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你必须爱自己的灵魂。 你必须保守自己的灵魂。 [箴言 19:8, 16]

      你 必 须爱 自己的 灵 魂。 你 必 须 保守自己的 灵 魂。       [ 箴言 19:8, 16]     你 爱 自己 吗 ?我偶然看到西雅 图荣 耀 教会 ( Seattle Glory Church )金炳奎( Kim Byung-kyu )牧 师写 的一篇 专栏 文章, 标题 很有趣,于是便 读 了起 来 。 标题 是“自 爱 是 爱 的基 础 ”( 见 于 网 络 )。在 专栏 中,金牧 师 指出了健康自 爱 的 两 个 方面:( 1 )被 动层 面的自 爱 。 这 涉及 懂 得如何 宽 恕 并 包容自己的罪 与 过 失。“人必 须 先 经历 被 宽 恕和接 纳 ,才能包容他人的 过 失。因此,人需要 经历宽 恕的恩典和福音的 爱 。”( 2 )主 动层 面的自 爱 。 这 意味着“能 为 自己的 长 处 而喜 乐 的人,也 懂 得 赞 美和鼓 励 他人。人 应当认 同 并 为 自己的 长 处 感到喜 乐 ,同 时 也因自己的 属灵 恩 赐 而感到幸福。” 你 对 此有何看法?就我 个 人而言,我 认为爱 的基 础 是神的 爱 ,而非自 爱 。不 过 ,我确 实认 同金牧 师关 于“自 爱 是基 础 ”的 观 点。 换 言之,我相信只有 当 我 们 先能借着神的 爱 去 爱 自己 时 ,我 们 才能去 爱邻 舍。我也同意,正如神 宽 恕了我 们 ,只有 当 我 们真诚 地 宽 恕自己 时 ,我 们 才能 宽 恕 邻 舍。“能 为 自己的 长 处 而喜 乐 的人,也 懂 得 赞 美和鼓 励 他人” 这 句 话 尤其引起了我的共 鸣 。也 许这 是因 为 我常常看不到自己的 长 处 ,即便看到了,也 难 以 为 此感到喜 乐 。 结 果,我 觉 得自己在 赞 美和鼓 励 他人方面做得不 够 。 简 而言之,看 来 我一直未能用神的 爱 好好地 爱 自己。 在今天的 经 文——《箴言》 19 章 8 节 和 16 节 —— 圣 经谈 到了那些 爱 自己 灵 魂的人,以及那些保守自己 灵 魂的人。我想 围绕这两节经 文,反思“我 们 必 须爱 自己的 灵 魂;我 们 必 须 保守自己的 灵 魂” 这 一主 题 , 并 领 受...

주님의 목적이 곧 오늘 교회의 목적이자 우리의 사명입니다.

 

주님의 목적이 오늘 교회의 목적이자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집에 이르렀으니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10).

 

 

(1)   첫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 1-10 말씀을 한국어 성경으로 읽을 때에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리고 단어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8 35-43절에서 예수님께서 맹인 보게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하셨는데(42) 이렇게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 1-10절에서도 삭개오 그의 집에 구원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9).  드는 의문은 누가는 여리고에서 맹인과 삭개오와 그의 집에 구원이 이른 것을 연이어 기록한 것일까요?’입니다.

 

(a)   누가가 사건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신학적, 문학적 이유는 크게 가지로 요약할 있습니다.

 

1.      구원의 보편성과 확장성 증거

 

누가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구원이 사회적 극과 극에 있는 모두에게 임한다는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극과 : 맹인은 사회 최하층의 '가난한 '였고, 삭개오는 부유한 세리장으로 '권력자'였습니다.

 

영적 공통점: 사람 모두 유대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죄인 취급을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메시지: 누가는 구원이 신분, 빈부, 계층에 상관없이 오직 믿음과 은혜로 모두에게 열려 있음을 시각적으로 증거합니다.

 

2.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심' 절정

 

여리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마지막으로 거치신 중요한 도시입니다.

 

누가복음의 핵심 주제: 누가복음 19 10("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전체의 핵심 요절입니다.

 

점진적 배치: 누가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 여리고의 소외된 (맹인과 세리장) 구원하시는 모습을 연달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이 땅에 오신 목적(사명) 가장 극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3.      영적 맹인과 영적 눈뜸의 대조

 

사건은 앞서 나온 '부자 관리의 비유'( 18:18-23) 연결되어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 무엇인지 대조합니다.

 

재물과 구원의 관계: 돈이 많아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부자 관리와 달리, 영적·육적 맹인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눈을 떴습니다.

 

삭개오의 변화: 돈밖에 모르던 부자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즉각 회개합니다.  누가는 사건을 연이어 보여주며, 참된 구원은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재물에 대한 태도) 변화로 증명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누가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 여리고의 소외된 (맹인과 세리장) 구원하시는 모습을 연달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이 땅에 오신 목적(사명) 가장 극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읽을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가지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1) 잃은 양의 비유, (2)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3) 잃은 아들(탕자) 비유.    결국 누가복음 전채의 핵심 구절인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 10 말씀이 우리의 땅에서의 목적(사명) 돼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전체의 핵심 요절입니다.”

 

1.      비유( 15)에서 실제 사건( 18-19)으로의 완성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 드라크마, 탕자를 찾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여리고에서의 실현: 여리고에서 만난 맹인과 삭개오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15장에 나온실제 속에서 찾아낸 잃어버린 양이자 탕자들입니다.

 

이유: 당시 유대 사회는 맹인을 '죄의 결과', 세리를 '민족의 반역자' 여겨 잃어버린 존재(외인)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 그들을 찾아가 구원하심으로 비유가 아닌 실제 역사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2.      누가복음 19 10: 예수님의 유언이자 교회의 위임령

 

"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말씀은 예루살렘(십자가) 향해 가시던 예수님의 사명 선언서인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를 향한 위임령입니다.

 

찾아가는 사명: 양과 드라크마, 탕자의 아버지가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찾고 기다렸듯, 예수님도 여리고라는 도시로 직접 들어가셨습니다.

 

우리의 적용: 문맥은 교회가 단순히 성문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소외되고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직접 찾아 나서는 사명' 가져야 함을 강력히 교훈합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2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삭개오”[Ζακχαος(작카이오스)] 세리장”[ρχιτελώνης(아르키텔로네스)]이요 또한 부자”[πλούσιος(플루시오스)]였다는 말씀이 저로 하여금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난 부자(18:18-23) 생각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누가복음 18 18-23절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부자 관리에 대해서 기록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 1-10절에서는 구원받은 부자 세리장 삭개오에 대해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의도가 무엇일까요?

 

(a)   인공지능이 크게 가지로 분석한 것입니다(인터넷):

 

1.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불가능한 구원' 증명

 

앞선 사건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우니라"( 18:25) 하셨고,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있나이까"( 18:26)라며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 "무릇 사람이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있느니라"( 18:27).

 

삭개오를 통한 증명: 누가는 바로 다음 장에서 재물의 노예였던 부자 세리장 삭개오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부자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어 내셨음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성취적 배치입니다.

 

2.      '율법적 의인' '세상적 죄인' 반전

 

누가는 부자의 사회적·종교적 배경을 극적으로 대조하며 참된 의가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부자 관리: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킨 종교적 '엘리트'였으나, 정작 자신의 우상인 재물을 내려놓으라는 말씀 앞에서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세리장 삭개오: 유대 사회에서 민족의 고혈을 짜내는 사회적 '죄인' 괴수였으나, 예수님을 만난 소유의 절반을 나누고 배나 갚겠다는 파격적인 회개와 결단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가의 의도: 율법을 지킨다는 외적 경건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낮아지는 자가 참된 구원에 이른다는 '하나님 나라의 반전' 보여줍니다.

 

3.      물질에 대한 '소유'에서 '다스림(나눔)'으로의 전환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님을 만난 '재물을 대하는 태도' 있었습니다.

 

관리는 재물의 지배를 받음: 예수님보다 재물을 사랑했기에 슬픈 기색을 띠고 물러갔습니다.

 

삭개오는 재물을 다스림: 예수님을 '(Kyrios)' 영접한 순간, 재물의 우상 권세가 깨졌습니다.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재물을 나누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증명했습니다.  누가는 이를 통해 참된 구원은 반드시 물질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강력히 선포합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참된 구원은 반드시 물질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증명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질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구두쇠 같은 우리의 모습(인색한 모습)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인공지능의 답변입니다:

 

·         말씀하신 의문은 구원받은 신자가 매일의 삶에서 겪는 가장 치열하고 실제적인 영적 갈등입니다.  분명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물질 앞에서 여전히 인색해지는 우리의 모순된 모습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영적 원리로 설명할 있습니다.

 

1.      구원의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이미 구원받았으나, 아직 죄의 본성이 남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분상 이미 완벽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과 성품은 하늘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날마다 거룩해져 가는 성화(Sanctification) 과정에 있습니다.

 

돈의 지배력: 돈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우상(맘몬)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수십 년간 굳어진 물질적 안정감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 사람의 본성'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설명: 우리의 인색함은 구원을 받지 못해서라기보다, 여전히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라는 죄의 습성이 우리 안에 남아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의 다스림' 깊이 차이 (삭개오 사건의 점진적 적용)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강력한 첫사랑의 순간에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심의 순간에 물질로부터 완벽하게 자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미성숙: 구원은 받았으나 물질 영역에서 아직 주권(Lordship) 주님께 온전히 이양하지 못한 '영적 미성숙' 상태일 있습니다.

 

설명: 주님을 사랑하지만 여전히 삶의 안전장치로 물질을 움켜쥐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는 믿음이 자라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점진적으로 깨어져야 부분입니다.

 

3.      하나님보다 돈을 신뢰하는 '불안과 두려움'

 

인색함의 뿌리를 깊이 내려다보면, 밑바닥에는 하나님이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으실지도 모른다는 '영적 고아 의식' '불안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구원을 경험하고도,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움켜쥐려 했습니다.

 

설명: 우리의 인색함은 단순히 돈을 아끼는 마음을 넘어, 삶의 공급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통장의 잔고라고 믿는 '약해진 믿음' 방증입니다.

 

4.      사탄의 지속적인 속임수

 

사탄은 구원받은 성도가 물질을 흘려보냄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인색함의 합리화: 사탄은 우리 마음에 지금은 때가 아니야’,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 ‘ 먹고살기도 힘들잖아라는 생각을 집어넣어 인색함을 지혜로 포장하고 합리화하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물질 앞에서 인색해지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하루도 온전히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영적 현주소입니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라고 탄식했던 것처럼, 우리는 인색한 모습을 때마다 절망하기보다 다시금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의 물질관을 깨뜨려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3 말씀을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삭개오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하여 보고자 였다[ζήτει δεν τν ησον τίς στιν (에제테이 이데인 이에순 티스 에스틴)] 말씀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문자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a)   누가복음 19 3절의 헬라어 표현 ζήτει δεν τν ησον τίς στιν’ 삭개오의 구원 사건에서 영적인 전환점이 되는 매우 역동적이고 깊은 의미를 담은 문장입니다.  구절의 구체적인 원어적 의미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헬라어 문장의 구체적인 의미

 

ζήτει (에제테이) : 지속적이고 간절한 탐색

 

단어는 '찾다, 구하다, 열망하다'라는 뜻의제테오(ζητέω)’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 시제는 과거에 행동이 단번에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되거나 지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삭개오는 길을 가다 우연히 호기심에 쳐다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기 위해 지속적으로 애쓰고, 찾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뜻입니다.

 

δεν ... τίς στιν (이데인 ... 티스 에스틴) : 본질에 대한 탐구

 

직역하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본질을) 보기 원했다"입니다.

 

삭개오는 단순히 예수님의 외모나 , 소문의 주인공을 구경하려는 '시각적 호기심'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가?’, ‘ 같은 자도 용납해 주실 분인가?’라는 내면의 영적 갈급함과 그분의 정체(본질) 알고 싶어 하는 실존적 탐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주는 가지 영적 교훈

 

구원은 '영적인 갈망(Seeking)'에서 시작됩니다

 

삭개오는 세상의 부와 권력을 가졌으나 마음은 , 영적으로 가장 가난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찾고 구하는(ζήτει)' 행동은 내면의 영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영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교훈: 예레미야 29 13 말씀(‘너희가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처럼, 주님은 당신을 향해 지속적인 갈망을 품고 찾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도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알고자 하는 '에제테이' 갈망이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장애물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고자 했을 ,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키가 작았고', 환경적으로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3).  세리장이라는 사회적 체면도 걸림돌이었습니다.

 

교훈: 그러나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는 파격적인 선택을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은 주변의 시선, 나의 약점, 환경의 제약을 뛰어넘게 만듭니다.  참된 믿음은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나무) 찾는 적극성으로 증명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고 계셨습니다

 

삭개오는 본인이 예수님을 '보고자(δεν)' 애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무 밑에 이르신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먼저 부르시며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19: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훈: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았던 '에제테이(지속적인 찾음)'보다, 삭개오를 향한 예수님의 '찾으심' 훨씬 크고 먼저였습니다.  결국 19 10절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ζητσαι, 제테사이) 구원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선언은, 삭개오의 갈망이 결국 주님의 거대한 찾아오심 속에서 응답받았음을 보여줍니다”(인터넷).

 

(i)                   여기서 저는 주님은 우리를 향해 지속적인 갈망을 품고 찾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우리에게도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알고자 하는 '에제테이'(찾다, 구하다, 열망하다) 갈망이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동시에 저는 삭개오나 우리가 주님을 갈망하는 것보다 주님이 우리를 훨씬 갈망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a.      창세 전부터 시작된 주님의 갈망

 

우리는 삶의 어느 역경의 순간이나 영적 공허함의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을 찾기 시작(에제테이)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 아니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우리를 마음에 품고 갈망하셨습니다.

 

성경의 증언: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4-5).

 

의미: 우리의 갈망은 기껏해야 , 것이지만,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갈망은 '영원(Eternity)'이라는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b.     십자가에서 증명된 갈망의 크기

 

갈망의 크기는 갈망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 '무엇을 지불했는가' 증명됩니다.

 

우리의 지불: 삭개오는 주님을 보기 위해 체면을 버리고 나무에 올라가는 수고를 지불했습니다.  우리 역시 시간과 마음을 지불하며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지불: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셨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 '물과 ' 전부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내가 목마르다"( 19:28)라는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갈증을 넘어 우리 영혼을 향한 주님의 타오르는 갈망의 절규였습니다.

 

c.      먼저 찾아와 이름을 부르시는 사랑

 

누가복음 19장의 주인공은 사실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삭개오는 그저 군중 속에서 숨어서 보려 했을 뿐이지만, 주님은 정확히 나무 아래 멈추어 서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아시는 주님: 통행증을 끊듯 세금을 징수하며 사람들에게 이름 대신 '매국노, 죄인'으로 불리던 그의 진짜 이름(삭개오: '의로운 , 깨끗한 ')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고, 이름을 먼저 불러주셨습니다.

 

의미: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던 열망보다, 외롭고 소외된 삭개오의 영혼을 만나 구원하시고자 했던 주님의 갈망이 비교할 없이 컸기에 가능했던 기적입니다.

 

결국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알고자 갈망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나를 향한 주님의 갈망이 얼마나 크고 압도적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은 자만이 깊은 사랑을 갈구할 있는 법입니다(인터넷).

 

(4)   넷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 5 말씀을 읽을 예수님께서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ς λθεν π τν τόπον, ναβλέψας(호스 엘텐 에피 토폰, 아나블렙사스)]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σπεύσας κατάβηθι· σήμερον γρ ν τ οκ σου δε με μεναι(스페우사스 카타베티, 세메론 가르 오이코 데이 메이나이)] 말씀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a)   누가복음 19 5절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동과 선포는 삭개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결정적 순간입니다.  헬라어 문맥을 통해 구절을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이토록 단호하고도 긴박하게 말씀하셨는지 영적인 이유를 가지로 발견할 있습니다.

 

1.      쳐다보시고(ναβλέψας) : 의도된 걸음과 시선의 마주침

 

원어적 의미: '아나블렙사스(ναβλέψας)' '(νά) 향해 보다(βλέπω)'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문장은 "그곳에 이르사(ς λθεν π τν τόπον)"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예수님이 처음부터 삭개오가 있는 '바로 장소' 목적지로 삼고 걸어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의도: 숨어서 예수님을 훔쳐보려던 삭개오의 시선과,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신적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입니다.   시선은 정죄의 시선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하던 세리장의 외로움과 갈망을 단번에 알아채신 치유와 수용의 시선이었습니다.

 

2.      속히 내려오라(σπεύσας κατάβηθι) : 구원의 긴박성과 즉각성

 

원어적 의미: '스페우사스(σπεύσας)' '서두르다, 재촉하다'라는 뜻의 분사이며, '카타베티(κατάβηθι)' '내려오라' 명령형입니다.  "서둘러서 지금 당장 내려오라" 강력한 재촉입니다.

 

의도: 예루살렘(십자가) 향해 가시던 예수님의 구원 사역 일정 중에서 여리고는 마지막 성읍이었습니다.  , 예수님이 삭개오를 구원하실 있는 시간은 바로 '오늘, 지금 순간'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체면이나 두려움 때문에 나무 위에서 주저하지 않도록, 구원의 긴박성을 가지고 즉각적인 결단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3.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δε με μεναι) : 신성한 구원 계획의 필연성

 

원어적 의미: 헬라어 '데이(δε)' 성경에서 '하나님의 필연적인 주권과 계획,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신적 의무' 표현할 쓰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또한 '메이나이(μεναι)' '머물다, 거하다'라는 뜻의 '메노(μένω)' 부정사입니다.

 

의도: 예수님은 내가 집에 머물면 좋겠다라는 제안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집에 반드시 머물러야만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적 명령이 있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원과의 연결: 당시 유대 사회에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 먹고 머무는 것은 그와 '동등한 친구' 됨을 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삭개오의 집에 스스로 찾아가 머무심(교제하심)으로써,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당신의 땅에 목적(사명)임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

 

구원은 언제나 '오늘'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나중이 아니라 '오늘(σήμερον)' 당장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은혜의 처소로 나아가는 영적 결단은 뒤로 미루어서는 되며, 주님이 부르실 즉각 순종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필연적인 사랑(δε)' 대상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세 계획 속에서 반드시 너를 구원해야겠다하시는 주님의 거룩한 고집과 필연적 사랑이 오늘 우리의 속에도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확신하게 합니다”(인터넷).

 

(5)   다섯째로, 저는 삭개오의 반응인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σπεύσας κατέβη, κα πεδέξατο ατν χαίρω(스페우사스 카테베, 카이 휘페덱사토 아우톤 카이론)](19:6)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a)   삭개오의 반응은 예수님의 강력한 부르심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전인적인 순종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구절의 구체적인 원어적 의미와 영적 내면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가지로 나누어 있습니다(인터넷):

 

1.      헬라어 문장의 구체적인 의미

 

“σπεύσας κατέβη” (스페우사스 카테베) : 지체 없는 즉각적 순종

 

앞서 5절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분사 '스페우사스(서두르며)' 명령어 '카타베티(내려오라)', 6절에서 삭개오가 동일한 단어(σπεύσας, 스페우사스) 직설법 과거형(κατέβη, 카테베)으로 그대로 받아 행동에 옮겼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삭개오의 행동 사이에 1초의 주저함이나 계산도 없었음을 뜻합니다.  세리장이라는 사회적 체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나무에서 서둘러 내려올 때의 우스꽝스러운 모양새 등은 주님의 음성 앞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πεδέξατο” (휘페덱사토) : 최고의 환대와 영접

 

단어는 '~아래에' 뜻하는 '휘포(πό)' '영접하다, 받다'라는 뜻의 '데코마이(δέχομαι)' 결합한 '휘포데코마이(ποδέχομαι)' 과거형입니다.

 

단순히 손님을 안으로 들이는 것을 넘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하며 '나의 주인으로 정중히 모셔 들이는 환대' 의미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주관자로 기꺼이 모셔 들였습니다.

 

“χαίρων” (카이론) : 환경을 뛰어넘는 영혼의 기쁨


'기뻐하다'라는 뜻의 '카이로(χαίρω)' 현재분사형으로,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삭개오의 전인격이 '기쁨으로 가득 차서 계속해서 넘쳐나고 있는 상태' 묘사합니다.

 

주변의 유대 군중들은 여전히 삭개오를 향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7) 수군거리고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난 삭개오에게는 타인의 비난이나 환경의 압박이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하늘의 초자연적인 기쁨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2.      우리에게 주는 가지 영적 교훈

 

참된 순종은 '속도' 증명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급히(σπεύσας)"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말씀과 감동을 받을 "기도해 보고 결정할게요", "형편이 나아지면 할게요"라며 순종을 뒤로 미룹니다.  그러나 미루는 순종은 불순종의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주님의 부르심 앞에는 계산 없는 즉각적인 반응이 참된 믿음의 증거입니다.

 

마음 중심의 왕좌를 내어드리는 것이 '영접'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휘페덱사토(기꺼이 복종하며 영접)'했습니다.  이는 돈과 세상 권력으로 가득 있던 자기 인생의 중심 왕좌를 예수님께 내어드렸음을 상징합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권을 주님께 완전히 이양하는 소유권의 변화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정죄를 이기는 '기쁨' 줍니다.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하는 길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 세리 , 죄인 " 하는 수군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7).  그러나 삭개오는 기쁨(χαίρων)으로 충만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용납하시고 이름을 불러주셨다는 확신이 배경에 있다면,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정죄하든 상관없이 평안과 기쁨을 누릴 있음을 보여줍니다(인터넷).

 

(6)   여섯째로, 저는 사람 반응을 생각하고 싶어졌습니다: “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κα δόντες πάντες διεγόγγυζον λέγοντες τι Παρ μαρτωλ νδρ εσλθεν καταλσαι(카이 이돈테스 판테스 디에공귀존 레곤테스 호티 파라 하마르톨로 안드리 에이셀텐 카탈뤼사이)](19:7).  사람 그리 반응한 것일까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a)   사람들의 반응 “κα δόντες πάντες διεγόγγυζον λέγοντες τι Παρ μαρτωλ νδρ εσλθεν καταλσαι” 앞선 삭개오의 기쁨(6)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구절을 통해 사람들이 분노 섞인 반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무거운 교훈을 주는지 가지로 분석할 있습니다(인터넷):

 

1.      헬라어 문맥으로 보는 사람들의 반응 이유

 

“διεγόγγυζον” (디에공귀존) : 깊이 뿌리박힌 원망과 연쇄적 수군거림

 

단어는 '수군거리다, 불평하다'라는 뜻의공귀조(γογγύζω)’ 강세를 뜻하는 접두어디아(διά)’ 결합한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이는 군중 속에서 불평과 수군거림이 번으로 끝나지 않고, 마치 전염병처럼 무리 전체로 퍼져나가 끊임없이 지속되었음을 묘사합니다.   단어는 구약 성경(70인역)에서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 쓰인 단어와 같습니다.

 

“Παρ μαρτωλ νδρὶ” (파라 하마르톨로 안드리) : 철저한 정죄와 분리

 

직역하면 "죄를 짓는 사람(죄인) 곁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삭개오는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의 피를 빠는 '공인된 죄인', '도저히 구원받을 없는 '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그런 부정하고 추악한 자의 곁에(파라) 다가가 동격이 되시는 행동은 도저히 용납할 없는 영적, 사회적 배신이었습니다.

 

“καταλσαι” (카탈뤼사이) : 동등한 관계로서의 유숙

 

단어는 짐을 풀고 '풀어놓다, 유숙하다,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며 음식을 나누는 것은 사람과 생명 공동체이자 대등한 친구가 됨을 공식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손을 잡으시는 모습을 보며 율법적인 분노와 함께 질투와 실망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2.      군중들이 그렇게 반응한 구체적인 배경

 

종교적 우월감과 보상 심리: 군중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로마의 압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과 메시아의 관심은 '우리 같은 의인들'에게 먼저 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은혜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함: 그들은 구원이 율법적 행위나 신분으로 얻는 '보상'이라고 생각했지,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은혜'라는 복음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3.      우리에게 주는 가지 영적 교훈

 

안의 '영적 시기심' '종교적 바리새주의' 경계해야 합니다.

 

군중들은 삭개오가 구원받는 은혜의 현장을 보면서도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수군거렸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 안에서 손가락질받던 사람이나, 내가 보기에 자격 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은혜를 받거나 축복을 받을 은연중에 불평하거나 깎아내리려 때가 있습니다.  " 사람은 나보다 기도를 하는데 ?", " 사람은 과거가 깨끗하지 못한데 ?"라는 생각은 안에 사람들과 같은 종교적 우월감이 도사리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시선은 세상의 평판을 뛰어넘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의인과 죄인', '쓸모 있는 자와 쓸모없는 ' 분류하여 낙인을 찍고 격리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세상이 낙인찍은 죄인의 문을 열고 들어가십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기준(낙인)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이 버린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조건 없는 구원의 은혜가 임할 있음을 믿고 환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길을 걸을 때는 세상의 수군거림(디에공귀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거센 수군거림과 비난을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 위해서라면 대중의 인기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는 사명을 감당할 , 주변의 오해나 비난, 수군거림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인터넷).

 

(7)   일곱째로,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말인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라는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a)   삭개오의 고백은 군중들의 따가운 수군거림(7) 침묵시키고, 자신의 회개가 감정의 눈물에 머물지 않고 삶의 전인격적 돌이킴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복음의 위대한 정수입니다.  고백을 원어적 맥락과 당시 문화적 배경 속에서 깊이 묵상해 보면 가지 영적 보화를 발견할 있습니다(인터넷):

 

1.      문맥과 문화적 배경으로 보는 삭개오의 고백

 

① "주겠사오며... 갚겠나이다" : 현재시제의 결단

 

원어적 의미: 헬라어 성경을 보면 '주다(δίδωμι)' '갚다(ποδίδωμι)' 현재 시제(δίδωμι, ποδίδωμι) 사용되었습니다.

 

의도: 이는 "앞으로 돈을 많이 벌면 언젠가 주겠습니다"라는 미래의 막연한 약속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로 지금 순간, "지금 당장 소유를 잘라 가난한 자들에게 넘겨주고 있으며, 당장 배로 갚기 시작하겠다"라는 즉각적이고 확고부동한 실행을 의미합니다.

 

②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 율법의 요구를 뛰어넘는 파격

 

문화적 배경: 당시 유대교 율법과 랍비들의 전통에 따르면, 구제할 자기 재산의 20%(5분의 1) 이상을 주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가난하게 만들 있다고 하여 금지하거나 만류했습니다.

 

의도: 그러나 삭개오는 물질의 기준인 율법을 훨씬 뛰어넘어 자기 재산의 50% 즉각 내놓았습니다.  재물이 자신의 전부이자 우상이었던 부자 부처가 자발적으로 재산의 절반을 포기한 것은,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맘몬) 권세' 예수라는 존재에 의해 완벽하게 깨졌음을 뜻합니다.

 

③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갑절이나" : 철저한 배상

 

문화적 배경: 구약의 출애굽기 22장에 따르면, 남의 것을 속여 빼앗거나 횡령했을 자복하면 보통 본래 액수에 5분의 1(20%) 더해 갚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4( 갑절) 갚아야 하는 경우는 남의 가축을 죽이거나 강도질을 하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뿐이었습니다.

 

의도: 세리장으로서 법의 테두리를 교묘히 이용해 합법적으로 착취했던 삭개오는, 스스로를 '가장 흉악한 강도' 자리에 위치시킵니다.  자신의 부당 이득을 철저히 청산하겠다는 결단은, 그가 가졌던 기쁨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에게 끼친 피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정의로운 책임감'으로 승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우리에게 주는 가지 영적 교훈

 

참된 회개는 반드시 '지갑의 회개' 동반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까지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삭개오는 부자 관리(18) 달리 예수님을 얻기 위해 재물을 기꺼이 잃어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주님을 (Lord) 모신 자는 물질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물질을 다스리고 나누는 삶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흘러갑니다.

 

삭개오가 재산을 나눈 대상은 그를 멸시하고 손가락질하던 '가난한 유대 이웃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조건 없는 용서와 환대가 너무나 커서, 자신을 죄인 취급하던 이웃들의 허물마저 덮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수직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수평적인 이웃 사랑으로 확장됩니다.

 

회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열매'입니다.

 

삭개오가 재산을 나누겠다고 보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을 선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집에 유하시며 구원의 은혜를 먼저 부어주셨기에, 은혜에 감격한 삭개오 안에서 아름다운 회개의 열매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순종과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증거입니다(인터넷).

 

(8)   마지막 여덟째로,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구원이 집에 이르렀으니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a)   누가복음 19 9-10절은 여리고에서 시작된 구원 드라마의 위대한 마침표이자, 누가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신학적 주제를 선포하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최종적인 선언을 원어적 의미와 구속사적 맥락에서 깊이 묵상해 보면 크게 가지 영적 진리를 깨달을 있습니다.

 

1.      문맥과 원어로 보는 예수님의 선언

 

① "오늘 구원이 집에 이르렀으니" : 은혜의 즉각성과 공동체성

 

오늘(σήμερον, 세메론): 예수님은 앞서 5절에서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셨고, 삭개오가 급히 순종하자(6) 이제 "오늘 구원이 이르렀다" 선포하십니다.  구원은 막연한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바로 순간, 오늘 우리 삶에 실제가 되는 현재적 사건입니다.

 

οκ τούτ, 오이코 투토): 구원이 삭개오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의 '(가정/가문)'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이 구원받음으로써 가정의 영적 질서가 회복되고, 가족이 하나님 나라의 복을 함께 누리게 됨을 뜻하는 공동체적 구원의 아름다운 원리를 보여줍니다.

 

② "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언약적 지위의 회복

 

소외로부터의 회복: 유대인 군중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언약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향해 " 사람도(κα ατς, 카이 아우토스 - 역시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 단순히 혈통적인 유대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 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알지어다"라고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삶의 왕좌를 내어드린 삭개오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언약 백성임을 복권해 주신 선포입니다.

 

③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예수님의 성육신 목적

 

인자의 사명: 주님은 가만히 앉아서 죄인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구체적 의미: '찾아(ζητσαι, 제테사이)' 3절에서 삭개오가 주님을 '보고자 찾았던(에제테이)' 것과 같은 어원입니다.  인간의 미약한 갈망(에제테이) 압도하는 주님의 위대하고 주도적인 찾으심(제테사이) 결국 영혼을 완벽하게 구원해 내셨음을 천명하는 웅장한 선포입니다.

 

2.      우리에게 주는 가지 영적 교훈

 

구원은 무너진 관계와 정체성을 완벽하게 복원합니다.

 

삭개오는 돈은 많았으나 이름 대신 '죄인'으로 불리며 영적 고아처럼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들어가심으로 그를 다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자리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구원은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뿐만 아니라, 땅에서 세상에 상처받고 무너진 나의 참된 정체성을 주님 안에서 다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잃어버린 사람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에게 삭개오는 수많은 무리 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거대한 십자가 사명을 눈앞에 두고도, 여리고라는 작은 도시에 오직 사람, '잃어버린 세리장' 찾기 위해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거대한 세상 속에서 소외되고 낙심한 '잃어버린 영혼'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목적이 오늘 교회의 목적이자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이었다면, 그분의 교회와 제자인 우리의 삶의 목적 역시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가 돈을 벌고, 직장에 다니고, 가정을 꾸리는 모든 삶의 현장은 결국 주변에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한 사명의 자리가 되어야 함을 강력히 도전합니다(인터넷).

 

댓글