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나타나는 날”은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을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누가복음 17:26-30).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26-30절 말씀을 한국어로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3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ᾗ ἡμέρᾳ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ἀποκαλύπτεται(헤 헤메라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아포칼륖테타이)]이란 문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a)
먼저 여기서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란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i)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실 때 가장 즐겨 쓰신 핵심 칭호입니다.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을 뜻하며,
성경 전반을 관통하는 세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인터넷):
1.
구약의 메시아 예언 성취
(다니엘 7장)
가장 중요한 배경은 구약 성경 다니엘서
7장 13-14절의 예언입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존재:
다니엘 환상 속의
'인자 같은 이'는 영원한 권세와 영광,
그리고 모든 백성을 다스릴 나라를 하나님께 받습니다.
신적 메시아:
즉, 예수님이 쓰신
'인자'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종말에 구름을 타고 와서 세상을 심판하고 통치할 신적인 메시아를 선포하는 칭호입니다.
2.
완전한 인간이 되심
(성육신)
이 표현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를 지닌 참인간이 되셨음을 보여줍니다.
낮아지심과 고난:
인자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이 낮아지셨으며,
죄인을 위해 고난받고 죽으셔야 하는 운명을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마 20:28).
우리의 대변자: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몸소 겪으셨기에,
우리를 완벽하게 공감하고 구원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뜻합니다.
3.
유대인들의 정치적 오해를 피함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그리스도)'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들으면 로마를 무력으로 무찌를 정치적·군사적 왕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고,
자신이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임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비정치적이고 신비로운
'인자'라는 칭호를 선택하셨습니다.
요약:
인자 칭호의
3대 성격
고난의 인자: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없고,
배신당하며, 죽임을 당할 분
(마 8:20, 막 8:31)
사역과 권세의 인자: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와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분
(마 9:6, 막 2:28)
영광과 심판의 인자:
마지막 날에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와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
(눅 17:30, 마 24:30)
예수님이 '인자'라고 스스로를 부르신 것은
"나는 너희를 위해 낮아져 고난받는 인간인 동시에,
마지막 날 세상을 심판할 하늘의 왕이다"라는 선언입니다(인터넷).
(b)
그러면 “인자가 나타나는 날”[ᾗ ἡμέρᾳ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ἀποκαλύπτεται(헤 헤메라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아포칼륖테타이)]이란 의미는 무엇일까요?
(i)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역사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을 뜻하는 가정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의 핵심인 “ἀποκαλύπτεται”(아포칼륖테타이)(나타나다)의 어원과 문법적 특징을 살펴보면,
이 날이 어떤 날인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핵심 단어
‘아포칼륖테타이(ἀποκαλύπτεται)’의 의미
이 단어는
‘베일을 벗기다’,
‘드러내다’라는 뜻의 동사 아포칼륍토(ἀποκαλύπτω)에서 유래했습니다.
영어 단어
‘Apocalypse(묵시/계시)’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감추어졌던 신성의 완전한 공개:
초림 예수님은 영광을 감추고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자 심판주라는 본래의 신적 영광이 전 우주에 숨김없이 통째로 폭로(Be
revealed)됩니다.
수동태(Passive)의 의미:
문법적으로 수동태입니다.
즉,
인자가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아들의 영광을 온 세상 앞에 강제로 드러내시는 사건임을 나타냅니다.
현재 시제(Present)의 신비:
헬라어 문법상 미래에 일어날 일임에도
'현재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수사학적으로
"반드시 일어날 너무나도 확실하고 생생한 미래"를 선언할 때 쓰는
'예언적 현재(Prophetic
Present)' 표현입니다.
2.
“인자가 나타나는 날”의 3가지 영적 의미
누가복음 17장 30절의 앞뒤 문맥(노아의 때,
롯의 때)과 연결해 볼 때,
이 날은 세 가지 성격을 가집니다.
①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임하는 날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유황 불비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사고파는 일상에 빠져 있을 때 예고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 역시 세상이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을 때,
도둑같이 불시에 임할 것을 뜻합니다.
② 완전한 분리(심판과 구원)가 일어나는 날
이 날은 단순히 구경하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칼로 자르듯 집행되는 날입니다.
성경은 그날에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눕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눅 17:34)이라고 경고합니다.
세상 정욕을 뒤돌아보던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미련을 둔 자는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③ 성도들에게는 최고의 영광과 위로의 날
악인들에게는 감추어고 싶었던 자신들의 죄와 심판이 드러나는 두려운 날이지만,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는 눈물과 고난이 끝나고 주님과 함께 영광에 참여하는 궁극적인 승리의 날이 됩니다.
요약
"인자가 나타나는 날"은 초림 때 가려져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심판주로서의 영광이,
하나님에 의해 온 천하에 완전히 베일을 벗고 드러나는 날(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인터넷).
(2)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눅17:30)은 “노아의 때”(26절)와 “롯의 때”(28절)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들은 어떠한 때였을까요?
(a)
“노아의 때”[ταῖς ἡμέραις Νῶε
(타이스 헤메라이스 노에)]:
27절에 4개의 헬라어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i)
첫째 단어는 “ἤσθιον”(에스디온)(“사람들이 먹고”)입니다.
1.
어원과 문법적 의미
원형: '먹다'라는 뜻의 기본 동사 에스디오(ἐσθίω)에서 나왔습니다.
문법 분석: 미완료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복수입니다.
뉘앙스: 헬라어에서 미완료 시제는 과거에 그 행동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지속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즉,
어쩌다 한 번 먹은 것이 아니라 심판의 경고 속에서도
"늘 하던 대로 정신없이 먹어 대고 있었다"는 중단 없는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2.
이 단어가 가진 진짜 의미
(영적 함정)
성경에서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종말의 징조로 이 단어를 첫머리에 꺼내신 데에는 날카로운 영적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① 영적 둔감함과 안일함
노아는 방주를 지으며 수십 년간 다가올 홍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경고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오늘 무엇을 먹을까 하는 육체적 필요와 일상적 만족에만 온 정신을 빼앗겨 있었습니다.
영적인 파멸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육신의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던 영적 불감증을 고발합니다.
② 탐욕과 방탕
(창세기 6장의 배경)
노아 시대의 문화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을 넘어,
탐욕과 쾌락으로 가득 찬 방탕한 삶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평행 구절(마 24:38)에서는 이 단어가
"홍수 전날까지...
먹고 마시고"로 쓰여,
심판의 문턱에서도 깨닫지 못하고 감각적인 즐거움에 취해 있던 상태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요약
“ἤσθιον” (에스디온)은 단순히 음식을 섭취했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비웃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육신의 정욕과 이 땅의 쾌락에만 도취하여 끊임없이 먹어 대던 영적 무감각"을 뜻합니다.
(ii)
둘째 단어는 “ἔπινον”(에피논)(“마시고”)입니다.
1.
어원과 문법적 의미
원형: ‘마시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피노(πίνω)에서 왔습니다.
문법 분석: 미완료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복수입니다.
뉘앙스: 앞서 나온 'ἤσθιον(먹고 있었다)'과 마찬가지로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단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홍수 심판이 임하기 직전까지
"일상적으로, 습관적으로, 끊임없이 들이켜고 있었다"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2.
이 단어가 가진 진짜 의미
(영적 함정)
물이나 음료를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단어를 심판의 징조로 지적하신 데에는 깊은 영적 고발이 숨어 있습니다.
① 방탕과 술 취함
(쾌락주의)
성경 문맥 속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가 부정적으로 쓰일 때는 단순한 수분 섭취가 아니라
'술 취함과 방탕한 잔치'를 의미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다가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영적인 각성 없이,
매일같이 술과 쾌락에 취해 영적으로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② 영적 갈증을 육신으로 채우려는 시도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영적 공허함과 갈증을 이 땅의 물질,
쾌락, 자극적인 문화(포도주와 잔치)로 채우려 했습니다.
주님이 경고하신 것은 바로 이처럼 이 땅의 즐거움에 중독되어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요약과 연결
첫째 단어 “ἤσθιον”(먹고 있었다)과 둘째 단어 “ἔπινον”(마시고 있었다)이 결합하여
‘먹고 마시는 삶’,
즉 하나님 없이 육신의 만족과 세상의 정욕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물질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인생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인터넷).
·
저는 이 첫째 단어 “ἤσθιον”(먹고 있었다)과 둘째 단어 “ἔπινον”(마시고 있었다)를 묵상할 때 “육신의 정욕”(요일2:16)이 생각났습니다.
a.
헬라어로 보는 두 구절의 완벽한 일치
누가복음 17:27: “ἤσθιον”,
“ἔπινον” (에스디온, 에피논) (먹고 있었다,
마시고 있었다)
요한일서 2:16: “ἡ ἐπιθυμία
τῆς σαρκὸς” (헤 에피두미아 테스 사르코스)
(육신의 정욕)
여기서 “정욕”(에피두미아)은 단순히 필요한 것을 구하는 마음이 아니라,
'통제 범위를 벗어난 강렬한 욕망'을 뜻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보여준
'멈추지 않고 먹고 마시는 모습(미완료 시제)'은, 요한사도가 지적한 하나님 없이 육체의 만족만을 갈망하는 상태(육신의 정욕)가 삶의 행동으로 고스란히 발현된 결과물입니다.
b.
“육신의 정욕”
관점에서 본 영적 의미
이 두 단어는 단순한 식사 행위가 아니라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힌 인간의 특징을 정확히 폭로합니다.
① 배부름이 곧 우상이 된 삶
육신의 정욕은 영적인 필요를 철저히 외면하게 만듭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영혼의 양식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육신의 배를 채우는 데만 전념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들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고 경고한 것처럼,
육체의 감각적 만족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② 다가올 심판에 대한 감각의 마비
음식과 술에 취하면 이성이 흐려지듯,
육신의 정욕에 취하면 영적 판단력이 마비됩니다.
방주가 지어지는 백 년의 세월 동안 경고의 메시지가 울려 퍼졌음에도,
정욕에 취한 그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정욕은 인간을 영적으로 철저히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③ 지나감과 영원함의 대조
요한일서 2장 17절은 이어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영원한 방주를 예비하기보다 곧 홍수에 쓸려 내려갈
'지나가는 정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결론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원수는 외부의 박해보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먹고 마실 것을 요구하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빌려,
오늘날 우리가 육체의 만족만을 채우느라 다가올 인자의 날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엄중히 묻고 계십니다(인터넷).
(iii)
셋째 단어는 “ἐγάμουν”(에가문)(장가들고 있었다)입니다.
1.
어원과 문법적 의미
원형: ‘결혼하다’, ‘아내를 맞이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가메오(γαμέω)에서 유래했습니다.
문법 분석: 미완료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복수입니다.
뉘앙스: 주어가 '남성들'입니다. 즉,
당대의 남성들이 주도권을 쥐고 끊임없이 아내를 맞이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앞선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미완료 시제가 쓰여,
홍수가 터지기 직전까지도
"정신없이 결혼 잔치를 벌이고 아내를 얻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2.
‘안목의 정욕’과 연결된 영적 의미
예수님이 이 단어를 지적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결혼 제도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6장의 배경과 연결할 때,
이 단어는 인간의 정욕이 극에 달한 상태를 고발합니다.
①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 좇는 삶
(창 6:2)
창세기 6장 2절은 홍수 심판의 원인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그들은 영적인 가치나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배제한 채,
오직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육체적인 매력(안목의 정욕)만을 기준으로 삼아 정욕을 채우기 위해 장가를 들었습니다.
② 하나님이 없는 관계의 확장
그들에게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가정을 이루는 신성한 언약이 아니라,
이 땅에서 자신의 육체적 기쁨을 극대화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세상의 조건에 눈이 멀어,
다가오는 영원한 심판의 경고를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 상태를 뜻합니다.
요약
“ἐγάμουν”(에가문)은 하나님의 언약과 영적 기준을 저버린 채,
오직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시각적 자극(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이 땅의 육체적 결합과 쾌락만을 끊임없이 추구하던 종말론적 타락을 의미합니다(인터넷).
(iv)
마지막 넷째 단어는 “ἐγαμίζοντ”(에가미존토)(시집가고 있었다)입니다.
1.
어원과 문법적 의미
원형: ‘결혼시키다’, ‘시집보내다’라는 뜻의 동사 가미조(γαμίζω)에서 유래했습니다.
문법 분석: 미완료 직설법 수동태(또는 중간태)
3인칭 복수입니다.
뉘앙스: 앞선 ‘장가들고(능동태)’와 대조적으로 수동태로 쓰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 결혼을 통해 남성의 집안으로 넘어가거나,
부모에 의해
‘시집보내어지는’ 사회적 현상을 묘사합니다.
이 또한 미완료 시제이므로,
홍수 심판이 문앞에 이를 때까지 세상의 관습과 풍조를 따라
"끊임없이 서로 주고받으며 시집보내는 일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2.
‘이생의 자랑’과 연결된 영적 의미
고대 사회에서 자녀를 시집보내고 가문과 가문이 결합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만남을 넘어,
이 땅에서 자신의 안전망을 구축하고 세력을 견고히 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었습니다.
① 이 땅에 영원한 성(城)을 쌓으려는 시도
사람들은 방주를 지으며 다가올 하늘의 심판을 경고하는 노아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 땅에 자신들의 가문과 명예,
그리고 재산을 든든히 세워가기 위해 정략적으로 시집을 가고 보냈습니다.
영원한 미래가 아닌,
곧 무너질 이 세상의 삶(βίος,
비오스)을 확증하고 자랑하는 일에 온 힘을 쏟은 것입니다.
② 세상 시스템에 대한 맹신과 교만
‘시집가고 있었다’는 것은 이 땅의 사회적 시스템이 영원히 안전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착각을 전제합니다.
바울 사도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그때에...
멸망이 갑자기 이르리니"(살전 5:3)라고 경고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맺어놓은 가문의 세력과 세상의 배경(이생의 자랑)을 믿고 영적인 안일함과 교만의 극치를 달렸습니다.
(v)
종합:
4가지 단어로 완성된 종말의 자화상
·
예수님이 묘사하신 노아 시대 사람들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 없는 완벽한 일상"이었습니다.
ἤσθιον(먹고), ἔπινον(마시고) ➔
육신의 정욕:
나의 배와 감각을 만족시키는 삶
ἐγάμουν(장가들고) ➔
안목의 정욕: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과 쾌락을 취하는 삶
ἐγαμίζοντο(시집가며) ➔
이생의 자랑:
이 땅에 기반을 다지며 세상을 의지하는 삶
이들은 악독한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일상에 취해 있다가 홍수를 맞이했습니다.
세상의 정욕은 우리에게
"세상 살이가 다 그런 거지"라는 핑계로 영적 감각을 마비시키고 방주(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인터넷).
(b)
“롯의 때”[ταῖς ἡμέραις Λώτ (타이스 헤메라이스 롯)]:
28절에 6개의 헬라어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i)
그
6개 단어들 중 첫째 단어는 “ἤσθιον”(에스디온)(“그들이 먹고”)와 “ἔπινον”(에피논)(“마시고”)는 우리가 이미 “노아의 때”(27절) 때 묵상했습니다(28절).
·
소돔 땅의 멸망을 다루는
“롯의 때”
역시 노아의 때와 똑같이 “ἤσθιον”(에스디온)(먹고 있었다)과 “ἔπινον”(에피논)(마시고 있었다)이라는 두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두 단어가 롯의 때에 다시 한 번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육신의 정욕”과 연결하여,
롯의 때 관점에서 이 두 단어가 가지는 특징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죄악이 가득한 일상의 반복
(동일한 미완료 시제)
소돔과 고모라 역시 유황과 불이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지기 직전까지 사람들은 정신없이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있었습니다.
노아 때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흘렀고 지리적 배경도 달랐지만,
심판을 앞둔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눈이 멀어 영적으로 완전히 마비되는 패턴은 소돔에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2.
에스겔서가 고발하는 소돔의 진짜 죄:
“풍족함과 안일함”
구약 성경 에스겔
16장 49절은 소돔의 죄악을 우리가 잘 아는 성적 타락 외에 다른 각도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
음식물의 풍족함:
소돔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 행위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습니다.
소돔 땅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던"(창 13:10) 극도로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정욕의 온상:
물질적 풍요 속에서 끊임없이 육신의 정욕을 채우던(ἤσθιον, ἔπινον) 그들의 일상은,
결국 영적 교만과 극단적인 방탕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3.
요약 및 다가올 단어들
예수님은 롯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이 익숙한 두 단어(먹고 마시고)를 징검다리 삼아,
소돔 특유의 더 강력한 세상적 정욕의 모습인 사고(ἠγόραζον), 팔고(ἐπώλουν), 심고(ἐφύτευον), 집을 짓는(ᾠκοδόμουν) 고도의 물질주의적 일상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인터넷).
(ii)
셋째 단어는 “ἠγόραζον”(에고라존)(사고)입니다.
1.
어원과 문법적 의미
원형: '시장에 가다', '물건을 사다',
'매수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아고라조(ἀγοράζω)에서 유래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광장이자 시장이었던
'아고라(ἀγορά)'가 이 단어의 뿌리입니다.
문법 분석: 미완료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복수입니다.
뉘앙스: 앞선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어,
유황 불비가 쏟아지기 직전까지 소돔 사람들이
"시장에서 끊임없이 재화를 사들이고 소유를 확장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2.
‘안목의 정욕’
및 ‘물질주의’와 연결된 영적 의미
예수님이 이 단어를 심판의 징조로 지적하신 이유는 정상적인 상거래 자체를 죄로 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이 땅의 소유에 영혼을 빼앗긴 인간의 탐욕을 폭로합니다.
① 소유욕과 안목의 정욕
(요일 2:16)
'사다(ἠγόραζον)'라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더 좋은 것,
더 화려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안목의 정욕'과 직결됩니다.
소돔 사람들은 영적인 구원이나 다가올 심판에는 눈이 멀었지만,
시장에서 사고파는 세상의 보화와 상품을 보는 눈은 극도로 밝아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유를 채우느라 영혼의 벌거벗음을 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② 소돔의 극대화된 자본주의와 안일함
창세기 13장에서 롯이 눈을 들어 바라본 소돔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던"
비옥하고 풍요로운 상업 도시였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그 풍요 속에서 끊임없이 물건을 사들이며 자신들의 안락함과 물질적 성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매매는 삶의 목적이자 신이었습니다.
요약
”ἠγόραζον”(에고라존)은 다가올 하늘의 심판 경고를 비웃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이 땅의 재물과 소유를 내 손에 쥐기 위해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들을 끊임없이 사들이던 물질주의적 정욕(안목의 정욕)을 의미합니다(인터넷).
(iii)
넷째 단어는 “ἐπώλουν”(에폴룬)(팔고)입니다.
1.
어원과 문법적 의미
원형: ‘팔다’, ‘수출하다’, ‘거래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폴레오(πωλέω)에서 유래했습니다.
(독점 시장을 뜻하는 영어 단어
‘Monopoly’의 뒤쪽 접미사가 바로 이 단어에서 왔습니다.)
문법 분석: 미완료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복수입니다.
뉘앙스: 이 단어 역시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소돔 사람들이 유황 불비가 쏟아지기 직전까지 오직
"이익을 남기고 자산을 증식하기 위해 끊임없이 물건을 팔고 거래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경제적 탐욕의 지속성을 보여줍니다.
2.
‘이생의 자랑’
및 ‘이윤 추구’와 연결된 영적 의미
'사고( buying)'와 '파는(selling)'
행위가 결합하면 고도의 상업 활동과 경제 시스템이 완성됩니다.
예수님이 이 단어를 지적하신 데에는 날카로운 영적 고발이 담겨 있습니다.
① 이익과 축적을 향한
'이생의 자랑'
(요일 2:16)
'파는 행위'의 본질은 이윤을 남기는 것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물건을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서 자신의 힘과 지위를 자랑하려는
‘이생의 자랑’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3절에 나오는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처럼,
내일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이 이 땅의 재물만 자랑하던 교만한 태도입니다.
② 영혼까지 팔아넘기는 물질주의
소돔과 고모라의 경제적 풍요는 영적·도덕적 타락과 정비례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11-13절은 종말을 맞이하는 무너진 바벨론 성의 상인들이 팔던 상품 목록의 맨 마지막에
"사람의 영혼들"을 기록합니다.
소돔 사람들 역시 더 많은 이익을 얻고 팔기 위해서라면 양심도,
이웃도, 영혼도 아끼지 않는 철저한 배금주의(돈을 신으로 섬김)에 빠져 있었습니다.
요약: '사고 파는 것'의 영적 자화상
예수님이 고발하신 롯의 때의
'사고 파는'
일상은, 하늘의 영원한 보화를 준비하기보다 곧 유황불에 타 없어질 이 땅의 재물을 모으고 유통하는 데 온 영혼을 빼앗긴 영적 파산 상태를 의미합니다(인터넷).
(iv)
다섯째 단어는 “ἐφύτευον”(에퓨퉤우온)(심고)입니다.
1.
어원과 문법적 의미
원형: ‘나무나 식물을 심다’,
‘나무를 가꾸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퓨튜오(φυτεύω)에서 유래했습니다.
문법 분석: 미완료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복수입니다.
뉘앙스: 역시 미완료 시제가 쓰였습니다.
단순히 씨앗 한 번 뿌린 것이 아니라,
유황 불비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미래의 수확과 더 큰 풍요를 기대하며 끊임없이 대지에 나무를 심고 과수원을 가꾸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2.
‘이생의 자랑’
및 ‘세상적 미래 보장’과 연결된 영적 의미
농사를 짓고 나무를 심는 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주님이 이 일상을 심판의 징조로 짚으신 데에는 깊은 영적 고발이 숨어 있습니다.
① 이 땅에 영원히 뿌리내리려는
‘이생의 자랑’
(요일 2:16)
나무를 심는 행위는
'이 땅에서의 장기적인 미래와 안정'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돔 사람들은
"여호와의 동산처럼"(창 13:10) 비옥한 땅에 값진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 등을 심으며,
이 땅에서 자신들의 부를 대대손손 누릴 장밋빛 미래를 꿈꿨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나라가 아니라,
곧 불타 없어질 세상 시스템에 자신들의 미래를 완벽히 뿌리내리고 안전을 신뢰했던 교만함과 이생의 자랑을 보여줍니다.
② 내일의 심판을 전혀 보지 못하는 영적 영양실조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사람의 눈은
'장차 거둘 풍성한 열매'만 바라봅니다.
소돔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을 채워줄 땅의 열매를 기대하느라,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해 당장 내일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미래의 세상적 번영에 취해 영혼의 파멸을 예비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요약
“ἐφύτευον”(에퓨퉤우온)은 곧 임할 하늘의 심판 경고를 비웃으며,
이 땅에 영원히 뿌리내려 미래의 부와 안정을 보장받으려는 물질주의적 확신(이생의 자랑)을 의미합니다(인터넷).
(v)
마지막 여섯째 단어는 “ᾠκοδόμουν”(오이코도문)(집을 짓는)입니다.
1.
어원과 문법적 의미
원형: ‘집을 세우다’, ‘건축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오이코도메오(οἰκοδομέω)에서 유래했습니다.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οἶκος)’와 짓는다는 뜻의
‘데모(δέμω)’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문법 분석: 미완료 직설법 능동태
3인칭 복수입니다.
뉘앙스: 이 마지막 단어까지도 철저하게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소돔 성에 유황 불비가 쏟아지기 직전까지 그들이
"망치질과 벽돌 쌓기를 멈추지 않고,
이 땅에 자신들의 영토와 건물을 견고히 구축하는 일에 완전히 중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고발합니다.
2.
‘이생의 자랑’의 정점,
그리고 인간의 바벨탑
건축은 인간이 이 땅에 남기는 가장 거대하고 영구적인 흔적입니다.
예수님이 이 단어로 롯의 때의 묘사를 끝맺으신 데에는 파멸 직전 인간의 교만함이 담겨 있습니다.
① 이 땅에 영원한 성을 쌓는
‘이생의 자랑’
(요일 2:16)
집을 짓고 성을 건축하는 행위는
"나는 이 땅에서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라는 인간의 선언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영원한 거처를 예비하기보다,
곧 흔적도 없이 불타버릴 소돔 땅에 화려하고 견고한 건물을 지어 올렸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부와 힘을 과시하고 세상적 안정감을 자랑하려 했던
‘이생의 자랑’의 최종 판판입니다.
② 노아·롯의 때와 요한일서
2장 16절의 총정리
노아와 롯의 때 사람들이 보여준
8가지 일상은 세상 정욕의 구조와 완벽하게 일치하며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완성합니다.
ἤσθιον, ἔπινον (먹고 마시고)
➔ 육신의 정욕
(내 배와 감각의 만족)
ἐγάμουν, ἠγό라존 (장가들고 사고)
➔ 안목의 정욕
(눈에 보이는 쾌락과 소유의 확장)
ἐγαμίζοντο, ἐπώλουν, ἐφύτευον, ᾠκοδόμουν
(시집가고 팔고 심고 집짓고)
➔ 이생의 자랑
(이 땅의 시스템과 미래의 안전망을 구축하고 자랑함)
결론:
"그들이 다 멸망하기까지"
소돔 사람들은 대단한 종교적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심고 집을 짓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일상 속에서 불의 심판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진짜 죄는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집을 지으면서 하나님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었습니다(인터넷).
(3)
저는
27절과
29절 하반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사람을 멸망시켰다”[καὶ ἀπώλεσεν πάντας (카이 아폴레센 판타스)]라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1.
'아폴레센(ἀπώλεσεν)'의 어원과 깊은 영적 의미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단순히 육체의 죽음을 넘어선 치명적인 종말론적 의미를 가집니다.
① 전적인 파멸과 상실
(Utter Destruction)
'아폴뤼미'는 물건이 완전히 망가져서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쓸모없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창조하신 인간이,
세상 정욕(육신·안목·이생)에 빠져 살다가 심판을 받아 존재의 목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영원한 지옥 형벌로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② 탕자의 '잃어버림'과 같은 단어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내가 내 아들을 잃었다가(ἀπολωλὼς, 아폴롤로스)
다시 얻었노라"고 할 때의
'잃어버리다'와 같은 어원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 세상 정욕에 취해 살던 자들은 결국 하나님께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된 존재'가 되어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③ 판타스(πάντας,
모두)의 엄중함:
예외 없는 심판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소돔에서 나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며 집을 짓던
'모든(All)' 자들이 예외 없이 멸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설마 나 하나쯤이야",
"다들 이렇게 사는데 괜찮겠지"
하며 다수의 흐름에 묻어가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세상 풍조를 따르던 다수의 무리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철저하게 심판의 대상이 됨을 선언합니다.
요약
우리가 묵상한 세상의 정욕(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최종 종착지는 바로
'아폴레센 판타스(ἀπώλεσεν πάντας) — 전적인 영적 파멸과 예외 없는 멸망'입니다. 이 땅에 화려하게 쌓아 올린 경제,
건축, 결혼의 성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단 한 순간에 재더미가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강력한 한 단어로 종지부를 찍으십니다(인터넷).
(4)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κατὰ τὰ αὐτὰ ἔσται ᾗ
ἡμέρᾳ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ἀποκαλύπτεται(카타 타 아우타 에스타이 헤 헤메라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아포칼륍테타이)](눅17:30)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정욕의 패턴이 소름 끼치도록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헬라어 ‘카타 타 아우타 에스타이(κατὰ τὰ
αὐτὰ ἔσται)’는 “이 일들과 완벽히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
세상 사람들은 노아의 때,
롯의 때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영적 상태에 빠져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육신의 정욕에 취해 끊임없이 먹고 마시고(ἤσθιον, ἔπινον)
안목의 정욕에 눈이 멀어 장가들고 물건을 사고(ἐγάμουν, ἠγόραζον)
이생의 자랑을 위해 시집보내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ἐγαμίζοντο, ἐπώλουν, ἐφύτευον, ᾠκοδόμουν)
일상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도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 없이 자신들만의 영원한 성을 쌓으며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2.
"베일이 벗겨지는 날,
예외 없는 전적 파멸이 임할 것이다"
인자가 ‘아포칼륖테타이(ἀποκαλύπτεται)(나타나는)’하는 날은 초림 때처럼 영광을 감추신 낮은 모습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자 심판주로서의 신적 위엄이 온 천하에 강제로 폭로되는 날입니다.
이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
인간들이 정욕으로 쌓아 올린 화려한 문명과 경제적 성들은 실상 아무 가치 없는 재더미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노아 때 홍수가,
롯 때 유황 불비가 불시에 들이닥쳐
‘아폴레센 판타스(ἀπώλεσεν πάντας)(모든 사람을 다 멸망시켰던)’
것처럼, 인자가 나타나는 그날의 심판 역시 노아의 방주 밖,
소돔 성 안에 남아 세상 정욕을 좇던 무리들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파멸시킬 것을 의미합니다.
3.
"기회가 끝나는 결정적인
‘그날(단수)’이 올 것이다"
앞서 노아의 때를 말할 때는
‘인자의 날들(복수)’이라고 하여 심판 직전 전조가 일어나는 긴 기간을 의미했지만,
30절에서는 ‘그날(ᾗ ἡμέρᾳ, 여격 단수)’로 못 박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분리가 칼로 자르듯 집행되는
‘단 하루,
그 결정적인 한 순간’을 가리킵니다.
홍수 문이 닫히던 날,
유황 불비가 쏟아지던 날처럼,
더 이상 세간을 챙기거나,
물건을 사고팔거나,
뒤늦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최종적인 마감의 순간이 올 것임을 뜻합니다.
묵상 총정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눈이 멀어 하나님 없는 완벽한 일상을 즐기다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전적인 파멸(ἀπώλεσεν πάντας)을 맞이했던 그 과거의 비극은,
인자가 영광 중에 베일을 벗고 강림하시는 최종적인 그날(ἡμέρᾳ)에도 소름 끼치도록 똑같이(κατὰ τὰ
αὐτὰ) 재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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