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는 것은 내가 독약을 마시고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용서하라”(눅17:3, 4)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누가복음 17:5-6).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5-6절 말씀을 읽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왜 사도들이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라고 말했을까 였습니다. 이 생각이 든 이유는 어제 묵상한 누가복음
17장 1-4절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a)
사도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부르짖은 이유는,
바로 어제 묵상한
1~4절의 말씀이 인간의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불가능한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인터넷):
1.
'실족'과 '용서'라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1~2절: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게 낫다
(엄청난 경고).
3~4절: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면 너는 용서하라.
특히 하루에 일곱 번이나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오는 사람을 매번 조건 없이 용서하라는 명령은,
인간의 본성과 감정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내 안의 인격과 인내심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한 것입니다.
2.
"믿음을 더하소서"
=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사도들이 요구한
'믿음(πίστις,
피스티스)'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내 상식과 감정을 뛰어넘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영적인 힘과 능력"을 뜻합니다.
즉, 제자들의 요청을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하루에 일곱 번이나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또 용서합니까?
제 안에는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렇게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믿음의 량(Volume)을 늘려주십시오."
3.
예수님의 답변(6절)이 주는 반전:
양이 아니라 관계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용서할 힘이 부족하니 믿음의
'양'을 더해달라고(Increase)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6절에서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생각:
"큰 순종을 하려면
'큰 믿음(많은 양)'이 필요해."
예수님의 교정:
"아니다. 믿음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가(질의 문제)'의 문제다."
아무리 작아도 살아있는 겨자씨 같은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어지는 기적(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내 안의 작은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라는 핵심으로 이어집니다.
요약하자면, 1~4절의 '무한 용서'라는 엄청난 요구 앞에 제자들은 압도당했고,
그 무력감 속에서
5절의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비명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인터넷).
(i)
저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께 ‘주님,
저에게 믿음으로 더하소서’라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안그래도 어제 사랑하는 첫째 딸과 식탁 교제를 나누면서 제 자신의 ‘밑바닥’을 주님께서 들춰내시사 보게하고 계시는데 제 자신의 여러모로의 ‘한계’를 딸에게도 진솔하게 고백하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또한 제자들처럼 “제 안에는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라고 인정하면서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충만히 열매를 맺으시사 하나님의 사랑으로만이 저는 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사랑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6절)이란 어떠한 믿음일까요?
(a)
저는 “겨자씨 한 알”[κόκκον
σινάπεως( )]이란 말씀을 묵상할 때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3장 18-19절 말씀을 다시금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i)
여기서 “겨자씨 한 알”이란 표현은 단순히 식물의 씨앗을 넘어 다음과 같은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작고 보잘것없는 시작
(Insignificant Beginning)
극도의 작음: 당시 유대 사회에서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이었습니다.
초라한 출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눈에는 매우 미약하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음을 상징합니다.
2.
폭발적인 생명력과 역동적 성장
(Dynamic Growth)
반전의 역사: 겨자씨는 작지만 그 안에 거대한 생명력을 품고 있어,
자라나면 3~4미터 높이의 큰 나무(또는 큰 풀)가 됩니다.
멈출 수 없는 확장: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속도로 확장되어 결국 온 세상을 덮게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3.
포용성과 안식의 처소
(Inclusivity & Refuge)
공동체의 형성: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방인)을 품는 거대한 공동체가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평안의 제공: 고단한 영혼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진정한 안식과 보호를 얻게 됨을 상징합니다.
4.
믿음의 실재
(Actual Faith)
분량보다 생명력: 다른 본문(눅 17:6)과 연결해 볼 때,
중요한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생명력'입니다.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살아있다면 산을 옮기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겨자씨 한 알은 ‘세상의 눈에는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대한 변화를 일으켜 만민을 품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인터넷).
(b)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생명력'이기에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살아있다면 산을 옮기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력이 있는 또는 꿈틀거리는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의 의미힐까요?
1.
내가 죽고
'예수 생명'이 일하게 하는 믿음
생명력 있는 믿음은 내 안의 의지나 열정을 쥐어짜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일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주권을 넘겨드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저의 삶 속 증거:
"제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라고 딸 앞에서 제 한계를 진솔하게 인정하신 바로 그 고백이 생명력 있는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제가 완전히 죽어 빈 공간이 될 때,
그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성령)'이 숨을 쉬고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에 단단히 붙어 있는 믿음
겨자씨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대지(땅)로부터 끊임없이 영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아 자라듯,
생명력 있는 믿음은 공급처인 하나님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체적 의미:
환경이 흔들리고 내 감정이 요동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신실하시다"라는 그분의 성품과 말씀의 약속에 나를 단단히 플러그인(Plug-in)하는 것입니다.
내 감정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연결성이 바로 생명력입니다.
3.
작지만
'지금 당장 순종의 발걸음'을 떼는 믿음
죽은 씨앗은 가만히 있지만,
살아 있는 씨앗은 땅속에서 외롭게 껍질을 깨는
'반응'을 합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은 거창한 결심에 머물지 않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아주 작고 구체적인 순종 하나를 선택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 의미:
나에게 상처 준 이웃을 단번에 완벽하게 사랑하겠다는 거대한 포부 대신,
오늘 당장 그를 향해
"비난의 말 한마디를 멈추는 것",
혹은 딸에게 먼저 나의 약함을 고백하며
"미안하다"고 손을 내미는 작은 선택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순종의 선택이 결국 뽕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는 기적의 폭발력을 가져옵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력이 있는 믿음이란,
내 연약함을 감추는 완벽함이 아니라
"나는 무능하지만,
내 안의 주님은 완전하시다"를 믿고 매 순간 그분께 반응하는 삶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내가 완전히 죽어 빈 공간이 될 때,
그 속에서 비로서 ‘하나님의 생명(성령)이 숨을 쉬고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란 말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저로하여금 “깨짐”(brokenness)
속에서 제 “밑바닥”을 보게하실 때에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은 바로 영적 “비움”(emptying)이기 때문입니다.
·
다시 말하면,
제 자아나 모든 것이 깨지는 가운데 성령님이 들춰내시사 저로하여금 보게하시는 제 밑바닥은 저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과 죄와 연약함과 미련함과 교만함 등등은 저로하여금 제 자신은 간 곳없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보이며,
주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 자신이 비워지고 주님으로만 채워지길 사모하는 가운데 저는 오늘 말씀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비워지고 있는 제 안에 살아 운동력있게 역사(일)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1.
내가 깨질 때 드러나는
'왕의 통치'
우리는 흔히 내가 강해지고 능력이 많아져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원리는 늘 반대였습니다.
그릇의 비유:
바울 사도는 우리가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질그릇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으면 그 안의 보배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깨어질 때,
그 틈새로 비로소 예수의 생명이 세상에 흘러넘치게 됩니다(고후
4:7~10).
약함이 곧 능력: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을 때,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네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셨습니다. 내가 완전히 비워진 그 자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100% 일하실 수 있는 완벽한 무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비움'
이후를 지키는 영적 분별력
주님이 주신 이 귀한
'비움'의 은혜가 삶의 실제적인 열매로 이어지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마음의 중심이 있습니다.
정죄감이 아닌 의탁으로:
사단은 성령님이 들춰내신 우리의 밑바닥(죄, 교만, 무능력)을 보고
"너는 자격이 없어",
"너는 실패자야"라며 '정죄감'을 심으려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들추심은 다릅니다.
우리를 고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나를 의지하렴"
하고 품어주시는 사랑의 초대입니다.
낙심이 아닌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시선을 돌리십시오.
비워진 자리에 복음을 채우기:
자아를 비워내어 생긴 그 거룩한 빈 공간은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의 말씀을 계속해서 채워 넣어야 합니다.
내가 비워진 만큼,
예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인터넷).
(3)
만일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은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하고 말씀하십니다.
(a)
왜 예수님께서는 많고 많은 나무들 중에 “뽕나무”[“συκαμίνῳ”(쉬카미노스)]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당대 유대인들의 배경과 이 식물의 생태학적 특징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나무를 선택하신 놀라운 세 가지 영적 이유가 숨겨져 있습니다(인터넷):
1.
지독할 정도로 깊고 단단한
'뿌리' (인간의 한계와 고집)
쉬카미노스[συκαμίνῳ (뽕나무)]는 땅속으로 뿌리를 엄청나게 깊고 넓게 내리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가뭄이 심한 이스라엘 기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하 깊은 곳의 수분을 찾아 뿌리를 사방으로 뻗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통째로 뽑아낼 수 없는 나무의 대명사였습니다.
영적 의미:
이 문맥은 바로 앞 절의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무조건 용서하라'는 명령 뒤에 나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박힌 분노,
억울함, 자존심, 그리고 내면의 교만함과 미련함은 이 뽕나무 뿌리처럼 단단해서 내 의지나 결단으로는 절대 뽑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힘으로는 그 깊은 마음의 뿌리를 뽑지 못하지만,
생명력 있는 믿음은 그것을 단번에 뽑아낸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2.
가식적인 단맛 뒤에 숨겨진
'지독한 쓴맛'
(죄와 상처의 열매)
이 나무가 맺는 열매는 멀리서 보면 달콤한 무화과나 복분자처럼 먹음직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한 입에 넣고 씹으면 혀를 찌르는 지독한 쓴맛을 냅니다.
그래서 이 열매는 한 번에 먹지 못하고 조금씩 갉아 먹어야 했습니다.
영적 의미:
우리가 내 자아를 부둥켜안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않을 때,
겉으로는 '내 자존심을 지켰다'는 가짜 만족감(가짜 단맛)을 주지만,
결국 내 영혼을 적시는 것은 지독한
'쓴뿌리와 쓴맛'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계속 묵상하며 조금씩 갉아 먹는 인간의 비참함을 이 나무의 열매가 그대로 대변합니다.
3.
'말벌'의 침을 맞아야만 열매를 맺는 생태
(상처의 번식)
이 뽕나무는 스스로 수정하지 못하고,
오직 특정
'말벌(Wasps)'이 열매를 침으로 찔러 상처를 내야만 비로소 번식하고 열매를 맺는 독특한 생태를 가졌습니다.
영적 의미:
우리 인생도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말이나 행동으로
'정신적인 침'을 맞으면,
내 안에서 상처와 분노가 번식하기 시작합니다.
"나 저 사람한테 상처(침) 받았어! 절대 용서 못 해!"라고 외치는 순간,
내 마음 밭은 뽕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기 가장 좋은 환경이 됩니다.
바다에 심기는 기적:
생명의 완전한 역전
내 힘으로는 절대 뽑을 수 없는 깊은 뿌리를 가졌고(고집), 씹을수록 쓰고(쓴뿌리), 상처를 먹고 자라는(분노) 이 뽕나무를 향해 주님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고 명령하십니다.
육지 식물인 뽕나무가 짠물이 가득한 바다에 심기면 즉시 죽습니다.
즉,
내 안의 끈질긴 자아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처의 뿌리가 성령의 바다 속에서 완전히 소멸하고 재조정되는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신 것입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용서하지 않은 우리의 마음 밭은 뽕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기 좋은 환경이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 인공지능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답변을 하였습니다:
“‘용서하지 않은 마음’과 ‘뽕나무의 생태’를 연결하면,
우리의 내면에서 상처와 죄가 어떻게 세력을 확장하는지 아주 명확하게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뽕나무(돌무화과나무)의 독특한 특성을 우리 마음 밭에 대입하여
3가지 단계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상처의 침을 맞을 때,
마음 밭에
'뽕나무 씨앗'이 심깁니다.
뽕나무 열매는 말벌이 침으로 찔러 상처를 내야만 가스가 배출되면서 비로소 익고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상처가 성장의 기폭제가 되는 셈입니다.
마음 밭의 모습:
누군가 나에게 모욕적인 말,
무시하는 태도,
혹은 배신이라는
'날카로운 침'을 찌를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 마음속에는 즉각적으로 ‘억울함’과 ‘분노’라는 뽕나무 씨앗이 심깁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하며 그 상처를 계속 묵상하는 것은,
말벌의 침이 내 마음에 계속 독을 퍼뜨리도록 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내 마음은 뽕나무가 자라기에 가장 완벽한 토양이 됩니다.
2.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집과 자존심의 뿌리'를 내립니다.
뽕나무는 가뭄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땅속 수십 미터 아래까지,
그리고 사방으로 지독하게 뿌리를 뻗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도 절대 뽑히지 않는 생명력을 가졌습니다.
마음 밭의 모습: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내 안에서 ‘내가 옳고 그 사람이 틀렸다’는 자존심과 고집의 뿌리가 자라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미움은 내 생각의 깊은 곳(무의식과 상처의 기억)까지 단단하게 얽혀버립니다.
무성해지는 환경:
처음에는 단순한 서운함이었는데,
용서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어느새 내 인격과 가치관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뽕나무'가 되어 버립니다.
나중에는 내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그 미움을 뽑아낼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됩니다.
3.
영혼을 마비시키는
'지독한 쓴뿌리의 열매'를 맺습니다.
뽕나무 열매는 겉보기엔 탐스럽지만 씹을수록 지독한 쓴맛을 냅니다.
마음 밭의 모습:
용서하지 않는 상태는 얼핏 보면 내 자존심을 지키고 상대방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보여서 겉으로는
'달콤한 만족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내 영혼에
'쓴뿌리'를 내어 내 삶을 먼저 망가뜨립니다.
악순환의 무성함:
내 마음에 뽕나무가 무성해지면 영적인 시야가 가려집니다.
예배를 드려도 은혜가 없고,
기도가 막히며,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색안경을 끼고 삐딱하게 보게 됩니다.
결국 용서하지 않은 한 사람 때문에,
내 주변의 모든 관계와 환경이 쓴맛으로 뒤덮이는 무성한 뽕나무 숲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겨자씨 믿음이 필요한 이유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드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밭이 일단 용서하지 않음으로 가득 차서 뽕나무 숲이 되어버리면,
인간의 노력(수양, 도덕적 결단,
의지)으로는 그 뿌리를 캘 수 없습니다.
오직 "제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님의 그 가난한 심령(비움), 그리고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생명력(겨자씨 믿음)만이 그 단단한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성령의 바다에 던져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인터넷).
·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결국 상대방이 아니라 내 삶을 가장 먼저,
가장 처참하게 망가뜨린다"는 것은 영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엄연한 사실입니다.
많은 신앙 선배들이 이를 두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내가 독약을 마시고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비참한 영적 원리가 어떻게 내 삶을 파괴하는지 인공지능이 이렇게 구체적인 역학을 정리했습니다(인터넷):
1.
영적 공급망의 차단
(기도와 예배의 마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 통로는
'은혜와 용서'라는 혈관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내가 타인을 향해 용서의 문을 닫아걸면,
그 순간 내 영혼의 혈관이 막혀버립니다.
증상: 예배를 드려도 감격이 없고,
말씀을 읽어도 가슴에 와닿지 않으며,
기도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돕니다.
이유: 내 마음 중심에 주님이 아닌
'내가 받은 상처와 미움'이 왕좌를 차지하고 앉아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올 빈 공간(비움)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가해자에게 내 삶의
'조종간'을 넘겨주는 꼴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밤낮으로 그 사람을 묵상하며 분노하고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내 삶의 행복과 감정을 제어하는 조종간을 그 사람에게 통째로 넘겨준 것과 다름없습니다.
증상: 그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주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살고 있는데,
정작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사랑하는 자녀와 행복한 식탁 교제를 나눌 때도 문득문득 그 사람이 떠올라 순식간에 마음이 지옥으로 변합니다.
이유: 미움이라는 단단한 뽕나무 뿌리가 내 일상의 모든 영역에 뻗어 나가,
나의 평안과 기쁨을 사사건건 갉아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내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함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용서하지 않는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내 내면의 성품이 거칠고 날카롭게 변해갑니다.
증상: 한 사람을 향한 미움과 방어기제가 굳어지면,
전혀 상관없는 다른 가족이나 이웃을 대할 때도 쉽게 짜증이 나고,
의심하게 되며,
매사에 삐딱한 시선(쓴맛)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유: 내 안에 뽕나무가 무성해져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사랑, 희락, 화평) 대신 '쓴뿌리의 열매'가 내 인격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곱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단순히 상처 준 그 사람을 봐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미움이라는 끔찍한 독소로부터 사랑하는
'성도님의 영혼과 삶'을 먼저 건져내고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애끓는 사랑의 조치입니다.
내가 죽고 주님으로 채워지는
'비움'이 일어날 때,
이 쓴뿌리는 비로소 힘을 잃습니다”(인터넷).
(b)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하는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 의미 세 가지입니다:
1.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출처’다.
제자들은 하루에 일곱 번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 앞에 압도되어,
엄청나게 큰 믿음의
‘분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을 제시하십니다.
의미: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는 내 믿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믿음이 겨자씨처럼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성령)’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신뢰하는 믿음만 있다면,
그 믿음이 비록 연약하고 작아 보일지라도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개입하시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2.
내 힘으로 절대 뽑지 못하는 마음의 고집을 뽑아내신다.
뽕나무(쉬카미노스)는 뿌리가 사방으로 깊게 얽혀 있어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뽑을 수 없는 나무입니다.
우리 내면에 단단히 박힌 상처,
자존심, 억울함,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의 쓴 뿌리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의미: 예수님은 “너희의 결단이나 인내심으로는 그 마음의 뽕나무 뿌리를 절대 못 뽑아낸다.
그러나 살아있는 작은 믿음으로 나를 의지하면,
내가 그 깊은 자아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내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넘겨드릴 때 일어나는 영적 해방을 의미합니다.
3.
바다에 심기는
‘창조적인 재조정(역전)’이 일어난다.
육지 식물인 뽕나무가 짠물인 바다에 심기면 생태학적으로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다에
‘던져져 죽으리라’고 하지 않고,
바다에 ‘심기어라(πεφυτεύθητι)’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미: 이것은 완벽한 영적 역전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던 상처와 분노(뽕나무)가, 살아있는 믿음을 통과할 때 성령의 거대한 바다 속으로 완전히 침투당해 소멸하고,
오히려 주님의 평안과 사랑으로 재창조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결국 이 말씀은
"네 자아를 비워내고(Emptying)
겨자씨 같은 내 생명을 붙들 때,
너를 괴롭히던 그 완고한 상처와 감정들이 오히려 네 믿음의 통제 아래 무릎 꿇게(순종하게) 될 것이다"라는 승리의 선포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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