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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로 채우고,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사명의 자리로 나아감으로써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축복을 온전히 유통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로 채우고 ,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사명의 자리로 나아감으로써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축복을 온전히 유통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 하늘로 올려지시니 ] 그들이 [ 그에게 경배하고 ]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누가복음 24:50-53).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 장 50-53 절 말씀 (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 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제일 먼저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6 장 19-20 절과 사도행전 1 장 9-11 절과 비교하여 종합적인 줄거리를 알아야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   1.       세 본문 통합 줄거리 ( 종합 요약 )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지상 명령과 성령 사역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후 , 그들을 데리고 감람산 자락의 베다니 앞까지 나아가셨습니다 .   예수님은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으며 , 바로 그 축복의 순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지기 시작하셨습니다 .   예수님이 위로 올라가실 때 구름이 그를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고 , 제자들이 아쉬움과 경이로움 속에서 하늘을 자세히 쳐다보고 있을 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그들 곁에 나타났습니다 .   천사들은 "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

나의 무지함과 영적 실망감을 치료하는 유일한 처방은 "성경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나의 무지함과 영적 실망감을 치료하는 유일한 처방은 "성경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  삶의 모든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날에 그들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박았느니라 우리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우리와 함께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가려 하는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그들과 함께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사람도 길에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누가복음 24:13-35).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 13-35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은 제일 먼저 복음성가 엠마오로 가는 제자가사를 찾아보았습니다: (1)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2) 세상 사는 엠마오의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예수 우리들에세 나타나시사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그런 저는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가 누구이며,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어졌습니다.

 

1.       제자는 누구인가요?

 

글로바: 본문 18절에 글로바라는 제자의 이름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 25절에 언급된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근거로, 그가 예수님의 이모부이거나 열두 사도 외에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던 초기 제자 그룹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른 제자: 성경은 번째 제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글로바의 아내(부부), 그의 아들( 10장의 70 제자 하나), 혹은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 자신일 있다는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2.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며 걸었나요?

 

예수님이 곁에 오시기 전과 , 이들의 대화는 절망에서 깨달음으로 급격하게 변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슬픔과 실망의 대화)

 

사건에 대한 이야기: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서로 주고받으며 몹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24:14-15).

 

꺾여버린 기대: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속량할 "(정치적·영적 해방자) 굳게 믿고 바랐으나, 그분이 허무하게 처형당하시자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21).

 

무덤이 비었다는 혼란: 몇몇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고 천사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말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이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22-24).

 

예수님이 동행하신 (성경의 깨달음)

 

부활하신 예수님이 곁에 서서 걸으셨지만,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구약 성경) 시작으로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하나하나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26-27).

 

훗날 제자는 이때를 회상하며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라며 고백합니다. 고백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복음성가 가사처럼, 절망 가득했던 그들의 마음이 '참된 소망과 뜨거운 확신'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시기 전에 나눴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관한 대화 가운데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속량할 ”[ μέλλων λυτροσθαι τν σραήλ( 멜론 뤼트루스다이 이스라엘)]라고 바랬다(소망했다)[λπίζομεν(엘피조멘)(“우리는 바랐노라”)](24:21) 말씀의 의미를 그들의 입장에서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슬픔과 실망의 대화를 나눴는지 이유를 있기 때문입니다.

 

(a)    제자가 고백한 "우리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1)라는 속에는 당시 유대인들이 품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그것이 무참히 깨졌을 느낀 절망의 크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고백이 어떤 의미였는지 헬라어 표현과 시대적 배경을 통해 살펴보면, 그토록 깊은 슬픔과 실망에 빠졌는지 이유를 명확히 이해할 있습니다(인터넷):

 

1.       헬라어로 보는 제자의 마음

 

λπίζομεν (엘피조멘 - "우리는 바랐노라"):

 

동사는 헬라어 시제상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 "과거의 어느 시점까지는 지속적으로, 아주 간절하게 바라고 바랐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간절했던 희망이 완전히 중단되고 과거의 일로 끝나버렸음을 고백하는 씁쓸한 탄식입니다.

 

μέλλων λυτροσθαι ( 멜론 뤼트루스다이 - "속량할 자로 되어 있던 ")

 

여기서 '속량하다’[λυτρόω(뤼트로오)]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다, 건져내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내신 '출애굽 사건' 가리킬 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2.       제자들이 기대했던 "이스라엘의 속량" (정치적 메시아관)

 

당시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 있던 유대인들에게 '속량(구원)' 매우 현실적이고 국가적인 문제였습니다.   제자를 포함한 무리가 예수님께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로마로부터의 해방: 다윗 왕처럼 강력한 군사적·정치적 힘을 발휘하여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다줄 통치자.

 

영광의 :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군중들이 "호산나" 외쳤던 것처럼, 당당하게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세계의 중심에 세울 영웅.

 

3.       그토록 슬픔과 실망에 빠졌는가?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의 마지막은 너무나 무력해 보였습니다.

 

가장 저주받은 죽음: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라고 믿었던 분이 로마의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박혀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명기 말씀( 21:23)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인데, 자신들이 메시아로 믿던 이가 저주를 받아 죽은 것입니다.

 

모든 소망의 파산: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스승의 상실이 아니라, 그들이 인생을 걸고 꿈꾸었던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모든 미래의 파산" 의미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리는 그렇게 바랐었으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라며 터덜터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슬픔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고난받는 메시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인간적인 구원 기준(정치적 메시아)' 예수님을 맞추려 했기 때문에 찾아온 영적 실망감이었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처럼 하나님의 구원 방식(그보다 하나님의 구원)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들의 인간적인 구원 기준(또는 우리가 예수님께 구원의 기대) 예수님을 맞추려 하는 면이 있기에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영적 실망감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       현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앙생활 속에서 '나만의 엠마오 ' 걸으며 영적 실망감을 경험하곤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거는 기대와, 실제 하나님의 구원 방식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영적 실망감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현대인들이 예수님께 거는 '인간적인 구원의 기대'

 

제자가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을 바랐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각자의 삶을 억누르는 결핍과 고통으로부터의 즉각적인 구원을 기대합니다.

 

번영과 성공의 메시아: 예수님을 믿으면 사업이 성공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며, 재정적인 어려움이 단번에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 (기복주의적 구원관)

 

문제 해결사와 치료자: 인생의 위기, 육체의 질병, 인간관계의 갈등이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즉각 해결되어야 한다는 기대

 

감정적 위로자: 신앙이 나에게 평안과 위로, 긍정적인 감정만을 제공해야 한다는 기대

 

b.       우리가 마주하는 영적 실망감의 이유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우리의 예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고난이 지속되거나, 상황이 악화될 우리는 제자처럼 "우리는 이분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바랐노라" 하며 깊은 슬픔과 회의감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침묵' 대한 오해: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시거나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여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십자가(고난) 기피: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방식을 택하셨고, 우리에게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바라기에 현실의 고난 앞에서 실망합니다.

 

c.       영적 실망감을 극복하는

 

엠마오의 제자가 절망의 길에서 돌이킬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주시며 그들의 영적 시야를 넓혀 주셨을 때였습니다.

 

기대의 전환: 나의 문제 해결이라는 '소적인 구원'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연단이라는 '거시적인 구원'으로 시선이 바뀔 눈이 밝아집니다.

 

소적인 구원은 질병 치유나 재정 위기 극복처럼 "지금, 여기, "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받는 개인적 차원의 구원입니다.  반면 거시적인 구원은 삶의 고난과 연단을 통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고 그분의 영원한 다스림 아래 거하게 하는 거대한 차원의 구원입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우리가 영적 실망감을 느끼는 이유는 대개 상황을 바꾸려는 '소적인 기대'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시선이 '거시적인 구원'으로 넓어지면, 삶의 모든 연단이 나를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축복의 통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의 뜨거워짐: "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신 예수님의 방식을 수용할 , 절망의 자리는 도리어 부활의 주님을 깊이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인터넷).

 

(ii)                    여기서 저는 이스라엘을 속량할 라는 말씀을 묵상할 속량, 사함”(1:14; 1:7)이란 말씀과 몸의 속량”(8:23)이란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가 가지고 있었던 속량이란 개념이 아닌 이미 받은 속량, 죄사함”(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았음) 믿음으로 몸의 속량”(장차 우리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받을 것임) 소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       이미(Already) 받은 속량: " 사함" ( 1:14, 1:7)

 

영적 의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죄와 사망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속량)되었습니다.

 

우리의 태도: 이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이미 받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우리는 날마다 구원의 감격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누려야 합니다.

 

b.       장차(Not-yet) 받을 속량: "몸의 속량" ( 8:23)

 

영적 의미: 비록 영혼은 사함을 받았으나, 우리는 여전히 질병, 쇠약, 죽음, 그리고 죄의 유혹이 가득한 깨어진 육신을 입고 땅을 살아갑니다.  '몸의 속량' 주님이 재림하실 우리의 썩을 몸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처럼 온전하게 변화될 구원의 최종 완성을 뜻합니다.

 

우리의 태도: 땅의 삶이 엠마오의 길처럼 슬픔과 연단의 연속일지라도, 장차 주어질 완성을 바라보며 끈기 있게 소망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c.       제자의 '속량' 오늘날 우리의 '소망'

 

엠마오의 제자는 당장 눈앞의 로마 압제(환경) 해결되는 지상적인 속량만을 바랐기에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참된 신앙의 자세는 "과거에 완료된 사함의 은혜를 굳게 믿고(Faith), 미래에 완성될 몸의 속량을 간절히 소망(Hope)하며, 현재의 연단을 이겨내는 "입니다.   방향성이 확고할 , 우리는 현실의 어떤 결핍이나 고난 앞에서도 영적 실망감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설 있습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슬픔과 실망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생하시나”[ατς ησος γγίσας συνεπορεύετο ατος (아우토스 이에수스 엥기사스 쉬네포레우에토 아우토이스)](24:15) 말씀과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가려 하는 같이 하시니”[γγισαν ες τν κώμην ο πορεύοντο, κα ατς προσεποιετο πορρώτερον πορεύεσθαι (엥기산 에이스 코멘 에포레우온토, 카이 아우토스 프로세포이에이토 포로테론 포레우에스다이)](28) 말씀을 각각 묵상한 말씀의 연관성을 통해 우리 주님은 어떠하신 주님이신지 주님의 마음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a)    15절의 "가까이 이르러 동행하시는 주님" 28절의 " 가려 하시는 같이 하시는 주님" 겉보기에 모순되어 보이지만, 헬라어 원어의 뉘앙스를 통해 구절을 연결하면 제자들의 인격적 결단과 친밀함을 원하시는 주님의 깊은 마음(숨바꼭질 같은 사랑) 발견할 있습니다(인터넷):

 

1.       15: 먼저 찾아와 곁을 지키시는 주님

 

원어의 깊이: συνεπορεύετο(쉬네포레우에토) '동행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해서 나란히 곁에서 걸어가고 계셨다" 의미입니다.

 

주님의 마음: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절망의 말을 쏟아내고 있을 때도, 주님은 화를 내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그들의 보폭에 맞추어 묵묵히 곁을 지키셨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여 영적 실망감에 빠져 있을 , 우리의 속도에 맞춰 먼저 찾아와 동행해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2.       28: 인격적인 초대를 기다리시는 주님

 

원어의 깊이: προσεποιετο(프로세포이에이토) '~하는 체하다, 시늉을 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 진심으로 제자들을 버리고 가려 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가시려는 듯한 모습을 취하셨다" 뜻입니다.

 

주님의 마음: 주님은 자신의 임재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을 , 그들의 자유 의지와 인격적인 결단으로 주님을 붙잡고 초청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여기서 주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주님은 그대로 지나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격적 고백과 자발적인 사랑을 원하십니다.

 

3.       말씀의 연관성: "인격적인 관계를 완성하시는 주님"

 

구절을 연결하면 주님의 마음이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의 서사로 완성됩니다.

 

구원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지만(15), 친밀함의 완성은 우리의 초대로 이루어집니다(28).

 

먼저 다가오신 주님(15) 우리 마음의 문을 강제로 부수고 들어오지 않으시고, 가시려는 행동하시며(28) 우리가 "주님,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하고 문을 열어드리기를 기다리십니다.

 

결국 28절의 ' 가려 하시는 행동' 제자들의 마음에 숨겨진 열정과 주님을 향한 갈망을 이끌어내기 위한 주님의 거룩한 유도였습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συνεπορεύετο(쉬네포레우에토)(“동행하시나”)(15)이란 단어의 의미인 계속해서 나란히 곁에서 걸어가고 계셨다 말씀을 묵상할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이 생각났습니다.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요, 우리 현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요?

 

·       15절의 συνεπορεύετο (쉬네포레우에토, "나란히 곁에서 걸어가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Παράκλητος(파라클레토스, "보혜사") 구조적·어원적으로 완벽하게 통하는 짝을 이룹니다.   단어의 연관성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대단히 강력한 영적 위로와 정체성을 선사합니다(인터넷):

 

a.       단어의 언어적·공간적 연관성: " 곁의 동반자"

 

단어는 모두 '곁에(Para / Syn)'라는 공간적 의미를 핵심으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συνεπορεύετο (쉬네포레우에토): σύν(, ~ 함께) + πορεύομαι(포레우오마이, 가다) 합쳐진 단어입니다.  제자들의 보폭에 맞추어 "곁에서 나란히 발을 맞추어 걸어가다"라는 역동적인 의미입니다.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παρά(파라, 곁에) + καλέω(칼레오, 부르다) 수동형입니다.  ,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기 위해 "곁으로 부름을 받은 "라는 뜻으로, 법정의 변호사나 위로자, 돕는 자를 뜻합니다.

 

연관성의 핵심: 엠마오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서 나란히 걸으셨던(쉬네포레우에토) 물리적 임재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무시는(파라클레토스) 영적인 임재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b.       현대 제자들에게 주는 3가지 영적 의미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재하는 동행'

 

엠마오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과 나란히 걷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고난과 영적 침체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같다" 외로워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보혜사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인생의 보폭에 맞추어 곁을 묵묵히 나란히 걷고 계십니다.

 

② '성경을 풀어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보혜사의 사역

 

예수님이 길에서 구약 성경을 풀어주실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요한복음 14 26절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 설교를 들을 , 혹은 고난 중에 약속의 말씀이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그것은 곁의 보혜사 성령님이 엠마오의 예수님처럼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③ '소적인 절망' '거시적인 소망'으로 바꾸는 변호

 

보혜사(파라클레토스) 낙심한 자를 변호하고 격려하여 일으키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분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로 바랐노라" 소적인 절망에 빠져 고향으로 내려가던 제자들을 예수님이 돌이키신 것처럼, 성령님은 오늘날 우리의 처지를 가장 아시고 말할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며( 8:26), 우리의 시선을 '장차 몸의 속량(거시적 구원)'으로 계속해서 이끌어 가십니다.

 

요약하자면,

엠마오 길의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시공간의 파라클레토스'(보혜사) 제자들과 나란히 걸으셨다면, 오늘날 성령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대 제자들 사람 사람과 영원히 나란히 걸으시는 '내주하시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이십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눈이 가리어져 예수님이 곁에서 그들과 나란이 걷고 계심을 알아보지 못했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것이 아니냐”[ νόητοι κα βραδες τ καρδί το πιστεύειν π πσιν ος λάλησαν ο προφται· οχ τατα δει παθεν τν χριστν κα εσελθεν ες τν δόξαν ατο ( 아노에토이 카이 브라데이스 카르디아 피스튜에인 에피 파신 호이스 엘랄레산 호이 프로페타이. 우키 타우타 에데이 파데인 크리스톤 카이 에이셀데인 에이스 독산 아우투?)](24:25-26)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ρξάμενος π Μωϋσέως κα π πάντων τν προφητν διερμήνευσεν ατος ν πάσαις τας γραφας τ περ αυτο (아록사메노스 아포 모위세오스 카이 아포 판톤 프로페톤 디에르메뉴센 아우토이스 파사이스 타이스 그라파이스 페리 헤아우투)](27)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책망과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주님의 책망: "지성의 둔함과 마음의 게으름"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가지를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한 자들이여 (νόητοι - 아노에토이)

 

단어는 단순히 IQ 낮다는 뜻이 아니라, "지각을 사용하지 않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눈으로 보았고 여인들의 부활 증언도 들었지만(22-24), 이를 영적으로 연결하여 해석할 있는 '영적 지성'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에 주님은 이를 책망하셨습니다.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βραδες τ καρδί το πιστεύειν - 브라데이스 카르디아...)

 

βραδες(브라데이스) '느린, 게으른, 둔한'이라는 뜻입니다.  , 그들의 마음이 "믿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 게으르고 둔하다" 책망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구약 성경)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지 모르나, 그것을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마음의 반응이 너무나 더디고 게으르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현대 우리에게 주는 책망: 우리 역시 성경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막상 삶의 위기와 절망(엠마오 ) 마주했을 말씀을 현실에 대입하여 믿는 일에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게으르지 않은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2.       구원의 필연적 법칙: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οχ τατα δει παθεν... - 우키 타우타 에데이 파데인...)

 

26절의 핵심 단어는 δει(에데이)입니다.  이는 "~해야만 한다" 신적 필연성(Divine Necessity)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로마 제국의 권력에 밀려 어쩔 없이 당한 '실패'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해 창세 전부터 성경에 계획된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필연적인 구원 공식이었습니다.

 

고난과 영광의 순서: 주님은 고난(παθεν) 통과해야만 비로소 자기의 영광(δόξαν) 들어갈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현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제자들은 '고난 없는 정치적 영광'만을 구했기에 십자가 앞에서 실망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시며, 우리 삶에 찾아오는 연단과 고난 역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필연적 과정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3.       주님의 교훈(해법): "오직 성경으로 주님을 해석하는 "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διερμήνευσεν - 디에르메뉴센)

 

단어는 '번역하다, 통역하다, 깊이 해석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해석학, Hermeneutics' 어원이 됩니다.)  예수님은 감정적인 위로나 눈에 보이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구약 성경 전체) 텍스트 삼아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로 의미를 완벽하게 통역해 주셨습니다.

 

성경의 목적지: τ περ αυτο( 페리 헤아우투) , 성경의 모든 기록이 결국 "자기에 관한 "임을 풀어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의 모든 제사, 성막, 선지자들의 예언이 가리키는 종착지가 바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사실을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현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의 무지함과 영적 실망감을 치료하는 유일한 처방은 "성경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상황을 감정이나 세상의 기준으로 해석하지 않고, 구약과 신약 전체를 뚫고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삶을 통역해 , 비로소 우리의 가려진 눈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인터넷).

 

(5)    다섯째로, 저는 제자들과 유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알아 았다[γένετο ν τ κατακλιθναι ατν μετ’ ατν, λαβν τν ρτον ελόγησεν κα κλάσας πεδίδου ατος· ατν δ διηνοίχθησαν ο φθαλμο κα πέγνωσαν ατόν (에게네토 카타클리데나이 아우톤 아우톤, 라본 아르톤 율로게센 카이 클라사스 에페디두 아우토이스. 아우톤 디에노이ㅋ데산 호이 오프달모이 카이 에페그노산 아우톤)](24:30-31)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반영 적용하고 싶습니다.

 

1.       주객(主客) 전도: 삶의 주권을 내어드림

 

원어의 뉘앙스: 제자들의 강권으로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을 , 본래 손님()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이 오히려 가지사”[λαβν(라본)], “축사하시고”[ελόγησεν(율로게센)], “떼어”[κλάσας(클라사스)] 주시는 주인() 역할을 행하십니다.   가지 행동의 연속은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 26:26) 오병이어의 기적( 9:16)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우리의 반영과 적용: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 삶의 필요를 채워줄 손님'으로 초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열리는 시점은 예수님이 삶의 식탁에서 주인의 자리를 잡으시고, 삶의 떡을 직접 쥐고 축사하시며 깨뜨리실 때입니다.   삶의 주권과 핸들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비로소 주님의 살아계심이 경험됩니다.

 

2.       가려진 눈의 열림: 성례전적 임재와 예배의 회복

 

원어의 뉘앙스: διηνοίχθησαν(디에노이흐데산)(밝아져/열려져) '열다'라는 뜻의 수동태 형태입니다.  , 제자들의 인간적인 노력이나 시력으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영적인 눈이 "강제로 열려지게 되었다" 신적 수동태입니다.   결과 그들은 주님을 단순히 아는 수준을 넘어 πέγνωσαν(에페그노산)(온전히/깊이 알아보다)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반영과 적용: 27절의 '말씀(성경 공부)' 통해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면, 30~31절의 '떡을 떼는 행위(성만찬/예배)' 통해 그들의 눈이 완전히 열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은 예배와 성찬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매주 들려오는 말씀(선포) 떡을 떼는 친교(성찬과 성도의 교제) 속에서 성령님이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실 , 우리는 관념 속의 예수가 아닌 '부활하여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실재하는 예수' 온전히 대면[πέγνωσαν(에페그노산)(온전히/깊이 알아보다)]하게 됩니다.

 

3.       '떼어 주시는 ' 영적 의미: 십자가의 흔적을 발견함

 

원어의 뉘앙스: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κλάσας(클라사스)(떼어/부수어) 제자들에게 건네주셨습니다.  떡이 찢어지는 순간, 제자들은 비로소 며칠 예루살렘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사 생명의 떡으로어 주셨던 예수님의 처절한 사랑과 십자가의 자국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반영과 적용: 우리 삶에 찾아오는 연단과 고난으로 인해 삶의 자리와 계획이 '찢어지고 깨지는 순간’[κλάσας(클라사스)] 있습니다.  소적인 구원에 갇혀 있을 때는 삶이 깨질 절망하지만, 거시적인 구원의 눈이 열리면 삶이 찢어지는 순간이 도리어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연합하여 부활의 주님을 가장 선명하게 만나는 은혜의 통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묵상 종합 요약:

엠마오 제자들의 영안이 열린 비결은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십자가 복음)' 받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일상과 예배 속에서 주님께 삶의 주권을 맡겨 드릴 , 가려졌던 눈이 열려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는 기적을 경험하게 것입니다(인터넷).

 

(6)    여섯째로, 저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Οχ καρδία μν καιομένη ν ν μν ς λάλει μν ν τ δ, ς διήνοιγεν μν τς γραφάς (우키 카르디아 헤몬 카이오메네 헤민 호스 엘랄레이 헤민 호도, 호스 디에노이겐 헤민 타스 그라파스?)](24:32)하고 서로 말한 내용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성령과 말씀이 일으키는 내면의 부흥: "계속 타오르는 마음"

 

원어의 깊이: καιομένη ν(카이오메네 ) '타오르다'라는 뜻의 현재 분사(καιομένη) 미완료 과거형 동사(ν) 결합한 형태입니다.  , 순간적으로 반짝 타올랐다 꺼진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내내 가슴속에서 불꽃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상태" 의미합니다.

 

교훈과 반영: 진정한 신앙의 회복(부흥) 외부의 자극이나 감정적인 분위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텍스트가 심령에 부딪힐 일어납니다.  현대 제자들은 감정적인 위로나 일시적인 뜨거움에 집착하기보다, 내면에서 말씀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성령의 역사를 구해야 합니다.

 

2.       가려진 닫힌 틀을 깨뜨리는 복음: "성경을 열어젖히심"

 

원어의 깊이: διήνοιγεν(디에노이겐) '열다, 헤치다'라는 뜻의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31절에서 제자들의 닫힌 눈을 여실 쓰인 단어(διηνοίχθησαν) 같은 어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가두어 두었던 생각의 , 닫혀 있던 성경의 닫힌 문을 활짝 열어젖혀(Open) 주셨습니다.

 

교훈과 반영: 제자들이 절망했던 이유는 성경을 자기 기준(정치적 구원)으로만 해석하여 닫아두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성경을 열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관통하는 거시적 구원으로 해석해 주실 비로소 가슴이 타올랐습니다.  우리 역시 삶을 방식대로 해석하지 말고, 성령님이 지각과 성경을 열어젖히사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관점으로 인생을 보게 하시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3.       일상의 여정에서 경험하는 임재: " 위에서 행하시는 역사"

 

원어의 깊이: 제자들은 주님이 위에서”[ν τ δ( 호도] 말씀하셨던 때를 회상합니다.  거룩한 성전이나 특별한 종교적 집회 장소가 아니라, 절망하여 터덜터덜 고향으로 내려가던 '지극히 평범하고 세속적인 ' 바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부흥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교훈과 반영: 오늘날 현대 제자들에게 '(δός)' 직장, 가정, 일터와 같은 일상의 현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종교적 공간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낙심하고 대화하는 일상의 여정 속에서도 여전히 우리 곁에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을 뜨겁게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예레미야 23 29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말이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그리고 저는 새찬송가 184 불길 같은 성령 생각났습니다.  1절과 후렴 가사만 나눕니다: (1) 불길 같은 성령 간구하는 우리게 지금 강림하셔서 영광 보여 주소서 (후렴)성령이여 임하사 우리 영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소서 기다리는 우리게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a.       바위를 깨뜨리는 방망이: 인간의 견고한 틀을 깨는 말씀

 

말씀의 연결: 예레미야 23 2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묘사됩니다.  엠마오 제자들에게 방망이는 그들이 완고하게 붙잡고 있던 '정치적·소적 메시아관'이라는 단단한 바위를 깨뜨리는 주님의 책망과 성경 풀이였습니다.

 

우리의 반영: 우리 내면에도 나만의 유익, 세상적인 성공, 인간적인 구원의 기준이라는 견고한 바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길이 임하면 가장 먼저 우리 중심적인 고집과 편견이 산산이 부서지는 '회개와 자복의 역사' 일어납니다.  바위가 깨져야 비로소 참된 복음의 씨앗이 심겨질 있습니다.

 

b.       같은 성령: 마음을 소멸하고 정결하게 하는

 

말씀의 연결: 예레미야의 " 말이 같지 아니하냐"라는 선포와 찬송가의 "불길 같은 성령" 동일한 영적 속성을 가리킵니다.  불은 모든 더러운 것을 태워버리고 순전한 정금만을 남깁니다.  제자들이 위에서 느낀 '뜨거움' 단순히 감정적인 흥분이 아니라, 그들 안에 가득했던 절망, 공포, 회의라는 찌꺼기들이 소멸되는 성령의 정화 작업이었습니다.

 

우리의 반영: 현대 제자들이 구해야 성령 충만은 나를 과시하는 능력이 아니라, 안의 불순물(염려, 정욕, 영적 게으름) 태우는 불입니다.  성령의 불길이 영혼을 사로잡을 , 세상이 주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주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순전한 소망이 타오르게 됩니다.

 

c.       영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성령 (찬송가 후렴)

 

말씀의 연결: 찬송가 후렴은 "우리 영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소서"라고 노래합니다.  엠마오 제자들은 처음에 '육신의 소원(로마로부터의 해방)' 좌절되어 절망했으나, 주님이 성경을 풀어주시고 성령의 불이 임하자 그들의 '영의 소원(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몸의 속량)' 눈을 뜨며 비교할 없는 영적 만족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반영: 세상적인 만족은 일시적이며 우리를 다시 목마르게 합니다.  그러나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기다릴 , 성령님은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영의 소원' 일깨우시고, 안에서 가장 완벽한 평안과 만족을 주십니다(인터넷).

 

(7)    마자막 일곱째로, 저는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그들과 함께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사람도 길에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24:33-35)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말씀은 절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났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 사명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엠마오 이야기의 위대한 결론입니다.   말씀이 주는 핵심 의미와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즉각적인 돌이킴과 사명의 회복 ("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의미: 제자들은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뜨거워지자, 날이 저물어 밤이 깊었음에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ναστάντες ατ τ ρᾳ(안아스탄테스 아우테 호라)(“ 때로 일어나”)]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불과 시간 전만 해도 예수님이 처형당한 절망과 공포의 자리이자, 자신들이 도망쳐 나왔던 곳이었습니다.

 

교훈: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환경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낙심하여 내려가던 방향을 돌이켜, 사명의 자리이자 증인의 자리인 '나의 예루살렘'으로 즉각 복귀하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2.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는 부활의 기쁨 ("모여 있어...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의미: 예루살렘에 돌아온 제자는 숨어 있던 열한 사도와 동료들을 만났고, 그곳에서 "주님이 과연 살아나셔서 베드로(시몬)에게 나타나셨다!" 공동체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교훈: 부활의 신앙은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교회) 안에서 함께 나누고 확증할 더욱 견고해집니다.  내게 임한 성령의 불길과 다른 이에게 임한 부활의 증거가 만날 , 공동체 전체가 확신과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3.       일상에서 만난 주님을 증언함 ("길에서 일과...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의미: 제자 역시 자신들이 ' 위에서' 겪은 성경 풀이의 감격과 식탁에서 '떡을 떼실 ' 주님을 알아보았던 생생한 간증을 공동체 앞에 쏟아놓았습니다.

 

교훈: 참된 제자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위에서 나란히 걸어주신 보혜사 성령님의 은혜, 삶의 주권을 맡겼을 열렸던 개안의 기적을 삶의 현장에서 이웃과 형제들에게 말하는 '복음의 증인' 되어야 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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