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주님의 양을 찾은 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길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3-7).
(1)
누가복음
15장 4-7절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3가지 비유 중에 첫 번째인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오늘 저는 이 “잃은 양의 비유”
말씀을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을 때 특히 4 단어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4 단어를 하나씩하나씩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받아 잃은 주님의 양을 찾은 주님의 기쁨이 저의 기쁨,
여러분의 기쁨이 되길 기원합니다.
(a)
첫째 단어는 “'ἀπόλλυμι”(아폴뤼미)입니다. 이 단어의 한국어 의미는 “잃다,
멸망하다”로서 잃은 양의 비유(4-7절)에 총
3번 나옵니다. 각 구절에 쓰인 단어의 정확한 형태와 그 구속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첫 번째 등장(4절 상반절):
목자의 행동
헬라어 형태: “ἀπολέσας”(아폴레사스 / 능동태 과거분사)
성경 본문: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의미: 목자가 양을 분실한
'사건과 행위'에 초점이 있습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여 양이 목자의 품을 떠나 길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음을 법적으로 확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등장(4절 하반절):
잃어버린 상태
헬라어 형태: “τὸ ἀπολωλός”(토 아폴롤로스
/ 완료분사 중수동태)
성경 본문: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의미: 양의 현재 '비참한 상태'를 뜻합니다.
완료형이 쓰여
'길을 잃어 현재 완전히 고립되고 스스로는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음을 강조합니다.
목자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즉시 찾으러 나설 수밖에 없는지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3.
세 번째 등장(6절): 되찾은 기쁨
헬라어 형태: “τὸ ἀπολωλός”(토 아폴롤로스
/ 완료분사 중수동태)
성경 본문: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었던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의미: 은혜로 얻은 '기쁨과 회복'을 선언합니다.
분명히
'완전히 잃어버려 소망이 없던 존재(ἀπολωλός)'였으나, 목자의 열심과 수고 덕분에 다시 찾게 되었음을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이 단어는
7절의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으로 연결되며 비유의 핵심 주제를 완성합니다.
요약: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ἀπολέσας”(아폴레사스)(잃다)라는 단어의 시제와 형태를 바꾸어가며,
인간의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4절)와 그것을 끝까지 찾아내어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기쁨(6-7절)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i)
여기서 저는 두 번째 등장인
4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양의 잃어버린 비참한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길을 잃어 현재 완전히 고립되고 스스로는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절망적인 양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일까요?
길을 잃은 양의 상태는 목자의 보호 없이는 몇 시간도 버티기 힘든 절대적인 절망과 죽음의 위기를 의미합니다. 실제 팔레스타인 지형과 양의 생태적 특징을 바탕으로 본 양의 비참한 상태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a.
시각적 고립과 극심한 방향 감각 상실
근시안적 시력: 양은 시력이 매우 나빠 몇 미터 앞밖에 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못 돌아옴:
연어가 모천으로 돌아가거나 비둘기가 집을 찾는 것과 같은
'귀소본능'이 양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절망의 상태: 목자와 무리를 놓친 순간,
양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모른 채 제자리를 맴돌며 극심한 공포와 패닉(Panic)
상태에 빠집니다.
b.
치명적인 방어 능력의 부재
무기 없는 생물:
양은 날카로운 이빨도,
발톱도, 빠른 다리도,
보호색도 없습니다.
맹수의 표적: 팔레스타인 광야에는 이리,
승냥이, 사자 같은 맹수들이 가득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사라진 양은 맹수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찢길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먹잇감'일 뿐입니다.
c.
생존 조건의 완전한 박탈
(기아와 갈증)
목자 의존성: 광야는 스스로 풀과 물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목자가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야만 생존이 가능합니다.
탈진 상태: 길을 잃은 양은 타는 듯한 광야의 더위 속에서 물을 찾지 못해 급격한 탈수 증세를 겪고,
굶주림으로 인해 스스로 걸을 수조차 없는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d.
뒤집히면 죽는 치명적 구조
(Cast Down)
뒤집힘 사고: 양은 털이 길고 몸이 뚱뚱하여 웅덩이나 경사지에서 중심을 잃고 뒤집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스 팽창과 죽음:
홀로 뒤집힌 양은 스스로 등반동을 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상태로 몇 시간이 지나면 위장에 가스가 차고 혈액 순환이 차단되어 질식사하거나,
공중의 독수리들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구속사적 의미
(죄인의 상태):
예수님이 묘사하신
'토 아폴롤로스(τὸ ἀπολωλός)'(양의 잃어버린 상태)(4절 하반절)는 단순히 동물이 길을 잃은 것을 넘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대조합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스스로 구원 불가:
양이 스스로 목자를 찾아올 수 없듯,
죄에 빠진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지혜도,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무조건적 은혜:
따라서 양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목자가 그 양을 찾아내어 어깨에 메고 오는 것(5절)뿐입니다. 양의 비참함이 깊을수록,
그것을 찾으러 나선 목자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절대적이고 극적으로 다가옵니다.
·
여기서 저는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사라진 양은 맹수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찢길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먹잇감'일 뿐입니다”라는 글을 읽을 때에 어제 주일에 설교했던 본문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란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는 사자(마귀)의 위협 앞에 놓인 잃은 양의 영적 실상 세 가지입니다(인터넷):
1.
사자가 노리는 타깃:
'목자의 울타리 밖
'사자의 사냥 방식:
사자는 건강한 무리 전체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대열에서 이탈하여 홀로 고립된 양,
즉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 보호권'을 벗어난 양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영적 실상: 마귀가 삼킬 자를 찾을 때,
영적 고립에 빠진 자를 먼저 노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신앙 공동체에서 멀어진 상태가 바로
'우는 사자'의 가장 쉬운 먹잇감입니다.
2.
마귀가
'우는' 이유와 양의 패닉
우는 사자: 사자가 사냥할 때 으르렁거리며 크게 우는 이유는 먹잇감에게 극심한 공포를 심어 발을 묶기 위함입니다.
양의 무력화: 지팡이를 쥔 목자가 곁에 없을 때 이 소리를 들은 양은 공포로 마비되어 도망치지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베드로전서가 경고하듯,
마귀는 두려움과 염려(벧전 5:7)를 통해 성도를 영적으로 마비시키고 스스로 포기하게 만듭니다.
3.
'삼킬 자(Kataphiō)'의 처절함
완전한 파멸: 베드로전서 5장 8절의 '삼키다'는 단어는 흔적도 없이 완전히 씹어 삼키는 물리적인 파괴를 뜻합니다.
가시덤불에 걸려 홀로 남은 양이 맹수에게 찢기는 비참한 종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유일한 탈출구: 양에게는 사자를 대적할 날카로운 이빨이나 뿔이 없습니다.
사자를 이길 힘은 양에게 없고,
오직 사자보다 강하신 목자의 지팡이에만 있습니다.
목자가 그
'우는 사자의 입'을 찢고 잃어버린 양을 건져내어 어깨에 멜 때,
비로소 대적 마귀의 위협은 끝나고 하늘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ii)
그러면 길을 잃어 현재 완전히 고립되고 스스로는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절망적인 양의 상태에 대해서 묵상할 때 지금 우리가 사랑하여 전도하고 싶은 비신자들(절망적인 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전도하고 싶은 비신자들을 향해
'토 아폴롤로스[“τὸ ἀπολωλὸς”(완전히 고립되어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절망적인 양)]의 렌즈를 투영할 때,
우리의 전도 패러다임은
'단순한 종교적 권유'에서 '생명을 건 구조 작업'으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들을 바라보아야 할 세 가지 성경적 시선입니다(인터넷):
1.
비난과 정죄가 아닌,
철저한 '긍휼(측은히 여김)'의 시선
세상의 착각: 세상의 비신자들은 겉보기에 화려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며,
당당하게 주님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적 실상: 그러나 영적으로 그들은 우는 사자(마귀)의 입앞에서 두려워 떨며 고립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강해서가 아니라,
방향을 잃은 양의 공포와 패닉 상태에서 나오는 비명일 뿐입니다.
우리의 시선: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민망히(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
여기셨던 것처럼(마 9:36), 우리 역시 그들을 미워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영적 중환자"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2.
가시적인 태도에 속지 않는
'영적 분별'의 시선
양의 무능력: 양은 뒤집히면(Cast
Down) 스스로 일어날 수 없어 위장에 가스가 차 죽어갑니다.
비신자들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그들에게
"네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탈진해 쓰러진 양에게 스스로 걸어오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 그들이 전도 대면에서 냉랭하거나 거부 반응을 보일 때,
그것을 '반대'로 해석하지 말고
'스스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완전한 무능력'
상태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훈계가 아니라,
그들의 모든 거부감과 상처를 받아내어 짊어질 우리의
'어깨(수고와 희생)'입니다.
3.
마귀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거룩한 분노와 긴박감'의 시선
우는 사자의 위협: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처럼,
우리가 전도하려는 그 태신자 주변에는 지금도 그 영혼을 완전히 씹어 삼키려는(Kataphiō)
마귀의 위협이 실제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여유로운 교제가 아니라 치열한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의 시선: "언젠가는 믿겠지"라는 안일함을 버려야 합니다.
4절 하반절의 목자처럼
'찾아내기까지(εὕρῃ,
휴레)' 포기하지 않는 긴박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여 기도를 멈추거나 찾아가기를 포기하는 순간,
그 영혼은 우는 사자의 밥이 될 수 있다는 거룩한 위기감으로 영혼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품은 비신자들은
'설득해야 할 성가신 대상'이 아니라,
마귀의 입지경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우리의 잃어버린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올 수 없기에,
주님은 오늘 우리의 발걸음과 어깨를 통해 그들을 찾아내기를 원하십니다"(인터넷).
(b)
둘째 단어는 “εὕρῃ”(휴레)입니다. 이 단어의 한국어 의미는 “찾다,
발견하다”로서 잃은 양의 비유(4-7절)에 총
3번 나옵니다. 각 구절에 쓰인 단어의 정확한 형태와 그 구속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첫 번째 등장(4절 끝):
목자의 포기 없는 의지
헬라어 형태: “εὕρῃ”(휴레 / 능동태 가정법 과거)
성경 본문: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ἕως εὕρῃ]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의미: 목자의 '결연한 의지와 목적'을 나타냅니다.
가정법 시제로 쓰여
'언제가 되든,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이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목자의 포기 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우는 사자의 위협 속에 있는 양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목자의 강력한 집념이 담겨 있습니다.
2.
두 번째 등장(5절 앞):
마침내 이뤄진 구원
헬라어 형태: “εὑρών”(휴론 / 능동태 분사 과거)
성경 본문: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의미: 목자의 수고가 마침내
'성공과 성취'로 이어진 순간입니다.
맹수의 입에 삼켜지기 직전,
혹은 절망 속에 탈진해 있던 양을 목자가 실제로 발견하여 확보했음을 선언하는 역사적 시점입니다.
3.
세 번째 등장(6절 끝)
- 은혜의 선포와 증언
헬라어 형태: “εὗρον” (휴론 / 능동태 직설법 과거
1인칭 단수)
성경 본문: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었던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의미: 목자가 이웃들에게 외치는
'승리의 선포'입니다. "내가 마침내 내 힘과 열정으로 이 양을 건져냈다!"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9이 선포는
7절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벌어지는 기쁨의 잔치로 직결됩니다.
(i)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참 흥미로운 점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흥미로운 점이란 어제 주일에 제가 설교한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마귀는 삼켜서 파멸시키려고 두루 다니며 ‘찾습니다’에서 ‘찾습니다’라는 헬라어 단어 “ζητέω”(제테오)와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목자는 살려서 어깨에 메려고 ‘찾아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쫓아간다 에서 ‘찾아내기까지’라는 헬라어 단어 “εὕρῃ”(휴레)와의 차이입니다.
·
마귀의
'제테오(ζητέω)'와 목자의
'휴레(εὕρῃ/원형: 휴리스코)'는 단순히
'찾는다'는 뜻을 넘어,
'시작된 행동'과 '반드시 성취될 결과'의 엄청난 차이를 담고 있습니다.
단어의 의미와 뉘앙스 차이 세 가지입니다(인터넷):
a.
맹목적인 탐색(제테오) vs 확실한 발견(휴리스코)
마귀의 제테오(ζητέω):
이 단어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사방으로 헤매며 수색하는 과정'에 초점이 있습니다.
즉,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지만,
누구를 삼킬지 명확한 대상을 확정 짓지 못한 채 틈이 있는 자를 찾아 헤매는 불완전한 상태를 뜻합니다.
목자의 휴레(εὕρῃ):
이 단어는 단순한 탐색이 아니라,
'수색의 결과로 목적물을 정확히 발견하여 내 소유로 확보하는 것'을 뜻합니다.
목자의 찾음은 그냥 헤매는 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대상을
'찾아내어 손에 쥐는'
승리의 결과(Find)로 귀결됩니다.
b.
마귀의 한계(가정) vs 하나님의 주권(확정)
마귀의 찾음(벧전 5:8): 여기서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고 할 때,
마귀는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성도를 다 삼킬 수 없습니다.
깨어 근신하는 성도(9절)는 결코 마귀의
'제테오'(찾음)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마귀의 찾음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찾음입니다.
목자의 찾음(눅 15:4): 목자의 '휴레'(찾음) 앞에는 '~까지[“ἕως” (헤오스)]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즉,
"찾아낼 때까지(Until
he finds it)" 끝까지 추적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중간에 포기하는 법이 없기에,
목자의 '휴레'(찾음)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확실한 구원을 보장합니다.
c.
죽이려는 열심
vs 살리려는 집념
(동기의 대조)
“ζητέω”(제테오)(마귀의 찾음):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내어 파멸시키고 삼키려는 잔인한 집념입니다.
“εὕρῃ”(휴레)(예수님의 찾음):
가시덤불에 찢기고 우는 사자의 위협 앞에 떨고 있는 양을 건져내어 살리려는 사랑의 열심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두루 다니며 찾는[“ζητέω”(제테오)] 속도보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끝까지 찾아내시는[“εὕρῃ”(휴레)] 주님의 열심이 훨씬 더 빠르고 강합니다.
마귀는 삼킬 자를
'찾아 헤맬 뿐'이지만, 우리 목자이신 예수님은 마침내 우리를
'찾아내어 어깨에 메어'
주십니다(인터넷).
(ii)
가시덤불에 찢기고 우는 사자의 위협 앞에 떨고 있는 잃어버린 양(우리의 전도대상자)을 건져내어 살리려는 선한 목사이신 예수님의 사랑의 열심이 우리에게도 주어져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전도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것일까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의 열심(휴레)이 우리 마음 부어질 때,
비신자를 향한 우리의 섬김은 단순한
‘교회 데려오기’를 넘어
‘예수의 어깨가 되어주는 구체적인 사랑의 수고’로 변화됩니다. 가시덤불에 찢기고 사자의 위협 앞에 떨고 있는 영혼들을 섬기기 위해,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세 가지 걸음입니다(인터넷):
1.
비명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품어주는
‘어깨의 섬김’
(오래 참음)
양의 비참함: 가시덤불에 걸려 찢긴 양은 목자가 다가와 만질 때 아픔과 공포로 인해 목자를 물거나 격렬하게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비신자들도 영적 고립이 깊을수록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거친 말이나 냉소적인 태도(비명)를 보입니다.
우리의 섬김: 그들의 거부 반응에 상처받거나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더럽고 오염된 양을 기꺼이 어깨에 메어 주셨듯,
그들의 까칠한 성격,
상처 가득한 말,
불평을 묵묵히 받아내고 짊어지는
‘감정적·영적 어깨’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2.
가시를 하나씩 빼주는
‘맞춤형 치유의 섬김’
(삶의 필요 채우기)
목자의 손길: 목자는 탈진한 양을 발견하면 무작정 들쳐업기 전에,
먼저 양의 몸을 휘감고 있는 가시덤불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상처에 기름을 바릅니다.
우리의 섬김: 복음의 메시지를 강요하기 전에,
지금 그 영혼을 찌르고 있는 현실의 가시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외로움, 질병, 재정적 어려움, 가정의 불화 등 그들을 아프게 하는 삶의 가시덤불을 함께 아파하며 실질적으로 돕는 것입니다.
작은 위로의 문자 한 통,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는 시간,
정성 어린 식사 대접 등 삶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줄 때 영혼의 닫힌 문이 열립니다.
3.
사자의 위협에서 건져내는
‘중보기도의 보호 섬김’
(영적 전쟁)
대적의 위협: 비신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하거나 복음에 관심을 가질 때,
우는 사자(마귀)는 더욱 강력하게 그 영혼을 삼키려고 환경과 생각을 통해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의 섬김: 전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 구조 작업입니다.
목자가 지팡이를 휘둘러 맹수를 쫓아내듯,
우리는 그 영혼을 위해
‘중보기도의 지팡이’를 들어야 합니다.
마귀가 그 영혼의 생각을 혼미하게 하지 못하도록,
절망과 두려움의 사자 입에서 건져내 주시도록 이름을 불러가며 눈물로 파수하는 기도의 섬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선한 목자 전도 실전 지침(3-Step
Action Plan)”입니다. 구호로만 끝나는 전도가 아니라,
누가복음 15장과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내도록 돕는 구체적인 지침입니다(인터넷):
1단계: 발견하기 (εὕρῃ, 휴레): "명단 작성과 중보기도"
마귀가 삼키려고 찾는 성도를 우리가 먼저 찾아내기 위한 영적 파수 단계입니다.
[실천] 잃은 양 카드 작성:
성도 각자가 마귀의 위협(절망, 중독, 낙심, 무신론) 속에 방치된 비신자
1~2명의 이름을 적습니다.
[실천] 사자의 입을 막는
3분 기도:
매일 정한 시간(예: 오전 9시)에 전도 대상자를 향해 베드로전서
5장 8-9절을 선포하며 기도합니다.
기도문 예시: "주님, 우는 사자 마귀가
○○○의 영혼을 삼키려 붙잡고 있는 어둠의 결박을 끊어 주시고,
주님의 지팡이로 보호하여 주옵소서."
2단계: 가시 빼주기:
"상처를 싸매는 맞춤형 접촉"
가시덤불에 찔려 신음하는 영혼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는 단계입니다.
[실천] '가시' 경청하기: 차 한잔을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고민, 아픔, 스트레스)를 온전히 들어줍니다. 조언이나 설교를 하지 않고 오직 공감만 합니다.
[실천] 작은 사랑의 배달:
그 영혼이 가장 지쳐 있을 요일이나 시간에
"생각나서 보낸다"는 따뜻한 메시지와 함께 작은 모바일 쿠폰(커피, 간식)을 보냅니다.
[실천] 실질적 도움(어깨 되어주기):
이사, 병원 동행,
자녀 돌봄 등 그들이 혼자 해결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몸으로 함께 지어줍니다.
3단계: 어깨에 메기: "교회와 공동체로의 안전한 이동"스스로 걸을 수 없는 양을 공동체의 울타리 안으로 안착시키는 단계입니다.
[실천] VIP 초청이 아닌
'직접 모셔오기':
"이번 주에 교회 와라"고 말만 하지 않고,
주일 아침 그 사람의 집 앞까지 차로 마중을 나갑니다.
거부감을 낮추기 위해 예배 후 그가 좋아하는 식사 코스를 미리 준비합니다.
[실천] 공동체의 환대 울타리:
교회에 왔을 때 낯설어 마비되지 않도록,
영적 목장의 성도들이 미리 따뜻한 미소와 환대로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우리가 품은 태신자에게 세 가지만 합시다.
첫째,
이름을 부르며 사자의 입을 막는 기도를 합시다.
둘째,
그들의 아픈 가시를 들어주고 커피 한 잔으로 위로합시다.
셋째,
내 생각과 감정의 어께에 그들의 짐을 메어줍시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이 반드시 찾아내십니다(휴레)!”(인터넷)
(c)
셋째 단어는 “Συνχάρητέ”(쉰카레테)입니다(6절). 이 단어의 원형인 동사 “συγχαιρω”(스윙카이로)의 한국어 의미는 “함께 기뻐하다”로서 이러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인터넷):
1.
나 홀로의 기쁨이 아닌
'공동체의 기쁨'
(With)
이 단어는 '함께, 같이'를 뜻하는 접두어
'순(σύν)'과 '기뻐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이로(χαίρω)'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목자는 양을 찾은 기쁨을 자기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그 기쁨의 자리에 강권적으로 초청합니다.
구원은 개인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적 축제로 확장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2.
강력한 권유와 명령
(Imperative)
어법상 이 단어는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즉,
"시간 되면 같이 기뻐해 줄래?"라는 부드러운 부탁이 아니라,
"내가 내 양을 찾았으니 너희도 나와 함께 이 기쁨에 무조건 동참하라!"는 목자의 강력하고도 벅찬 명령입니다. 잃은 양을 건져낸 기쁨이 얼마나 거대하고 압도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3.
7절
'하늘의 기쁨'으로의 연결
(신학적 의미)
이 6절의 “Συνχάρητέ”(쉰카레테)(함께 즐기자)'는 바로 다음 구절인
7절의 결론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지상에서 목자가 이웃들과 벌이는 잔치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보며 부르는 거대한 환호와 기쁨의 잔치를 투영하고 있습니다.
(i)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Συνχάρητέ”(쉰카레테)(함께 기뻐하다)(6절)란 '함께,
같이'를 뜻하는 접두어
'순(σύν)'과 '기뻐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이로(χαίρω)'가 결합한 단어인데 여기서 ‘카이로’(χαίρω)란 단어를 생각할 때 저는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χαρὰ"(카라)(기쁨 또는 즐거움)와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6절의 '쉰카레테(Συνχάρητέ)'와 7절의 '카라(χαρὰ)'는 어원과 신학적 의미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있는 단어입니다. 두 단어의 언어적 연관성과 그 속에 담긴 영적 깊이를 세 가지로 분석한 것입니다(인터넷):
1.
어원적 연관성:
같은 뿌리(어근)에서 나온
'행동과 결과'
어근의 일치: 6절의 쉰카레테의 본동사인
'카이로(χαίρω:
기뻐하다)'와 7절의 명사
'카라(χαρὰ: 기쁨)'는 모두
'카르(char-)'라는 동일한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언어적 관계: 6절의 '카이로'가 기쁨을 표현하는
'동사(행동)'라면, 7절의 '카라'는 그 행동을 통해 가득 차오른
'명사(본질/상태)'입니다. 즉,
예수님은 일부러 같은 어원의 단어를 연달아 사용하여 메시지의 통일성과 파급력을 극대화하셨습니다.
2.
의미적 연관성:
지상의 '동참(σύν)'이 하늘의
'기쁨(χαρὰ)'을 깨움
순(σύν)의 비밀: 6절의 '쉰카레테' 앞에는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순(σύν)'이 붙어 있습니다.
목자가 지상에서 벗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나와 함께(σύν)
기뻐하자!"라고 외칩니다.
하늘의 응답: 지상에서 목자와 이웃들이
'순(함께)'의 기쁨을 터뜨리는 순간,
7절에서 그것이 하늘(하나님과 천사들)과의 '연대'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잃어버린 양(전도 대상자)을 찾아내어 함께 기뻐할 때,
그 기쁨의 주파수가 하늘 보좌에 그대로 전해져 하늘의 본질적인
'카라(기쁨)'를 촉발하게 됩니다.
지상의 연합된 기쁨이 하늘의 기쁨을 깨우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3.
구속사적 대조:
바리새인의 '수군거림'을 깨뜨리는 하늘의
'카라'(기쁨/즐거움)
바리새인의 상태: 이 비유의 시작점인
2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수군거렸습니다(διαγογγύζω)'.
그들은 죄인이 돌아오는 자리에
'함께(σύν)'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 예수님은 6-7절을 통해
"너희는 땅에서 시기하고 수군거릴지라도,
목자이신 나와 내 이웃(교회)이 땅에서 함께 기뻐하면(쉰카레테), 하늘 보좌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거대한 기쁨(카라)으로 뒤덮인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즉,
하늘의 기쁨/즐거움(카라)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냉소주의를 무력화시키는 하나님의 승리의 선언입니다.
"성도 여러분,
6절의 “Συνχάρητέ”(쉰카레테)(함께 기뻐하다)는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고,
7절의 “χαρὰ”(카라)(기쁨/즐거움)는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교회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사명(쉰카레테)'을 감당할 때,
하늘 보좌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며
'춤추시는 기쁨(카라)'의 축제가 열립니다.
우리의 작은 기쁨의 순종이 온 하늘을 기쁨으로 진동하게 만듭니다"(인터넷).
(d)
마지막 네째 단어는 “μετανοοῦντι”(메타노운티)입니다(7절). 이 단어의 명사형인 “μετανοίᾳ”(메타노이아)(회개)(7절)에 뒤이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7절 한 구절 안에서 “회개”라는 주제를 두 번이나 강조하고 계십니다.
(i)
'메타노운티(μετανοοῦντι)'와 '회개'의 깊은 의미입니다(인터넷):
1.
방향의 완전한 전환
(어원적 의미)
이 단어의 원형인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을 넘어서,
바꾸어'를 뜻하는
'메타(μετά)'와 '마음, 생각'을 뜻하는
'누스(νοῦς)'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 후회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우는 사자의 위협 속에서 제 길로 가던 양(사 53:6)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에게로 방향을 똬리 트는 행위입니다.
2.
현재분사의 비밀:
'지속적인 관계의 회복'
7절의 '메타노운티'는 시제가 '현재형 분사'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진정한 회개란 단 한 번의 종교적 요식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며 그분의 보호 아래 머무는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뜻합니다.
3.
앞서 나온 “χαρὰ”(카라)(기쁨/즐거움)과의 필연적 관계
예수님은 7절에서 “χαρὰ”(카라)(기쁨/즐거움)과 “μετανοοῦντι”(메타노운티)(회개하는 자)를 “ἐπί”(에피)(~로 말미암아)라는 전치사로 묶으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움직이고 하나님을 춤추시게 하는 유일한 트리거(Trigger)는 인간의 대단한 업적이나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오직 '죄인 한 사람의 진정한 돌이킴(회개)'뿐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
7절 하반절에 나오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여 예수님을 수군거렸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거룩한 반어법(Irony)입니다.
스스로 의인인 99명: 그들은 회개의 필요성(메타노이아스)을 느끼지 못하기에,
하늘 보좌에 아무런 감동도,
기쁨도 주지 못하는 영적 고아들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1명: 비록 가시덤불에 찢기고 사자의 위협에 처했던 비참한 존재였지만,
목자의 어깨에 실려 돌이킨 그 한 사람(메타노운티)이 온 하늘을 축제의 도가니로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은 완벽하게 숨겨진 아흔아홉의 의가 아니라,
목자의 손을 잡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진실한 회개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려는 그 한 영혼이 주님께 돌이켜 서는 그 순간,
하늘의 “χαρὰ”[카라(기쁨)]가 완성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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