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심판을 보며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멸망해가는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애통함의 영성이 필요함을 교훈합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표준새번역)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9:41-44).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장 41-44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인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으로 읽은 후 헬라어 성경으로 읽었을 때 몇까지 헬라어 단어와 문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단어와 문장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째로,
예수님께서 ‘우셨다’[ἔκλαυσεν(에클라우센)](눅19:41)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i)
여기서 ‘우셨다’[ἔκλαυσεν(에클라우센)]라는 단어는 눈물만 흘리는 소리 없는 울음[δακρύω(다크리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 요한복음
11장 35절에에 등장함]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 크게 우는 통곡(Weeping,
Lamento)을 뜻합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외적으로 강하게 표출하며 우는 상태를 가리킵니다(인터넷)
·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우셨다고 기록된 대표적인 두 사건을 비교하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집니다(인터넷):
-
요한복음
11장 35절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때 사용된 단어는
'에다크뤼센'(εδακρυσεν)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소리 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는 뜻으로,
개인적인 슬픔과 긍휼을 나타냅니다.
-
누가복음
19장 41절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본문의 '에클라우센'(ε̂κλαυσεν)은 예루살렘의 영적 무지와 다가올 비참한 파멸(심판)을 바라보시며 소리쳐 통곡하신 대성통곡입니다.
n
영적 교훈:
통곡 속에서 주시는 메시지
하나님의 타는 듯한 아픔:
예수님의 통곡은 죄로 인해 무너져가면서도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사랑과 아픔을 보여줍니다.
눈물의 선지자적 사명:
다가올 심판을 보며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멸망해가는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애통함의 영성이 필요함을 교훈합니다(인터넷).
(ii)
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멸망해가는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애통함의 영성이 필요하다(예수님의 애통)는 글을 묵상할 때 마태복음
5장 4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신자의 애통).
·
연결 묵상을 통해 주시는 두 가지 영적 교훈:
첫째, 복이 있는 애통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세상은 슬픔을 피해야 할 불행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단순히 내 개인의 신세타령이나 세상적인 실패로 인한 눈물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멸망해가는 세상,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는 이웃을 보며 예수님처럼 가슴을 치며 우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는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자'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위로(파라클레데손타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이
'위로자(파라클레토스)'이듯,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마음으로 함께 우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깊은 평강과 위로를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생명수가 되게 하십니다(인터넷).
(b)
둘째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장
4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평화에 관한 일”[
τὰ πρὸς εἰρήνην(타 프로스 에이레넨)]이란 무엇일까요?
(i)
“평화에 관한 일”을 직역하면
"평화를 향해 있는 것들"
또는 "평화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일들"입니다. 여기서
'에이레네'(εἰρήνη)(“평화”)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을 번역한 것입니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오는 전인격적인 평안,
회복, 구원을 뜻합니다. 따라서
'평화에 관한 일'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해지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본질적인 길을 의미합니다(인터넷).
1.
문맥 속에서 본
"평화에 관한 일"의 본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예루살렘 성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군사적 '평화'를 기대하며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신 본질적인 평화의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
참된 평화의 실체는 바로 눈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러 오신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평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회개와 영적 눈을 뜨는 것: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참된 평화의 시작이었습니다.
(c)
셋째로,
이 “평화에 관한 일”이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νῦν δὲ ἐκρύβη ἀπὸ ὀφθαλμῶν
σου(뉜 데 에크뤼베 아포 오프탈몬 수)](눅19:42)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i)
이 말씀은 참된 평화의 왕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영적 맹목성을 향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이 문장의 헬라어 원어적 특징과 구체적인 의미,
그리고 영적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헬라어 구조적 의미
직역: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너의 눈들로부터 감추어졌다."
핵심 단어 분석:
'에크뤼베'(ἐκρύβη):
'감추다', '숨기다'를 뜻하는
'크립토'(κρύπτω)의 부정과거 수동태형입니다.
성경에서 수동태는 종종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로 사용되는데,
이는 인간의 지속적인 거부와 불순종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 눈을 가리우시는 영적 심판이 임했음을 암시합니다.
'뉘인데'(νῦν
δὲ): "그러나 바로 지금"이라는 뜻으로,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은혜의 기회의 시간이 지나가 버렸음을 뜻하는 엄중한 전환점의 선언입니다.
2.
"눈에 숨겨졌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
이 말씀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시력이 나빠졌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완악함의 결과:
하나님이 억지로 숨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메시아관,
기득권, 그리고 죄악을 고집하며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적을 지속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마침내 그들의 영적 눈이 어두워지는 심판에 이른 것입니다.
은혜의 마감:
예수님이 눈앞에 계시는
'바로 지금(νῦν)'이 구원의 날이었으나,
그들은 그 기회를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 결과 영적인 진리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비밀이 되어버렸습니다.
3.
영적 교훈:
은혜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
영적 보화는 믿음의 눈에만 보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욕망에 눈이 멀어 있으면,
바로 곁에 계신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은혜의 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기 전,
예수님은 눈물로 마지막 기회를 주셨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고 참된 평화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지금'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지혜입니다(인터넷).
(ii)
평화의 도시(예루살렘)가 평화의 왕을 눈앞에 두고도 영적 소경이 되어 파멸을 자초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경종을 울립니다.
예루살렘(Jerusalem)의 이름 뜻은
'평화(Shalom)의 터전'이지만, 정작 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가장 처참한 심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역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인 경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익숙함과 종교성이 영적 소경을 만듭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매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율법을 외웠으며,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공언했던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경종:
우리 역시 매주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직분을 가졌다는 교만과 종교적 익숙함에 빠져,
정작 지금 내 삶의 중심에 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세미한 음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될 수 있습니다.
2.
세속적 욕망이 참된 평화를 가립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원했던 평화는 로마를 무찌르는 정치적 승리와 경제적 번영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십자가의 평화',
'회개의 평화'를 가져오신 예수님을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오늘날의 경종:
오늘날 세상이 말하는 평안(돈, 성공, 안락함, 문제없는 삶)에 눈이 멀어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성결함, 십자가를 지는 삶,
이웃을 향한 애통함)를 오히려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 밀어내게 됩니다.
3.
은혜의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예루살렘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미래(주후 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를 예언하셨습니다.
'지금(νῦν)'이라는 은혜의 때를 놓친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오늘날의 경종: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하신 말씀처럼,
우리에게 허락된 회개의 기회와 사명의 기회는 무한정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인터넷).
(d)
넷째로,
예수님께서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ὅτι ἥξουσιν ἡμέραι ἐπὶ σέ, καὶ
παρεμβαλοῦσιν οἱ ἐχθροί σου χάρακά σοι, καὶ περικυκλώσουσίν σε, καὶ συνέξουσίν σε πάντοθεν(호티 헥수신 헤메라이 에피 세,
카이 파렘발루신 호이 에크드로이 수 카라카 소이,
카이 페리퀴클로수신 세,
카이 쉬넥수신 세 판토덴)](눅19:43)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저는 “παρεμβαλοῦσιν”(파렘발루신)(“쌓고”)와 “περικυκλώσουσίν” (페리퀴클로수신) (“둘러싸고”)와 “συνέξουσίν”(쉬넥수신)(“가두고”)란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i)
이 세 동사는 모두 미래형으로 쓰여,
다가올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주며,
역사적으로는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함락시킬 때 일어난 비극적 사건을 완벽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각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영적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파렘발루신
(παρεμβαλοῦσιν) (“쌓고”):
원형 및 구조:
'파렘발로'(παρεμβάλλω)의 미래 시제입니다.
'곁에'(παρά)와 '던지다·던져 넣다'(βάλλω)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구체적인 의미: 군사 용어로
"진을 치다",
"방어벽이나 토성(포위벽)을 구축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토둔(χάραξ, 카락스)'은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무 말뚝이나 흙으로 만든 둑을 의미합니다.
즉,
적들이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 주변에 거대한 포위벽과 공격용 토성을 쌓는 모습을 뜻합니다.
역사적 성취: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후,
유대인들이 탈출하거나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도록 성 주위에 약
8km에 달하는 거대한 목책과 토성(포위벽)을 단
3일 만에 쌓았습니다.
2.
페리퀴클로수신
(περικυκλώσουσίν) (“둘러”):
원형 및 구조:
'페리퀴클로오'(περικυκλόω)의 미래 시제입니다.
'사면에·주위에'(περί)와 '원·고리'(κύκλος)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구체적인 의미: "둥글게 에워싸다",
"사면을 완전히 포위하다"라는 뜻입니다.
틈새를 전혀 주지 않고 원형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서 도망갈 길을 완전하게 차단하는 군사 작전을 묘사합니다.
역사적 성취: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의 오병이어 언덕과 감람산 등 성 사방에 주둔하며 성 전체를 거대한 고리처럼 포위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성 안에 들어왔던 수많은 인파는 이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3.
쉬넥수신
(συνέξουσίν) (“가두고”):
원형 및 구조:
'쉬네코'(συνέχω)의 미래 시제입니다.
'함께'(σύν)와 '가지다·붙잡다'(ἔχω)가 결합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의미: "사방에서 압박하다",
"꼼짝 못 하게 내리누르다",
"숨 막히게 가두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공간적으로 갇힌 것을 넘어,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박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과 곤경을 겪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역사적 성취: 포위가 장기화되면서 성 안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잡아먹는 비극(요세푸스의 기록)이 일어날 정도로 성 안의 사람들은 영육 간에 숨 막히는 압박과 고통(쉬네코)을 당했습니다.
4.
종합적인 영적 교훈:
죄가 가져오는 영적 고립
예수님이 사용하신 세 단어(쌓고 → 둘러싸고 → 가두고)는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예외 없이 임하는지를 점진적으로 보여줍니다.
영적 고립의 무서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에이레네)을 거부하고 영적 소경(에크뤼베)이 된 영혼의 최종 상태는 사방이 막히는
'영적 고립'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결국 죄와 사탄의 권세에 둘러싸여 숨 막히는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막히기 전에 돌이키는 은혜:
사방이 토성으로 막히고 원수들에게 가침을 당하면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참혹한 파멸이 오기 전에,
아직 사방이 열려 있고 은혜의 기회가 있을 때 예루살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눈물로 바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문자 그대로 촘촘하게 갇혀 파멸을 맞이했습니다.
이 군사적이고도 생생한 단어들을 통해 예수님의 탄식이 얼마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인터넷).
·
저는 이 세 단어들 중에 마지막 세 번째 단어인 “συνέξουσίν”(쉬넥수신)(“가두고”)(will
hem in)를 읽었을 때 출애굽기
14장 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hemmed
in) 하리라."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
-
두 본문은
"인간이 사방으로 완전히 갇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적 고립"을 시각적으로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의 영적인 배경과 결과는
'완벽한 대조(Contrast)'를 이룹니다.
그 연관성과 영적 의미를 인공지능이 세 가지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70인역(LXX)
성경을 통한 언어적 연관성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을 보면 출애굽기
14장 3절에서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며
"광야에 갇혔다"고 할 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쉬클레이오(συγκλείω)'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3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두고"라고 하실 때의 단어는
'쉬네코(συνέχω)'입니다.
두 단어 모두
'함께(σύν)'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어,
사방에서 틈새 없이 꽉 조여와 완전히 폐쇄된 상태를 뜻하는 쌍둥이 같은 단어들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앞은 바다(혹은 성벽)요, 뒤는 애굽 군대(혹은 로마 군대)라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b.
두 사건의 결정적인
'차이점' (대조의 연관성)
두 사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 갇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 순종의 결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불순종의 결과인가’에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갇힘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를 따라 기적 같은
‘구원과 해방’으로 나아가는 축복의 통로였던 반면,
누가복음의 갇힘은 참된 평화의 왕을 거역한 죄로 인해 사방이 막혀버린 참혹한
‘심판과 파멸’의 결과였습니다.
즉, 동일한 고립의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그 중심에 함께 계시는 갇힘(출애굽기)은 홍해가 갈라지는 생명의 자리가 되지만,
하나님의 보살핌이 떠나버린 갇힘(누가복음)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영적 무덤이 된다는 점이 두 사건의 가장 큰 대조입니다.
c.
연결 묵상을 통해 주시는 영적 교훈
누구와 함께 갇혀 있는가?
출애굽기의 이스라엘은 사방이 갇혔으나 그 중심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에 그곳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의 예루살렘은 성벽을 단단히 닫아걸고 로마 군대와 싸우며 갇혔으나,
참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성 밖으로 밀어냈기에 그 갇힘은 결국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 고립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
우리 인생에도 때로는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혹은 인간관계 속에서 사방이 막히는
'쉬네코(가둠)'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 내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다면 그 갇힘은 출애굽기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볼 기회'가 되지만,
내 죄와 완악함으로 예수님을 멀리한 채 맞이한 고립은 나를 갉아먹는
'영적 파멸'이 됩니다.
사방이 막혔을 때,
하늘을 향해 눈을 들면 구원의 길이 열리지만(출애굽기), 하늘의 하나님마저 거부하면 사방의 토성은 나를 삼키는 감옥이 된다(누가복음)는 이 엄연한 영적 진리가 두 본문의 연결을 통해 더욱 명확해집니다(인터넷).
(e)
마지막 넷째로,
예수님께서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καὶ ἐδαφιοῦσίν σε καὶ τὰ τέκνα σου ἐν
σοί, καὶ οὐκ ἀφήσουσιν λίθον ἐπὶ
λίθον ἐν σοί, ἀνθ’ ὧν οὐκ ἔγνως τὸν
καιρὸν τῆς ἐπισκοπῆς
σου(카이 에다피우신 세 카이 타 테크나 수 엔 소이,
카이 우크 아페수신 리돈 에피 리돈 엔 소이,
안돈 우크 에그노스 톤 카이론 테스 에피스코페스 수)](눅19:44)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특히 “보살핌을 받는 날”[τὸν καιρὸν τῆς ἐπισκοπῆς
(톤 카이론 테스 에피스코페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i)
누가복음
19장 44절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최종 선언이자,
앞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통곡하셨던 궁극적인 원인을 밝히는 본문의 결론부입니다. 이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와 특히
“보살핌 받는 날”[τὸν καιρὸν τῆς
ἐπισκοπῆς (톤 카이론 테스 에피스코페스)]의 원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보살핌 받는 날"의 구체적인 의미
핵심 단어 분석:
'카이로스'(καιρός): 단순히 흘러가는 일반적인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목적이 성취되는
'결정적인 기회의 시간',
'하나님의 때'를 뜻합니다.
'에피스코페'(ἐπισκοπή):
'위에'(ἐπί)와 '보다'(σκοπέω)가 결합된 단어로,
"위에서 아래를 자세히 들여다보다",
"방문하다",
"감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비와 긍휼로 찾아오심(Visitation)'을 뜻합니다.
종합적 의미:
따라서 이 문장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비와 긍휼로 찾아오신 은혜의 기회"를 뜻합니다.
예루살렘의 비극은 왕이신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신 그 결정적인 기회의 때[카이로스(καιρός)]를 알아보지 못하고[우크 에그노스(οὐκ ἔγνως)]
거절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2.
전반부 심판 선언의 구체적인 의미
예수님은 이 은혜의 기회를 날려버린 예루살렘이 맞이할 참혹한 결과를 두 가지 생생한 묘사로 경고하셨습니다: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ἐδαφιοῦσίν σε καὶ τὰ
τέκνα σου ἐν σοί]
'에다피조'(ἐδαφίζω)는 '바닥', '기초'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하여
"바닥에 내리치다",
"흔적도 없이 평탄하게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성안의 주민들과 어린 자녀들까지 잔인하게 학살당해 땅에 짓밟힐 것을 예언한 가슴 아픈 통찰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οὐκ ἀφήσουσιν λίθον ἐπὶ
λίθον]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괴를 뜻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당시 헤롯 성전은 거대하고 화려한 돌들로 지어졌으며,
돌 사이에 금을 입혔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 군인들은 그 금을 찾기 위해 성전의 돌들을 하나하나 다 들추어내어 완전히 평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역사 속에서 문자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3.
본문 전체를 마무리하는 최종적인 영적 교훈
예수님의 우심(41절)부터 시작된 이 깊은 묵상은
44절에 이르러 우리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집니다.
방문의 목적은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에피스코페(방문)'는 본래 구원과 자비의 방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를 끝까지 거부하고 영적 소경으로 살아가면,
그 방문은 결국 심판과 형벌의 방문으로 바뀐다는 두려운 진리를 보여줍니다.
오늘이 바로
'에피스코페'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시며 은혜로 찾아오십니다.
내 생각과 세속적인 기준에 갇혀 지금 내 곁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자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합니다(인터넷).
·
우리가 내 생각과 세속적인 기준에 갇혀 지금 내 곁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자비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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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기준에 갇혀 우리 곁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자비(에피스코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적 감각을 깨우는 구체적인 훈련과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묵상하신 단어들(에클라우센, 에이레네, 에크뤼베, 쉬네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공지능이 3가지 단계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적 방향 전환)
첫째, 내 안의 '가짜 평화(세속적 기준)'를 매일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풍요를 평화라고 믿었기에 참 평화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돈,
성공, 세상적인 안락함을 참된 평화라고 믿는 눈을 매일 씻어내야 합니다.
둘째,
'영적 무지'에 대한 영적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는 예수님의 탄식이 나의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하며,
종교적인 익숙함(주일 예배,
직분)이 나의 영적 눈을 멀게 하지 않도록 날마다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눈물(애통함)을 내 눈물로 삼아야 합니다.
내 문제로만 우는 삶에서 벗어나,
죄로 인해 무너져가는 세상과 이웃을 보며 가슴을 치는 마태복음
5장 4절의 애통함을 품어야 합니다.
b.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실행 지침)
① 말씀의 거울 앞에 내 고집을 깨뜨리기
(날마다)
어떻게: 매일 성경을 읽을 때
'내가 원하는 복'을 찾는 도구로 읽지 말고,
'내 생각을 책망하시고 교정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읽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 내 가치관이 부서지는 경험이 있어야 눈이 열립니다.
② '바쁜 크로노스'를 멈추고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머물기
(기도의 골방)
어떻게: 세상의 유행과 성공을 따라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을 의도적으로 멈추어야 합니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스마트폰과 세상 소음을 끄고,
"주님, 오늘 내 삶을 감찰하시고(에피스코페) 말씀해 주옵소서"라고 묻는 침묵과 기도의 골방을 만드십시오.
③ 낮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훈련
(삶의 현장)
어떻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화려한 군마가 아닌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곁에 화려한 성공의 모습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웃,
고난받는 자,
교회의 작은 지체들의 모습으로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내 주변의 작고 소외된 이들을 주님 대하듯 대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c.
최종 결단을 위한 기도 제목
"주님, 예루살렘처럼 내 눈앞에 오신 주님의 자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는 영적 소경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내 세속적인 눈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시고,
오늘도 세미한 음성과 이웃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방문(에피스코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사방이 막히는 심판이 아니라 홍해가 갈라지는 구원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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