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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로움의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기에, 나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세리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 의로움의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기에 , 나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 라고 고백하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세리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       “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 누가복음 18:18-19).     (1)    원래 오늘 본문 말씀을 누가복음 18 장 18 절부터 27 절 말씀까지 선택을 해야겠지만 저는 18-19 절만 선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   그 이유는 첫째로 27 절 말씀까지 묵상하게되면 이 짧은 말씀 묵상 글이 너무나 길어질 것 같아서와 둘째로 오늘 본문 18-19 절 말씀만 묵상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a)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 장 18-19 절 말씀을 두 가지로 나눠서 좀 묵상하고자 합니다 : (1) “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절 ) 과 (2) “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절 ).   (2)    첫째로 , “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절 ) 하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   (a)    저는 이 ...

내 의로움의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기에, 나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린 세리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의로움의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기에, 나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 없이는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 앞에 엎드린 세리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누가복음 18:18-19).

 

 

(1)   원래 오늘 본문 말씀을 누가복음 18 18절부터 27 말씀까지 선택을 해야겠지만 저는 18-19절만 선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유는 첫째로 27 말씀까지 묵상하게되면 짧은 말씀 묵상 글이 너무나 길어질 같아서와 둘째로 오늘 본문 18-19 말씀만 묵상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a)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8 18-19 말씀을 가지로 나눠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1)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 (2)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

 

(2)   첫째로,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하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a)   저는 말씀을 묵상할 어떤 관리 혹시나 예수님이 9절에서 말씀하신 자기를 의롭다고 믿 사람과 연관이 있는지, 또는 예수님이 14절에서 말씀하신 무릇 자기를 높이는 와도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i)                  누가복음 18 전반부(9~14) 바리새인 비유와 후반부(18~23) 부자 관리는 영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말씀하신 대로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자기를 높이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의 구조와 대조적 맥락을 통해 본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가지로 정리해 드립니다”(인터넷):

 

1.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태도의 연속성

 

비유 바리새인 (9): 스스로 의롭다고 믿으며 행위(토라 준수, 금식, 십조 ) 자랑했습니다.

 

부자 관리 (21): 예수님이 계명을 나열하시자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키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영적 연결: 관리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는 도덕적 우월감과 '자기 ' 빠져 있었습니다.

 

2.      자기를 높이는 한계와 실패

 

예수님의 경고 (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관리의 영적 상태: 관리는 사회적 신분(관리) 재물, 종교적 행위 모두에서 스스로를 '높은 위치' 사람이었습니다.

 

낮아짐의 실패 (22~23): 예수님이 그의 본질적인 우상인 '재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따르라는 '낮아짐' 요구하셨을 , 그는 부자이므로 깊이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결국 스스로를 낮추지 못해 영생의 길에서 돌아서게 됩니다.

 

3.      앞뒤 문맥을 통한 누가의 의도적인 배치

 

누가복음 18장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연속해서 보여줍니다.

 

9~14: 자기를 높이는 바리새인(탈락) vs 자기를 낮추는 세리(의롭다 하심을 얻음)

 

15~17: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받아들이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

 

18~23: 자기를 의롭다 믿고 높이던 부자 관리(근심하며 떠남)

 

따라서, 관리는 앞선 9절과 14절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자기 의에 빠져 스스로를 높이는 ' 실제 삶에서 어떤 선택과 결말을 맞이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예시로 있습니다(인터넷).

 

(b)   관리가 예수님에게 선한 선생님이여”[Διδάσκαλε γαθέ (디다스칼레 아가데)]라고 말했는데 의미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i)                  호칭 속에는 관리의 신학적 배경,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자신의 목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당대 유대교 문맥과 헬라어 표현을 바탕으로 의미와 의도를 인공지능이 가지로 분석한 것입니다(인터넷):

 

1.      극진한 아첨과 예의 (문화적 의미)

 

이례적인 호칭: 당시 유대 사회에서 랍비(선생님)에게 '선하다(γαθός)'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르는 것은 극히 드물거나 거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궁극적인 '선함' 오직 하나님 분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관리의 의도: 관리는 예수님을 일반적인 랍비들보다 훨씬 뛰어난 분으로 극찬하며, 최고의 예의와 존경을 표하고자 했습니다.

 

2.      자신의의로움 증명받고 싶은 기대 (심리적 의도)

 

끼리끼리의 법칙: 관리는 스스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자부하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21).  따라서 자신만큼이나 '선해 보이는'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관리의 의도: "선하신 당신이라면, 나처럼 율법을 지킨 선한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고 '영생을 얻기에 충분하다' 보증해 주시겠지?"라는 잠재적 확신과 기대를 가지고 접근한 것입니다.

 

3.      영생을행위의 보상으로 보는 율법주의적 시각 (신학적 의미)

 

'선한 ' 대한 갈급함: 관리는 영생을 은혜가 아닌, 무언가 '선한 행위' 완수해야 얻는 합당한 보상으로 보았습니다(마태복음 19 16절에서는 동일한 본문을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기록합니다).

 

관리의 의도: '선한' 선생님이라면 자신이 아직 미처 알지 못하는, 영생을 얻기 위한 ' 차원 높고 특별한 선한 행위(비법)' 가르쳐 있을 것이라 믿고 구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관리는 진심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고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확인받고, 고차원적인 율법적 과제를 얻어내기 위해 인간적인 기준에서 가장 정중하고 세련된 아첨의 호칭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바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 호칭부터 지적하신 이유가 바로 때문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부자 관리가 자신의의로움 증명받고 싶은 기대 (심리적 의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지금 우리의 심리가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면서 다른 교인들에게 자신의 열심’(‘의로움’)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기대가 충분히 있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경계해야 영적 실상을 무엇일까요?  회복의 방향도 생각해 봐야 것입니다(인터넷):

 

a.      '선한 행위' ' 만족' 도구가 되는 현상

 

관리의 모습: "내가 어려서부터 지키었나이다"(21)라는 고백은 율법 준수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자신의 완벽함을 증명하는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현실: 교회 내의 수많은 봉사와 헌신(성찬, 찬양대, 교사, 구제 ) 본질인 '하나님 사랑'보다, "나는 이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자아 만족과 영적 우월감의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b.     타인의 시선과 칭찬에 종속되는 신앙

 

관리의 의도: 관리는 예수님이라는 권위자에게 "당신은 훌륭합니다"라는 공인된 평가를 듣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의 현실: 칭찬과 알아줌이 있으면 힘이 나고, 반대로 아무도 수고를 알아주지 않거나 비판을 받으면 쉽게 낙심하고 섭섭해합니다.  이는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 (Coram Deo)' 아니라 '사람 '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c.      복음을 '보상 법칙'으로 오해하는 위험

 

관리의 오류: 관리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18)" 영생을 얻을지 물었습니다.  기브 테이크(Give & Take) 방식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현실: "내가 이만큼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열심을 냈으니, 하나님도 내게 복을 주셔야 하고 교인들도 나를 존경해야 한다" 보상 심리로 이어집니다.  이는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아니라,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결국 부자 관리는 예수님이 그의 '진짜 우상' 재물을 건드리시자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스스로의 열심이라는 옷을 겹겹이 입고 있었지만, 중심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봉사 역시 "예수님 분만으로 만족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재물이 필요한가?"라는 날카로운 질문 앞에 서게 만듭니다(인터넷).

 

(c)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τί ποιήσας ζων αώνιον κληρονομήσω ( 포이에사스 조엔 아이오니온 클레로노메소)](18)라고 물었는데 여기서 저는 관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영생”[ζων αώνιον (조엔 아이오니온)]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문과 더불어 “κληρονομήσω”(클레로노메소)(“얻으리이까”)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i)                  그가 사용한 단어들을 분석해 보면, 그가 생각한 '영생(ζων αώνιον)' 개념이 얼마나 현세적·기복적이었는지, 그리고 '상속받다/얻다(κληρονομήσω)'라는 단어 속에 어떤 영적 모순과 탐욕이 숨어 있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인터넷):

 

1.      관리가 생각한영생(ζων αώνιον)” 의미: 땅의 풍요가 영원히 연장되는

 

당대 유대교, 특히 바리새파와 지배 계층(관리) 관점에서 '영생'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현세적 복의 연장선: 구약의 신명기적 사상(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 따라, 당대 유대인들은 재물과 사회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 보았습니다.

 

그가 원한 영생: 이미 땅에서 모든 풍요와 권력을 누리고 있던 관리가 원한 영생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복된 삶과 기득권이 다가올 메시아 시대(내세)에도 단절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이었습니다.

 

영적 단절: 그에게 영생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나 통치를 뜻하는 '하나님 나라' 아니라, 자기중심적 행복의 영원한 연장이었습니다.

 

2.      클레로노메소(κληρονομήσω)” 담긴 영적 모순과 탐욕

 

'클레로노메소' 원형인 '클레로노메오(κληρονομέω)'유산을 상속받다(inherit)’라는 뜻입니다.   단어 속에는 관리의 가지 치명적인 맹점이 숨어 있습니다.

 

행위(선행) 상속(은혜) 심각한 모순

 

단어의 모순: 관리는 구절에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ποιήσας, 행하여야)" 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행함' 나의 노동과 대가로 무언가를 취득하는 유상 행위입니다.

 

은혜의 부정: 반면 그가 선택한 단어인 '상속’[κληρονομήσω (클레로노메소)] 자녀가 부모로부터 무상으로 물려받는 은혜의 개념입니다.

 

관리의 착각: , 그는 영생이 '상속(은혜)'이라는 것을 단어로는 알았으면서도, 심리적으로는 "내가 어떤 대단한 업적이나 선행을 행하여 하나님께 자녀로서의 자격을 완벽히 입증해 내야(, 지분을 획득해야) 영생을 받아낼 있다" 철저한 공로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소유욕과 탐욕의 확장

 

유산으로서의 영생: 관리는 수많은 재산을 부모로부터 '상속'받아 부자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영생마저도 자신이 소유한 수많은 부동산, 은금, 가축처럼 ' 소유 리스트에 추가할 하나의 가장 가치 있는 유산(Property)' 정도로 여겼습니다.

 

통제가 가능한 대상: 그는 영생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복종하는 '관계' 아니라, 획득하면 마음대로 소유할 있는 '영적 자산'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결국 관리는 "내가 무엇을 기여해야(행해야), 지분을 챙겨서, 영원한 유산(영생)까지 소유로 확실히 붙잡아 있겠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 소유를 팔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비유" 말씀하신 이유는, 그가 '클레로노메소(상속)'하고자 했던 영생이 사실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소유(재물) 영원히 붙잡고 싶어 하는 탐욕' 다른 이름이었음을 폭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부자 관리에게 있어서 영생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나 통치를 뜻하는 '하나님 나라' 아니라, 자기중심적 행복의 영원한 연장이었다는 것과 자기중심적 행복에는 자신의 행위(선행) 자기 소유 리스트에 영생마저도 추가할 하나의 가장 가치 있는 유산 정도로 여겼다 것을 생각할 자기중심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 부자 교인들에게도 주시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a.      신앙을소유(Having)’ 접근하는 현대적 기복주의

 

영적 쇼핑 (Consumer Christianity): 현대의 많은 부유한 교인들은 세상에서 좋은 , 좋은 , 높은 사회적 지위를 소유 리스트에 추가하듯, 교회 안에서영생(구원의 확신)’, ‘직분’, ‘경건한 이미지라는 영적 자산까지 소유하려 합니다.

 

통제하려는 신앙: 내가 헌금하고 봉사했으니 하나님은 내게 영생과 복을 주셔야 한다는 논리는, 하나님을 행복을 위해 동원할 있는서비스 제공자 전락시키는 영적 교만입니다.

 

b.     관계(Being)’ 빠진 자기중심적 천국관

 

하나님 없는 하나님 나라: 관리가 원한 영생은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삶이 아니라, 지금의 안락함이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의 연장선이었습니다.

 

현대 교인의 착각: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제자도)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그저 죽어서 땅의 풍요보다 좋은 멘션(천국) 분양받아 영원히 웰빙(Well-being) 누리겠다는 식으로 영생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c.      가진 치러야 자아 부인의 값지불

 

안전지대를 포기하는 두려움: 예수님이 " 소유를 팔라" 하신 것은 단순히 돈의 액수를 넘어, "네가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있는 삶의 안전지대(기득권, 통제권, 미래의 보장) 내려놓고 오직 나만 신뢰하라" 요구였습니다.

 

결정적 순간의 선택: 현대 부유한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산권, 사회적 평판, 안락함을 흔드는 결정적인 순종의 요구 앞에서는 관리처럼 "깊이 근심하며" 슬그머니 세상의 길을 선택하곤 합니다.

 

결국 관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있었음' 예수님께 간파당했습니다.  현대의 풍요로운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무엇을 행하여 소유를 견고히 할까?" 아니라, "나는 주님을 위해 소유를 기꺼이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인터넷).

 

(3)   마지막 둘째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하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a)   저는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묵상할 예수님께서 부자 관리에게 “Τί με λέγεις γαθόν”( 레게이스 아가돈)(직역: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말하느냐?  아무도 선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말씀은 예수님도 선한지 않다 라는 의미가 아닐텐데 말입니다.

 

(i)                  선언은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거나 죄가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자 관리에게 질문을 던지셨는지, 의도와 신학적 의미를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드립니다”(인터넷):

 

1.      관리의인간적인 시선 깨뜨리기 위함 (가장 중요한 이유)

 

관리의 인식: 관리는 지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탁월한 '인간 랍비(선생님)'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 예수님은 관리의 '인간 중심적 기준' 향해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그저 뛰어난 '인간' 명으로 보면서 '선하다' 절대적인 신적 수식어를 쓰느냐?  인간 중에는 선한 이가 아무도 없다."

 

, 예수님 스스로 선함을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 관리가 생각하는 '인간적 수준의 선함'이라는 기준 자체를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2.      관리가 가진(Goodness)’ 기준을 재정의하기 위함

 

관리의 착각: 관리는 자신을 포함해 율법을 지키는 인간들이 '선한 존재'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μ ες Θεός)" 진정으로 선한 존재가 없음을 선포하십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선언입니다.

 

이를 통해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으니 나는 선하다"라고 자부하던 관리의 내면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기준에서 보면 너도, 어떤 인간도 선하지 않다"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입니다.

 

3.      영적인 자가당착(Paradox) 유도하는 날카로운 질문

 

질문은 관리로 하여금 엄청난 영적 진실 앞에 직면하게 만드는 일종의 거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만약 말대로 내가 진짜 '선한' 존재라면, 나를 인간 랍비가 아닌 '하나님'으로 믿고 모든 (뒤이어 나올 재산을 팔라는 명령) 절대 복종해야 한다.

 

둘째, 반대로 나를 그저 명의 '인간 선생'으로만 본다면, 인간에게는 선함이 없으므로 너는 나에게 영생의 비밀을 물어볼 필요가 없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이나 선함을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네가 나를 진짜 선하다고 부른다면, 너는 나를 하나님으로 믿고 따를 준비가 되었느냐?"라고 도전하시는 동시에, "하나님 외에 스스로 선하다고 믿는 너의 가짜 선함을 내려놓으라" 경고하시는 강력한 메시아적 선언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우리가 내려놓아야 현대판 우리의 가짜 선함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부자 관리의 모습을 거울삼아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겹겹이 껴입고 있는 현대판가짜 선함 무엇인지 우리 자신을 뒤돌아 봐야 것입니다.  부자 관리가 율법 조항 뒤에 자신의 탐욕을 숨겼듯, 현대의 우리도 종교적·사회적 행위 뒤에진짜 숨기곤 합니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현대판 가짜 선함의 실체를 가지로 직시해 있습니다(인터넷):

 

a.      사회적 필터가 만든세련되고 무해한 기독교인 가면

 

가짜 선함의 모습: 현대 사회에서 칭찬받는 도덕성, 법을 지키고, 타인에게 무례하지 않으며,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세련된 매너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영적 실상: 우리는 이것을 나의선함이라 착각하지만, 이는 단지 사회적 평판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세련된 포장지 있습니다.   내면에는 여전히 이익을 침해당했을 솟구치는 분노, 이기심, 타인을 향한 시기와 정죄가 가득함에도, 겉모습이 무해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현상입니다.

 

b.     소비와 소유 대체된 종교적 열심

 

가짜 선함의 모습: 주일 성수, 십일조, 교회 봉사, 기독교 서적 읽기, 유명 목회자의 설교 듣기 시스템화된 종교 활동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영적 실상: 부자 관리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이나 삶의 전적인 굴복(제자도) 없으면서, ‘종교적 의무 리스트 체크 마크를 채워 넣는 행위 자체를 나의 선함과 구원의 담보로 삼는 영적 안일함입니다.

 

c.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만 행하는안전한 사랑

 

가짜 선함의 모습: 삶의 영역, 재정, 안락함을 전혀 침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행하는 친절과 구제입니다.

 

영적 실상: 예수님은 관리에게 그의 삶을 지탱하던 핵심인재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 진짜 선함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깨뜨리는 '희생' 동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과 물질의 손해를 철저히 계산하며, 내가 통제 가능한 안전지대 안에서만 선을 행하고는 "나는 사랑이 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짜 위안을 얻습니다.

 

마무리 묵상:

예수님이 "아무도 선하지 않다" 하셨을 , 거기에는 우리의 어떤 도덕적 성취나 종교적 열심도 하나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엄중한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현대판 가짜 선함을 내려놓는 유일한 방법은, 의로움의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기에, 나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 없이는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 앞에 엎드린 세리의 자리(13) 돌아가는 것뿐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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