가 과정에 그 남편 형제가 저에게 연락이 와서 자살을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렇게 제가 제 주위에 세 부부를 두리뭉실하게 나눈 이유는 제가 볼 때 부모님(어머니)이 자식(외동아들)을 믿음으로 떠내보내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생각할 때 저는 이 말씀 묵상 제목을 자식을 떠나보내야 합니다!”라고 갈급한 심정으로 정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말씀 묵상이 제 자신에게 먼저 적용한 이유는 제 자신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그가 사랑하는 조카 롯을 믿음으로 떠나보냈던 것처럼 제 자신도 제 세 자녀들을 떠나보냈고 지금도 떠나보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떠나보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제가 그들을 떠나겠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 전까지 저는 가정의 가장으로 주님이 저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아내와 세 자녀들을 양육할 책임이 있는 자로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들을 떠나보내는데 헌신한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룻을 떠나보내돼 그가 선택한 동쪽인 소돔과 고모라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곳을 멸하셨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서 악하며 큰 되인들만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비록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리도 사람들이 악하며 큰 죄인인줄 모르고 그 동쪽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요 우리 사람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아시고서도(6:5) 이 죄악된 악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버리셨습니다(요일3:16,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라고 크게 소리 지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하는 아들의 소리를 외면하셨습니다.  그렇게 외면하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그러기에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제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딜런, 예리, 예은이를 떠나보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고 있는,

 

 

 

 

제임스 김 나눔

(2022 7 30,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세 자녀 딜런, 예리, 예은이를 믿음으로 떠나보내기로 다시금 헌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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