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을 주의하는 사람은 속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21:7-9).
(1)
개역개정 한국어 성경을 보면 누가복음
21장
5-9절을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이르시다(마24:1-2; 막13:1-2)”라고 제목을 붙혔지만 표준새번역 한국어 성경을 보면 누가복음
21장
5-6절만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시다(마24:1-2; 막13:1-2)”라고 제목을 붙혔고
7-19절을 “재난의 징조(마24:3-14; 막13:3-13)”라고 제목을 붙혔습니다[개역개정 한국어 성경은
10-19절을 “환난의 징조(마24:3-14; 막13:3-13)”라고 제목을 붙혔음].
(a)
저는 개역개정 한국어 성경보다 표준새번역 한국어 성경을 따라서 지난 주에 누가복음
21장 5-6절만 묵상하였고,
오늘은 7-9절 말씀만 묵상하려고 합니다(내일은 10-19절 말씀을 묵상하려고 함).
(i)
그 말은 저는 표준새번역 한국어 성경을 따라서 ‘환난(재난)의 징조’
말씀인 누가복음
21장 7-19절 말씀을 두 부분으로 나눠서 오늘은
7-9절 말씀을,
내일은 10-19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2)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1장
7-9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으로 읽고 또 읽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
[τὸ τέλος (토 텔로스)]전에 “반드시 먼저 있어야”
[γενέσθαι πρῶτον (게네스다이 프로톤)]할 “이런 일”[ταῦτα (타우타)](9절, 표준새번역)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한
4가지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a)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
[τὸ τέλος (토 텔로스)]은 무엇일까요?
1.
단어의 원어적 의미:
'텔로스(τέλος)'
헬라어 '텔로스(τέλος)'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파멸'이나 '끝(End)'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목적의 성취',
'완성(Completion)',
'도달해야 할 최종 목표(Goal)'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하신 구원 역사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완성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2.
누가복음
21장 문맥에서의 이중적 의미
예수님의 종말론 설교(감람산 강화)는 언제나 당대의 역사적 사건과 우주적 종말이 겹쳐서 나타나는
'예언적 원근법'을 가집니다.
가까운 역사적 종말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제자들이 돌 성전을 보며 감탄할 때 예수님은 성전 파괴를 예언하셨습니다(6절). 7절에서 제자들이 물은
"이런 일이 어느 때에 일어나겠사오며"라는 질문에 대한 일차적 답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한 시대의 종말'이었습니다.
궁극적인 우주적 종말
(인자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러나 9절에서 예수님은 난리와 소문이 있어도
"끝(τὸ τέλος)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전 파괴 이후에도 역사가 지속될 것이며,
진짜 최종적인 끝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재림의 날(27절), 즉 악의 세력이 심판받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우주적 종말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3.
묵상을 위한 영적 메시지
따라서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은 두려워해야 할 파괴의 날이 아니라,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28절) 하신 말씀처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최종적 완성이자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의미합니다.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일들'(타우타)이 일어나는 혼란 속에서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정하신
'최종 목적지(텔로스)'를 향해 역사가 전진하고 있음을 신뢰하게 만듭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개혁주의 종말론(Reformed
Eschatology), 특히 개혁주의 완성(Consummation)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간략하게 생각해보고 싶어졌습니다.
·
먼저 개혁주의 종말론입니다:
개혁주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언약 성취를 중심으로 역사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신학입니다.
세 세가지 핵심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a.
이미와 아직
(Already but Not Yet)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첫 번째 오심)으로 이 땅에
'이미' (Already)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최종적인 완성은 미래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
'아직'(Not-yet)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이 두 시기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b.
역사적·우주적 회복
종말은 단순히 영혼들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개인적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종 심판을 통해 전 우주가 죄와 저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갱신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c.
언약의 최종 완성
(Consummation)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는 때입니다.
사탄과 사망의 권세는 영원히 멸망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주님과 영원하고 완전한 연합을 누리게 됩니다.
·
개혁주의 완성(Consummation)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역사,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최종적으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우주적 사건을 뜻합니다.
a.
이미와 아직
(Already but Not Yet)의 완성
개혁주의 종말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Already)'
시작되었으나, 예수님의 재림 때
'아직(Not
yet)' 성취되지 않은 최종 상태에 도달한다는 점입니다.
Consummation(완성)은 이
'아직'의 상태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전 우주적으로 완성되는 시점을 의미합니다.
b.
구속사의 최종 정점
사탄과 죄의 멸망: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종 심판을 통해 모든 악과 죄,
사망의 권세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
타락으로 신음하던 피조 세계가 완전히 회복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언약의 성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며,
성도는 부활한 몸으로 주님과 완전한 연합(결혼의 완성)을 누리게 됩니다(인터넷).
(b)
둘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
전에 “반드시 먼저 있어야”
[γενέσθαι πρῶτον (게네스다이 프로톤)]할 “이런 일”[ταῦτα (타우타)](눅21:9, 표준새번역)은 무엇일까요?
(i)
누가복음
21장 7-9절 문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이런 일(ταῦτα, 타우타)"은 종말의 완성이 이르기 전에 세상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전조 사건들을 의미합니다.
본문과 앞뒤 구절을 살펴보면,
이 일들은 크게 세 가지 성격으로 분류됩니다(인터넷):
1.
‘이런 일(ταῦ타)’의 구체적인 내용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이 오기 전 역사 속에서 일어날 징조들을 명시하셨습니다.
영적 미혹과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8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
하며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종교적 혼란이 일어납니다.
정치적 격동과 군사적 재난(9-10절): 난리와 소문,
즉 "전쟁(πολέμους)"과 소요 사태인
"소동(ἀκαταστασίας)"이 일어납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국제적 갈등과 전쟁이 치열해집니다.
자연재해와 사회적 위기(11절):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발생하고,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들이 나타납니다.
2.
“반드시 먼저 있어야(γενέσθαι
πρῶτον)”의 성경적 의미
신적 필연성 (δεῖ, 데이): 9절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데이(δεῖ)'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는 우연히 일어나는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사적 계획 속에서 허용된
'신적 필연성'을 뜻합니다.
과정으로서의 필연성: 종말이라는 최종 목적지(텔로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죄악된 세상이 겪어야만 하는 산고(진통)의 과정이
'먼저(πρῶτον)' 선행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3.
묵상을 위한 영적 메시지
예수님께서 이 일들이
"반드시 먼저 있을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신 이유는 제자들을 공포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8절), "두려워하지 말라(μὴ πτοηθῆτε)"(9절)
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전쟁과 소요,
재난으로 요동칠 때,
그것은 세상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이런 일들'을 보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이 묵상의 핵심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이 오기 전 역사 속에서 일어날 징조들인
(1) “영적 미혹과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8절)”과 (2) “정치적 격동과 군사적 재난(9-10절)”과 (3) “자연재해와 사회적 위기(11절)”를 묵상할 때 생각난 말씀과 질문이 생겼습니다.
-
먼저 “영적 미혹과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8절)”을 묵상할 때 생각난 말씀은 요한일서
4장 1절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아마도 그 이유는 제가 요한일서 전체를 묵상했을 때 영적 미혹과 거짓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미 묵상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영적 미혹과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8절)"과 요한일서의 연관성을 좀 체계적으로 알고 싶어졌습니다.
n
누가복음
21장 8절의 종말론적 경고와 요한일서
4장 1절의 영적 분별 명령은
'거짓 세력의 출현이 종말의 필연적 징조'라는 점에서 매우 강력하고 체계적인 연관성을 지닙니다.
누가복음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현상에 대한
'거짓의 현상적 예언'이라면, 요한일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한
'교리적·실천적 분별 지침'입니다. 두 본문의 연관성을 세 가지 핵심 축으로 체계화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종말론적 타이밍의 일치:
"이미 시작된 마지막 때"
누가복음 21장 8절: 예수님은 미래에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나
"때가 가까웠다"고 미혹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요한일서 연관성: 요한 사도는 이 예언이 자신들이 살던 시대에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선언합니다.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라고 말합니다.
묵상 포인트: 예수님이 예언하신 영적 미혹의 전조들은 먼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교회 역사 전체,
특히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재'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합니다.
2.
미혹의 본질과 정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함"
누가복음 21장 8절: 거짓 적그리스도들의 특징은
"내가 그라(I
am He)" 하며 예수님의 자리를 찬탈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연관성: 요한일서는 이 영적 미혹의 실체를 교리적으로 정확히 규명합니다.
요한일서
4장 2-3절은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를 제시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했고,
요한은 이를
"적그리스도의 영"이자 "거짓 선지자"의 본질로 규정했습니다.
묵상 포인트: 영적 미혹은 언제나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신성과 인성,
그리고 그분의 구속 사역'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의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적 기독론(예수 그리스도 중심)에 서 있는지 검증하라는 뜻입니다.
3.
미혹에 대처하는 성도의 태도:
"미혹을 받지 말라"
vs "시험하라"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의 영적 혼란을 경계하며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면,
요한 사도는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아무 영이나 덥석 믿지 말고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권면합니다.
즉,
성도는 다가오는 미혹 앞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의 기준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검증하며 영적 분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두 본문을 엮어 묵상할 때,
마지막 때의 영적 혼란은 우리의 감정이나 영적 체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거하는 분별력'으로만 이겨낼 수 있다는 강력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인터넷).
n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기 위해 세 가지 명확한 진위 검증 기준을 제시합니다(인터넷):
1.
교리적 기준
(Doctrinal Test):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가장 근본적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바르게 믿고 선포하느냐에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거룩한 신이 추하고 악한 물질(육체)을 입을 수 없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분별 요점:
예수께서 100%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100%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핵심 구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일 4:2-3).
2.
도덕적 기준
(Moral Test): 의의 행함과 계명 준수
말과 지식으로만 구원을 논하고 삶의 열매가 없는 자들은 거짓에 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그분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어둠(죄) 가운데 행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분별 요점: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의를 행하는 삶의 열매로 증명됩니다.
핵심 구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0).
3.
관계적 기준
(Relational Test): 형제 사랑의 실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눈에 보이는 공동체의 지체와 형제를 미워하고 외면한다면,
그 안에 거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닙니다.
분별 요점:
적그리스도의 영은 분열을 조장하고 이기적이지만,
하나님의 영은 십자가의 사랑을 본받아 공동체 안에서 실제적인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핵심 구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인터넷).
-
또한 저는 “정치적 격동과 군사적 재난(9-10절)” 부분에서 “소동”[ἀκαταστασίας (아카타스타시아)]이 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와 “자연재해와 사회적 위기(11절)” 부분에서는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들”이 무엇인지 좀 알고 싶어졌습니다.
1.
정치적 격동:
‘소동’[ἀκαταστασίας (아카타스타시아)]의 구체적 의미
헬라어 ‘아카타스타시아(ἀκαταστασία)’는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아-)와 ‘안정, 질서’를 뜻하는 어원(카타스타시스)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시끄러운 상태를 넘어
“기존의 사회적·정치적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무정부 상태의 대혼란(Anarchy)”을 뜻합니다.
성경적 맥락:
국가 간의 공식적인 전쟁[πολέμους
(폴레무스)]뿐만 아니라,
한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내란,
폭동, 혁명, 정권 전복,
시민 소요 사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묵상 포인트:
법과 질서가 붕괴되고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정치적 무법천지가 펼쳐지더라도,
예수님은 그것이 종말의 과정 속에서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일(9절)”이므로 성도는 공포에 질려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격려하십니다.
2.
자연재해와 사회적 위기: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들’의 의미
예수님 당시 유대 묵시문학과 신약성경의 맥락에서 이 표현은 우주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경고의 사인들(Cosmic
Signs)을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현상: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며,
천체들이 흔들리는 현상(눅
21:25-26)이나 혜성,
유성우, 극단적인 기후 이변 등 인간이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대자연의 두려운 전조들을 뜻합니다.
역사적 성취: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멸망 직전 하늘에 칼 모양의 별(혜성)이 나타나고 성전 위에 군대와 병거들이 구름 속을 달리는 듯한 기이한 현상들이 목격되어 사람들이 큰 공포에 빠졌다고 전해집니다.
묵상 포인트:
땅의 재난(지진, 기근, 전염병)을 넘어
'하늘의 징조'까지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의 역사가 영원하지 않으며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심판과 개입이 임박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영적 경고등입니다(인터넷).
(c)
셋째로,
예수님께서 “종말”
전에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이런 일”을 대비하여 제자들에게 하신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Βλέπετε
μὴ πλανηθῆτε (블레페테 메 플라네테테)](눅21:8)는 말씀과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전쟁과 난리의 소문을 듣게 되어도 겁내지 말아라”(표준새번역)][ὅταν δὲ ἀκούσητε πολέμους καὶ ἀκαταστασίας,
μὴ πτοηθῆτε (호탄 데 아쿠세테 폴레무스 카이 아카타스타시아스,
메 프토에테테)](9절)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i)
예수님께서 대재난을 앞두고 주신 이 두 가지 명령은 종말의 혼란 속에서 성도가 지켜야 할
‘내면의 영적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강력한 행동 지침입니다.
각 명령의 단어적 의미와 성도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8절) — 지성을 깨우는 분별력
원어적 의미: ‘주의하라(βλέπετε)’는 눈을 크게 뜨고 계속해서 예리하게 관찰하라는 뜻이며,
‘미혹(πλανηθῆτε)’은 길을 잃고 헤매거나 본래의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의미: 종말이 가까울수록 진리를 왜곡하고 신앙의 본질을 흐리는 영적 속임수가 치밀해집니다.
예수님은 환경의 변화보다
‘영적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더 경계하셨습니다.
성도는 감정이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앞서 묵상한 요한일서의 기준처럼 철저히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 분별력의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합니다.
2.
"두려워하지 말라
/ 겁내지 말아라"
(9절) — 감정을 지키는 믿음
원어적 의미: ‘두려워하다’[πτοηθῆτε (프토에테테)]는 갑작스러운 공포나 재난 앞에 마음이 펄쩍 뛰며 공황 상태(Panic)에 빠지는 내면의 붕괴를 뜻합니다.
말씀의 의미: 전쟁(정치적 격동)과 소동(사회적 무법천지)의 소식이 들려올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성도의 내면만큼은 공포에 장악당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십니다.
이 두려움 없는 태도는 세상이 안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혼란조차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δεῖ (데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일)]
아래에 있음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3.
두 명령의 통합적 묵상
예수님은 성도가 마지막 때를 살아갈 때
‘차가운 머리(영적 분별력)’와 ‘담대한 심장(평안함)’을 동시에 소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미혹을 주의하는 사람은 속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위기 앞에서도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성도는 공포에 질려 도망치거나 거짓 구원자에게 매달리지 않고 묵묵히 주님이 맡기신 사명의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미혹을 주의하는 사람은 속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속지 않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묵묵히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이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 속지 않는
'분별력'과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의 뿌리는 결국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 신뢰'에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아무리 소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여도,
그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δεῖ)의 손길 아래에 있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 내면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임합니다.
그 평안을 소유한 사람만이 요동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사명의 자리'를 묵묵히,
그리고 굳건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성도의 가장 위대한 종말론적 삶은 거창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을 신뢰함으로 오늘 나에게 맡겨진 일상과 사명에 신실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인터넷).
(d)
마지막 넷째로,
왜 예수님이 “종말”
전에 “받으시 먼저 있어야”
할 “이런 일”(눅21:9, 표준새번역)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제자들이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Διδάσκαλε,
πότε οὖν ταῦτα ἔσται, καὶ τί τὸ σημεῖον ὅταν μέλλῃ ταῦτα γίνεσθαι (디다스칼레, 포테 운 타우타 에스타이,
카이 티 토 세메이온 호탄 멜레 타우타 기네스다이?)](7절, 표준새번역)하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제자들의 질문의 의미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i)
제자들의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당대 유대인들의 역사적 배경과 신앙적 갈망이 집약된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7절에 나타난 제자들의 질문([ποτέ
(포테)(언제)]와 [τί τὸ σημεῖον (티 토 세메이온)(무슨 징조)]의 깊은 의미와 의도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성전 파괴 예언에 대한 충격과 두려움
질문의 배경: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돌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습니다(5절). 그러나 예수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6절)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하십니다.
의도: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이자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들 세계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거대한 역사적 재앙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서,
미리 대비하고 피할 수 있는 구체적인 타이밍(언제)과 전조(무슨 징조)를 구했던 것입니다.
2.
정치적·군사적 해방(하나님 나라)에 대한 조급함
질문의 배경: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눈에 보이는 영광스러운 메시아 나라를 당장 세우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눅 19:11).
의도: 제자들은 성전 파괴라는 대격변이 일어나면,
곧이어 자신들이 열망하던 새로운 정치적 황금기(메시아 시대)가 즉각 도래할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려고 할 때"를 물음으로써,
자신들이 주역이 될 새로운 세상의 반전이 언제 시작되는지 그 시간표를 미리 파악하고 싶어 하는 조급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3.
영적 무지와 시한부적 신앙의 한계
의도: 제자들의 초점은 '언제(Time)'와 '징조(Sign)'라는 외부적인 조건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여 안전을 확보하거나,
위기를 모면할 정보(스케줄)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와 대조: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언제, 무슨 징조)에 대해 날짜나 시기를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8-9절에서 '미혹을 주의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며 성도의 내면적 상태와 삶의 태도(사명)로 초점을 완전히 전환시키십니다.
예수님이 징조들을 말씀해주신 진짜 이유는 제자들이 종말의 시간표를 마스터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언제 그날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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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리의 초점은
'언제(Time)'와 '징조(Sign)'라는 외부적인 조건에 맞춰져 있고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여 안전을 확보하거나,
위기를 모면할 정보(스케줄)를 원하지만 주님은 언제 그날(종말)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시키기 위하신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저에게 주신 마음은 종말이 온다할지라도 주님이 주신 사명따라 묵묵히 사역하다가 죽기[죽을 사(死)] 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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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글입니다:
“참으로 숙연해지며 깊은 울림을 주는 위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미래를 예측하여 안전을 도모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면서도,
주님이 원하시는
‘단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서기를 결단하시는 모습에서 참된 제자의 길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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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이 맡기신 사명의 자리에서 ‘묵묵히 사역하다가 죽기를 원한다(死)’는 고백은,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선언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이는 사도 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했던 순교적 영성과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종말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며 내면의 방어선(분별력과 담대함)을 요구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종말론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일상을 포기하거나 도피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마지막 때의 소란함 속에서 가장 일상적이고도 가장 거룩한 사명에 끝까지 신실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보내주신 이 종신(終身)의 사명 선언은 오늘날 수많은 미혹과 염려로 요동하는 이 시대 속에서,
성도가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결한 이정표입니다.
주님께서 그 마음에 부어주신 거룩한 소원과 결단을 기쁘게 받으시고,
사역의 걸음마다 흔들리지 않는 평강과 하늘의 능력을 더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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