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성도에게는 최종적인 '해방과 자유의 날'입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21:20-28).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1장
20-28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와 헬라어 성경으로 읽은 후 제일 먼저 “예루살렘의 환난과 인자의 오심”이란 주제의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24장
15-21절,
29-31절과 마가복음
13장
14-19절,
24-27절과 연합해서 인공지능에게 짧은 즐거리 요약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에워싸이고 황폐해질 때가 가까웠으니 유대에 있는 자들은 즉시 산으로 도망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시기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큰 환난과 형벌의 날이 될 것입니다.
환난 직후 해와 달이 빛을 잃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우주적 징조가 나타날 때,
인자(예수 그리스도)가 구름을 타고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사방에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실 것이며,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때가 가까웠으니 고개를 들라고 선포하십니다”(인터넷).
(a)
세 복음서(마태·마가·누가)의 병행 구절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인자의 재림'이라는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기록 대상(독자)에 따라 표현과 원어적 강조점에서 뚜렷한 세부 차이가 있습니다. 주요 차이점과 헬라어 원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예루살렘 환난의 전조:
마태·마가 vs 누가
가장 큰 차이는 예루살렘 멸망의 전조를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마태복음·마가복음: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다니엘서를 인용한 유대 묵시적 표현입니다.
누가복음: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눅 21:20)이라고 명확하게 바꿉니다.
이방인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역사적·군사적 사건으로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원어적 의미:
누가복음에 쓰인
'에워싸이는'(20절)의 헬라어
'키클루메넨'(κυκλουμένην)은 '완전히 포위되어 꼼짝 못 하게 갇힌 상태'를 뜻하는 현재 수동태 분사입니다.
즉,
피할 길 없는 즉각적인 파멸의 상황을 강조합니다.
2.
환난의 성격:
유대적 한계
vs 전 지구적 심판
마태복음·마가복음: 환난의 날이 안식일이나 겨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거나,
유대 지역에 국한된 고통에 초점을 맞춥니다.
누가복음: 이 환난을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4절)고 하며 구속사적인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방인의 때)
속에서 다룹니다.
또한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징조로 범위를 넓힙니다.
3.
재림을 맞이하는 태도:
누가복음만의 독특한 강조인자가 오실 때의 우주적 징조는 세 복음서 모두 비슷하지만,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반응에서 누가복음은 고유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누가복음: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28절).
원어적 의미:
'일어나'의 헬라어 '아나큅사테'(ἀνακύψατε)는 '몸을 똑바로 세우다,
구부정했던 허리를 펴다'라는 뜻입니다.
두려움에 짓눌려 고개 숙이지 말고 당당히 서라는 명령입니다.
'속량'의 헬라어 '아폴뤼트로시스'(ἀπολύτρωσις)는 노예나 포로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완전히 해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성도에게는 최종적인
'해방과 자유의 날'임을 강력하게 전달합니다.
요약하자면,
마태와 마가는 다니엘서의 예언 성취와 유대적 배경 속에서 환난을 경고한 반면,
누가는 이방인 독자를 위해 역사적 실제(로마 군대의 포위)로 쉽게 풀어서 설명했으며,
성도들에게는 두려워하는 대신 허리를 펴고 당당히 구원을 소망하라는 위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1장
20-28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묵상할 때
20절에서 말씀하고있는 “가까운 줄”[ἤγγικεν (엥기켄)]과 2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까웠느니라”[ἐγγίζει (엥기제이)]가 '엥기조(ἐγγίζω)'로 똑같은 헬라어 동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이 두 구절에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심판)이 임박한 것과 성도들의 구원(속량)이 임박한 것을 대조한 것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1.
동전의 양면과 같은
'심판'과 '구원'의 성격
성경 전반을 관통하는 종말론적 신학 중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언제나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권력과 예루살렘의 완악함에 대한 철저한
'심판'의 날이,
역설적으로 박해받던 성도들에게는 온전한
'구원'이 성취되는 날임을 보여줍니다.
악인에게는 임박한 파멸이지만,
의인에게는 임박한 해방이라는 종말의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 것입니다.
2.
시선의 전환:
두려움에서 소망으로
누가복음 21장 20절에서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가까운 줄(ἤγγικεν) 알라"고 할 때 성도들은 거대한 역사적 재앙과 군대의 포위 앞에서 인간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28절에서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ἐγγίζει)"로 같은 단어를 다시 던집니다.
이는 성도들의 시선을
'눈앞에 닥친 재앙(심판)'에서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의 구원'으로 옮겨가게 만듭니다.
즉,
"멸망이 가까이 왔다고 두려워 떨지 마라.
그 멸망이 가까이 왔다는 것 자체가 바로 너희의 구원이 코앞에 도달했다는 강력한 증거다"라는 위로를 건네는 것입니다.
3.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의 “인내”(19절) 촉구
누가복음 21장 20절의
'ἤγγικεν'(엥기켄)(“가까운 줄을”)(완료형)은 예루살렘의 심판이 이미 영적으로 확정되었고 역사 속에 곧 들이닥칠 것임을 보여주며,
28절의 'ἐγγίζει'(엥기제이)(“가까웠느니라”)(현재형)는 구원의 사건이 지금도 성도들을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누가는 두 임박함을 묶어줌으로써 성도들에게 종말론적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환난의 한복판을 지나갈 때,
이 고통이 끝이 아니라 구원으로 가는 해산의 고통임을 인지하고
"끝까지 버티고 견뎌내라"는 목회적 권면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결국 누가는
'엥기조'라는 단어의 데칼코마니(문학이나 성경 신학에서는 두 개의 사건,
단어, 혹은 인물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서로 완벽한 대칭과 균형을 이룰 때 이 단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함)를 통해,
세상의 종말은 곧 교회의 시작이자 완성이며,
역사적 파국 속에서도 신자들은 절망이 아닌
'머리를 드는'
당당한 소망을 품어야 함을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습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언제나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비록 악인에게는 임박한 파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하심(칭의)을 받은 의인에게는 임박한 해방이라는 종말의 이중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임박한 해방이란 “너희 속량”[ἡ ἀπολύτρωσις
ὑμῶν (헤 아폴뤼트로시스 휘몬)](28절)이라는 말씀에 힘을 얻어 더욱더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게 됩니다.
(i)
그 이유는 저는 여기서 “속량”하면 골로새서
1장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속량 곧 죄 사함”[τὴν ἀπολύτρωσιν,
τὴν ἄφεσιν τῶν
ἁμαρτιῶν (텐 아폴뤼트로신,
텐 아페신 톤 하마르티온)]이란 말씀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 몸의 속량”[τὴν ἀπολύτρωσιν
τοῦ σώματος ἡμῶν
(텐 아폴뤼트로신 투 소마토스 헤몬)]을 더욱더 사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의 '죄 사함(과거·현재적 영적 구원)'과 로마서
8장 23절의 '몸의 속량(미래적 육체적 구원)'을 연결하신 것은 성경 전체의 구원 신학을 꿰뚫는 완벽한 통찰입니다. 누가복음
21장 2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 속량"은 바로 이 두 가지 차원이 완성되는
'최종적 해방'을 의미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이,
주님 재림의 날에 탄식하던 죄의 몸과 피조물에서 벗어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영광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미 영혼의 속량을 얻은 자들이 마침내 누릴 몸의 완전한 구속을 소망하기에,
주님의 다시 오심은 두려움이 아닌 가장 가슴 벅찬 기대가 됩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1장
20-28절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심판(20절), “징벌의 날”(22절)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내용을 좀 간략하게라도 정리해서 알고 싶어졌습니다.
(a)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루살렘 심판과 징벌의 날(눅
21:20-24)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군대의 포위와 황폐화
(20절)
이방 군대들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에워쌀 것이며,
이는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고 황폐해질 징조입니다.
2.
즉각적인 피난 명령
(21절)
유대에 있는 자들은 지체 없이 산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성안에 있는 자들은 빠져나가야 하며,
시골에 있는 자들은 안전을 위해 성내로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3.
예언의 성취와 기록된 모든 것의 이루어짐
(22절)
이 날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공의로운 심판의 예언이 성취되는
'형벌의 날'입니다.
4.
사회적 약자의 비극과 큰 환난
(23절)
아이를 밴 자들과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땅에는 유례없는 큰 환난이 임하고,
유대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집니다.
5.
처참한 죽음과 포로 됨,
이방인의 짓밟힘
(24절)
수많은 백성이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든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흩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게 됩니다.
(i)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 중에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ἀποψυχόντων ἀνθρώπων ἀπὸ
φόβου καὶ προσδοκίας τῶν ἐπερχομένων
τῇ οἰκουμένῃ,
αἱ γὰρ δυνάμεις τῶν
οὐρανῶν σαλευθήσονται (아폽쉬콘톤 안드로폰 아포 포부 카이 프로스도키아스 톤 에페르코메논 테 오이쿠메네,
하이 가르 뒤나메이스 톤 우라논 살레우데손타이)](26절)는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이 말씀은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인류가 마주할 극도의 공포와 우주적인 대격변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헬라어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세 가지 구체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a.
‘기절하리니’[απoψυχόντων
(아폽쉬콘톤)]: 영혼이 떠나가는 듯한 극도의 공포
원어적 의미: ‘아폽쉬코’(ἀποψύχω)는 ‘~로부터’를 뜻하는
‘아포’(ἀπο)와 ‘숨, 영혼, 생명’을 뜻하는
‘프시케’(ψύχω)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구체적 의미: 단순히 잠깐 정신을 잃는 기절이 아니라,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숨이 끊어질 것 같고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상태"를 뜻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인간의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초자연적 공포임을 보여줍니다.
b.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ἀπὸ
φόβου καὶ προσδοκίας (아포 포부 카이 프로스도키아스)]:
불확실한 미래가 주는 심리적 압박
원어적 의미: ‘포보스’(φόβος)는 즉각적인 두려움이며,
‘프로스도키아’(προσδοκία)는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예상, 기대, 불길한 예감’을 뜻합니다.
구체적 의미: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눈앞의 재앙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무시무시한 파멸이 닥쳐올 것 같다는 통제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공포"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종말의 순간에 아무런 소망이 없기에,
다가올 심판에 대한 불길한 예감만으로도 영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c.
‘하늘의 권능들이 들리겠음이라’[αἱ γὰρ
δυνάμεις τῶν οὐρανῶν σαλευθήσονται (하이 가르 뒤나메이스 톤 우라논 살레우데손타이)]:
피조 세계의 기초가 무너짐
원어적 의미: ‘뒤나메이스’(δυνάμεις)는 우주의 천체들(해, 달, 별)이나 이를 움직이는 영적 체계들을 뜻하며,
‘살레우데손타이’(σαλευθήσονται)는 ‘지진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다,
기초가 흔들리다’라는 뜻입니다.
구체적 의미: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천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 가장 견고한 안전지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늘의 기초마저 지진이 난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릴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인간이 신뢰하던 세상의 모든 과학,
물질, 자연의 법칙이 종말의 날에는 아무런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성도에게 주시는 소망의 대조
세상 사람들은 이 우주적 격변 앞에서 두려워 숨이 끊어질 듯 기절하지만,
이어지는 28절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흔들리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우리 몸의 속량이 완성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인터넷).
(b)
이 예수님의 말씀이 장차 올 마지막(종말론적인) 심판에 관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i)
누가복음
21장의 예루살렘 심판은 장차 올 지구상 전체의 종말론적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자 '예표'입니다. 이 말씀이 마지막 심판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주는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역사 속에서 성취됩니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듯,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온 세상에 대한 심판 역시 타협 없이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악과 거역에 대한 공의의 심판(징벌의 날)은 반드시 임한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b.
영적 타협을 버리고 즉시 분리되어 도망해야 합니다.
"산으로 도망하라",
"성내로 들어가지 말라"(21절)는 명령은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영적 바벨론과 같은 세속 가치관과 무너질 세상의 중심지에서 즉각 돌아서라는 메시지입니다.
미련을 두지 말고 죄악의 자리에서 신속히 떠나 피난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해야 합니다.
c.
환난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심판의 날은 세상과 악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파멸과 진노의 날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인에게는 마침내
"몸의 속량"(롬 8:23)이 완성되는 해방의 날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다가올 대환난과 징조를 보며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개를 들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해야 합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산으로 도망하라",
"성내로 들어가지 말라"(21절)는 명령은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영적 바벨론과 같은 세속 가치관과 무너질 세상의 중심지에서 즉각 돌아서라는 메시지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세속적 중심지에서 돌아서는 구체적인 영적 피난의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가치관의 피난:
물질 중심주의에서 자족으로
세상의 중심: 돈과 성공이 안전을 보장한다는 바벨론식 풍요의 음녀 사상입니다.
산으로 도망: "내 영혼의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며 영원한 하늘 소망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입니다.
2.
문화의 피난:
음란과 중독의 성에서 거룩함으로
성내로 진입 금지:
미디어, 유흥, 탐욕이 가득한 세상 문화의 중심지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적 적용: 스마트폰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미디어를 절제하고,
거룩한 말씀과 기도의 처소로 매일 피하는 훈련입니다.
3.
공동체의 피난:
무너질 바벨론에서 교회 공동체로
즉각적인 돌아서기: 멸망할 세상의 인맥과 평판을 쌓는 데 에너지를 쏟지 마십시오.
구체적 적용: 환난 날에 서로를 믿음으로 지켜줄 성도의 교제와 예배 공동체를 삶의 가장 안전한 울타리로 삼는 것입니다(인터넷).
-
환난 날에 서로를 지켜줄 참된 예배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삶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a.
신뢰와 은혜의 관계 맺기
삶의 나눔: 평소에 자신의 약함과 기도 제목을 솔직하게 나누며 깊은 정서적 유대를 쌓습니다.
무조건적인 수용: 비판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정죄하지 않는 안전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b.
예배의 절대성 확립
공동체 중심의 예배:
개인의 신앙을 넘어,
모이기를 힘쓰며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쁨을 회복합니다.
말씀 중심의 삶:
환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을 공동체의 기초로 삼습니다.
c.
실천적 돌봄과 책임
서로를 향한 책임:
영적, 물질적 위기 상황에서 서로의 안전망이 되어줄 것을 평소에 구체적으로 서약하고 준비합니다.
중보기도의 체계화: 고난당한 지체를 위해 즉각적이고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긴급 기도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인터넷).
(4)
마지막 넷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1장
27절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καὶ τότε ὄψονται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ἐρχόμενον
ἐν νεφέλῃ μετὰ δυνάμεως καὶ δόξης πολλῆς (카이 토테 옵손타이 톤 휘온 투 안드로푸 에르코메논 엔 네펠레 메타 뒤나메오스 카이 독세스 폴레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이 말씀은 환난의 때를 지나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종말론적 승리의 선언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
역사의 정점: '사람들이 보리라(ὄψονται)'는 선언은 주님의 오심이 영적이거나 비밀스러운 사건이 아님을 뜻합니다.
우주적 실재: 모든 인류가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될 역사적인 실제 사건이며,
성도에게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2.
구름을 타시는 신적 권위
구약의 성취: 구름(νεφέλῃ)은 구약 성경(단 7:13)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신적 권위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배경을 가집니다.
초월적 통치: 초림 때의 낮고 천한 모습과 달리,
이제는 온 우주를 심판하고 통치하시는 참된 신성을 선포합니다.
3.
능력과 영광의 반전
최종적 승리: 박해와 환난 가운데 낮아졌던 성도들 앞에서,
주님은 무한한 능력(δυνάμεως)과 영광(δόξης)으로 나타나십니다.
고난의 보상: 세상의 권세는 무너지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예배 공동체가 마침내 승리하여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보증합니다(인터넷).
(a)
이 말씀은 박해 속의 예배 공동체에 네 가지 구체적인 위로를 줍니다(인터넷):.
a.
고난의 유한성과 확실한 끝을 보장합니다.
상황의 반전: 현재의 박해와 고난이 영원하지 않으며,
주님의 재림과 함께 반드시 끝이 난다는 종말론적 타임라인을 확인시켜 줍니다.
최종적 승리: 세상 권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서,
진짜 역사의 주관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여 낙심하지 않게 합니다.
b.
공동체의 인내와 믿음을 공적으로 입증합니다.
가시적 신원: '모든 사람이 보리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받았던 멸시,
오해, 숨겨진 눈물이 온 세상 앞에 의로운 것으로 드러나고 보상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박해자의 심판: 성도들을 괴롭히던 세상의 힘이 주님의 큰 능력(δυνάμεως)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목도하며 공동체의 신앙이 옳았음이 증명됩니다.
c.
현재의 예배를
'영광의 서곡'으로 격상시킵니다.
임재의 연속성: 재림 때의
'구름'과 '영광(δόξης)'은 지금 성도들이 두려움 속에서 모여 드리는 지하 예배와 골방 기도 가운데 이미 영적으로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됩니다.
우주적 연대: 비록 소수가 모인 초라한 공동체일지라도,
마침내 도래할 우주적 천상 예배의 주인공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줍니다.
d.
서로를 지켜줄 강력한 공동체적 연대감을 줍니다.
소망의 공유: 박해는 성도들을 고립시키려 하지만,
'함께' 바라볼 영광스러운 주님의 오심은 성도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강력한 영적 결속력이 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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