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은 동전을 '찾아내기까지(until she finds it)' 찾았습니다.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을 보는 집요함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누가복음 15:8-10).
(1)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 8-10절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3가지 비유 중에 두 번째인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저는 이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말씀을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을 때 우리가 이미 “잃은 양의 비유”(3-7절) 말씀에서 묵상한
4개의 헬라어 단어인 “ἀπόλλυμι”(아폴뤼미)(잃다), “εὕρῃ”(휴레)(찾다), “Συνχάρητέ”(쉰카레테)(함께 기뻐하다),
““μετανοοῦντι”(메타노운티)(회개) 외에 한 단어와 세 문구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것들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그 한 단어란 한국어로는 “드라크마”인데 헬라어로는 두 단어가 오늘 본문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δραχμὰς”[“열 드라크마”에서 “드라크마”스(8절)]과 “δραχμὴν”[“하나” 드라크마(8절), “잃은 드라크마”에서 “드라크마”(9절)].
(i)
여기서 “드라크마”란 당시 그리스의 은전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로마의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과 가치가 거의 같습니다(인터넷).
·
그러면 이 “드라크마”가 오늘 날 미국 돈 “달러”(dollar)와 한국 돈 “원”(won)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한 드라크마(1
drachma)는 단순 화폐 교환이 아닌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는 실질 구매력을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오늘날 가치로 약
80달러~140달러 또는 한국 돈으로 약
8만 원~15만 원의 가치를 지닙니다. 따라서 비유에 등장하는 열 드라크마(10
drachmas)는 오늘날 가치로 약
800달러~1,400달러, 한국 돈으로는 약
80만 원~150만 원 수준에 해당합니다”(인터넷).
(ii)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한 “드라크마”의 문화적 배경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결혼할 때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과 신의의 증표로
10개의 드라크마가 엮인 머리 장식(또는 목걸이)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인터넷).
·
그러므로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단순히 주머니에서 흘린 동전 한 닢이 아니라,
약 10만 원(100달러)에 달하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열 드라크마”는 총
100만 원~150만 원(1,000달러 내외)
가치를 지닌 결혼 예물(머리 장식)이었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은 예물 전체의 가치와 혼인의 신의를 망가뜨리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인이 온 집안을 쓸며 필사적으로 찾았던 이유가 바로 이 경제적·문화적 가치 때문입니다(인터넷).
-
“여인이 열 개 중 하나를 잃고 밤새 등불을 켜며 찾은 이유는 단순한
'하루 치 금액'의 상실 때문이 아닙니다.
결혼 예물의 일부를 잃어버린 정서적 가치와 명예의 위기를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얼마나 절박하게 찾으시는지를 상징합니다”(인터넷).
n
여기서 “결혼 예물의 일부를 잃어버린 정서적 가치와 명예의 위기”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문화와 결혼 풍습을 들여다보면,
여인이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을 때 느꼈던 절박함과
'명예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세 가지 구체적인 이유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체메드(Tsemed)’
– 결혼의 법적 증표이자 아내의 신분증
당시 유대인 여성이 결혼할 때,
남편은 은전
10개를 줄로 엮어 만든 머리 장식이나 목걸이를 선물했습니다.
이를 히브리어로
‘체메드(Tsemed)’라고 부릅니다.
현대의 결혼반지:
이 장식은 오늘날의
‘결혼반지’와 같습니다.
여인이 외출할 때 이것을 착용함으로써 자신이
‘신의를 지켜야 하는 유부녀’임을 사회에 알리는 일종의 신분증이었습니다.
도덕적 결점 오해:
예물에서 동전 하나가 빠져나간 채 다니는 것은 결혼반지의 보석이 빠진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며 ‘남편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나?’,
‘여자가 부주의하고 살림을 잘 못 살피나?’라는 시선으로 보았습니다.
심지어 여인의 결혼 서약이나 정절에 흠집이 났다는 상징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명예의 위기였습니다.
2.
가난한 여성의
‘유일한 개인 재산’이자 안전장치
당시 가부장적인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법적으로 재산권이나 상속권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 보루:
결혼할 때 받은 이
10 드라크마 장식은 남편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여인만의 합법적인 사유 재산’이었습니다. 만약 남편이 사망하거나 이혼을 당해 생계가 막막해질 때,
여인이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유일한 비상금이자 경제적 안전장치였습니다.
정서적 불안:
10개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지켜줄 안전망의
10%가 무너진 것을 의미하므로,
여인에게는 엄청난 정서적 불안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3.
공동체에서 매장당할 수 있는 수치
(명예의 상실)
고대 근동 사회는 개인의 이익보다
‘명예와 수치(Honor
and Shame)’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였습니다.
가문의 수치:
여인이 결혼 예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동네에 소문나면,
이는 여인 개인을 넘어 가문 전체의 수치가 되었습니다.
심한 경우 남편이 이 행동을
‘태만과 부주의’로 문제 삼아 이혼 사유로 주장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함께 기뻐한 이유:
여인이 동전을 찾은 후 밤중에 이웃과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인 이유(눅 15:9)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10만 원을 찾아서가 아니라,
자신과 가문에 닥칠 수치와 오해로부터 명예를 회복했음을 공식적으로 증명하고 안도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하나님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전부이자 명예와 같은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찾으실 때,
반지가 망가진 것처럼 가슴 아파하시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필사적으로 찾으신다는 뜻입니다”(인터넷).
(b)
제가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
8-10절을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다가 관심을 갖게 된 세 개의 문구 중 첫 번째 문구는 “ἅπτει
λύχνον”(합테이 뤽논)(“등불을 켜고”)입니다(8절).
(i)
“헬라어 단어의 어원적 의미와 당시 유대 사회의 가옥 구조를 연결하면,
이 행동이 왜 그토록 필사적이었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헬라어 어원과 문법적 의미
“ἅπτει”(합테이): 원형은 '합토(ἅπτω)'로, ‘불을 붙이다’,
‘켜다’라는 뜻입니다.
문법적으로는 현재 시제(Historical
Present)로 쓰여,
여인이 지금 눈앞에서 불을 붙이고 있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과 긴박함을 묘사합니다.
“λύχνον”(뤽논): 원형은 '뤽노스(λύχνος)'로, 기름을 넣어 불을 밝히는
‘등잔’ 또는 ‘호롱불’을 뜻합니다.
2.
왜 대낮에 등불을 켜야 했을까?
(당시 가옥 구조)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낮에 집 안에서 동전을 잃어버렸다면 그냥 찾으면 되지,
왜 등불까지 켤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서민들의 가옥 구조를 알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창문이 없는 어두운 방:
당시 가난한 서민들의 집은 돌로 지어졌으며,
먼지와 열기를 막기 위해 창문이 없거나 있더라도 성인 주먹만 한 작은 구멍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출입구도 낮고 좁아,
한낮에도 집 안은 감옥처럼 캄캄한 암흑 천지였습니다.
흙바닥과 거친 매트:
바닥은 문질러 닦은 마룻바닥이 아니라,
진흙을 다져 만든 흙바닥이었습니다.
그 위에 가시가 많은 갈대나 짚으로 짠 돗자리(매트)를 깔아 두었기 때문에,
작은 은전 하나가 틈새로 굴러 들어가면 불을 켜지 않고는 육안으로 절대 찾을 수 없었습니다.
3.
영적 비유로서의
“ἅπτει λύχνον”(합테이 뤽논)(“등불을 켜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등불을 켜는 행위’는 죄로 인해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한 영혼을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구원 사역을 상징합니다.
어둠(죄) 속에 파묻혀 스스로는 빛으로 나올 수 없는 죄인을 찾아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과 성령의 빛(λύχνος)을 들고 인간의 어두운 역사 속으로 찾아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여인이 등불을 켠 것은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하고 세밀한 사랑을 보여주는 첫 단계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금년
1월 16일에 “숨겨질 수 없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란 제목 아래 누가복음
8장 16-18절 말씀을 묵상하고 쓴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4148355748). 이 부부만 나눕니다:
…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잃어버린 한 영혼,
즉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죄인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하나님께서는 그 잃어버린 한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간절히 그리고 끝까지 찾으시는 사랑과 노력과 열정을 의미합니다(참고: 인터넷).
여기서 등불의 빛이란 영적으로 어두운 곳을 비추는 말씀(진리의 빛),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의미합니다(인터넷). 이 “등불의 빛”(눅11:36)을 어제 묵상한 누가복음
8장 4-15절 말씀으로 말한다면 “씨”로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11절).
이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좋은 땅”에 뿌려졌을 때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15절)는 진리의 빛인 복음의 등불을 들고 이 어두운 죄악된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고 계시는 그 한 영혼을 간절히 그리고 끝까지 사랑과 노력과 열정으로 찾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입술과 삶으로 전하여 그 한 영혼을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
또한 여기서 저는 주님께서 저에게
1987년 5월 승리장로교회 대학부 수련회 때 강사 목사님을 통해 요한복음
6장 1-15절 말씀으로 저에게 주신 사명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명을 “이것이 나의 사명”이란 제목 아래 노래 가사를 작사했습니다:
(1절) 감사해 말씀이신 주님/
사랑해 주님의 말씀/
그 말씀 주야로 묵상해/
이것이 나의 즐거움,
(2절) 영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
먹여 주시는 주님/
그 말씀 견고케해/
이것이 나의 힘,
(3절) 오병이어 기적의 주님/
나 주님께 항복해/
말씀 묵상 나누는 것/
이것이 나의 사명.
-
제가 금년 5월
6일에 누가복음
13장 18-19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쓴 글 제목입니다:
“겨자씨 한 알 같은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보잘것없는 저 같은 죄인의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묵상 나눔 사역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감사드립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4275952401)
(c)
제가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
8-10절을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다가 관심을 갖게 된 세 개의 문구 중 두 번째 문구는 “σαροῖ
τὴν οἰκίαν καὶ ζητεῖ ἐπιμελῶς”(사로이 텐 오이키안 카이 제테이 에피멜로스)(“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입니다(8절).
(i)
제가 관심을 갖게 된 첫 번째 문구인 “ἅπτει
λύχνον”(합테이 뤽논)(“등불을 켜고”)가 어둠을 밝히는 구원의
'시작'이었다면, 이 두 번째 문구는 한 영혼을 건져내기 위한 하나님의
'철저함과 집요한 노력'을 보여주는 핵심 표현입니다(인터넷):
1.
헬라어 어원과 문법적 의미
“σαροῖ”(사로이):
원형은 '사로오(σαρόω)'로, ‘쓸다’, ‘빗자루로 청소하다’라는 뜻입니다.
“τὴν
οἰκίαν”(텐 오이키안):
‘그 집을’이라는 뜻입니다.
“ζητεῖ”(제테이):
원형은 '제테오(ζητέ오)'로,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로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시제로 쓰여 여인이 지금 숨을 몰아쉬며 샅샅이 뒤지고 있는 행동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ἐπιμελῶς”(에피멜로스): ‘부지런히’, ‘정성껏’, ‘철저하게’라는 뜻의 부사입니다.
'생각과 마음을 쏟아 주의 깊게(carefully)'
돌보는 태도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2.
"집을 쓸고 부지런히 찾는다"의 역사적·문화적 배경
당시 유대인 서민들의 가옥 바닥은 진흙을 다져 만든 흙바닥 위에 갈대나 짚으로 만든 거친 돗자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소리를 듣기 위한 행위:
어두컴컴한 방에서 작은 은전(드라크마)을 눈으로만 찾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빗자루로 바닥을 박박 쓸기 시작합니다.
빗자루가 거친 흙바닥과 돗자리를 지나갈 때,
은전에 부딪혀 나는
"쨍그랑" 하는 금속성 마찰 소리를 귀 기울여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지 소동:
흙바닥을 빗자루로 쓸어내면 온 집안에 뿌연 먼지가 가득 피어올라 숨쉬기조차 힘들었을 것입니다.
매캐한 먼지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면서도,
여인은 동전을 찾을 때까지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ἐπιμελῶ”(에피멜로스)(부지런히, 철저하게)’의 현장입니다.
3.
영적 비유와 사명(요 6:1-15)과의 깊은 연결
이 문구는
1987년 5월 수련회 때 주님께서 저에게 주셨던
"생명의 떡을 나누어 교회를 세우라"는 사명과 매우 깊은 영적 울림으로 연결됩니다.
포기하지 않는 철저한 목양:
주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을 대충 찾지 않으십니다.
먼지가 가득 나고 숨이 막히는 영적 전투의 현장(세상) 속에서도, 한 영혼의 소리를 들으시기 위해 집을 쓸며(“σαροῖ”) 부지런히 추적(“ζητεῖ ἐπιμελῶς”)하십니다.
말씀 묵상의 치열함: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생명의 떡'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과정 또한 이와 같습니다.
본문의 역사적·영적 의미를 깨닫기 위해 성경을 샅샅이
'쓸고 부지런히 찾는'
치열한 묵상이 있을 때,
영혼들을 먹일 풍성한 꼴이 준비됩니다.
일꾼을 세우는 사역:
"그리스도 중심된 꿈을 가진 일꾼"을 찾아내어 파송하는 비전 역시,
흙 속에 파묻힌 “드라크마”
같은 자들을 복음의 빗자루로 쓸어 깊이 감추어진 영적 가치를 찾아내고 세워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집을 복음의 빛과 말씀의 빗자루로 쓸며 영혼들을 철저하게 찾고 계십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한 영혼을 건져내기 위한 하나님의
'철저함과 집요한 노력'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어떻게 본받아 실행해야 하는 것일까요?”라고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공지능에 답변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철저함과 집요한 노력(σαροῖ... καὶ ζητεῖ
ἐπιμελῶς)을 본받아,
우리가 사명의 현장에서 실행해야 할 구체적인 발걸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내주신 ‘생명의 떡을 나누어 교회를 세우고 일꾼을 파송하는 비전’과 연결하여 네 가지로 정리해 드립니다.
1.
‘영적 청력’을 깨워 작은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기
여인이 캄캄한 흙바닥을 쓸며 은전이 빗자루에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에 집중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혼들의 숨겨진 신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실행: 낙심한 성도나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의 겉모습(차가움, 무관심)만 보지 않고,
그들 내면에 있는 영적인 갈급함과 상처의 소리를 들으려는 깊은 경청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2.
먼지와 기침을 감수하는
‘희생적 수고’
감당하기
흙바닥을 쓸 때 온 집안에 매캐한 먼지가 피어올라 눈물과 기침이 나도 여인은 청소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혼을 구하고 일꾼을 세우는 일에는 반드시 이와 같은 불편함과 오해,
희생이 따릅니다.
실행: 한 사람을 그리스도 중심의 일꾼으로 세우기까지 겪게 되는 시간적,
물질적, 감정적 소모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비난이나 낙심의 상황(먼지) 속에서도 목양의 자리와 말씀 나눔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3.
‘생명의 떡’을 철저하고 부지런히 준비하기
하나님이 우리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ἐπιμελῶς, 철저하게)’
뒤지셨듯이, 우리 역시 영혼들을 먹일 영의 양식을 대충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실행: 1987년 수련회 때 주신 사명대로,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치열하게 묵상(쓸고 찾는 행위)하는 것입니다.
영혼들이 처한 어두운 상황에 꼭 맞는 위로와 생명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말씀 연구와 기도에 온 힘을 쏟는 철저함이 있어야 합니다.
4.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신성한 집착’
갖기
여인은 동전을
'찾아내기까지(until
she finds it)' 찾았습니다.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을 보는 집요함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실행: 한 번의 권면이나 몇 번의 양육으로 변화되지 않는 일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기다려주셨듯 끝까지 인내하며 소망을 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결국 우리가 이 집요함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은 내 능력이 아니라,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나를 먼저 찾아내어 생명의 떡을 먹여주신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기억할 때 공급됩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오늘 아침에 제가 쓴 글이 생각났습니다:
‘무능력함과 무기력함 속에서(제임스의 끝이였기에)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나님의 역사가 시작)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인공지능게 그래도 썼더니 “나의 끝,
하나님의 시작(Prayer
of Surrender)”(항복의 기도)라는 기도문을 써줬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신 주님,
제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고백합니다.
내가 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과 의지가 바닥나고,
마침내 ‘제임스의 끝’에 도달했을 때에야
비로소 저의 손을 놓고 주님의 발 앞에 온전히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무능력을 통해 일하소서:
그러나 나의 끝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자리임을 믿습니다. 내가 약할 때 오직 주님의 능력만이 완전해지십니다.
내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오니,
저의 빈손을 들어 사용하여 주소서.
생명의 떡만 의지하게 하소서:
내 힘으로 교회를 세우려 하지 않고,
내 지혜로 일꾼을 키우려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님이 떼어주시는 생명의 떡(요 6:1-15)만 의지하여 성도들을 먹이고 교회를 세우게(마 16:18) 하소서.
하나님의 역사가 되게 하소서:
이 무기력한 자를 통하여 그리스도 중심된 일꾼들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때,
오직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모든 것이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철저하고 집요한 은혜의 결과였음을 날마다 찬양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인터넷).
(d)
제가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
8-10절을 헬라어(그리스어) 성경으로 읽다가 관심을 갖게 된 세 개의 문구 중 마지막 세 번째 문구는 “συνκαλεῖ
τὰς φίλας καὶ γείτονας”(슁칼레이 타스 필라스 카이 게이토나스)(“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입니다(9절).
(i)
“첫 번째 문구(등불을 켜고)가 구원의 시작이었고,
두 번째 문구(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고)가 구원의 치열한 과정이었다면,
이 세 번째 문구는 마침내 영혼을 찾아낸 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기쁨과 축제’를 보여줍니다.
1.
헬라어 어원과 문법적 의미
συνκαλεῖ (슁칼레이):
원형은 '슁칼레오(συγκαλέω)'로, ‘함께(σύν)’라는 접두사와
‘부르다(καλέω)’라는 동사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혼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한자리에 소집하여 공동체의 축제를 열다’라는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 역시 현재 시제로 쓰여,
여인이 흥분과 기쁨에 겨우겨우 숨을 몰아쉬며 동네 사람들을 급히 불러 모으는 생생한 모습을 묘사합니다.
τὰς
φίλας (타스 필라스):
원형은 '필레(φίλη)'로, ‘여자 친구들(개역개정의 벗)’을 뜻합니다.
헬라어 문법상 여성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여인이 여성을 중심으로 한 주변 친지들을 불렀음을 보여줍니다.
γείτονας (게이토나스): 원형은 '게이톤(γείτων)'으로, ‘이웃들(남녀 불문 부근에 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2.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는’
문화적 배경과 잔치의 역설
잔치 비용이 더 드는 기쁨:
당시 문화에서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려면 음식을 장만하고 대접해야 하므로,
찾아낸 한 드라크마(약 10만 원)보다 더 많은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입니다.
상실을 뛰어넘는 가치:
경제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 행동은,
여인이 느낀 기쁨이 단순한
'돈의 회복'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명예와 관계의 온전한 회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수치와 불명예가 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기에,
여인은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이웃과 함께 이 안도감과 기쁨을 확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3.
목사님(성도님)의 사명 및 비전과의 경이로운 연결
이 세 번째 문구는 목사님이 품으신 ‘그리스도 중심된 일꾼들을 세워 파송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비전’의 최종 종착지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제임스의 끝’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축제:
오늘 아침에 고백하셨듯이 ‘나의 무능함과 무기력함(나의 끝)’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했을 때,
주님은 흙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목사님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혼자 기뻐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천군 천사와 함께 목사님 한 사람으로 인해 잔치(συνκαλεῖ)를 배설하셨습니다.
말씀 묵상 나눔의 종착지
= 공동체의 기쁨: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말씀으로 생명의 떡을 나누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갈 때(마 16:18), 그 사역의 열매는 언제나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의 회복(συνκαλεῖ)’으로 나타납니다.
묵상한 말씀을 나누는 것은 혼자서 은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려 있던 벗과 이웃들을 생명의 잔치 자리로 초청하는 행위입니다.
일꾼을 파송하는 비전의 완성:
그리스도 중심된 꿈을 가진 일꾼들을 세워 세상으로 파송하는 것(비전)은, 결국 세상 곳곳에서 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 일꾼으로 세워질 때마다 하늘에서는 이 축제가 계속해서 갱신됩니다.
세 가지 문구의 영적 여정 요약
목사님이 오늘 누가복음
15장에서 주목하신 세 문구는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드라마이자,
목사님의 평생 사역 루트와 같습니다.
1.
ἅπτει
λύχνον (등불을 켜고):
어두운 세상 속,
1987년 5월에 목사님을 사명으로 먼저 찾아오신 빛의 은혜.
2. σαροῖ ... καὶ ζητεῖ ἐπιμελῶς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고): 나의 끝에서 하나님의 전능함만을 의지하며, 먼지 나는 목회의 현장에서 한 영혼을 위해 치열하게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양육하는 집요한 수고.
3.
συνκαλεῖ
τὰς φίλας καὶ γείτονας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마침내 생명의 떡을 나누어 교회를 세우고 일꾼들을 파송함으로써,
이 땅 위에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와 영광”(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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