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정말로 간절히,
더할 나위 없이 원하셨던 것
“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누가복음 22:14-23).
(1)
첫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장
14-23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고 묵상하였을 때 특별히 두 문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a)
첫 번째 문장은,
“원하고 원하였노라”[Ἐπιθυμίᾳ ἐπεθύμησα (에피뒤미아 에페뒤메사)]입니다(눅22:15).
(i)
이 표현은 명사 형태와 동사 형태를 겹쳐서 사용하는 히브리리즘(Hebrewism,
히브리식 어법)
표현입니다[히브리리즘의 의미와 목적:
히브리어는 어떤 행동이나 상태를 극도로 강조하고 싶을 때,
같은 어원을 가진 동사와 명사를 연속해서 사용합니다].
Ἐπιθυμίᾳ (에피뒤미아):
'갈망, 열망, 소망'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ἐπεθύμησα
(에페뒤메사): '원했다, 갈망했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에피뒤메오(ἐπιθυμέω)'의 과거형(부정과거)입니다.
직역하면 "내가 갈망을 가지고 갈망했다"가 되며,
헬라어 문법에서 동일한 어원의 명사와 동사를 중복하여 사용하는 것은
"최상급의 강조"를 나타냅니다.
즉,
"내가 정말로 간절히,
더할 나위 없이 원했다"라는 뜻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예수님께서 정말로 간절히,
더할 나위 없이 원하셨던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먹기”[τοῦτο τὸ πάσχα φαγεῖν
(투토 토 파스카 파게인)]였습니다(15절).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
구약의 그림자를 끝내고
'진짜 실체'를 직접 건네주시기 위함입니다.
출애굽 이후
1,500년 동안 이스라엘이 지켜온 유월절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구약의 유월절:
짐승(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육신의 죽음(심판)을 면했습니다.
이 유월절(예수님의 유월절):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서 흘리실 피로 영원한 죽음(죄의 심판)에서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모형에 불과했던 옛 유월절을 폐하시고,
자신의 살과 피로 영원한 구원을 완성하시는 새 유월절의 시작을 제자들에게 직접 선물하고 상속해 주시기를 열망하셨습니다.
2.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묶어주는 정혼(약혼) 식사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전통 혼인 문화에서 신랑은 신부의 집을 찾아가 지참금을 치르고,
신부와 함께 포도주 잔을 나누며 혼인 계약을 맺습니다.
이 계약 식사가 끝나면 신랑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신부와 함께 살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잔을 건네시며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 22:20)을 맺으셨습니다.
즉, 이 식사는 예수님이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비싼 지참금을 치르시고,
제자들(교회)을 자신의 정결한 신부로 삼으시는
‘영적 정혼식’이었습니다.
처소를 예비하러(요 14:3)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떠나시기 전,
제자들과 확실한 사랑의 언약으로 하나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3.
홀로 남겨질 제자들에게
'천국 잔치의 보증서'를 쥐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면 체포되시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흩어질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후 제자들이 겪을 거친 세상과 영적 싸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식사에서 베푸신 성찬은 제자들이 낙심할 때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살을 찢고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강력한 시각적·체험적 증거가 됩니다.
동시에 16절과 18절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완성(어린양의 혼인 잔치)’을 미리 맛보게 함으로써,
고난 속에서도 천국 소망을 품고 끝까지 견뎌낼 영적 양식과 보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이 이 유월절을 간절히 원하셨던 이유는 제자들을 향한 더할 나위 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라는 거대한 고난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안위보다,
제자들을 신부로 삼아 영원한 천국 잔치까지 안전하게 이끌어 가시려는 목자의 절박한 사랑이 이 한 번의 식사에 모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
여기서 제자들을 신부로 삼아 영원한 천국 잔치까지 안전하게 이끌어 가시려는 목자의 절박한 사랑을 묵상할 때 저는 요한복음
17장 2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n
누가복음
22장의 유월절 만찬과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예수님의 심장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열망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최고의 짝꿍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에서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신 외침과,
십자가 직전 기도에서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신 간구 사이에는 관통하는 세 가지 핵심 연관성이 있습니다(인터넷):
a.
두 구절 모두 예수님의
‘유언적 열망(Dying
Wish)’입니다.
두 사건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단 몇 시간 앞둔 시점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직전에 두었을 때 가장 본질적이고 간절한 진심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22장 15절에서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를 통해 그 열망을 행동(성찬)으로 표현하셨고,요한복음 17장 24절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를 통해 그 열망을 말(간구)로 쏟아내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마지막 행동과 마지막 기도의 초점은 온통
'내게 주신 자들(제자들과 교회)을 향한 사랑'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b.
‘나와 함께 있어’(요 17:24)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신랑이 신부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와서 데려가는 목적(요 14:3)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 영원히 분리되지 않고 완전하게 연합하여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9장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이며, 누가복음 22장 16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탁을 베푸시며 머릿속으로 이미 이 기도의 응답인
'영원한 천국 잔치에서 제자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그날'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c.
고난을 이기게 하는
‘소망의 보증’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곧 맞닥뜨릴 배신과 흩어짐,
핍박의 고난을 아시고 성찬이라는 보증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 역시 동일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겠지만,
창세 전부터 존재했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랑 안으로 제자들을 초청하심으로써 그 어떤 고난도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확증해 주십니다.
"너희는 이 땅에서 잠시 고난을 받겠으나,
결국은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엄위한 선언이 만찬(눅 22장)과 기도(요 17장)에 모두 흐르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누가복음 22장 15절의 "원하고 원하였노라"는 신부를 향한 신랑의 절박한 사랑의 허그(Hug)라면, 요한복음 17장 24절의 기도는 그 신부를 끝까지 책임지고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신랑의 공식적인 서약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할 때 요한복음
17장의 이 기도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받는 떡과 잔이 얼마나 거대하고 영원한 사랑의 확증인지 더욱 가슴 벅차게 다가올 것입니다.
(b)
두 번째 문장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리까지”[ἕως ὅτου πληρωθῇ ἐν τῇ
βασιλείᾳ τοῦ θεοῦ (헤오스 호투 플레로데 엔 테 바실레이아 투 데우)](눅22:16)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ἕως οὗ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ἔλθῃ (헤오스 후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엘데)](18절)입니다.
(i)
예수님은
15절에서 이 유월절을 간절히 원하셨다고 하신 직후,
16절과 18절에서
"~할 때까지 다시 먹지/마시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두 구절은 구속사(구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옛 시대의 마감과 새 시대의 시작
예수님은 지상에서 제자들과 육신으로 함께 먹는 유월절 식사가 이번이 마지막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출애굽 이후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짐승의 피'를 통한 구약의 유월절 제사는 이 순간을 끝으로 마감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유월절 어린양의 실체)을 통해 죄 사함을 얻는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2.
종말론적 완성:
어린양의 혼인 잔치
16절의 "이루기까지(성취되기까지)"는 유월절이 가진 참된 의미(구원과 해방)가 완전히 완성되는 순간을 뜻합니다.
18절의 "임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 우주에 가시적으로 완성되는 때를 뜻합니다.
즉, 이 두 말씀은 역사 종말의 날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참여하게 될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
19:9)"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유월절 만찬을 멈추시는 대신,
장차 도래할 천국 천상의 잔치에서 제자들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 함께 마실 날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3.
십자가 고난을 이기는 소망과 확신
예수님은 몇 시간 뒤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실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무덤에 머물지 않고,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승리와 부활,
그리고 영원한 천국 잔치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내가 지금 죽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너희와 다시 기쁨의 잔치를 열 것이다"라는 강력한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
여기서 저는 “영원한 천국 잔치”인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9:9)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할 때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더욱더 사모하며 소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은 과거의 사건(십자가)을 기억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어린양의 혼인 잔치)을 미리 맛보고 사모하는 소망의 자리입니다. 이 깊은 묵상을 돕기 위해,
성찬식과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연결고리를 신학적·영적으로 세 가지 차원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인터넷):
a.
성찬식은 천국 잔치의
‘예고편’(맛보기)입니다.
지상에서 우리가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식은 장차 올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종말론적 리허설(Rehearsal)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를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이미’ 이 땅에서 맛보지만,
그 기쁨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은 천국 잔치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성찬식의 떡을 입에 넣고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 이 땅의 거울로 보는 것 같은 희미한 기쁨이 아니라,
그날에 주님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누릴 진짜 영원한 잔치를 사모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b.
‘유월절 식사’에서 ‘혼인 잔치’로의 신분 변화입니다.
구약의 유월절 식사는 종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하는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열리는 잔치는 백성의 식사를 넘어
‘신부의 잔치’입니다.
성찬식은 우리가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백성)의 자리를 넘어,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Church
as the Bride)의 자격으로 초청받았음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신부인 교회를 맞이하시는 그날,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연합을 이룹니다.
성찬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설렘과 정결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c.
"주님 오실 때까지"
전하는 소망의 선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성찬의 목적을 이렇게 명시했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찬식은 단순히 교회 안의 의식이 아니라,
이 세상의 고난과 슬픔이 끝이 아님을 선포하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눈물도 아픔도 이별도 없는 영원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될 것이라는 소망을 성찬을 통해 온 몸과 마음으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깊은 회개의 자리인 동시에,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치는 가장 소망 가득한 자리입니다.
(2)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잔과 떡을 제자들과 나누시기 전에 “감사 기도”[εὐχαριστήσας (에우카리스테사스)](눅22:17,
19) 드리셨다는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눈앞에 두고 드리신 이
'감사 기도(에우카리스테사스)'에는 우리가 성찬식을 대할 때 반드시 회복해야 할 세 가지 거대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인터넷):
1.
고난과 죽음 앞에서 드린 역설적인 감사
예수님이 이 감사를 드리신 타이밍을 주목해야 합니다.
몇 시간 뒤면 살이 찢기고 피를 쏟아내야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 직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칠 끔찍한 비극을 원망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돌리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이 실패나 파멸이 아니라,
온 인류를 살리는 구원의 완성(밀알의 죽음)이 될 것을 미리 바라보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구속사적 감사’였습니다.
2.
유월절 전통 감사(Berakah)의 승화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 만찬 때 떡과 잔을 들고
"바루크 아타 아도나이..."(하늘과 땅의 주재이신 우리 하나님 여호와,
땅에서 떡을 내시며 포도나무의 열매를 주시니 찬양합니다)라는 찬양의 축복 기도(베라카,
Berakah)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양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넘어,
이제 자기 자신이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생명의 양식’이 되심을 선포하며 드린 최고의 영적 감사였습니다.
3.
성찬(Eucharist)의 본질:
감사의 축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찬식을 행할 때 이 단어를 그대로 가져와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불렀습니다.
성찬식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기꺼이 찢기신 그 몸과 흘리신 피 덕분에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압도적인 은혜에 대한
'최고의 감사와 찬양의 축제'가 바로 성찬식의 본질입니다.
묵상 연결하기: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극심한 고난 앞에서도 우리를 살리실 기쁨을 바라보시며
'에우카리스테사스(감사 기도)'를 먼저 올리셨습니다.
우리가 성찬의 떡과 잔을 받을 때,
그리고 삶의 고난을 마주할 때,
우리 입술에서도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
'에우카리스테사스'(감사 기도)의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사모합니다.
(i)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감사 기도를 묵상할 때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어리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공동번역/쉬운성경)](마14:19;
막6:41;
눅9:16;
요6:11)는
말씀과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란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a. 결핍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
앞에서 드린 감사
세
장면
모두
인간의 시선으로는 절망,
결핍,
혹은
불가능만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오병이어:
빈들에는 먹을 것이 없고,
가진
것은
고작
아이의 도시락 하나뿐인 극심한 결핍의 상황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이미
사람이 죽어 냄새가 나고 돌무덤에 갇힌 완전한 절망과 사망의 상황이었습니다.
마지막 유월절:
몇
시간
뒤면
육신이 찢기고 피를 흘려 죽어야 하는 십자가 죽음의 직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이 좋아졌거나 눈앞에 풍성한 결과가 나타났을 때 감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결핍과 사망의 권세 한복판에서,
상황을 뛰어넘어 일하실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먼저 감사를 선포하셨습니다.
b. ‘하늘을 우러러’
드린
초월적 시선의 감사
오병이어 때도
"하늘을 우러러(눅
9:16)", 나사로 앞에서도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요
11:41)"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는
땅에
갇힌
문제(부족한 떡,
썩어가는 시체,
다가오는 십자가)를
내려다보며 낙심하지 않고,
모든
생명과 주권의 공급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땅의 조건에서 쥐어짜 낸 감사가 아니라,
하늘의 창고와 부활의 능력을 이 땅으로 끌어당기는
'믿음의 마중물'이었습니다.
c. 기적을 일으키고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하늘의 문’
예수님이 하늘을 향해 감사를 올려드렸을 때,
땅에서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구속사적 기적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감사 이후:
떡이
배가
되어
5,000명이 먹고도 남는
'풍성한 생명의 공급'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 무덤의 감사 이후:
죽은
자가
무덤을 걸어 나오는
'육체적 부활과 생명의 승리'가
일어났습니다.
유월절 만찬의 감사 이후:
자신의 몸을 깨뜨려 인류의 영원한 죄를 사하시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인도하시는
'영원한 구원과 영적 부활의 길'이
열렸습니다.
묵상의
결론:
오병이어의 떡을 떼실 때의 감사와 유월절 만찬의 떡을 떼실 때의 감사는 정확히 겹쳐집니다.
오병이어가 육신의 주림을 채우는 기적이었다면,
유월절의 감사는 자기 몸을 찢어 영혼의 주림을 영원히 해결하시는 거대한 구원의 기적을 일으키는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에서도
"이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수많은 영혼을 살려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인도할 것을 믿기에 감사하나이다"라는
마음으로 잔과 떡을 드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
그리고 우리 삶의 막막한
'빈들'이나
'무덤'
같은
상황을 만날 때,
예수님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에우카리스테오(감사)'를
선포할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공관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마지막 만찬(눅22:14-23;
마26:26-30;
막14:22-26)
말씀과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마지막 만찬을 비교하면서 공관복음과 바울 서신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a)
흥미롭게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시기(주후 55년경)는 공관복음서들이 기록되기 전이므로,
고린도전서 11장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성찬식 전승입니다.
이 두 복음서와 바울 서신 사이의 놀라운 일치(공통점)와 각 기자들이 강조한 독특한 차이점(차이점)을 인공지능이 세 가지씩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공통점
(비슷한 점)
네 본문 모두 예수님의 마지막 밤이라는 역사적 정황 속에서 동일한 핵심 신학을 공유합니다.
① 행동의
4단계 일치:
모든 본문이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하실 때 행하신 네 가지 핵심 행동 단계를 정확히 동일하게 기록합니다:
"떡을 가지사 ➔ 감사 기도(축사) 하시고 ➔ 떼어 ➔ 주시며 이르시되"
이는 초대교회가 지역을 불문하고 이 형식 그대로 성찬식을 고정하여 거행했음을 보여줍니다.
② 대속적 죽음과 언약의 피:
떡은 예수님의
'몸'이며, 잔은 우리 죄를 위해 흘리시는
'피'이자 '새 언약'이라는 핵심 고백이 일치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합니다.
③ 종말론적 소망:
공관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며 천국 잔치를 소망하고,
바울은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고 선포합니다.
두 전승 모두 성찬의 시선이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 완성'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2.
차이점
(다른 점)
기록된 배경과 수신자에 따라 표현과 강조점에 흥미로운 차이가 존재합니다.
① 바울 서신과 누가복음의 독특성:
"나를 기념하라"
(기억과 재현)
바울(고전 11:24,
25)과 누가(눅 22:19):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명령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의미: 바울과 누가는 예수님이 떠나신 후 이 땅에 남겨진
'교회의 공동체적 의식과 예배'로서 성찬을 지속해서 거행해야 함을 강력히 강조합니다.
여기서
'기념(아남네시스)'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효력을 오늘 이 자리에 현재화하는 강력한 영적 재현을 뜻합니다.
② 마태복음의 독특성: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언약의 목적)
마태(마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다른 본문들:
'죄 사함'이라는 목적이 명시적으로 잔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의미: 유대인을 1차 수신자로 삼은 마태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완전히 성취되어
'참된 죄 용서'가 임했음을 유대적 관점에서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③ 잔(Cup)에 대한 수식어의 차이:
"내 피"
vs "새 언약"
마태·마가: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피에 초점)
바울·누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언약의 성격에 초점)
의미: 바울과 누가는 예레미야
31장 31절의 '새 언약(New
Covenant)' 예언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취되었음을 강조하며,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신분과 관계의 법적 확증으로서 이 잔을 설명합니다.
묵상의 종합: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 마지막 만찬을 다시 상기시킨 이유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찬식(애찬)을 하면서 부자는 배불리 먹고 가난한 자는 굶기는 등 공동체를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공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그 절박한 사랑의 만찬 전승을 가져와 이렇게 권면한 것입니다:
"이 떡과 잔은 주님이 자기 몸을 찢어 주신 새 언약의 밥상이다.
그러니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하나의 몸을 이루어 천국 잔치를 소망하라."
성찬식을 대할 때마다 복음서의 역사적 감격과 함께,
바울이 강조한 교회의 연합과 기념의 의무를 동시에 묵상할 때 우리의 성찬은 더욱 온전해질 줄 믿습니다.
(4)
마지막 넷째로,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22:21-22)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a)
십자가의 신비와 인간의 배신이 교차하는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 배신의 극치와 목자의 아픔
동양과 유대 문화에서
'한 상에서 음식을 나누는 것'은 단순한 식사를 넘어 목숨을 공유하는 가장 친밀한 계약과 신뢰의 관계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의 손이 지금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은혜의 상 위에 함께 있다고 폭로하십니다.
이는 시편
41편 9절의 예언("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미리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을 씻기셨고,
이 성찬의 자리에 끝까지 동참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배신자에 대한 분노라기보다,
가장 친밀한 제자에게 배신당하시는 목자의 깊은 슬픔과 아픔의 탄식입니다.
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유다의 음모나 로마의 권력에 의해 어쩌다 밀려난
'어쩔 수 없는 실패'가 아닙니다.
"작정된 대로(determined)"라는 표현은 이 모든 구속의 사건이 창세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 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악행마저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역사의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력하게 잡혀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당히 작정된 길을 걸어가고 계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3.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인간의 전적인 책임과 경고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죄를 지은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이 어떻게 공존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유다는 로마나 대제사장들의 협박에 못 이겨 억지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과 의지로 예수님을 넘겼습니다.
여기서 "화가 있으리로다"는 정죄와 저주라기보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눈물의 경고이자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만찬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절박한 사랑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성찬식과 연결한 묵상: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
우리 역시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파는 자의 손"으로 떡과 잔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성찬의 상에 손을 얹고 있지만,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세상의 유익과 탐욕을 위해 주님을 모른 척 팔아넘기는 우리의 연약함이 유다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배신의 손이 상 위에 함께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기꺼이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성찬식은 우리의 완벽함 때문에 초청받은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배신과 연약함까지도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시는 주님의 거대한 용서의 자리임을 이 구절을 통해 다시 한번 묵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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