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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을 대면할 때, 우리는 그분의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영원토록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을 대면할 때 , 우리는 그분의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영원토록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         “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24:36-49).  ...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을 대면할 때, 우리는 그분의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영원토록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을 대면할 , 우리는 그분의 손과 발에 있는 자국을 보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영원토록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말을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알라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4:36-49).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 36-49절을 먼저 한국어 성경으로 읽었을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8 16-20절과 마가복음 16 14-18절과 요한복음 20 19-23절과 사도행전 1 6-8절과 비교하여 종합적인 줄거기를 순서대로 알고싶어졌습니다.

 

(a)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시고 승천을 약속하시는 과정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록을 종합할 다음과 같은 시간적 순서로 진행됩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특징을 녹여 부활 당일 저녁부터 승천 직전까지의 사건을 5단계로 종합한 줄거리입니다”(인터넷):

 

1.      부활 당일 저녁: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안식 첫날 저녁,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고 모여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가와 요한복음의 기록처럼 그들 한가운데 갑자기 나타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24:36, 20:19).  처음에는 제자들이 유령을 보는 알고 무서워하고 의심했습니다.

 

2.      부활의 증거: 손과 발을 보이시고 음식을 드심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심을 꾸짖으시며 ( 16:14),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자신은 있는 것을 보라며 십자가에 박혔던 손과 ,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24:39-40, 20:20).  제자들이 너무 기쁘면서도 믿기지 않아 , 예수님은 구운 생선 토막을 받아 그들 앞에서 직접 잡수심으로써 육체의 부활을 확실히 증명하셨습니다( 24:41-43).

 

3.      성경을 깨닫게 하심과 사함의 권세 부여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시며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24:44-45).  그리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시고,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라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20:22-23).

 

4.      갈릴리에서의 만남과 대위임령 (Great Commission)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갈릴리의 산으로 이동하여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습니다( 28:16-17).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명령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8:18-20, 16:15-18).

 

5.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당부와 성령의 약속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승천하시기 마지막으로 당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일의 '증인' 것을 선언하시며, "위로부터 능력(성령) 입혀질 때까지 (예루살렘) 머물라" 명령하셨습니다( 24:48-49).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를 묻자, 예수님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있으니 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최종 사명을 주셨습니다( 1:6-8)(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마지막 당부하신 말씀을 누가복음 24 48-19절과 사도행전 1 6-8절에 반복하여 기록한 것의 연관성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24장과 사도행전의 장인 1장에서 마지막 당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일까요?

 

a.      권의 책을 하나로 묶는문학적 연결고리 (Bridge)’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본래 '누가-사도행전(Luke-Acts)'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연속된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보낸 번째 (누가복음) 마무리하고, 번째 (사도행전) 시작하면서 책이 별개의 사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상호 중첩되는 이음새(승천과 마지막 당부) 만들었습니다.

 

누가복음 24: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하신 사역의 '마침표'

 

사도행전 1: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교회를 이끄실 사역의 '시작점'

 

b.     사역 주체의 전환: ‘예수님의 행하심에서성령의 역사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에서는 사역을 제자들이 이어받아야 합니다.  누가는 거대한 바통 터치(사역의 전환) 이루기 위해 "위로부터 오는 능력(성령) 입을 때까지 기다리라"( 24:49) 말씀과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1:8) 말씀을 반복합니다.  제자들의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만 사명을 감당할 있음을 강력히 경고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c.      증인(Witness)’이라는 핵심 키워드의 심화

 

누가는 본문에서 제자들의 정체성을증인으로 박습니다. 

 

누가복음 24:48: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라" (과거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목격한 자들)

 

사도행전 1:8: "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미래에 복음을 세상에 전파할 자들) , 복음서에서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사도행전에서는 '선포하는 증인'으로 확장되는 논리적 흐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d.     지리적 방향성의 예고: 예루살렘에서 끝까지

 

누가는 복음의 역사가 움직이는 '지리적 경로'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모든 초점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장소).  그래서 누가복음 24장에서는 " (예루살렘) 머물라" 하십니다.

 

반면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을 시작점으로 삼아 세상으로 뻗어 나갑니다.  사도행전 1 8절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라는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와 전개 방향을 미리 보여주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         여기서 저는 모든 초점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누가복음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밖에서 안으로) 생각났고, 예루살렘을 시작점으로 삼아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사도행전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택한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들인 교회가 예수님의 대계명대로 예루살렘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안에서 밖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구조는 흔히 신학에서구심적(Centripetal) 선교원심적(Centrifugal) 선교 전환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인터넷):

 

1.      누가복음: 구심적 역사 (밖에서 안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구약의 성취: 구약 성경에서 예루살렘(시온) 세상의 열방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몰려오는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여정: 누가복음의 지리적 정점은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9:51).

 

의미: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마침내 구약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에서 완성(십자가와 부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사도행전: 원심적 역사 (안에서 밖으로, 끝을 향하여)

 

이스라엘(교회) 탄생: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가 ' 이스라엘(교회)' 되었습니다.

 

폭발적인 확장: 이제 복음은 예루살렘()에만 갇혀 있을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복음은 인위적인 경계를 깨고 유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으로 뻗어 나갑니다.

 

의미: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으나, 이스라엘인 교회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열방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세상의 ' 사명을 온전히 성취하게 됩니다.

 

결국 누가는 "하나님의 구원이 예루살렘에서 완성되었으니 (누가복음), 이제는 구원을 세상으로 배달하라(사도행전)" 메시지를 '안과 ' 지리적 이동을 통해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인터넷).

 

(2)   둘쨰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Ερήνη μν (에이레네 )](24:36)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πτοηθέντες δ κα μφοβοι γενόμενοι δόκουν πνεμα θεωρεν (프토에덴테스 카이 엠포보이 게노메노이 에도쿤 프네우마 테오레인)](37) 한국어 성경 말씀을 읽었을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질렀던 제자들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14:26).   어떻게 예수님을 으로(마태복음 14 26절의 경우는 유령으로) 보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릴 있을 것일까요?

 

(a)   제자들은 마태복음 14장에서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φάντασμα(판타스마)]이라며 소리 질렀고,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도 "”[πνεμα(프네우마)]으로 착각하여 무서워 떨었습니다.  주님은 분명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셨는데, 제자들은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을까요?  어떻게 해야 두려움을 깨고 진정한 평강으로 들어갈 있었을까요?  영적 원리를 3가지 단계로 풀어볼 있습니다(인터넷):

 

1.      평강의 인사 앞에서도 두려워했는가?:  '부재(Anxiety) 감옥'

[여기서 부재(Anxiety) 감옥이란 신학적·심리학적 관점에서 " 삶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혹은 나를 돕지 못하고 실패하셨다) 믿을 인간이 갇히게 되는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의 상태" 뜻합니다].

 

예수님이 "평강" 말씀하셨음에도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한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주님의 부재와 실패'라는 인간적 절망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 풍랑 속에서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고립감과 두려움에 눈이 가려져, 찾아오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으셨다는 절망과 죄책감에 갇혀 있어서, 눈앞에 살아나신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 내면의 두려움과 고정관념이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바로 곁에서 평강을 선언하셔도 그것을 '유령'처럼 비현실적이고 무서운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2.      평강을 누리는 첫걸음: '감각적 확인' (손과 발을 만져보라)

 

예수님은 말로만 평강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서워 떠는 제자들에게 "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알라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하시며 직접 만지게 하시고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며 베드로를 위로 걸어오게 하심으로 주님의 실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원리: 두려움 속에서 평강을 누리려면, 주님이 관념이나 영적인 허상이 아니라 '지금 삶의 고난과 현실 속에 실재(Reality)하시는 '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약함을 아시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심으로 두려움을 지워나가셨습니다.

 

3.      평강의 완성: '믿음의 ' '성경의 깨달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제자들은 너무 기쁘면서도 여전히 믿기지 않아 했습니다( 24:41).  이때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45) 하십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도 배에 오르사 바람이 그친 후에야 제자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원리: 상황이 변해서 평강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고난과 부활이 '하나님의 말씀(성경)대로 성취된 '임을 깨달을 , 비로소 제자들은 환경을 초월하는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믿음의 ' 열릴 , '유령이 주는 공포' '주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요약하자면, 제자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고정관념과 두려움 때문에 주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주님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자신의 살아계심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시고(만져보라), 말씀으로 확증해 주실 (성경을 깨달음) 두려움의 껍질이 깨지고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강을 누릴 있게 되었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예수니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τί τεταραγμένοι στέ, κα δι τί διαλογισμο ναβαίνουσιν ν τ καρδί μν ( 테타라그메노이 에스테, 카이 디아 디알로기스모이 아나바이누신 카르디아 휘몬)](24:38)라는 말씀도 묵상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의심이 일어나면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두려움과 의심의 연관성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         예수님은 단어, 두려워하다’[τεταραγμένοι(테타라그메노이) (소동하다, 흔들리다)] 의심[διαλογισμοί (디알로기스모이) (인간적인 계산, 논쟁, 생각들)] 문장으로 묶어 질문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의심이 일어나면 주님의 평강이 자리가 없어집니다.   감정의 긴밀한 연관성을 3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묵상해 있습니다(인터넷):

 

a.      두려움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두려움을 키운다 (악순환의 고리)

 

두려움과 의심은 별개의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먹여 살리는 쌍둥이와 같습니다.

 

두려움의심: 마음에 두려움(불안) 찾아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과 환경을 방어하려 합니다.  이때 머릿속에서 인간적인 계산과 복잡한 생각들[의심(διαλογισμοί) (디알로기스모이)] 솟구쳐 오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두려움 때문에,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저분이 정말 주님일 리가 없다' 의심(인간적 계산) 품었습니다.

 

의심두려움: 이렇게 시작된 의심은 결국 주님의 약속과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니 미래가 불안해지고, 결과 두려움은 더욱 증폭됩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베드로가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두려움)' 빠져갈 , 예수님은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하셨습니다.

 

b.     의심[διαλογισμοί (디알로기스모이)] 실체: 마음에솟구쳐 오르는인간의 생각들

 

헬라어 본문을 보면 의심이 마음에 "일어나느냐”[ναβαίνουσιν (아나바이누신)]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어는 밑바닥에서부터 '물이 솟구쳐 오르듯' 통제할 없이 올라오는 모습을 뜻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임재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있지 않으면, 환경의 자극에 따라 우리 마음 심연에 있던 인간적인 염려, 부정적인 상상, 과학적·이성적 계산들이 끊임없이 솟구쳐 오릅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 "이건 유령일 거야"라는 인간적 생각들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에, 주님이 바로 곁에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셔도 평강이 마음 중심에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나간 것입니다.

 

c.      두려움과 의심이 평강을 가로막는 이유: 주님의선하심 오해하게 만듦

 

두려움과 의심이 결합할 발생하는 가장 무서운 영적 상태는 주님의 의도와 선하심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며 우리를 해치러 존재로 오해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도 부활의 기쁜 소식 앞에 제자들은 '(유령)' 보는 알고 무서워했습니다.

 

, 마음에 두려움과 의심이 가득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구원의 손길마저도 나를 망가뜨리거나 위협하는 사건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아무리 평강을 부어주셔도, 편에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의 결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라고 책망하듯 물으신 것은, 그들의 상태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 내면에서 스스로 솟구쳐 오르는 불안과 인간적 계산의 실체를 직면하게 하심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시기 위한 사랑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곧바로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39) 의심의 샘을 막고 평강을 채워주셨습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운 생선 토막 받으사 앞에서 잡수시더라”(24:42-43)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었을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음식을 드셨다는 자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씀을 묵상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시며 함께 아침 식사를 하신 요한복음 21 9-13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

 

1.      신체적 부재의 반박: 부활하신 몸의 실재성 (Physical Reality)

 

사건의 가장 1차적인 연관성은 예수님의 부활이 영혼이나 유령의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살과 뼈를 가진육체의 부활임을 증명한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24: 제자들이 예수님을(유령)’으로 오해하자, 예수님은 직접 생선을 받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씹고 삼키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24:42-43).  고대 유대 헬라 사상에서 영이나 귀신은 음식을 먹을 없다고 믿었기에, 이는 육체적 부활의 가장 강력한 물리적 증거였습니다.

 

요한복음 21: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생선과 떡을 구우셨으며,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 21:12) 하시며 음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단순히 시각적 환영이 아니라, 만질 있고 불을 피우며 음식을 배급할 있는 물리적 신체를 지니셨음을 보여줍니다.

 

신학적 깊이: 부활의 몸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벽을 통과함 )이면서도, 동시에 음식을 먹을 있고 만질 있는 실제적인 몸이었습니다.  ,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를 완벽하게 통합한 창조의 몸인 것입니다.

 

2.      식탁 공동체 회복: 배신한 제자들과의 화해(Communion)

 

복음서에서 예수님과의식사(식탁)’ 단순한 영양 섭취가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와 연합, 그리고 용서를 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 주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쳤고 베드로는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가득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호통을 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들 앞에서 함께 음식을 드시고(누가복음), 그들을 위해 따뜻한 아침 식사를 차려주셨습니다(요한복음).

 

이는 "내가 너희와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너희의 주님이며, 우리는 여전히 식탁에 앉는 가족이다"라는 완전한 용서와 관계의 회복을 선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3.      디베랴 바닷가(요한복음) 이어지는목회적 배려 확장

 

누가복음 24장의 식사가 제자들의 '의심을 깨뜨리기 위한 즉각적인 방편'이었다면, 요한복음 21장의 식사는 사명을 잃고 과거의 어부 생활로 되돌아간 제자들을 '사명자로 재파송하기 위한 치유의 과정'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생선 드시는 모습을 보고도 제자들은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여 여전히 완전히 소화해 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후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지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과거 처음에 그들을 부르셨던 ( 5)처럼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게 하사 고기를 가득 잡게 하십니다.  그리고 숯불 생선 구이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신 ,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양을 먹이라" 사명을 완전히 복원하십니다.

 

묵상의 결론:

결국 누가복음 24장의 '생선을 잡수심' 요한복음 21장의 '조반을 차려주심'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끈질긴 '체화된 사랑(Embodied Love)'(: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에만 머무는 사랑이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의 '(Body)' 통해 역사 속에 구체적인 행동과 실체로 나타난 사랑) 보여줍니다.  주님은 관념적인 신학 구호가 아니라, 생선 토막을 나누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따뜻한 식사를 통해 제자들의 두려움을 지우고 사명의 자리로 이끌어가셨습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은 점이 생겼습니다.  점이란 예수님은 두려워하며 마음에 의심을 가진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알라”(39)라고 말씀하셨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발에 아직 못자국이 있나 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게 이유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같은 어린 ”(a Lamb standing as if it had been slain)이란 말씀에 영어 번역이 “slain”[“죽임을 당한 같은”(σφαγμένον)(에스파그메논)]이라고 요한계시록 5 6절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i)                  질문자님의 통찰은 성경 전체의 거대한 구속사를 꿰뚫어 보는 매우 깊고 아름다운 신학적 연결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손과 발을 보여주신 사건과 요한계시록 5 6절의 죽임을 당한 같은 어린 연결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흔적' 가진 영원한 신비를 드러내 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여전히 십자가의 자국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흔적은 하늘 보좌에 계신 지금까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영광의 흉터로 존재합니다.  신비롭고 감동적인 영적 의미를 3가지로 나누어 묵상해 있습니다.

 

a.      역사적 사실과 연속성: "바로 내가 예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라 하시고,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도마에게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손을 보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 보라 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셨던 바로 예수와, 지금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가 '동일 인물'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부활은 과거의 고난을 완전히 삭제하고 리셋(Reset)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흔적을 고스란히 몸에 지닌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국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분이 환상이나 다른 영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랑하고 따랐던 선생님 예수임을 확신할 있었습니다.

 

b.     요한계시록의 성취: 영원한 보좌에 새겨진에스파그메논(σφαγμένον)’

 

질문자님이 인용하신 요한계시록 5 6절의 죽임을 당한 같은(slain)’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원어로에스파그메논이며, 이는 '도살당한, 베임을 당한'이라는 매우 생생하고 참혹한 흔적을 뜻합니다.

 

사도 요한이 하늘 성전에서 영광스러운 예수님은, 없고 멀끔한 왕의 모습만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대속의 상흔( 자국과 자국) 그대로 지니고 계신 어린 양의 모습이었습니다.

 

땅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손과 발의 자국이, 하늘 보좌에서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c.      상흔(흉터) 영광이 되는 신비: 영원한 사랑의 증표

 

예수님은 모든 질병과 약함을 고치시는 전능한 부활의 몸을 입으셨음에도, 자신의 자국은 치료하지 않고 남겨두셨을까요?

 

승리의 훈장: 군인이 전쟁에서 얻은 상처가 영광스러운 훈장이 되듯, 주님의 자국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승리의 증표입니다.

 

영원한 중보의 근거: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주님이 손을 드실 때마다 손에 새겨진 자국은 "내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가장 강력한 대속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을 대면할 , 우리는 그분의 손과 발에 있는 자국을 보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영원토록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묵상의 결론:

예수님의 부활하신 손과 발에는 분명히 자국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의심의 ' 깨뜨렸던 위의 흉터는, 이제 요한계시록에 이르러 우주가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어린 양의 상흔'으로 격상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의심을 아시고,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흉터를 기꺼이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τότε διήνοιξεν ατν τν νον το συνιέναι τς γραφάς (토테 디에노익센 아우톤 쉬니에나이 타스 그라파스)](24:45)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었을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24 32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또한 저는 사도행전 16 14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주께서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a)   성경구절( 24:45, 24:32, 16:14) 연결은 성경이 말하는영적 회심과 깨달음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관통하는 최고의 통찰입니다.  구절 모두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마음을 열어 주셔야만(Open)’ 비로소 말씀이 깨달아지고 삶이 변화된다는은혜의 원리 담고 있습니다.  누가가 (누가복음, 사도행전) 걸쳐 정교하게 배치한 '열림의 신비' 3가지 단계로 묶어 함께 묵상해 있습니다(인터넷):

 

1.      24:32 — 말씀이 풀어질 임하는마음의 뜨거움’ (감정의 각성)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곁에 두고도 눈이 가려져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길에서 구약 성경을 풀어 주실 ”[διήνοιξεν (디에노이겐)(열어주실 )], 그들의 마음 속에서 없는 뜨거움이 솟구쳤습니다.

 

원리: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조명 아래 바르게 해석되고 열릴 , 인간의 얼어붙었던 내면과 절망이 녹아내리며 영적인 갈망(뜨거움) 시작됩니다.  지성의 완전한 깨달음 이전에, 말씀의 권능이 먼저 제자들의 가슴을 것입니다.

 

2.      24:45 — 주님이 직접 열어주시는지성의 ’ (이해의 완성)

 

누가복음 24 45절에서 예수님은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마음을 열어”[διήνοιξεν (디에노익센)]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νον)’ 인간의 지각, 지성, 영적 이해력을 뜻합니다.

 

원리: 제자들은 3 동안 예수님 곁에서 직접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들의 지성을 '열어주시기' 전까지는 십자가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지능지수(IQ) 학식의 문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닫힌 지성을 열어주셔야만 가능한 영적인 사건임을 누가는 강력히 증언합니다.

 

3.      16:14 — 루디아에게 재현된 성령의 역사 (의지의 순종과 삶의 변화)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열림의 역사' 이방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여인 루디아에게 그대로 재현됩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설교를 들을 , “주께서 마음을 열어”[ διήνοιξεν (디에노익센)]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원리: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던 주님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통해 루디아의 마음을 여십니다.

 

마음이 열리자 루디아는 단순히 '지식적 이해' 머물지 않고, 바울의 말을 '따르는(순종하고 영접하는)' 의지적 결단과 삶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3구절 묵상의 종합: "주님이 열어주셔야 들립니다"

 

본문은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이 변화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말씀이 풀어짐( 24:32) à 주님이 지성을 열어주심(45)  à 마음이 열려 말씀에 순종함( 16:14)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스스로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주님이 위에서 말씀을 풀어주시고( 24:32), 안에서 제자들의 지성을 열어주셨듯이(45),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주님이 마음에 빗장을 열어주셔야만( 16:14) 우리는 진정한 증인의 삶을 시작할 있습니다(인터넷). 

 

(5)   마지막 다섯째로, 저는 헬라어 성경으로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 36-49절을 읽었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전해야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μετάνοιαν ες φεσιν μαρτιν ες πάντα τ θνη (메타노이안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에이스 판타 에드네)](47)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a)   예수님이 부활하신 제자들에게 세상에 전하라고 명하신 복음의 요약이 바로 짧은 선언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구절이 가진 구체적인 의미와 영적 깊이를 인공지능이 3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인터넷):

 

1.      “μετάνοια”(메타노이아)(“회개”) 참된 의미: 존재와 방향의 대전환

 

우리는 흔히 '회개'라고 하면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거나 후회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헬라어메타노이아생각을 바꾸다’, ‘마음의 방향을 완전히 돌이키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삶의 주권 전환: 내가 인생의 주인 되어 살던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삶의 주인과 왕으로 인정하는 존재론적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지성의 변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경을 깨닫게 하사(45) 제자들의 마음() 열어주셨듯이, 인간의 생각과 세계관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 참된 메커니즘입니다.

 

2.      “ες φεσιν”(에이스 아페신)(“ 사함을 받게 하는”) 법정적 선언: 감옥에서 풀어놓아 주는 사함

 

회개는 자체로 공로가 되지 않지만, 예수님은 회개가 사함(아페신 하마르티온)’으로 나아가는 통로(에이스 - ~ 향하여) 된다고 선언하십니다.

 

아페신(φεσιν)’ 원뜻은풀어주다’, ‘자유하게 하다’, ‘부채를 탕감하다입니다. 

 

이는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를 조건 없이 석방해 주거나, 도저히 갚을 없는 엄청난 빚을 완전히 지워주는 법정적 은혜를 뜻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방향을 돌이켜(회개) 예수님께로 나아갈 ,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인해 우리를 묶고 있던 죄와 정죄의 사슬에서 완벽한 자유를 얻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3.      π τ νόματι ατοῦ”(에피 오노마티 아우투)(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누가복음 24 47 전반부를 보면 회개와 사함이그의 이름으로(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유일한 권세: 인간은 스스로 죄를 씻을 없고, 세상의 어떤 도덕이나 종교로도 '아페신( 사함)' 얻을 없습니다.  오직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만 죄를 사하는 법적 권세가 있습니다.


제한 없는 확장: 권세 있는 이름이 이제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특정 민족(이스라엘) 전유물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우주적 선포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묵상의 종합: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전해야 메시지는 도덕적 훈계나 종교적 규율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에 힘입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기만 하면(회개), 너희를 얽매던 모든 죄의 사슬에서 완전히 해방( 사함) 것이다!"라는 위대한 자유의 선언이었습니다.   메시지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사도행전의 역사로 폭발하게 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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