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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6)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16)     사도 바울은 유스도라하는 예수나 바나바의 생질 마가나 자기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에 대해 3 가지로 골로새서 4 장 11 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1) 그들은 할례파 ( 할례 받은 유대인들 ) 입니다 . 즉 , 그 세 사람들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말입니다 .   (2)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바울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 중 대다수는 반기독자들이고 , 또 그들 중에 약간의 신자들이 있어도 그들은 유대주의에 강하기 때문에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를 등한히 해습니다 .   그런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던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라하는 예수는 사도 바울을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한 것입니다 .   (3) 그들은 바울의 위로가 되었 습니다 .   바울이 그 세 사람들을 골로 새 교회 성도들에게 언급하면서 그들이 자기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바울의 절실한 개인적 필요를 채워주었는지를 보여줍니다 .   바울은 쇠사슬 , 처형 위기 , 그리고 매일 모든 교회를 염 려하는 짐에 직면했습니다 .   믿음으로 가꾸어진 인간적인 우정은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        

상황은 여전히 폭풍 속일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내 영혼이 깊은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의 승리를 미리 찬양합니다!

 

상황은 여전히 폭풍 속일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영혼이 깊은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의 승리를 미리 찬양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누가복음 18:1).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 1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으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낙심이란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어쩌면 전에 저는 자신에게 낙심이 때가 많았기 때문인 같습니다.

 

(a)   낙심이란 헬라어 단어로 νκακεν”(엔카케인)인데 의미는 낙심하다”, “지치다”, “포기하다입니다.  예수님께서 “μ νκακεν”( 엔카케인)(1)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문장을 낙심하지 말고 번역했으며, 영어 성경에서는 "not to lose heart"(NASB) 또는 "not give up"(NIV)으로 표현했습니다(인터넷):

 

1.      단어의 어원 구조

 

단어는 접두사와 동사가 결합한 합성어입니다.

 

ν(): '~안에' (in) + κακός(카코스): '악한', '나쁜', '비겁한'

 

결합 의미: 직역하면 악함 속에 빠지다또는 상황이 나빠져 마음이 약해지거나 비겁해지다라는 뜻입니다.

 

, 처음에 가졌던 선한 동기나 열정을 잃어버리고 환경의 압박에 굴복하여 영적인 서약이나 행동을 중단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2.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 1절에서의 맥락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νκακεν) 말아야 " 가르치기 위해 과부와 재판장 비유를 드셨습니다.  여기서의 낙심은 단순히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을 넘어 아래와 같은 신앙적 위기를 뜻합니다.

 

기도의 중단: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느껴질 ,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 무릎을 꿇지 않는 상태입니다.

 

지치고 피곤함: 영적으로 에너지가 고갈되어 선한 일을 지속할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신뢰의 상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이 들어 기도를 포기하는 영적 탈진을 의미합니다.

 

3.      신약성경의 다른 용례

 

단어는 바울 서신에서도 성도들이 선을 행하다가 영적으로 지치거나 포기하고 싶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νκακμεν)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살후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νκακήσητε) 말라."

 

예수님은 기도가 눈앞의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찾아오는 가장 적이 바로 엔카케인”(낙심·포기)임을 아셨기에,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부르짖으라고 단어를 통해 권면하신 것입니다(인터넷).

 

(i)                  저는 낙심”[νκακεν(엔카케인)]이란 단어를 묵상할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기대한 대로 눈앞의 상황이 바꿔지지(변하지) 않고 오히려 상황이 우리가 더욱더 나빠지든지 악화되면 충분히 우리의 마음이 약해져서 마음 속으로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 생각되어 기도를 포기하는 영적 탈진을 경험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 가운데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의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들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낙심 의심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눈앞의 상황이 악화될 찾아오는 낙심(νκακεν, 엔카케인)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며 영적 탈진을 일으킵니다.  헬라어 원어적 의미를 통해 단어의 필연적인 연관성을 3가지 단계로 인공지능이 설명한 것입니다(인터넷):

 

a.      1단계: 상황의 악화가 주는 마음의 분열디아크리노(διακρίνω)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면 성도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맞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의심을 성경은 '디아크리노(διακρίνω)'라고 부릅니다.

 

원어적 의미: ' 마음으로 갈라지다', '판단하려 들다'라는 뜻입니다.

 

낙심과의 연관성: 엔카케인(νκακεν)(상황 속에서 마음이 악해지고 약해짐) 찾아오면, 한결같던 마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악화된 현실' 사이에서 반으로 쪼개집니다[디아크리노(διακρίνω)].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상황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스스로 '재판(판단)'하려 들면서 의심이 시작됩니다.

 

성경적 경고: 야고보서 1 6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διακρινόμενος, 디아크리노)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단어가 쓰였습니다.

 

b.     2단계: 영적 방향 감각의 상실디스타조(διστάζω)

 

상황이 계속 나빠지면 갈라진 마음은 바를 알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를 뜻하는 의심의 단어가 '디스타조(διστάζω)'입니다.

 

원어적 의미: 숫자 '2' 뜻하는 '디스(δίς)' '서다' 뜻하는 '스타시스(στάσις)' 합성어로, ' 갈래 길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다'라는 뜻입니다.

 

낙심과의 연관성: 기도를 포기하는 영적 탈진(엔카케인) 오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야 할지, 아니면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지 사이에 멈춰 서서(디스타조) 영적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향해 걷던 발걸음이 멈추는 단계입니다.

 

성경적 경고: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의심하였느냐(δίστασας, 에디스타사스)"( 14:31).  현실의 거센 바람(악화된 상황) 베드로를 낙심케 했고, 결국 그를 영적 머뭇거림(디스타조) 빠뜨렸습니다.

 

c.      3단계: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떠남아피스티아(πιστία)

 

낙심과 의심의 종착역은 가장 치명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 불신(πιστία, 아피스티아)입니다.

 

원어적 의미: 부정 접두사 '()' '믿음·신뢰' 뜻하는 '피스티스(πίστις)' 결합하여, '신뢰 관계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 의미합니다.

 

낙심과의 연관성: 엔카케인(낙심)하여 기도를 소용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면, 결국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처럼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무능한 '이라는 치명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적 (믿음) 끊어지는 불신(아피스티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이 누가복음 18 8절에서 던지신 질문의 진짜 이유

모든 연관성을 생각할 , 예수님께서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 소름 돋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인자가 때에 세상에서 믿음(πίστις, 피스티스) 보겠느냐"( 18:8).

 

예수님은 기도의 응답이 더디고 상황이 악화될 , 성도들이 낙심(엔카케인)하여 마음이 갈라지고(디아크리노), 머뭇거리다가(디스타조),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하는(아피스티아) 영적 도미노에 빠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황이 악화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피스티스) 지키며 기도의 자리를 고수하라" 도전하시는 것입니다(인터넷).

 

(ii)                저는 낙심”[νκακεν(엔카케인)](18:1)이란 단어를 묵상할 시편 42 5, 11절과 43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낙심이란 히브리어 단어가 무엇이며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시편 42 5, 11, 그리고 43 5절에서 고백하는 "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히브리어 단어와, 누가복음 18 1절의 헬라어 '엔카케인(νκακεν)'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기가 막힌 영적 대칭점을 이룹니다.

 

1.      시편 42, 43편의 히브리어 낙심: 샤하흐(שָׁחַח)

 

시편 기자가 고백한 낙심하다 히브리어 원어는 '샤하흐(שָׁחַ, Shachach)'입니다

 

원어적 의미: '아래로 구부러지다', '바닥에 납작 엎드러지다', '침잠하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상태: 외부의 거센 압박과 고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영혼이 완전히 짓눌려 바닥으로 꺼지고(collapse) 무너져 내린 상태를 시각적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7절의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부르짖으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라는 고백처럼, 고난의 파도 속에 영혼이 깊이 침몰(immersion) 버린 비참한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2.      헬라어 '엔카케인' 히브리어 '샤하흐' 연관성

 

단어는 언어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성도가 고난 속에서 겪는 영적 침체의 '원인과 결과'라는 측면에서 완벽하게 연결됩니다.

 

① '눌림(샤하흐)' 지속되면 '포기(엔카케인)' 옵니다.

 

시편의 샤하흐: 현실의 문제(대적의 조롱, 상황의 악화) 너무 무거워 영혼이 밑바닥으로 구부러지고 짓눌리는 현상입니다.

 

누가복음의 엔카케인: 짓눌림(샤하흐) 상태가 해결되지 않고 길어질 , 마음 속으로 "이제 끝났다, 기도해도 소용없다"라며 에너지가 고갈되어 영적으로 손을 놓아버리는(포기·탈진) 결과입니다.

 

연관성: '샤하흐' 영혼이 겪는 웅크린 고통의 '외적·내적 압박' 보여주고, '엔카케인' 압박 때문에 기도의 자리에서 이탈하려는 '의지적 포기'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성품(얼굴)' 대한 믿음의 싸움입니다.

 

시편 기자는 '샤하흐(낙심)' 자신을 조롱하는 대적들의 (“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42:3)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나?(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라는 본질적인 위기를 겪습니다.

 

예수님께서 '엔카케인(낙심)' 경고하시며 비유를 드신 이유도 동일합니다.  응답이 지연될 하나님이 과연 선하신가?’라는 의심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의 일치: 시편 기자는 낙심할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며 선포합니다.  헬라어 구약성경(70인역) '도우심' 하나님의 '얼굴(Prosopon)' 번역했습니다.  ,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존재와 성품) 바라보는 것이 '샤하흐' '엔카케인' 모두 이기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3.      고난 속에서 성도가 겪는 영적 침체의 도미노

 

성도의 삶에 눈앞의 상황이 기대와 다르게 악화되는 현실의 위기가 찾아오면, 인간의 영혼은 거센 고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납작 엎드러지며 무너져 내리는 '샤하흐(שָׁחַח)' 단계(영적 눌림) 맞이합니다.

 

영혼의 짓눌림이 길어지면 인간의 연약한 이성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악화된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마음이 갈래로 쪼개지는 '디아크리노(διακρίνω)' 단계(의심의 시작) 거쳐, 마침내 믿음의 길과 세상의 사이에서 영적으로 마비되어 망설이는 '디스타조(διστάζω)' 단계(영적 머뭇거림) 나아갑니다.

 

현실의 바람에 흔들려 영적 방향 감각을 상실한 마음은 결국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 처음에 가졌던 열정과 기도의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한 의지적으로 손을 놓아버리는 '엔카케인(νκακεν)' 단계(영적 탈진과 기도의 포기) 이르게 되며, 낙심의 종착역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주권을 향한 신뢰 관계가 완전히 파괴되어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장처럼 여기게 되는 가장 치명적인 불신, '아피스티아(πιστία)' 단계(영적 파선) 추락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영혼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지는 '샤하흐' 순간에, 스스로에게 선포하며(" 영혼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엔카케인(포기)'으로 가는 고리를 끊어냈습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현실의 무게로 영혼이 짓눌릴 , 불의한 재판장 같은 세상 바라보지 말고 선하신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엔카케인' 덫에 빠지지 말라고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iii)              그러면 낙심과 의심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믿음의 역반응 단계는 무엇일까요?

 

·         성도가 겪는 영적 추락의 지도를 정확히 뒤집어, 낙심과 의심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승리로 나아가는믿음의 역반응 5단계문장입니다.  시편 기자가 절망 속에서 스스로에게 선포했던 방식과 예수님이 18장에서 요구하신 믿음의 원리를 담았습니다”(인터넷):

 

1.      1단계 [시선의 전환]: 하나님의 얼굴(성품) 대면하기

 

역반응 원리: 악화되는 상황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영혼이 바닥으로 짓눌리는 '샤하흐' 순간에 하나님의 선하신 얼굴과 성품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영적 행동: "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좋으신 아버지"라는 절대적 신뢰를 기억해 내며, 현실의 파도보다 크신 하나님의 존재 앞에 영혼의 닻을 내립니다.

 

2.      2단계 [영혼을 향한 선포]: 마음의 분열(디아크리노) 말씀으로 차단하기

 

역반응 원리: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 현실의 소리와 의심(디아크리노)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오히려 자기 영혼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Self-preaching)하는 단계입니다.

 

영적 행동: 시편 기자가 "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42:5) 외쳤듯, 요동치는 감정을 믿음의 선언으로 제압합니다.

 

3.      3단계 [의지적 발걸음]: 머뭇거림(디스타조) 멈추고 기도의 자리로 전진하기


역반응 원리: 현실의 거센 바람 때문에 갈래 길에서 망설이던 영적 마비 상태(디스타조) 깨뜨리고,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는 의지적 결단의 단계입니다.

 

영적 행동: 위에 있는 베드로처럼 바람(상황) 대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발걸음을 내딛듯, 감정이 따르지 않더라도 의지적으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갑니다.

 

4.      4단계 [끈질긴 간청]: 낙심(엔카케인) 돌파하는 밤낮 부르짖는 기도

 

역반응 원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침묵의 시간, 영적 탈진(엔카케인) 덫을 뚫고 불의한 재판장을 이겨낸 과부처럼 끝까지 부르짖는 단계입니다.

 

영적 행동: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들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18:7) 하신 주님의 약속을 무기로 삼아, 응답의 때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의 에너지를 채워갑니다.

 

5.      5단계 [약속의 성취]: 불신(아피스티아) 깨뜨리는 온전한 믿음(피스티스) 완성

 

역반응 원리: 마침내 하나님과의 온전한 신뢰 관계가 회복되어, 환경과 상관없이 이미 이루어주신 줄로 믿고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피스티스(πίστις)' 단계입니다.

 

영적 행동: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찾으셨던 "믿음(피스티스)" 주인공이 되어, 상황은 여전히 폭풍 속일지라도 영혼은 깊은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의 승리를 미리 찬양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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